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자체가 알 막툼의 가족 기업

정치·경제 권력 장악… 두바이월드 사태로 ‘휘청’
두바이 통치 가문의 야심과 좌절


▎두바이 지도자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 막툼은 두바이의 정치와 경제, 국방권을 쥐고 있는 ‘알 막툼’ 가문의 수장이다.

알 막툼. 아랍에미리트(UAE) 토후국인 두바이의 통치자 가문이다. ‘사막의 기적’으로 불리며 도발적 개발을 계속해 온 두바이가 대표적인 국영기업 두바이월드 등의 채무 지급유예 요청으로 휘청거리면서 이 가문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두바이 통치자(군주)인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 막툼을 비롯한 ‘알 막툼’ 가문이 사실상 두바이의 정치는 물론 경제권까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두바이의 야심찬 도전부터 현재 겪는 미증유의 고난까지 모두 알 막툼 가문의 작품이다. 통치자인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 막툼은 말할 것도 없고 두바이 장관이나 국영기업 대표가 대부분 알 막툼 가문 사람이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의 알 막툼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두바이 민간항공공사의 회장 겸 두바이 국영기업인 에미레이트 그룹의 회장, 그리고 에미레이트항공과 플라이 두바이의 회장을 겸하는 막강 실세인 아메드 빈 사이드 알 막툼은 현재 통치자인 무하마드의 숙부다(숙부지만 늦둥이로 태어나 나이는 조카인 통치자보다 12세 적은 50세다).

또 통치자의 둘째 형인 함단 빈 라시드 알 막툼은 두바이의 부통치자이자 아랍에미리트의 재정산업장관을 겸하면서 두바이포트월드와 두바이 홀딩 컴퍼니라는 두바이의 대표적 국영기업을 동생인 통치자 무하마드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두바이의 수많은 호텔과 아파트 빌딩, 은행과 금융업체, 보건시설도 보유·운영하고 있다.

한마디로 왕족들이 국가와 기업을 경계 없이 소유·운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두바이라는 토후국 자체가 사실상 알 막툼 가문의 가족경영 기업 성격이 짙은 것이다. 알 막툼 가문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1833년, 군주 가문이 되다


▎무하마드의 딸 마히타는 두바이의 태권도 국가대표다.
알 막툼 가문은 페르시아만 연안 사막 지역에 거주하는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귀족 집안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두바이를 포함한 아랍에미리트 지역에는 중세 이후 ‘바니 야스’라는 부족연합이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 부족연합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알 팔라히 분파에서 현재 아부다비의 통치자 집안인 알 나히얀 가문이 나왔다.

또 다른 분파인 알 팔라시에선 두바이의 통치자 집안인 알 막툼가를 배출했다. 아랍에미리트를 이루는 일곱 토후국 가운데 영토와 인구, 그리고 자금력에서 가장 큰 아부다비와 2위인 두바이는 이렇듯 한 부족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 사이다. 알 막툼가는 1833년 독립적인 에미리트(토후국)인 두바이를 세우고 군주가문이 됐다.

이 가문의 지도자였던 막툼 빈 바티(바티의 아들 막툼이라는 뜻)는 800여 명의 바니 야스 부족원을 모아놓고 두바이라는 이름의 에미리트를 세우는 것을 승인받았다. 알 막툼 가문의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여기서 알은 정관사에 해당한다. 막툼 빈 부티는 두바이의 첫 에미르(이슬람 세계의 독립적인 지역 영주)에 올랐다.

막툼1세로도 불리는 막툼 빈 부티는 현재 두바이 통치자인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 막툼의 6대조가 된다. 무하마드 빈 라시드는 두바이의 10대 군주가 된다. 에미르 자리가 형제간에 상속된 경우가 몇 차례 있기 때문이다. 에미르 자리를 잠시 찬탈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제외했다.

