1899년 이 땅에 온 독일황제 동생 고종, 대한제국 알리려 국빈대접

발굴특종 | 개화기 최초의 국빈-하인리히 왕자 대한제국 방문기


▎대한제국을 포함한 근대 시기 우리나라를 최초 국빈방문한 독일의 하인리히(Heinrich Prinz von Preußen·1862~1929) 왕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하나뿐인 친동생으로 1899년 6월8일 인천항에 상륙했다.

1899년 6월8일, 이날은 우리 외교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날이다. 대한제국을 포함한 근대 시기 최초이자 최고의 국빈방문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하나뿐인 친동생 하인리히(Heinrich Prinz von Preußen·1862~1929) 왕자였다. 이 시기 하인리히 왕자보다 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찾아온 적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국가원수의 방문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하인리히 왕자의 방한은 개화기 유일한 국빈방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고종은 이러한 공식적인 국빈방문을 통해 국가의 독립과 권위를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이날 오후 3시 무렵 제물포 앞바다에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순양함 한 척이 닻을 내렸다. 거대한 흰색 선체에 하늘 높이 솟은 두 개의 마스트에는 제독 깃발이 바닷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독일 동아함대의 기함인 ‘도이칠란트(Deutschland)’호였다. 도이칠란트호에는 독일의 하인리히 왕자가 타고 있었다. 하인리히 왕자는 1897년 11월14일 독일이 중국 칭다오(靑島)를 점령함에 따라 동아함대를 강화할 목적으로 제2전대를 창설하자 전대장으로 임명돼 그해 12월16일 키일을 출발해 부임했다.

1899년 4월 동아함대사령관(해군 중장)으로 승진한 하인리히 왕자는 1900년 2월까지 동아시아 지역에 체류했다. 덕분에 독일 해군 내에서는 동아시아 전문가였고 1900년 6월 중국에서 의화단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서방연합군 총사령관직에 거론되기도 했다. 1903년 귀국 후 발트(동해)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06년 독일 본국 함대사령관(해군 대장)을 거쳐 1909년 해군 원수로 승진했다.

하인리히 왕자의 방한은 원래 한 해 전인 1898년 7월28일부터 8월6일로 잡혀 있었다. 독일 동아함대 제2전대장(동아함대 부사령관 해군소장, 제1전대장은 동아함대사령관이 겸직했다)으로서 고종 황제를 알현할 계획이었다. 알현일은 8월5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독일 외교부가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해 한 해 연기돼 이날 입항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인리히 왕자의 방한은 한국과 독일 어느 쪽에도 비중있게 소개되지 않았다. 당시 하인리히 왕자의 국빈 대접에 대해 의정부 찬정 이도재는 “외국 친왕을 이같이 높이 대접하시면 만일 더 큰 손님이 온다면 어떻게 대접하실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나치게 극진한 대우는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하인리히 왕자의 처소였던 소공동 대관정 내부의 객실을 비단으로 도배했다는 당시 <독립신문>의 기사를 보면 극진히 예우했음은 틀림없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하인리히 왕자의 방문을 상세히 정리하는 것은 대한제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1899년 4월14일 하인리히 왕자는 중국 우쑹(吳淞)에서 서울 주재 독일총영사관에 6월 중 한국을 공식방문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당시 서울 주재 독일대표부는 크리엔(Krien) 총영사가 1899년 1월 서울을 떠난 이후 충원되지 않아 통역관 출신인 라인스도르프(Reinsdorf) 부영사가 대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인스도르프는 하인리히 왕자의 거취가 불분명했고 한국의 상황도 불안정했기 때문에 일정을 계획하는 것을 보류했다. 6월2일 하인리히 왕자가 제물포 도착 일자를 확정함에 따라 라인스도르프는 대한제국 외부에 하인리히 왕자의 방문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2일간 서울에 머무를 것이고, 세창양행(E. Meyer & Co.)이 경영하는 당현금광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고종 알현 때 황색가마 이용


▎하인리히 왕자가 타고 온 독일 동아함대의 기함 ‘도이칠란트(Deutschland)’호. 거대한 흰색 선체에 하늘 높이 솟은 두 개의 마스트가 위용을 자랑한다.
고종은 외부대신과 궁내부대신을 통해 환영 의사를 밝히고 하인리히 왕자의 서울 체류지를 대관정(大觀亭)으로 정했다. 대관정은 미국선교회가 유럽식 숙박구조로 개조한 건물을 고종이 유럽인들을 접대하기 위해 1898년 매입한 것이다.

