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도사’ 말잘하던 외무通 군부책동엔 ‘침묵대통령’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이야기 최규하
‘최주사’ 별명엔 화를 벌컥 내… 부정부패 없는 맑은 공직자 평가도



최규하의 소년시절

역대 대통령에 어울리는 노래를 고르던 어떤 음반수집가는 가수 김종환이 부른 <존재의 이유>를 최규하에게 매치시켰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재임기간이 짧았던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감이었을 뿐 관리로서의 그는 아주 빛나는 존재였다. 세간에서는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흔히 최장수 총리를 역임한 정일권(丁一權), 3공 및 국민의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한 김종필(金鍾泌) 또는 서울시장·총리 등을 역임한 고건(高建)을 꼽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의 단계를 밟아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최규하의 관운을 능가하지 못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 그리고 청렴결백함에서도 그는 공직자의 귀감(龜鑑)이었다.

청소년시절의 인간 최규하 역시 빛나는 존재였다.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아버지 최양오(崔養吾)와 어머니 전주 이(李)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최규하는 서너 살 때 <천자문>을 습득하고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 <소학>과 <통감>을 통달했을 만큼 머리가 좋았다.

원주보통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줄곧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글짓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가령 그가 써낸 <뱀과 개구리>라는 글은 당시 동창들 사이에서 늘 화제가 될 정도의 작문이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풀숲을 기어가던 뱀이 약한 개구리를 어르다가 끝내 잡아먹는다는 것으로 당시 일본인 담임교사(土谷一夫)가 약육강식의 모습을 잘 그렸다고 극찬해주어 모두 부러워했던 것이 기억에 뚜렷하다고 그의 동창 원형상(元珩常)은 회고했다.(<조선일보>, 1979년 12월 4일)

‘공부벌레’라는 별명을 듣던 그는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1고보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때 글짓기를 잘했다는 친구들의 증언처럼 그는 고보에 진학해서도 문학과 어학에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영어 성적은 특A급에 속해 일본인 영어교사(高岡)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전교 2등이던 그는 4년제의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영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를 모델로 설립된 도쿄고등사범학교는 당시 도쿄제대에 맞먹는 수재들이 모인 곳으로 전교생 1200명 가운데 한국인은 영문과의 최규하, 물리·화학과의 윤일병(尹日炳)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특기인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연마했다고 한다.

1941년 3월 도쿄고사를 졸업한 최규하는 대구의 한 중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1942년 10월 만주 대동학원(大同學院)에 입학했다.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이 국립관리양성소에서 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정치·행정학을 공부한 것에 늘 자부심을 느꼈던 그는 훗날 “나는 동경고사에서 영어를 배웠고, 대동학원에서 정치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며 6개월 단기코스의 이 대동학원을 자신의 이력서에 최종 학력으로 기입하곤 했다.

그의 이력서나 비서관이 작성한 약전(略傳)에 보면 대동학원을 졸업한 1943년 7월부터 해방까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미군정 G-2 문서에는 우메하라(梅原)라는 창씨성을 가졌던 그가 1943년 7월 6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2년간 만주국 관리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G-2문서 또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 1994)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경성사범과 경성여자사범을 합쳐 새로 발족한 경성사범대학(서울사대의 전신)의 영문과 조교수가 되었으나 역시 행정 쪽이 체질에 맞았던지 1946년 4월부터는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했다. 이때 미군과의 식량 교섭은 물론 중앙식량행정처가 정부 수립 후 농림부로 바뀌고 나서도 쌀 도입에 관한 국제회의나 교섭, 토의, 계약서의 영문 작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발군의 영어 실력 때문에 그는 1948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식량기구(FAO) 아시아식량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이때도 도쿄고사에서 익힌 그의 정통 영어가 진가를 발휘했다. 한국인으로서 그런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관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관계에 두루 소문이 났다.

그 뒤 영어 구사력이 뛰어난 인재를 찾던 외무장관 변영태(卞榮泰)가 소문을 듣고 농림부 귀속농지관리국장 서리였던 최규하를 외무부로 끌어들여 통상국장 자리에 앉혔다. 1951년 9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최규하의 화려한 외교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최규하와 고급영어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고급 영어를 구사하던 일본의 한 외교관이 있었다. 영국 고관이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는가 물어보자 그는 “My English is made in Japan(내 영어는 일본제요)”이라고 대답해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일본 기자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최규하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는 호주 의회에서 영어 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의 고급 영어에 감탄한 호주 의원이 한국 수행기자들에게 “최 총리는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느냐? 영어를 쓰는 우리보다 더 고급 영어를 구사하니 놀랍다”며 칭찬했다는데 그의 영어야말로 Made in Japan 또는 Made in Korea였던 것이다.


▎주월한국군을 방문한 최규하.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도 감탄했다는 최규하의 King’s English(정통교양영어)에 대해서는 그에 얽힌 일화가 많다.

외무장관이던 1970년 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연설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연단에 올라갔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내려왔다. 이때 그의 손에는 백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이에 대해 그가 “미리 준비해온 연설문을 읽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어 백지를 들여다보며 연설했다”고 털어놓은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최규하를 가까이에서 보좌한 한 외교관은 영어권 나라에 유학하지 않고도 그가 영어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자신의 회고록에 적어놓았다.

“1980년 4월 어느 날, 점심시간 때였다. 청와대 등나무 밑에 앉아 있던 최 대통령이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권 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아나?’ 나는 ‘왜 하필 발가락이야?’라고 생각하며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내가 발가락을 만질 때는 영어 단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실 그날 오후 미국에서 온 상원의원들과 주한 미국대사의 청와대 예방이 예정돼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최 대통령은 이렇게 점심시간에도 만나야 할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 대통령의 영어 실력은 단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형성된 것이었다.”(권영민, <자네, 출세했네>, 2008)


▎1996년 11월 14일 증인 심문을 받기 위해 법원에 도착한 최규하(가운데).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직업공무원으로서 평생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거쳐 국가원수에 오른 인물은 최규하 대통령이 유일하다. 최 대통령이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이 큰 몫을 하였던 것 같다. 내가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 대통령은 영어의 달인이셨다.”(권영민)

단순히 영어를 잘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에서 배운 행정이론과 만주국 관리로 일하면서 익힌 행정 노하우가 신생 대한민국의 관료조직에서 빛을 발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점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그의 진급 속도다.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발로 주일대표부 총영사→참사관→공사를 거친 그는 이미 41세 때인 1959년 외무부 차관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영어에 능통했던 관계로 수많은 국제회의에 참가했던 그는 건국 후 외교통인 이승만 대통령 휘하에서 직업외교관으로 성장한 외교 2세대의 중심인물이었다.

