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치하이던 1973년에 터진 윤필용 사건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대표적인 ‘권력 스캔들’이다. 이해 4월 28일 보통군법회의는 수경사령관 윤필용(육사 8기) 소장,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육사 11기) 준장, 3사관학교 생도대장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과 26사단 76연대장 권익현 대령(육사 11기, 전 민정당 의원), 육군 범죄수사단장 지성한 대령, 육본 진급인사실 신재기 대령(육사 13기, 전 민자당 의원) 등 장교 10명에게 횡령·수뢰·직권남용·군무이탈죄 등을 적용해 최고 징역 15년(윤필용·손영길)에서 징역 2년까지 선고했다.파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군부 내에서 윤필용 인맥으로 분류됐던 안교덕(육사 11기, 전 민정당 의원), 정동철(육사 12기), 배명국(육사 14기, 전 민정당 의원), 박정기(육사 14기, 전 한국전력 사장), 김상구(육사 15기, 전 민정당 의원, 전두환 전 대통령 동서), 정태화(육사 18기) 등 31명이 군복을 벗었다. 중앙정보부에서도 윤 장군과 가깝다고 여겨졌던 이재걸 감찰실장 등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쫓겨났다. <대한일보> 사장이자 한양대 총장이던 김연준 씨도 윤 장군과 친하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았다.윤 총장은 수재의연금을 횡령했다는 명목으로 구속당하고 <대한일보>는 폐간당했다.윤필용 사건의 전체적 윤곽이 비교적 자세하게 세상에 공개된 것은 이로부터 17년이 지나서였다. 1990년대 초반 <중앙일보>에 연재된 ‘청와대 비서실’에서 김진 기자(현 <중앙일보> 논설위원)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 내막을 샅샅이 파헤쳐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관련자마다 조금씩 증언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큰 줄거리는 일치한다.“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 등에서 ‘노쇠한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말을 했는데, 이런 언행을 전해 들은 박 대통령이 진노해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와 엄벌을 지시했고, 그 결과 윤필용 사단이 결딴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보통군법회의가 범죄로 인정한 횡령·수뢰 등의 혐의는 한낱 억지요 뒤집어 씌우기에 불과했고, 본질은 대통령의 ‘권력 관리’였다는 얘기다.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권력 스캔들손영길 장군의 무죄 판결에 앞서 2009년 12월 서울고법 형사8부는 윤필용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성배 전 준장 사건의 재심에서 “구속영장도 없이 끌려가 고문을 당한 점이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사건 연루자 중 첫 무죄 판결이었으니 손영길 장군은 두 번째 명예회복인 셈이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은 지난해 7월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그의 아들 윤모 씨는 그 직후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겠다”며 지난해 8월 고등군사법원에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다. 또 신재기 전 대령도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면 연금을 받게 되며, 사후 국립묘지에 묻힌다. 김성배 전 준장의 재심 판결에 상고를 포기했던 검찰은 손영길 전 준장의 경우엔 굳이 상고를 해 대법원 판결이 주목된다. 소송을 대행한 법무법인 바른의 박주범 변호사는 “오히려 국가 권력이 손 장군께 사죄를 해야 할 판에 되레 상고를 하다니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육사 11기 선두주자에서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몰려 온갖 고문을 받고 강제로 예편까지 당한 손영길 씨의 심정은 어떨까? 그가 잃어버린 세월은 무려 38년이다.
▎1967년 8월 17일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 후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맨 왼쪽이 전두환, 맨 오른쪽이 손영길 중령. 손영길의 후임 제30대대장으로 육사 동기인 전두환·김복동이 물망에 올랐으나 손영길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두환이 더 믿을 만하다”고 건의해 전두환으로 낙점됐다.