소공동에 위치한 대관정은 원구단 맞은편에 있어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였고, 경운궁(덕수궁)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고종은 하인리히 왕자 접대를 위해 자신의 친인척과 고위관료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구체적 방문일정은 외부대신 박제순과 라인스도르프가 협의해 결정했다. 계획안에 따르면 하인리히 왕자가 경운궁으로 고종을 알현하고, 고종이 대관정을 답방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고종은 이에 동의했으나 며칠 후 대신회의에서 문제가 됐다. 반대하는 측은 중국 황제가 하인리히 왕자의 방문에 자금성 내에서 답방 형식을 취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에 외부대신 박제순은 중국 황제는 자금성을 떠난 적이 없는 거의 ‘감금된’ 생활을 하는 존재라고 반박하는 한편 유럽문화가 많이 보급된 일본에서는 일왕이 답방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독일 황제 친동생의 방문에는 유럽의 예절로 접대해야 함에도 한국에는 아직 유럽의 예절이 보급되지 않았다고 탄원했다.

반면 하인리히 왕자가 고종을 알현할 때 지붕을 황색비단으로 장식한 황색 가마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이는 고종의 권한이었던 데다, 하인리히 왕자가 베이징(北京)을 방문했을 때도 황색 가마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왕자의 방한 일정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다음은 하인리히 왕자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당시의 주변 정황을 보태 재구성한 것이다.

▶▶▶6월8일

오후 3시 제물포에 도착한 독일의 동아함대 기함 도이칠란트호에 제독 깃발이 올랐다. 당시 독일의 동아함대에 배치된 군함 가운데 가장 큰 순양함이던 도이칠란트호는 1874년 런던 근처 포플러(Poplar)의 사무다브러더스(Samuda Brothers) 조선소에서 배수량 8,940t으로 건조한 지 25년 된 노후 함정이었지만 1894~97년 빌헬름스하벤(Wilhelmshaven)의 제국조선소에서 8,736t으로 개조돼 기함 역할을 맡고 있었다.

▶▶▶6월9일

오전 8시 하인리히 왕자가 하선했다. 항구에는 길을 따라 태극기와 독일 국기가 내걸리고, 궁내부대신 이재순, 부장(副將, 육군중장) 민영환, 외부협판 민상호, 황태자첨사(詹事) 이재현이 막사를 설치하고 하인리히 왕자를 기다렸다. 이들은 고종의 친척이거나 1895년 살해된 민비의 친척들이었다.

국빈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한국군 1개 대대 병력이 도열한 가운데 20명의 포병이 2문의 대포로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외국인이 하인리히 왕자의 방한을 환영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히인리히 왕자 일행은 즉시 서울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10시30분께야 출발할 수 있었다.

6명의 장교와 28명의 해군병사가 하인리히 왕자를 호위했다. 그밖에 1명의 군의관과 12명으로 구성된 군악대(별도로 3명의 보조원이 있었다)도 수행했다. 라인스도르프가 선발대로 길을 안내했다. 하인리히 왕자 일행은 12시30분쯤 부천 오리골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마포 일대에서 한강을 건널 때는 1개 대대가 배치됐다.

한국정부는 2척의 큰 배를 연결하고(<독립신문> 6월10일자 기사에는 3척의 배를 연결해 육지처럼 만들었다고 돼있다) 막사를 설치했다. 도성 관문인 남대문 밖에서는 의정부 참정 신기선을 비롯해 호위대장, 경비대장, 경무사와 궁내부 관리들이 하인리히 왕자 일행을 마중했다. 남대문은 소총으로 무장한 1개 중대(50명) 병력이 경계했다.

오후 4시 무렵 하인리히 왕자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인 대관정으로 향했다. 남대문에서 대관정까지 가는 길에는 한국 병사들이 배치됐고, 대관정은 호위대가 경비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훗날 역사가로 더 유명해진 도이칠란트호의 함장 알렉산더 뮐러(Muller) 대령, 개인부관인 비츠레벤(Witzleben) 소령과 함께 대관정에 체류했다.