최규하와 '3대산맥'

영어에 능통해 외무부에 영입된 인물로는 최규하 외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나와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용식(金溶植)이었다. 최규하가 정통 영어를 구사한 데 반해 그는 변호사 출신답게 정확한 외교 영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외무부에 들어와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규슈(九州)제대를 나와 고문에 합격한 뒤 일본 내무성 관료를 역임한 김동조(金東祚)였다. 이 세 사람이 바로 한국 외교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세칭 ‘외무부의 3대 산맥’이다.

이 가운데 김동조는 김용식이나 최규하만큼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으나 대신 두 사람에게 없는 두둑한 배짱이 있었다. 그는 외교관에게 영어가 중요하지만 그건 단지 외교라는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무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며 외무부에 고시(考試) 출신의 ‘DJ사단’을 구축했다.(김동조, <냉전시대 우리 외교>, 2000) 김용식의 인맥은 ‘YS맨’이라 불렸으나 최규하는 자기 인맥을 따로 구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로 라이벌이었던 세 사람의 성격에 대한 ‘돌다리’ 버전이 있다.

“셋이서 따로 떨어져 돌다리를 건너게 됐다. 김동조는 뒤도 안 본 채 무턱대고 다리를 건넜다. 김용식은 돌다리를 두들겨본 후 조심조심 건넜다. 최규하의 차례가 됐다. 그는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고 남이 먼저 건너기를 기다렸다 그 뒤를 따라 건너는 것이었다.”(김승웅, <파리의 새벽, 그 화려한 떨림>, 2008)

셋 중 최규하가 가장 신중하고 소심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성격이 그렇다는 것일 뿐 일에 임해서는 그도 대단한 뚝심을 보였다. 그 같은 모습은 가령 1968년 김신조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이 차례로 발발했을 때 한국에 급파된 사이러스 밴스 미국특사와의 만남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 조야가 온통 푸에블로호 사건에만 신경을 쓰자 이에 반발해 북한에 독자적인 보복공격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달래기 위해 밴스 특사를 급파한 것이었다.

“서울 타워호텔에서 최규하 외무부 장관과 밴스 특사 간에 철야회담이 열렸다. 수많은 기자가 회담장 밖 복도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며 회담 결과를 기다렸다. 이때 한국 측 대표인 최 장관은 20여 잔의 커피를 마시고, 여섯 차례나 재떨이를 교체하면서 뚝심과 끈기로 회담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를 이끌어냈다. 그 뒤 밴스 특사 일행이 귀국하면서 ‘최 장관의 애국심과 쇠고집, 인내력 그리고 그가 계속 뿜어대는 담배 연기에 손을 들었다’는 말로 최 장관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때 받은 군사원조로 한국군은 장비를 현대화했고, 예비군도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권영민)

또 다른 예로는 같은 해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문제를 놓고 미국 대표 윌리엄 포터와 회동했던 때를 들 수 있다.

당시 최규하는 핵 공격에 대한 안보공약을 재확인해주는 각서를 미국 측에 요구했다. ‘백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노련한 외교관인 포터는 기존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충분하니 “시간을 질질 끌다 불쾌한 그룹(unpleasant group)에 끼지 않기를 바란다”며 한국을 무시하는 태도로 나왔다.

그러자 최규하 장관은 전혀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 “미국 정부의 대표로 나선 귀하가 가장 맹방인 한국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 무슨 대한외교를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 한마디에 포터 대사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최규하 장관의 승리였다. 다음 날 포터 대사가 새로운 공약을 가지고 최 장관을 직접 찾아왔기 때문이다. 당시 최규하 장관을 기자로서 수행했던 이재원(李在遠) 전 정무차관은 회담장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두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두 마리의 뱀이 상대방의 꼬리를 물기 위해 계속 두뇌회전을 해서 생긴 어지럼증과 같았다.” 어쨌든 회담 결과 한국은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의 기초가 된 한미국방각료연례회의를 성사시켰다.(권영민)

외교관으로서의 최규하는 당당하고 끈질겼다. 당시 그의 별명은 ‘최뚝심’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의 자동상정이 아닌 재량상정의 방식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최규하 대통령



최규하와 재상자리

역대 외무장관은 국회답변을 할 때도 각각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었다. ‘3대 산맥’ 가운데 달변인 김용식은 의원들의 질문에 자세하게, 그러나 알맹이는 빼고 답변했다. 김동조는 국회 출석 자체를 싫어했다. 그래서 정기국회가 열리는 9월에 유엔총회에 참석한다며 뉴욕에 나가 몇 달씩 머물곤 했다. 그때마다 대리 출석한 차관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최규하의 경우엔 어리숭한 답변으로 대처했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질문에 빠짐없이 답변은 하는데 다 듣고 나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시원치 않고 어딘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박준규(朴浚圭) 외무위원장은 최 장관의 답변은 세워놓은 나무판자에 물 붓듯이 술술 잘 나오지만 듣고 나면 싱겁게 느껴진다고 평하였다.”(최호중, <둔마가 산정에 오르기까지>, 1997)

술술 빠짐없이 대답하면서도 어딘가 핵심이 빠진 듯한 답변을 하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다. 그러나 진짜 협상을 할 때는 그도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외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1973년부터 대통령 외교담당특보로 있던 그는 제1차 오일쇼크를 해결하기 위해 중동을 방문했다. 그는 사우디 국왕이 한국 근로자들의 ‘횃불도로공사’에 감명받고 있다는 점과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다는 점에 착안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 노동자들은 사우디의 발전을 위해 횃불을 밝혀가며 철야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한국은 지금 오일쇼크로 큰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공산세력과 싸워 이길 수 없으니 국왕께서 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산당과 이스라엘을 미워하던 사우디 국왕의 기분에 꼭 들어맞는 발언이 주효했다.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국왕으로부터 종전 수준의 석유를 계속 공급받는다는 언약을 받아냈던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최 특사는 김포공항에서 청와대로 직행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저녁을 들지 않고 기다렸다. 최 특사가 들어서자 작은 체구의 박 대통령은 거구인 최 특사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등공신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날 밤 늦게까지 박 대통령의 강한 권유에 못 이겨 상당한 양의 막걸리를 마신 최 특사는 청와대를 나와 승용차에 오르면서 토하기까지 했다.”(최호중)

석유파동 때의 이 빛나는 공훈도 분명 카운트되었을 것이다. 그는 1975년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재상 자리는 백관의 정점이다. 이 출세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가 넓은 의미에서 박정희의 만주 인맥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심이 있거나 도전하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박정희에게 그의 온순한 성품과 태도는 마음에 들 만한 요소였다. 당시 일선 기자였던 한 언론인은 그 점을 이렇게 묘사했다.