막툼 1세(통치기간 1833~1952)에 이어 그의 동생인 사이드 빈 바티(사이드 1세: 1852~1859)가 통치했다. 하지만 사이드의 사후 에미르 자리는 장자 가문으로 돌아갔다. 막툼 1세의 장남인 하세르(1859~1886)가 맡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다시 형제 상속으로 막툼의 차남인 라시드(라시드1세: 1886~94)가 이어받았으며 그 다음에는 하세르의 아들인 막툼(막툼2세: 1894~1906)에게 넘어갔다.

막툼2세가 세상을 떠난 뒤 에미르 자리는 독특하게도 사촌에게 승계됐다. 막툼 1세의 3남인 수하일의 아들 바티(1906~12)가 맡은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자리는 다시 장손 집안으로 돌아왔다. 막툼2세의 아들인 사이드(사이드 2세: 1912~58)에 이어 손자 라시드(라시드 2세: 1958~90), 증손 막툼(막툼3세: 1990~2006) 등 계속 장자 상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만 현재 사이드는 통치 중 먼 친척 숙부에게 에미르 자리를 사흘간 찬탈당한 적이 있다. 막툼3세는 통치 초기인 1995년 동생(라시드2세의 3남) 무하마드를 일찌감치 후계로 결정했다. 2006년 에미르가 된 현재의 통치자인 무하마드가 바로 그다. 라시드2세의 차남인 함단은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위에서 밝힌 대로 현재 경제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두바이는 최근 두바이월드 사태로 어려움에 처했다.

3대에 걸친 두바이 혁신 프로젝트

알 막툼 가문은 그야말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살아왔다. 지난 3대가 특히 그러했다. 무하마드의 할아버지인 사이드(1878~1958) 시절로 올라간다. 34세에 에미르가 된 사이드는 통치 17년을 갓 넘긴 1929년 먼 숙부뻘인 마니 빈 라시드에게 에미르 자리를 찬탈 당한다. 수양대군에게 밀린 단종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종과 달랐다. 그는 자기 세력을 규합해 사흘 만에 숙부를 몰아내고 에미르 자리를 도로 찾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생환한 것이다. 그가 비록 일시적이나마 에미르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 세계를 덮쳤던 대공황의 여파가 두바이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당시 두바이는 진주조개를 채취해 영국 식민지인 인도 등에 수출하는 것이 주요 산업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이은 1920년대 대공황으로 사치품인 진주의 수요가 뚝 떨어졌다. 이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자 통치권이 도전 받은 것이다. 사이드는 이 사건 뒤 가문과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진주조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규제를 줄임으로써 무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한 것이다. 아랍 지역의 상품을 모아 인도에 내다 팔고, 인도의 상품을 들여와 아랍 지역에 되파는 중계무역에 매달렸다. 그 결과 두바이는 일찌감치 수많은 외국 상인과 노동자가 북적대는 국제도시의 면모를 보였다.

지금 두바이의 초석은 사이드가 놓은 셈이다. 사이드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라시드. 라시드는 대영제국이 쇠퇴해진 1971년 주변의 아랍 토후국(에미리트) 6개국과 연합해 아랍에미리트를 건국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형식적으로는 7개 토후국 가운데 인구와 면적이 가장 큰 아부다비가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두바이가 독립과 토후국 연합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랍에미리트는 아부다비의 에미르가 대통령을 맡고 두바이에서 부통령과 총리를 맡도록 권력을 배분했다. 각료 자리도 여러 토후국이 나눠가졌다. 하지만 핵심인 국방장관과 재정산업장관은 두바이 차지였다. 라시드는 처음에는 부통령 자리만 맡고 총리는 장남인 막툼에게 주었다가 1979년 총리도 함께 맡았다.

국방장관은 20대인 셋째 아들 무하마드에게 맡겼다. 무하마드는 1973년 일본 적군파와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일본항공 여객기 납치 사건 때 수완을 발휘했다. 여객기가 두바이에 착륙하자 일본과 게릴라 측을 중재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돈 한 푼 쓰지 않은 채 처리를 시리아와 리비아에 맡겼다.