▎하인리히 왕자와 부인 이레네.

다른 독일 장교와 병사들은 독일총영사관에 막사를 설치하고 머물렀다. 오후 6시 하인리히 왕자는 장례원 예시종경의 안내로 경운궁으로 가서 고종을 알현했다.

15분에 걸쳐 간략하게 인사를 올리고 대관정으로 돌아온 하인리히 왕자는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경운궁 밖에 위치한 수옥헌으로 향했다. 수옥헌은 고종의 개인 도서관으로 경복궁 집옥재에 있던 도서를 아관파천 이후 이곳으로 옮겼다.

고종과 황태자가 참석한 만찬은 오후 7시에 시작해 10시까지 이어졌다. 만찬에는 고위관료와 고종의 측근들만 참석했고 민상호가 통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영어로 진행된 통역은 피상적이었다. 하인리히 왕자와 부인 이레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손녀이기도 해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지만 통역이 문제였다.

1897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고종의 ‘광무개혁’의 기본 목적은 부국강병이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가 보여주듯 고종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부국보다 강병을 중요시했다. 원수부 설치(1899년 6월22일)를 통한 군제개혁을 준비 중이던 고종은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져 대화의 주제는 군사제도였다.

고종은 하인리히 왕자와 대화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지만,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고 라인스도르프는 기록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고종이 매우 재능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을 자아내게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서울에 주재하면서 당시 한국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던 라인스도르프는 하인리히 왕자가 서울에 도착하기 직전에 발생한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하인리히 왕자가 도착하기 며칠 전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그 중에는 경운궁 내에서 발생한 사고도 있었고, 경운궁을 지키는 초소 두 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폭발사건에 대해 고종의 호위와 경운궁 수비를 담당했던 시위2대대 참령 김명제는 ‘서울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이 반란은 궁궐로 진입할 태세를 보였으며, 고종의 목숨을 노린다’고 보고했다. 놀란 고종과 황태자는 경운궁을 떠나 미국공사관 옆이자 러시아공사관에서 매우 가까운 수옥헌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며칠 밤을 보내던 고종은 하인리히 왕자를 접대하기 위해 6월9일 오후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날 정신병자 한 명이 경운궁에 난입해 고종에게 자신은 천주교 신자인데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면서 국가를 자신에게 인계하라고 난동을 부렸다.

그는 곧 체포됐으나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경무사는 그를 석방했다. 난동자를 석방한 경무사 원우상은 며칠 뒤 해직됐다. 또 당현금광까지 하인리히 왕자를 수행했던 김명제도 서울에서 반란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잘못된 것임이 판명돼 파직됐다.

이러한 사건들이 고종의 불안을 자아냈고, 하인리히 왕자와 만찬 중에도 불안과 공포 심리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하인리히 왕자의 수행원과 초대된 손님들은 옆방에서 식사했다.

▶▶▶6월10일

오전 8시 하인리히 왕자는 말을 타고 동궐(창덕궁)을 중심으로 서울을 구경했다. 하인리히 왕자의 기록에 따르면 서울은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중국의 도시들과 같이 광범위한 성벽을 갖춘 도시다. 거리는 넓고 비교적 깨끗했다. 그러나 집들은 초라했고 지붕은 초가였다. 인상적인 건물은 경복궁과 창덕궁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대략 20만 명이었고, 유럽인들은 외교관이나 선교사가 대부분이었다. 11시에 고종과 황태자가 하인리히 왕자를 답방했다. 고종이 대관정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독일 군악대가 연주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갖추었다. 고종과 황태자는 12시께 대관정을 떠났다.

오후 4시께 하인리히 왕자는 고종의 답방에 답례하기 위해 고종의 사촌인 궁내부대신 이재순, 민비의 사촌 민영환, 외부대신 박제순의 저택을 직접 방문했고, 그밖의 고위 관료의 저택은 부관인 비츠레벤이 방문했다.