“총리 시절 그는 행사 참석이 줄어든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하여 공식치사와 격려사 등을 읽는 경우가 많아 ‘대독총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대통령 치사를 대독한 뒤에는 박수를 치고 환영하는 군중에게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줄 만한 데도 일절 그 같은 제스처 없이 군중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퇴장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이런 자세 때문에 여당의 역학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장수형 국무총리’라는 평가를 받았다.”(주돈식,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2004)

‘일인지하(一人之下)’의 구조에서 그는 무난한 또는 유능한 재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총애하던 그 ‘일인(一人)’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그의 지도력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었는지 몰라도 난세의 영웅은 아니었던 것이다.




▎1975년 12월 19일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서리 임명장을 받는 최규하(왼쪽).
최규하와 시국수습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이렇게 내뱉은 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과 대통령 박정희에게 차례로 총격을 가했다. ‘유신의 심장부’를 향한 두 발의 총탄이 궁정동 밤하늘에 울려 퍼진 것은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김대중·전두환·노무현·노태우 전 대통령.
삼청동 총리공관에 있던 최규하가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金桂元)으로부터 그 총소리의 내막을 들은 것은 사건 발생 2시간 뒤였다. 김계원은 생사불명의 대통령을 병원에 옮겨놓은 뒤 최규하에게 빨리 청와대로 오라는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최규하는 즉시 청와대로 갔고, 거기에서 김계원으로부터 대통령의 ‘유고(有故)’를 들었다. 잠시 후 김재규로부터 육군본부로 오라는 전화가 걸려와 최규하는 김계원과 함께 다시 육군본부로 갔다. 군 수뇌부가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김재규는 비상계엄 선포를 재촉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병원부터 가봅시다” 하고 수도육군병원으로 차를 몰게 했다. 말은 짧았지만 그는 대통령의 생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육군병원에 도착하니 6척 거구인 그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대통령이 아닌 165㎝의 작은 주검이었다. 병원장은 흰 천에 덮인 주검을 눈빛으로 가리키며 “각하께서는 여기 오시기 전, 즉 19시55분 이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라고 최규하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최규하는 자기가 추대되거나 선출된 일도 없이 헌법에 따라 자동적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던 심정을 사후 측근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진실로 무력함을 깨닫겠다. 내가 한다고 해도 힘이 없으며, 안 한다고 버텨보아야 안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국수습에 임할 뿐이다.”(<조선일보>, 1979년 12월 4일)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면서 다짐을 했던 그는 과연 시국수습에 최선을 다했던 것일까?

그는 지나치게 신중했다. 그래서 뜸을 들였다. 그 결과 대통령 자리를 승계한 지 2주가 지날 때까지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1월 10일이 되어서야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국민이 가장 궁금해 하던 정치 일정을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인 날짜는 제시하지 않은 채 현행(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로 10대 대통령을 뽑고, 거기에서 뽑은 10대 대통령이 새 헌법을 마련한 뒤에 다시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다단계의 정치 일정은 지난날 민주화를 위해 즉각 개헌작업에 들어갔던 허정(許政) 과도정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야당 및 재야의 분위기를 반영해 신민당 당수 김영삼(金泳三)은 11월 22일 삼청동 공관으로 최규하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날 나는 최규하에게 ‘시간을 끌면 자꾸 혼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온다. 당신의 임무는 3개월 내에 선거를 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11월 10일 최규하의 담화에 대해 유신헌법에 의해 다시 대통령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었다. 최규하는 내 말에 대해 ‘잘 알겠습니다. 제게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권투경기장에서 심판 노릇이나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가 진심이기를 기대했다.”(김영삼,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000)

이때만 해도 최규하는 자기에게 부과된 시대적 임무가 민주화인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1월 19일에는 대학 휴교 조치를 폐지했고, 체육관선거를 통해 10대 대통령에 선출된 다음 날인 12월 7일에는 긴급조치9호를 해제하고 1차적으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학생과 일반인 68명을 석방했다. 뒤이어 1700여 명에 대한 특별사면과 감형을 단행했다.

“10·26으로 기대되었던 민주화의 행진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 무렵 많은 사람이 최규하를 가리켜 과도기에 중도적인 입장에서 사태를 처리해 나가기에는 오히려 적격자라고 평했다.”(이상우, <최규하의 빼앗긴 295일>, 신동아, 1988년 5월호)

그러나 최규하의 긍정적인 행보는 거기까지였다.

최규하와 12.12

10·26 이후 권력의 공백을 형식적으로 메운 것은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최규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를 권력의 실체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권한대행의 자리는 국무총리였던 그가 헌법상 승계한 것이지만 12월 6일의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10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최규하를 에워싸고 있던 집단지도체제, 그 중에서도 군부 고위층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당시 공화당 의장서리였던 박준규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때 나는 생활화된 민주주의자, 절대권력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 국제적 배경이 있는 사람, 비경상도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와 몇몇이서 합의를 보고 각각 당과 군, 내각을 맡아 최규하 대통령을 추대했습니다. 그때 김영삼 씨에게도 내가 사전설명을 구했고, 그는 좋다고 했습니다.”(, 월간조선, 1997년 10월호)

결국 과도기의 인물로 이렇다 할 자기 세력이 없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최규하를 얼굴마담으로 택했다는 이야기다. 국민도 최규하가 아닌 군부에 실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 최규하를 대통령 후보로 민 것도, 그에 대항해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던 공화당의 김종필을 주저앉힌 것도 군부 고위층, 보다 구체적으로는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였다.(정승화, <12·12사건>, 1987)

정승화 자신은 정치 불개입을 원칙으로 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장했지만 당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박 정권의 뒤를 누가 이을 것으로 보는가?”라는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즉답을 피하면서도 “현재 미국의 대화상대는 최규하 대통령이나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이 아니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야당과 재야도 군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군을 장악해야 하지만, 최규하의 경우 장악은커녕 오히려 군부의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실권이 군부로 넘어가자 군 내부에서는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전개됐다.