라시드는 현대 두바이의 설계자다. 부친인 사이드가 두바이를 무역항으로 만들었다면, 라시드는 항구 확장공사를 비롯한 토목공사로 두바이를 상전벽해의 땅으로 만들었다. 대규모 SOC 투자로 두바이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은 라시드의 아이디어였다. 이웃 아부다비에 비하면 석유자원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두바이의 처지를 고려한 국가 발전전략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막툼은 아랍에미리트의 국방장관인 동생 무하마드에게 두바이 혁신의 지휘봉을 맡겼다. 아랍에미리트의 재정산업장관인 함단에게는 재무를 맡겼다. 사실상 라시드의 유훈통치이자 형제들의 공동통치나 다름없었다. 무하마드는 개혁겙낱?경제를 추진해 나라의 빗장을 풀었다.

해외투자를 받아 세계 최대 규모의 여러 가지 국제 토목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두바이 개발은 곧 알 막툼 가문의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 가문의 야심이기도 했다.


예술에 관심 많은 알 막툼 가문

알 막툼 가문은 온 집안이 예술에 관심이 많다. 특히 아랍 전통시와 미술에 관심이 높다. 두바이와 아랍에미리트에서는 물론 아랍 세계 전체에서 이 부문의 문화 패트론을 자처하고 있다. 집안에서 전통시를 낭송하는 행사도 수시로 열고 있다. 게다가 아랍 귀족의 전통적인 스포츠인 승마와 낙타 타기는 물론 다양한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2006년 아시안게임에서 그의 아들 라시드가 장거리 종목인 엔두런스 마술경기 개인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의 아들인 라시드, 아메드, 마지드, 그리고 함단은 단체 부문 금메달을 땄다. 딸인 마이타는 태권도 대표로 출전했다. 신분 상승을 위한 알 막툼 가문의 욕구는 현 통치자인 무하마드의 삶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아랍세계에서 에미르가 다스리는 에미리트는 서양으로 치면 공국 정도다. 국왕보다는 하나 처지는 셈이다. 중동에서 국왕이 있는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정도다. 그런데 두바이 통치자 무하마드는 2004년 4월 10일 신분 상승을 했다. 왕국인 요르단의 공주와 결혼한 것이다.

중동 국제정치의 전설적인 조율자였던 고 후세인 국왕의 딸이자 현 요르단 국왕인 압둘라의 배다른 동생을 둘째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1947년생인 그와 결혼한 둘째 부인 하야 빈트 알 후세인은 1974년생으로 올해 35세다. 둘 사이에는 2007년 12월 2일, 아랍에미리트 건국 기념일에 태어난 딸 알 잘리라가 있다.

이로써 알 막툼 가문은 아랍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됐다. 무하마드의 첫 부인은 사촌인 힌드 빈트 막툼 빈 주마 알 막툼이다. 알 막툼 가문 주마의 아들 막툼의 딸인 힌드라는 뜻이다. 1979년에 결혼했다. 무하마드는 19명의 자녀를 뒀다. 아들 여덟 명과 딸 11명이다. 무하마드의 삶은 두바이라는 시골 구석의 작은 에미리트를 아랍세계에서 나름 큰소리치고 사는 나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부다비와 두바이 등 걸프 지역 7개 토후국이 1971년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해 아랍에미리트를 세울 당시 토후국은 물론이고 아랍에미리트조차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비록 지금은 채무지급유예신청으로 비판받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두바이를 이 정도 수준으로 높인 것은 그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요르단 공주와의 결혼도 그런 성격이 짙다. 아랍 왕족사회에서의 신분 상승을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르단 왕가는 이슬람 성인인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져 아랍세계에서 존경의 대상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하마드는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는 160억~280억 달러의 개인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왕족 가운데 5위 안에 드는 수준이다. 알 막툼가 전체 재산은 그 몇 배로 추정된다. 두바이가 사실상 그 가문의 소유나 다름없다. 이 재산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명성은 이미 금이 갔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