저녁 7시 황태자가 하인리히 왕자를 수옥헌으로 초청했다. 하인리히 왕자의 수행원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옆방에서 식사했다. 식사 후에는 궁녀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연회가 펼쳐졌다. 하인리히 왕자는 고종과 식사하면서 대원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통역은 민영환의 친동생인 외부협판 민영찬이 담당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1897년 11월14일 독일이 중국 칭다오(靑島)를 점령하고 동아함대를 강화할 목적으로 제2전대를 창설하자 전대장으로 임명돼 그 해 12월16일 키일을 출발해 부임했다. 1897년 12월16일 키일을 떠나기 직전 빌헬름 2세와 함께한 하인리히 왕자 일행.

▶▶▶6월11일 일요일

이날 오전 하인리히 왕자는 고종, 황태자와 함께 군대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퍼레이드에는 외국 대표들도 초대됐다. 퍼레이드는 러시아 교관이 훈련한 2개 대대(각 300명 규모)와 한국 장교들이 훈련한 1개 중대(150명)가 참가한 가운데 서궐(경희궁)에서 거행됐다. 고종과 황태자는 장군 군복을 입었는데, 라인스도르프는 유럽 모델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왕자는 프랑스 모델과 일본 모델을 합친 것이라고 보고서에 서술했다. 두 명의 독일인 기록에 따르면 고종의 군제개혁은 러시아나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하인리히 왕자와 대화에서 고종은 프로이센의 철모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오후 1시 점심식사에 하인리히 왕자는 고종의 최측근으로 당시 광무개혁을 주도하던 이재순, 민영환, 박제순을 초청했고, 라인스도르프와 비츠레벤이 배석했다. 식사 후 독일총영사관 마당에서 독일 군악대의 연주회가 거행됐다. 하인리히 왕자는 미국공사관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보스(Vos)라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이었는데, 그는 이미 한국에서 고위관리들의 초상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다. 보스가 그린 대표적 초상화는 민상호의 초상화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후 하인리히 왕자는 1898년 9월 개교한 관립 독일어학교를 방문했다. 독일어 교사는 볼얀(Bolljahn)이었다.

그는 몇 명 되지 않는 한국인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하인리히 왕자는 한국에 독일어를 보급하려는 그의 노력을 치하했다. 오후 3시 하인리히 왕자는 이재순, 민영환의 안내를 받아 북궐(경복궁)과 정원(비원)을 방문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경복궁이 서울에서 가장 볼 만한 건물이라고 했고, 특히 대형 연회장인 경회루가 인상적이었다고 기록했다.

경복궁에서는 한국 궁수대가 활을 쏘는 모습을 참관하기도 했다. 오후 7시, 하인리히 왕자는 독일총영사관에서 독일인들과 함께 식사했다. 저녁식사에는 하인리히 왕자를 수행한 장교들과 세창양행 한국지사장 볼터(Wolter), 관립 독일어학교 교사 볼얀이 초대됐다.

식사 후 독일총영사관 비서관 브링크마이어(Brinckmeier)와 몇 달 전부터 당현금광에서 근무 중인 광산 엔지니어 크노헨하우어(Knochenhauer)와 마쉬케(Maschke)가 하인리히 왕자를 알현했다.

▶▶▶6월12~14일

하인리히 왕자는 당현금광 방문길에 올랐다. 수행원은 부영사 라인스도르프, 함장 뮐러 해군대령, 개인비서 비츠레벤 해군소령, 군의관 라이히 박사 외에 5명의 장교와 세창양행 지사장 볼터였다. 서울에서 당현까지 거리는 130km로 3일이 소요된다. 고종은 말, 마차, 가마, 식탁, 의자, 요리기구, 그릇, 접시 등 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해 주었다.

또한 술 12병, 생수 200병과 얼음을 제공했다. 나머지 식료품은 볼터가 준비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충분할 정도로 마련됐다. 여행 도중 휴식처로는 고종의 명령에 따라 포천, 김화의 관청이 제공됐다. 고종은 자신을 호위하는 김명제를 대장으로 30명의 보병을 호위병으로 제공했고 탁지부 협판, 궁내부 관리 2명, 외부 관리 1명, 한성부윤 등이 동행했다.

당현으로 가는 길은 교량을 새로 설치하는 등 한국정부가 어느 정도 정비해 커다란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고개를 넘어갈 때 바위 때문에 약간 힘들었다. 여행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중도에는 물자를 구매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왕자의 행렬은 국왕의 행차와 비슷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잘 정비한 길에 마을 사람들이 이방인의 모습을 보기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늘어섰다.