12월 12일 저녁 약 6000명의 수도권 지역 군인들이 동원된 가운데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태를 지켜본 당시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다음 날 아침 밴스 미 국무장관에게 타전한 전보에서 이를 사실상 쿠데타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겪고 있습니다. 민간 합헌정부는 명목상 유지되고 있지만 모든 징후는 군의 중추기관들이 일단의 ‘야심적인 젊은’ 장교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장악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안기구 책임자라는 이점을 살린 전두환 소장은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대부분 안보 분야에 종사하는 거사그룹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것으로 보입니다.”(글라이스틴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 1979년 12월 13일)

하극상이었다. 이는 유신정권의 안보를 위해 청와대 주변에 정치장교들을 양산해내었던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러다가 컨트롤타워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 정치장교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 12·12사태의 본질이다. 한국통이었던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는 12·12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박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전두환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그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 때문에 그를 연행했다고 자신들의 군사반란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미군 당국자들에게 더 설득력 있는 또 다른 동기는 기존 한국군 지도부가 자주 말썽을 일으키고 야심이 많은 전두환을 제거하기 위해 오지(奧地) 사령부로 발령을 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 낌새를 사전에 감지한 전두환과 그 추종세력은 최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는 등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기습적으로 반란을 감행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코리아>, 1998)

승자는 신군부의 리더였던 전두환이었다. 그는 군 수사병력이 정승화를 체포하러 간 틈에 따로 20여 명의 경호병을 데리고 삼청동 공관으로 최규하를 찾아가 정승화의 체포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의 허가부터 받아오라”며 버텼다. 그로부터 9시간30분을 버티다가 12월 13일 새벽 4시쯤 국방장관 노재현이 나타나 서명하는 것을 보고 그도 체포동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 정승화의 체포는 이미 이뤄지고 난 뒤였다.



최규하와 글라이스틴

당일 최규하가 9시간30분간을 버티다 서명하게 된 까닭을 최규하 자신이 직접 밝힌 일은 없으나 그의 인척이었던 비서관 최흥순(崔興洵)은 최규하로부터 들은 것이 있다며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12·12 그날 밤 최 대통령은 전두환 씨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조사를 위해 총리실 공관으로 재가를 받으러 왔을 때, 이를 군부 내의 파워게임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 대통령은 보다 신중한 상황 판단을 위해 군부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 노 국방장관은 이미 피신한 뒤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또한 총리실 주변은 이미 신군부 측 병력에 의해 장악되어 외부에서의 접근이 통제된 상태였다. 최 대통령의 당시 결정은 군부 내의 세력다툼이 외부로 확산되어 내란이라는 더 큰 불상사로 치닫는 것을 우선 막는 데 있었다. 물론 최 대통령이 사태를 장악할 힘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최규하 전 대통령, 13년 만의 최초 인터뷰>, 월간조선, 1993년 10월호)

최규하는 당시 내란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군의 내부사정을 아는 국방장관 노재현의 출현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12·12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전달한 메시지(북한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는 한국군 간의 충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 민간정부를 전복시켜 정치발전이 무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가 존중되지 않자 “12월 12일 밤 미국의 존재가 무시되었다”고 분개하면서 12월 13일 아침 서둘러 대통령 최규하를 만났다.

이 시기의 최규하 생각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는 별로 없기 때문에 좀 길더라도 글라이스틴의 회고록에 간접으로 나타난 최규하의 생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난밤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운 정치 발전의 지속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런 점에서 그가 대통령직에 유임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최 대통령의 반응은 유연했다. 자신의 역할에 관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한 후 그는 ‘내부적 반감’을 지닌 군인들의 행동은 심각하고 우려할 만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내가 지적한 사항들을 신임 참모총장에게 즉시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최 대통령과의 만남은 지난 몇 주간의 솔직한 접촉과는 판이하게 다른 첫 대좌였다. 대사관의 클라크 정무담당 참사관과 내가 미국의 항의를 전하기 위해 그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점차 침식돼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최 대통령에게 항의 의사를 전달할 때면 똑같은 내용이 신군부의 실세 그룹에도 전달됐다. 최 대통령은 그들에게 전달되는 미국의 항의가 한층 무게를 지닌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말을 경청했지만 우리가 그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그는 내가 미국의 입장 강조를 위해 직설적인 표현을 동원해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말에 동의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전두환과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내 말을 자주 인용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합당한 절차와 형식을 따르는 한 그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에 강한 인내력을 보이는 것 같았다.”(이상의 인용문은 글라이스틴, <알려지지 않은 역사>, 2000)

이 만남을 통해 글라이스틴은 최규하가 군부의 눈치를 보고 있으며, 따라서 뱃심 좋게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다.

글라이스틴과 전두환

12월 14일 아침 글라이스틴은 사실상 군부와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전두환은 그날 오후 야전복 차림에 몇 명의 보좌관과 40명 가량의 무장군인을 대동하고 대사관저로 왔다. 그는 자신의 무장경호원들이 관저 곳곳에 포진한 가운데 승리한 야전군 사령관처럼 대사관 건물로 들어왔다.

“그의 태도는 무뚝뚝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관심의 중심인물이 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과시하는 듯했다. 나는 문에서 사무적인 태도로 그를 맞아 큰 접견실을 통해 작은 방으로 안내해 약 2시간 동안 그와 얘기를 나눴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을 그렇게 우려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마침내 드라마의 주인공을 만났다는 설렘을 즐겼을 것이다. 그와의 회담 내내 나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냉소적 태도를 보이다가도 무대에 새로 등장한 인물이 소원해지지 않을 정도의 냉담함을 보였다. 전두환도 외견상으로는 자신이 우려하는 바가 우리와 마찬가지라는 태도를 보였다.”