손씨를 2월 9일, 12일 이틀에 걸쳐 그의 서울 광화문 오피스텔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매우 건강해 보였다. 모두 7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격정적으로 ‘잃어버린 38년’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궁금해서요. 도대체 윤필용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잠시 생각하다) 내 생각엔 세 가지예요. 권력투쟁, 시기심, 그리고 음모입니다. 박종규(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이하 당시 직책)는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을 밀어내고 중정부장을 하고 싶었고, 사건 수사를 맡은 강창성(보안사령관)은 라이벌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을 제치고 싶었겠죠. 박종규·강창성에다 또… 난, 전두환·노태우 둘이서 박종규를 ‘꾸운’(그는 ‘구운’을 경상도 사투리로 ‘꾸운’이라고 발음했다. ‘구워삶았다’는 뉘앙스였다) 것 같아요. 박종규는 사람이 단순하거든요. 그런 정황들이 여럿 있어요.”―당시 권력 실세들의 이해관계에 전·노 두 전직 대통령, 그러니까 육사 11기 동기생들의 시기심도 작용했다는 말이네요. 어떤 정황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맹호부대원으로 베트남전 참전 당시 채명신 주월사령관의 부대 순시 기념 사진. 왼쪽 두 번째부터 손영길·채명신·윤필용.
“예를 들면, 사건 직전인 1973년 1월 장군 진급 직후예요(육사 11기에서 첫 준장 진급자는 손영길·전두환·김복동·최성택 4명이었다. 이 중 최성택은 포병 병과였으므로 나머지 3명이 이후 선두를 다투게 됐다). 서울 근교 송추에서 축하 모임이 열렸는데 나는 그 자리에 좀 늦게 도착했어요. 전두환·노태우 둘이서 이후락이 어쩌고 손영길이 어쩌고 한창 얘기를 하다 내가 나타나니 말을 뚝 그쳐요.‘무슨 얘기냐’고 했더니 주저하다 하는 말이 ‘요새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과 아주 친하다. 손영길이 둘 사이를 붙여줬다더라’는 소문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말했죠. ‘윤 장군이 술집 같은 데 가면 이후락 욕을 많이 한다. 서로 욕하면 대체 누구를 욕뵈는 일이 되느냐? 결국 각하 아니냐? 그래서 내가 윤 장군께 왜 이후락 욕을 하십니까, 욕하려면 각하 앞에서 하시고 아니면 아예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내 말 틀렸냐’고요.사실 나는 이후락이 학교(울산농고) 선배이긴 했지만 좋아하지 않았어요. 너무 부패했거든요. 어쨌든 동기생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데 뭔가 안 좋은 감이 들더군요. 비슷한 시기에 내가 전두환의 시기를 살 만한 일이 더 있었어요. 이후락이 수경사 참모장이던 나를 중앙정보부 2국장으로 데려가려 했어요. 이후락·윤필용 둘이서 대통령께 건의했더니 박 대통령이 ‘무슨 소리야. 손영길이는 참모총장 감이야’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후 전두환(공수여단장)이 수경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윤 장군이 전두환에게 ‘야, 각하께서 손영길이가 참모총장 해야 한다시는데 넌 공수단장이라고 권총이나 차고 다니면서 뭐 하는 거냐’라고 놀린 적도 있어요.”―박종규 경호실장,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도 밉보일 만한 일이 있었나요?“감옥에 가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소소한 여러 일들이 생각나더군요. 내가 준장 진급 후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간다는 소문이 좀 있었어요. 강창성 씨의 경우 육사 11기 동기생이자 국방부 합동조사부대장이던 L 헌병대령 건이 있었죠. 윤필용 사건 두 달쯤 전이에요. 이른 아침에 L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사람이 완전히 사색이 돼서 ‘나 서빙고(보안사 분실)에서 나오는 길이야. 예편서도 쓰라기에 썼어’ 하는 겁니다. 이놈(보안사 요원)들이 글쎄 L의 성기에 전극을 꽂고 전기고문까지 했다는 거예요. 경악했죠. 강창성 사령관을 찾아갔죠. ‘어째서 고급장교에게 그런 말도 못 할 수모를 주느냐’고 따졌더니 ‘그놈 나쁜 놈이야. 옷 벗겨야 돼. 공금을 70만원이나 횡령했어’라고 합디다. 그 공금이 헌병대 수사비라는 게 뻔한데도 말이죠. 그래서 ‘정 그렇다면 각하께 사실대로 보고드리죠’라고 했더니 강 사령관의 태도가 싹 달라지더군요. ‘불문에 부치겠다’는 겁니다.”