그래서인지 하인리히 왕자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게 남아있다. 하인리히 왕자의 보고서에는 한국의 지형과 경관은 독일의 튀링엔 지역이나 오버슐레지엔을 연상하게 하며 농작물이 풍성하고 나무가 잘 자란다고 기록돼 있다.

농작물로는 보리나 밀도 경작하지만 더 많은 농토에서 벼를 재배한다고 했다. 한국의 기후는 매우 좋으며, 한국인은 매우 예절바르고 교양이 있다고도 언급했다.


▎하인리히 왕자의 서울 체류지였던 대관정(大觀亭). 미국선교회가 유럽식 숙박구조로 개조한 건물을 고종이 유럽인들을 접대하기 위해 1898년 매입한 것이다. 원구단 맞은편에 있어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6월15일

15일 하인리히 왕자는 당현금광에 머물렀다. 당현금광은 40년 전부터 한국인이 채광하던 금광이다. 독일 세창양행은 5명의 광산 엔지니어와 제련업자를 당현금광에 파견했다. 그 중에는 독일정부의 권유로 파견된 크노헨하우어 같은 전문가도 포함돼 있었다. 크노헨하우어는 얼마 전까지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바알 금광에서 근무했던 베테랑 광산기술자였다.

이들 광산 엔지니어에 따르면 1t의 광석에서 0.25g의 순금을 채취해야 채산성이 있는데, 당현금광은 충분한 함량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사과정에서는 2t가량의 금이 매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생산비용과 운반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전신선과 철도 부설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세창양행은 한국정부로부터 경원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6월16~18일

서울로 되돌아왔다.

▶▶▶6월18일

오후 4시 하인리히 왕자는 서울에 도착했다. 저녁 6시 하인리히 왕자는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고종과 황태자를 알현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고종에게 독일의 세창양행이 수주하려는 경원선 철도 부설에 대해 문의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더 이상 외국에 철도 부설권을 넘기지 않기로 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 경원선 철도 부설을 한국 회사가 수주하기는 했지만 철도 부설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종을 알현한 뒤 하인리히 왕자는 독일총영사관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에는 왕자를 수행한 장교들 외에 볼터, 볼얀, 크노헨하우어, 마쉬케가 초대받았다.

이날 오후 고종과 황태자는 하인리히 왕자와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행 모두에게 선물을 보냈다. 선물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고종이 하인리히 왕자에게 준 선물: 표범가죽 2개, 담비가죽 10개, 8쪽짜리 자수병풍 8개, 옛 한국 갑옷과 투구 1개, 순금 담배 케이스 1개, 비단 2필, 양가죽 2개.

- 황태자가 하인리히 왕자에게 준 선물: 호랑이가죽 2개, 담비가죽 10개, 1쪽짜리 자수병풍 8개. 군복 1벌, 은접시 2개, 비단 2필, 그림 4개.

- 고종이 뮐러 대령과 비츠레벤 소령에게 각각 준 선물: 표범가죽 1개, 화문석 3개, 양가죽 2개.

- 고종이 군의관 라이히 박사와 6명의 장교에게 각각 준 선물: 화문석 2개, 양가죽 2개, 둥근 부채 6개.

- 고종이 2명의 하사관과 의장대장에게 각각 준 선물: 양가죽 2개, 둥근 부채 4개.

- 고종이 25명의 병사와 12명의 군악대원에게 각각 준 선물: 둥근 부채 4개, 접는 부채 3개.

- 황태자가 장교와 병사들에게 준 선물은 고종의 선물과 동일하다.

▶▶▶6월19일

하인리히 왕자는 오전 8시 서울을 출발해 오후 4시 제물포에 도착했다. 볼터의 초청으로 세창양행(오늘날의 인천시립박물관) 정원에서 진행된 저녁식사에는 한국 관리와 제물포에 주재하는 외국인이 초대받았다. 식사 후 하인리히 왕자는 제물포에 주재하는 모든 독일인의 배웅을 받으며 기함 도이칠란트호에 승선했다.

▶▶▶6월20일

오전 5시 도이칠란트호는 제물포를 출항해 옌타이(烟台)의 즈푸(芝?)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