“회담 분위기는 부드러운 가운데 긴장이 감돌았다. 나는 12·12사태에 대해 우리가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특히 파생될 위험에 대해서는 최 대통령에게 했던 것보다 더욱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한국은 민간정부를 유지해야 하며 미국의 군사·경제분야의 지원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980년 8월 18일 청와대를 떠나면서 전두환 장군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전두환도 사태가 미칠 파장에 대해 걱정한다면서 내가 지적한 사항에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쿠데타나 혁명으로 평가되는 것은 거부했다. 단지 박 대통령 암살의 수사 때문이지 개인적 야망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 대통령의 민주화 계획을 지지하며 정승화 장군 지지자들이 몇 주일 정도 말썽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한국군 내의 질서는 1개월 내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상은 글라이스틴)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했는데, 그가 돌아간 뒤 글라이스틴은 서류철을 뒤져 1961년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김종필을 보내 한 말의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이던 카터 B 매그루더 장군을 찾아온 김종필은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이 기록은 매그루더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마크 피터슨, <신동아>, 1989년 5월호)

놀랍게도 전두환의 말과 박정희가 보낸 김종필의 말이 일치했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신군부가 5·16의 선례를 깊이 연구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만큼 신군부는 이 거사의 결론이 어떻게 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처음엔 민간정부의 지지와 민주화의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론 아무 편도 들지 않으면서 내부 싸움의 추이를 지켜보다 이긴 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이 안전하고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이 일시 역쿠데타를 수행할 대체세력을 찾았던 것처럼 말했지만, 만일 그랬다면 그건 새로운 세력을 길들이기 위한 포즈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냉전시대에 있어 미국의 대한정책 최우선 순위는 안보였고, 그 점에서 군사정권은 미국이 가장 안도할 수 있는 세력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관심은 신군부가 얼마나 오래갈 것이냐를 저울질해보는 데 있었다.

최규하와 정치

최규하는 “나는 동경고사에서 영어를 배웠고, 대동학원에서 정치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고 했다. 이때 그가 대동학원에서 키웠다는 정치적 안목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만일 대동학원에서 배운 정치가 올바른 것이었다면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국민이 원하는 바를 먼저 살펴야 했을 것이다. 당시 국민의 열망은 민주화였다. 따라서 대통령인 그가 민주화에 대한 결의를 보이면 국민은 그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내외의 조건은 그에게 불리하지 않았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미국 정부는 10·26 후 민주체제로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었고, 일본 외무성도 민주화를 환영하는 공식논평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그가 정말 민주화를 성공시킬 생각이 있었다면 초기부터 여야 정치인들을 만나 협의한 뒤 빠른 민주화 일정을 국민에게 공표하고 국회가 헌법 개정을 주도하도록 했어야 한다. 그리고 계엄령 해제를 통해 자신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미국의 후원을 지렛대로 삼았더라면 그는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신군부도 민주화의 흐름에 역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원인에 대해 군부의 압력, 권력 의지의 부재를 드는 사람도 있고 그의 무능이나 결단력의 부족 같은 것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선택의 문제였다.

최규하는 결코 우유부단하거나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외교관으로서의 최규하는 유능한 관리였고, 공직자로서의 최규하는 엄정하고 청렴한 행정가였으며, 개인으로서의 최규하는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한 인간이었다. 문제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최규하였다.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갑자기 권력의 중심에 내몰리자 그의 행동을 지배한 것은 본능적인 조심스러움과 보수적 경향이었다. 그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용기를 발휘한 경우도 많았지만 본능적으로 대담한 도전은 피했다. 어쩌면 현명하게도 그는 전두환에 대항해 국민적 지지를 동원하려 들지 않았다.”

단순히 용기 없는 겁쟁이라서 신군부의 압력에 굴복했던 것이 아니다. 원했다면 그도 맞설 용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명하게도’라는 단어 속에 당시 글라이스틴이 넘겨다본 최규하의 정치적 선택이 엿보인다.

다시 말하면 최규하는 국민이나 정의 또는 민주화를 선택하지 않고 보다 힘이 있는 군사권력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 정치적 선택이 글라이스틴의 ‘현명하게도’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규하의 경력을 보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역대 정권은 만주국→1공→3공→5공이었다. 어느 것이나 힘이 있고 오래갈 것 같은 정권이었다. 그는 민주정권이었던 2공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먼 인척 가운데 최규하의 고보 후배로 외무부 고관을 지낸 분이 있다. 나의 인척도 그랬고 최규하도 2공의 민주당 정권을 몹시 비난하다가 5·16이 나자 “이제 때가 왔다!”며 서둘러 군사정권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일이 있다. 최규하는 그때도 분명 힘이 있어 보이는 정권을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그가 대동학원에서 키웠다는 정치적 안목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군가의 보다 적나라한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 줄을 서야 오래갈 것인지”를 저울질하는 법을 배웠다는 뜻이다. 이것이 일반 관리의 수준에서는 그리고 ‘1인’의 보호막 아래 있는 ‘대독총리’ 때까지는 오케이였을지 모른다. 문제는 이 무렵 그의 신분이 대통령, 곧 국민의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적 지도자였다는 점에 있었다.



최규하와 '최주사'

정사 정(政)자는 원래 ‘목표(一)를 향한 발걸음(止)이 똑바로 향해지도록 채찍질(?)을 가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방향을 인도하는 자가 정치적 지도자다.

당시 국민이 원하던 목표는 민주화였다. 그러면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최규하는 국민이 그 목표로 향하도록 리드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규하가 생각한 목표는 ‘안정’이었다.(‘대통령 취임사’, <현석편모>, 1998) 예의 글라이스틴은 최규하를 위시한 당시의 집권세력이 “최상의 상황에서도 기껏 유교식 또는 관 주도의 민주주의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고 지적했다(글라이스틴, , 1986) 다시 말해 그들은 민주 절차에 대한 신념이 없었고 서구식 민주주의 자체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규하가 추구한 ‘안정’ 노선은 국민이 원하던 목표와 차이가 있었다. 야당이나 재야나 학생들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은 신군부의 눈치를 보면서 힘의 울타리 안에 안주한 듯한 최규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서관이 쓴 회고록을 보면 이 시기 대통령 최규하는 불우한 사람들을 음성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사람들이나 사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소리 소문 없이 적극 지원했다. 이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두 분은 나를 비롯한 비서관들에게 선행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철저히 입조심을 시켰다.”(권영민)

금일봉도 주고, 학자금도 주고, 영세민들에게 쌀가마니 등도 소리 소문 없이 나눠주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방문은 거의 그의 부인이 도맡아 했다.

“영부인은 최 대통령 재임 9개월 동안 전국에 있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거의 방문하였다. 경기도 사회복지시설을 시작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각 시·도에 있는 대표적인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했던 것이다. 지병인 허리디스크로 고생을 하면서도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여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정에 굶주린 그들의 쓸쓸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셨다.”(권영민)

최규하는 나름대로 지도자로서의 덕행을 다한 것이었다. 언론에 알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는 것을 보면 보이기 위한 선행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료를 뒤적거리던 나는 여기에서도 핀트가 조금 어긋난 그 무엇을 느꼈다. 덕행은 물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행보가 어쩐지 옛날 임금의 민정시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대 대통령이라면 좀 더 큰 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방안 같은 것을 강구하고 설치했어야 한다. 그 점에서 대통령인 그의 멘탈리티는 지도자의 수준이 아니라 여전히 일반 공직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닐까?