▎1967년 8월 17일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에서 전임자인 손영길 중령(왼쪽)이 후임 전두환 중령(가운데)에게 30대대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첫 인연―그런 일만 보아도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대단했군요. 박 대통령과는 언제 인연이 생겼습니까?“1957년일 겁니다. 육사를 졸업하고 소대장으로 처음 강원도의 7사단 3연대 1중대 1소대로 부임했어요. 7사단에서 모두 3년을 근무했죠. 도중에 27사단 창설 작업이 있었는데, 연대 작전장교로 그 일에 참여했다가 사단 통제관이던 박정희 준장(6군단 부군단장)을 처음 뵈었어요. 평가나 지시가 분명하고 조리 있어서 인품과 태도, 모든 면에서 감명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박 장군이 우리 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저는 그때 쌀·부식부터 담배까지 병사들이 부조리에 시달리지 않고 정량을 공급받게 하고, 훈련도 열심히 시켰습니다. 당시만 해도 하루 자고 나면 1개 사단에서 1개 중대 병력이 탈영할 정도로 엉망이었어요. 그러나 우리 중대는 탈영병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박 사단장도 그걸 눈여겨보신 모양이에요. 어느 토요일, 사단장 전속부관이던 한병기(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사위, 전 국회의원) 대위가 절 데리러 왔더라고요. 따라서 사단장 숙소로 갔어요. 만주군관학교 시절 얘기, 우리 군이 청렴해져야 한다는 얘기를 하시고, 왜 우리가 미군 고문관 말이나 들어야 하느냐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셨죠. 군이 각성해야 하고, 그 책임은 너 같은 청년 장교들에게 있다는 거예요. 이런 분이라면 어디든 따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그렇게 맺은 인연이 계속 이어졌군요.“박정희 장군은 1군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1959년 11월께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어요. 나는 그동안 논산훈련소, 육군대학, 교육총사령부를 거쳤고요. 원주 1군사령부에 계실 때 내가 휴가로 고향(울산) 가는 길에 찾아뵌 적도 있습니다. 그때 박 장군의 보좌관이 윤필용 중령이었어요. 물론 윤 중령은 박 대통령이 7사단장 시절 참모였기도 하죠. 원주 시절부터 윤필용 보좌관이 저를 동생처럼 대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간 박 장군이 1960년 1월에 저를 자기 부대로 끌어갔어요. 작전처 작전편제장교였죠. 그해에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4·19 직후 어수선한 와중에 하루는 박 사령관이 저를 부르더니 ‘지금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군에서 누군가 (군내 부정선거를) 지시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하시더니 며칠 후 편지 한 통을 제게 주시면서 ‘서울 가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해드려라’는 거예요. 비행기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서 육본으로 갔죠. 편지를 드린 뒤 별 지시가 없어 다시 부산에 내려왔는데, 송 총장이 나중에 편지를 읽고 뒤늦게 나를 찾는 등 노발대발했답니다. 뒤에 들어보니 ‘부정선거에 책임지고 물러나면 모두가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는 내용이었대요. 송 총장이 ‘박정희 이 새끼 빨갱이 아니냐’며 엄청 화를 냈답니다.”―그러다가 5·16 쿠데타가 난 겁니까? 5·16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습니까?“송요찬 참모총장이 박정희 장군을 1관구 사령관으로 전출시켰습니다. 보복 인사죠. 1관구 사령관 다음에는 대구의 2군 부사령관으로 발령냈고요. 하루는 박 장 군이 그리워서 대구로 가 찾아뵈었어요. 