외교관 출신답게 형식과 격식을 중히 여기면서 매사에 꼼꼼하고 치밀하며 신중하고 소심한 그의 성격을 묘하게 당시 국민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그를 ‘최 주사’라고 불렀다. 그 점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하루는 최규하가 “국민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나?”라고 측근에게 물었다.

“나는 최 대통령의 느닷없는 질문에 바짝 긴장했다. 잠깐 사이에 나의 뇌리에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려야 하나? 아니면 좋은 쪽으로 순화해서 말씀 드려야 하나?’ 당시 국민은 최 대통령을 지나치게 신중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의미로 ‘최 주사’라고 불렀다. 이 별명에는 대통령직을 맡겨놓고 보니 6급 공무원인 주사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 아니냐는 뜻도 담겨 있었다. ‘나쁜 이야기입니다. 모두 각하를 ‘최 주사’라고 부릅니다.’ ‘뭐야? 최 주사?’ 나의 대답에 최 대통령은 버럭 화를 냈다. 10년 넘게 모셨지만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권영민)

그는 왜 사람들이 ‘최 주사’라는 별명으로 불렀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최규하와 안개정국

1980년 봄을 안개정국으로 몰고 간 원인의 하나는 정계일각에서 제기되어 최규하 정부도 진지하게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온 이른바 ‘2원집정부제’안의 대두였다.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와 둘로 나눈 ‘2원집정부제’안은 대통령에 출마하려던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크게 자극했다. 김영삼은 최규하가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비판했다. 항간에서도 최규하가 무슨 야심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최규하 정부는 분파적인 정치인들에게 일을 맡기면 아무 타결점도 찾지 못하고 장기간 싸움만 계속할 것이라면서 법제처에 헌법연구반을 설치해 정부가 개헌작업을 주도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2004년 8월 8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오른쪽)가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인 최규하 전 대통령을 예방, 환담하고 있다.



지난날 허정 과도정부는 4개월 만에 개헌작업과 정권이양을 모두 끝냈는데 시간을 질질 끄니 야당과 재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들은 최규하 정부의 신현확(申鉉碻) 국무총리에 주목했다. 리더십이 강하고 국정 전반에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던 그는 정부 내 각종 회의를 총괄하고 종합 결론을 내리는 역할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김용삼, <월간조선> 1999년 2월호)

최규하나 신현확에 대해 의혹을 느낀 것은 비단 야당과 재야만이 아니었다. 미 국무부도 의심했다.

“2월 초 나는 국무부로부터 신랄한 전문을 받았다. 최 대통령이 전두환과 몇몇 재벌이 지지하는 현재의 정치제도하에서 자신이나 신 총리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 여부를 점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종된 정치적 결과가 한·미관계에 미칠 명확하고 부정적인 영향은 강조할 필요도 없이 지대하다.’ 나는 중간보고를 통해 그가 우리를 속이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최 대통령을 옹호했다. 그러나 신현확은 어느 시점에서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글라이스틴)

그러나 봄이 다가오면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낙관론으로 기울었다. 정치인도, 국민도 적극적인 행동은 자제했다. 이런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동아일보 회장 김상만(金相万)은 1980년 2월 25일 대권 경쟁에 뛰어들 3김(김종필·김영삼·김대중)을 자택에 초대해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만찬장에는 미국·일본·캐나다 대사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언론의 대대적인 각광을 받은 이날 행사에 참석했던 글라이스틴은 그것이 로맨틱한 휴지기간의 절정이었다면서 워싱턴에 이렇게 빈정대는 투로 보고했다.

“김상만으로서는 영광의 시간이었겠지만 정부와 군의 국민적 도덕체계 수호자들은 그날 밤 행사를 조금은 냉철하게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한국을 위한 최선의 길은 3김 모두의 집권을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을 것입니다.”(글라이스틴)

글라이스틴은 12·12 성공 후 물밑에서 움직이던 신군부의 존재를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모두가 속으로는 우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3월 1일 개교에 즈음하여 문교부 장관 김옥길(金玉吉)도 시위를 자제해 달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고, 학생들도 그 당부를 듣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야당과 재야·학생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최규하는 “계엄 해제의 여건은 안 만들면서 계엄 해제만 요구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군사정부의 등장 가능성을 암시했지만 아무도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고 최규하의 측근은 회고했다.(권영민)

최규하와 전두환

최규하의 경고나 글라이스틴의 우려처럼 신군부는 정권 찬탈을 위한 작업을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1989년 ‘전두환 청문회’를 앞두고 국회의원 이철(李哲)이 공개해 세상에 알려진 ‘K(King)-공작’이었다.

이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에서 1980년 3월께 수립한 언론공작 계획으로, 그 줄거리는 3김을 구태의연한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몰고 신군부는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해 전두환을 King(왕)으로 만든다는 집권공작이었다. 이 공작을 담당할 언론조종반 반장은 대공(對共)업무의 베테랑이었던 이상재(강기덕) 준위였다.

그가 이끄는 언론조종반은 중앙 일간지 및 방송사 간부 94명과 차례로 접촉해 회유공작에 들어갔다. 94명의 언론인 외에도 학자·평론가·외국 인사 등 지식인도 포섭대상이었다. K-공작의 실무요원이었던 김기철은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12·12사태 후 권력장악에 자신감을 얻은 신군부는 집권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대중조작을 위해 3월 초부터 언론대책반을 가동시켰어요. 사실 보안사의 언론대책반은 12·12 이전부터 보안처 산하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그것이 2월 초 신설된 정보처 산하로 옮겨지면서 확대, 개편된 것이지요. 이상재 씨의 활동도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3김씨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길로 확실하게 나선 것입니다. 언론검열의 방향은 다분히 ‘혼란방치’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요. 혼란이 극심해져야 안정세력의 명분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80년대편> 1권, 2003에서 재인용)

혼란 방치의 일환으로 신군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당시 서울의 사회 혼란에 외부 세력의 개입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전두환과 그의 휘하 군인들이 반정부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음모설도 믿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그것을 기회로 활용했음은 확실하다”고 회고했다.

드디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전두환은 압력을 넣어 4월 14일 최규하에 의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을 받아냈다. 이는 “(중앙정보)부장은 일체 타직을 겸할 수 없다”는 당시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위배되는 명백한 불법이었으나 청와대는 “신임 전두환 정보부장 서리는 ‘부장’이 아니고 ‘서리’이기 때문에 겸직이 가능하다”는 해괴한 논리로 이 문제를 덮었다.

12·12 반란의 주역인 전두환이 베일을 벗고 표면에 떠오르자 내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4월 15일자 <뉴욕타임스>는 장문의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정보부장직은 보통 민간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 장군의 임명 소식은 한국 국민에게 놀라움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더 놀란 것은 글라이스틴이었다. 허약한 ‘천황’ 역할을 맡은 최규하 뒤에서 ‘쇼군’ 역할로 만족할 줄 알았던 전두환이 표면에 떠오르자 그는 서둘러 최규하부터 만났다.

이 무렵 최규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글라이스틴 회고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4월 18일 최 대통령을 만난 나는 장시간에 걸쳐 전두환이 민간분야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것에 우리가 그토록 신경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결정을 공개하거나 한국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의 상징적인 조치들(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연기/ CIA 국장의 한국 방문 취소)이 대통령이나 전두환 및 신군부 세력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 대통령은 우리가 너무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약체 정부에 물리적 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학생 시위와 노동자들의 소요가 과격해지는 것을 막지 않으면 극우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정치 개혁의 희망이 무산된다고 지적했다. 전두환이 경찰에 힘을 보탬으로써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주장도 폈다.”(이상은 글라이스틴)

최규하는 정보부장에 임명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는지 전두환을 두둔했다. 하지만 “전 장군이 앞으로 대통령의 중요 정책결정 과정에 현직 군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군부에 의한 중앙정보부의 관리가 노골화될 것”이라는 일본 교토통신의 논평처럼 전두환의 등장으로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최규하의 발광체가 더욱 흐려질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최규하와 서울의 봄

전두환의 위상 강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학생들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민주화의 꿈에 들떠 있던 ‘서울의 봄’이 이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결집시켰다.

대학가에서 최규하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국무총리 신현확은 집중포화의 대상이었다. 한때 미 국무부로부터 의심을 받았던 그는 학생들로부터도 대통령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 무렵 학생들의 단골 구호는 “신현확·전두환은 물러나라”였다.

4월 24일 신현확은 자기와 최규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학생들의 소요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들은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로 진출하려고 들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정치인들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4월 30일 전두환의 회견 기사가 도하신문에 1면 톱기사로 다루어지더니, 다음 날인 5월 1일에는 계엄사에서 열린 전군지휘관회의 기사가 다시 1면 톱기사로 등장했다. 이날 계엄사령부는 “법치주의의 원칙과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엄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사태악화를 우려한 글라이스틴은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계엄령의 조속한 해제와 새로운 선거를 이른 시일 내 실시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온건한 시위 참가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체질적인 신중함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지닌 최규하는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군부의 조종을 받는 정부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불순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몰고 가기 위해 뒤에 북한이 개입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학생들의 시위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5월 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열린 민주화대총회에서는 서울 시내 각 대학에서 모인 1만여 명의 학생이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5월 3일 이후에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안 글라이스틴은 5월 12일에는 김대중, 5월 13일에는 김영삼을 만나 학생시위가 자제되도록 노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큰 효과는 없었다.

5월 15일 10만여 명의 대학생이 서울역 광장에 운집해 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10·26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 인파였다. 그러나 5월 16일의 거리는 오히려 조용했다. 이날은 1961년에 일어났던 군사쿠데타 19주년 기념일이었다.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군부의 조작과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모든 시위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부는 5월 17일 아침 전군지휘관회의를 열어 강경방침을 굳혔고, 이 결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여행길의 최규하는 말레이시아에서 전화를 받은 뒤 신현확 총리에게 비상계엄령 전국확대건의 처리를 전화로 지시했다. 최규하가 김포공항을 거쳐 청와대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11시쯤이었다. 시국대책회의는 그 직후 청와대에서 열렸다.

그러나 계엄군은 시국대책회의가 계엄확대 결의를 하기 훨씬 전인 그날 저녁 이미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에서 체포했고, 김영삼을 가택연금했으며, 김종필을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구속했다. 같은 시각 계엄군은 문익환·예춘호·김동길·고은·이영희·인명진·함세웅 등 재야 인사와 교수 그리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화여대 회의장에 모였던 학생 등 600여 명을 전격 구속했다.

그리고 그날 자정을 기해 계엄령 전국 확대가 선포되면서 탱크로 무장한 군병력이 주요 도시에 투입되었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국회도 봉쇄되었다. 서울의 봄은 이렇게 군홧발에 짓밟혀졌다.

최규하와 5.17정변

5월 18일 최규하는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성명을 통해 학원 소요가 극도의 사회혼란을 가져오고 일부 정치인이 이들을 선동·자극함에 따라 “정부는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대 단안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수차 천명한 바 있는 정치 발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으며 이를 계속해서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군부에서 써준 것을 그냥 읽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600여 명이 영장도 없이 전격 구속되는 5·17정변 직후 “정치 발전에는 아무 변함도 없다”는 그의 다짐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었다.

더 이상한 대목은 정국이 가파르게 치닫고 있던 5월 10일 그가 중동 여행길에 올랐다는 점이다. 5·17정변 1주일 전이었다. 물론 순방 자체는 예정되었던 일이고 석유의 원활한 공급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국내 문제가 긴박한 시점에 국가원수가 해외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 일이었다. 정가에는 군부 등장설이 파다하게 퍼진 가운데 노사분규가 꼬리를 잇고 학원소요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 점에는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도 같은 느낌이었던 듯 “최 대통령은 위기가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우려되던 기간에 예정돼 있던 4∼5일의 중동 방문에 나서겠다고 결정해 나를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상식적으로는 여행을 취소하거나 연기했어야 했다. 그렇게 건의한 보좌관도 있었다. 그러나 외무부와 중앙정보부 쪽에서 가야 한다는 강력한 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떠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진행된 기간 내내 그는 자리를 비웠다.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최 대통령의 출국은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품기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5·17 계획을 알고 그 책임을 미리 회피하는 방편의 하나로서. 중동 방문을 끝내고 그 긴박한 시기에 며칠 쉬어가려고 말레이시아의 휴양지 바레인까지 들렀다니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곳에서 비서실장 최광수(崔侊洙)로부터 하트라인 전화를 받고 급거 귀국한 그가 5월 17일 밤 청와대에서 시국대책회의를 갖고, 5월 18일 오후 계엄령 전국 확대의 특별성명을 발표한 것을 보면 책임회피용 출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역시 신군부에 동조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한 언론인은 이 시기 최규하의 행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5·17 그날 최규하 대통령도 군부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인가, 아니면 묵인 또는 편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중의 요구에 찬물을 끼얹은 가해자인가.…… 국가원수로서 국헌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헌법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성스런 직무를 포기했다는 비난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김진배, <사람을 알고 사람을 말하라>, 1992)

최규하와 광주민주화운동

5·17정변은 서울에서 일어났는데 불꽃은 묘하게도 광주에서 튀었다. 서울과 달리 시위가 계속되던 광주에서는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앞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원이 서로 맞붙게 됨으로써 저 처절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시위대들은 곳곳에서 도시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태극기가 꽂힌 군용차와 군인들로부터 탈취한 전차를 타고 있었다. 트럭과 유리창이 깨진 버스를 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군중은 ‘전두환을 죽여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었다.”(필립 퐁스 기자, <신동아>, 1989년 5월호)

광주민주화운동의 촉발 원인 중 하나가 호남 출신의 대권 유력후보였던 김대중의 체포 소식에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이는 광주 진압 후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이른바 ‘광주사태’의 핵심 골자이기도 했다. 김대중이 사주하고 조종한 탓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주장은 1988년 서울대 교수 노재봉(盧在鳳)에 의해 “광주사태는 김대중 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이었다”는 식으로 다시 리바이벌돼 세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사태’ 또는 ‘광주항쟁’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5월 18일 이후의 일이고, 김대중이 계엄군에 구금된 것은 5월 17일의 일이다. 시간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남한의 한 도청소재지 광주에서 10만여 시위대는 서울의 계엄정권과 새로운 권력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곧 전면적인 봉기로 확대되었다. 시민들은 도주한 경찰을 대신해서 광주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타임>, 1980년 6월 2일)

이처럼 광주가 시민군에 장악되는 사태로 발전하자 최규하는 5월 25일 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각료들과 군 수뇌부가 그를 수행했다. 이 같은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시찰은 광주시민보다 국민에게 마치 대통령이 계엄부대를 위로, 격려하는 듯한 인상을 주려는 계엄당국의 면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김진배)

그러나 정작 최규하는 광주 도심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광주 교외의 전투병과기지사령부에 임시로 마련된 TV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일시적인 흥분과 격분에 의해 총기를 들고 다니는 청소년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하고 미리 마련된 담화문을 읽는 모습을 광주시민들에게 TV로 보여주는 것이 대통령 최규하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공수여단에 의한 진압작전이 시작되기 30시간 전의 일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9일간에 걸친 광주민주화운동은 사망자 163명, 행불자 166명, 부상자 3139명의 처절한 흔적을 남겼다.

진압 4일 뒤인 5월 31일 국정전반을 관할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가 설치됐다. 이 기구의 출범과 함께 대통령 최규하는 완전 ‘허수아비’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행정실무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 국보위가 출범함으로써 그 권한마저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은 1980년 5월 말에서 6월 사이에 변화된 상황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을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대하는 것도 이제는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 6월부터 한·미 양국 정부 간의 기본적인 의견 교환은 최규하 대통령이 아닌 전두환 장군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글라이스틴, , 2000)

하야 자체는 8월 16일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최규하 시대는 끝난 것이었다.



리더십의 결여

보수주의의 아름다움은 사람이 가진 것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존중한다는 점에 있다. 남의 ‘아픔’을 같이 느낄 줄 알기 때문이다. 나와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이 ‘교양’이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정의를 부르짖는 진보주의 관점에서 옳지 않았다 할지라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수주의 관점에서 궁지에 빠진 한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늘 감동시킨다.

그러나 사이비 보수주의자가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에서 그런 아름다움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론재판을 통해 ‘반동’ ‘수구’로 낙인 찍고 정죄하는 것은 공산당 수법인데, 엉터리 보수주의자는 개별요인은 고려하지 않고 전체적 관점을 중시하는 공산당식 수법을 차용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이는 무조건 낙인 찍고 정죄한다.

신군부의 주체세력이 민주화를 외치던 시민을 모두 ‘좌빨’이나 ‘붉은 폭도’로 낙인 찍어 죽음으로 몬 것은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자기들의 욕심, 곧 권좌에 올라 엄청난 돈을 챙기기 위한 일종의 정지작업 같은 것이었다. 생명을 경시하면서 권력이나 재산 등의 자기 이익만 얻고 지키는 천박한 보수주의는 부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신군부의 두 수장은 바로 그 문제로 감옥에 갔던 대표적 사례다.

최규하의 경우는 결코 부패한 인물이 아니었다. 1995년 검찰이 12·12사건에 대한 재수사 때 그의 은행 계좌를 뒤져보았으나 뒤가 깨끗했다는 후문이다.(<현석편모>)

권좌에 있었음에도 1973년 구입해 별다른 수리도 없이 40년간 살았던 서교동 2층집은 그의 검소하고 청빈했던 삶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공직자로서의 청렴결백함은 적어도 각료 때까지는 그것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한 미덕이었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재산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무슨 짓도 마다않는 사이비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특별히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그 밑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한 박동진(朴東鎭)은 각료들이 그를 10대 대통령 후보로 천거할 때 고사했다면서 “이분은 원래 겸손한 성품에 정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 주저했다”고 회고했다.(박동진,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1992)

그러나 생명을 아끼고 남의 아픔을 느끼고 나와 다름이 있음을 이해하는 면을 적극적으로 보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를 건강하고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군부의 억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관리 시절에 보이던 ‘뚝심’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는 대통령이었다. 어떻게든 유혈의 비극은 막아야 할 지도자였다. 힘에 부쳐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시도는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적극적인 노력이나 지도력을 발휘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낸 5공 내내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남아 있었던 대목이 암시하듯 그저 현실을 수용하고 소극적으로 자기 것만 챙기는 일종의 본능적 보수주의자였던 것일까? 그는 고급 관리 또는 행정가 수준의 그릇이었던 듯싶다. 그런 그가 운명의 장난으로 보다 큰 리더십을 요구하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데에 역사적 비극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1995년 법정 증언에서 그가 내놓은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증명하거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 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공자님 말씀’이 공허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그에게 무덤까지 안고 갈 만한 비밀이나 ‘억울한 사연’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세월은 흐른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그는 2006년 10월 22일 노환으로 서교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누린 해는 8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