그때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이 김용순 씨(2대 중앙정보부장)였는데, 박 장군을 잘 따랐고 박 장군도 그분을 좋아했죠. 박 장군이 저보고 ‘김용순이한테 뭐 들은 거 없어?’라는 거예요. ‘없습니다’ 하니까 별다른 설명도 없이 ‘김용순이한테 내가 곧 부산에 간다고 해’라더군요. 그게 5·16에 관련된 일이었던 것 같아요. 혁명 과정을 저는 전혀 몰랐고, 5월 16일 새벽 부대 숙소에서 라디오로 소식을 처음 들었습니다.”―5·16 후에는 개인적인 인간관계상 박정희 장군 편에 설 수밖에 없었겠네요.“당연하죠. 서울도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부산도 그랬어요. 박 장군의 후임 군수기지사령관 박현수 소장은 혁명에 반대했죠. 그러나 김용순 참모장은 찬성이었지 않습니까? 한 사령부 사무실에 혁명 반대, 지지 간판이 번갈아 붙었다 떼어졌다 했어요.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나는 김현옥 대령(육군 제3항만사령관), 진종채 중령(군수기지사령부 교육대장) 등 혁명을 지지하는 분들과 육사 동기생들이 함께 5월 18일 부산에서 혁명 지지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짰어요. 그런데 17일 저녁에 서울에서 동기생 전두환(당시 서울대 ROTC 교관)이 급히 전화를 하더군요. ‘영길아, 큰일났다. 우리 육사 동기들이 혁명을 지지 안 한다고 다 붙잡혀 가게 생겼다. 네가 올라와서 도와줘야겠다’는 거예요. 동기들이 반혁명으로 구속된다는 말에 저녁에 급히 기차를 탔습니다. 밤새 달려 18일 오전 10시 30분쯤 서울역에 도착했더니 전두환이 나와 있더군요.”
윤필용 사건으로 깨달은 권력의 명암―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서울시내 행진은 그날 아침에 이미 진행됐을 텐데요.“그렇습니다. 전두환이 ‘퍼레이드는 아침에 벌써 했다. 잘 끝났다’고 해요. 둘이서 같이 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5·16 직후 설치된 군사혁명위원회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된다) 사무실에 갔습니다. 박태준 비서실장, 윤필용 보좌관을 만나고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께 인사드렸죠(최고회의 의장은 장도영). 부산의 사정을 물으시더니 그 자리에서 저를 부의장 전속부관으로 임명하시더군요. 정식 발령은 1주일 후에 났고, 이후 1963년 12월 민정 이양 때까지 2년 반 넘게 근무했습니다. 그사이 소령으로 진급(1962년)했고요.”―그렇다면 민정 이양을 앞두고 당연히 정부나 정치권에 들어가라는 권유가 있었겠네요.“그랬었죠. 하지만 박 의장이 제게 직접 물었을 때 ‘군에 복귀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고등 군사반 가서 제대로 배워 군에 봉사하겠다고요. 1964년 1월 2일 박 의장께 세배 드린 후 광주 보병학교로 떠났어요. 장성환 공군참모총장이 제가 교육 간다는 얘기를 듣고 선뜻 준비해준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어요. 5월 16일 교육을 마치고는 부산 군수기지사령부로 부임했지요.”―최고권력자의 탄탄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군 생활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겠습니다.“사실 그랬어요. 청와대 외곽 경비를 책임지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 대장만 해도 원래 중령 보직인데 저는 소령 때 임명(1964년 11월)됐어요. 전임자는 육사 8기였지요. 연대장도 육사 동기생 중 가장 먼저(1970년 5월) 했어요. 26사단 75연대장인데, 전임자가 육사 8기였지요. 준장 보직인 수경사 참모장도 대령 때 부임(1971년 8월)했습니다. 전임자는 또 육사 8기였고요. 1968년 10월 육군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보안사령관, 윤필용 20사단장이 서로 저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연대장 시절엔 남파 무장간첩 셋을 나흘 만에 모두 잡아 화랑무공훈장도 받았고요(그는 충무무공훈장 1번, 화랑무공훈장을 3번 받았다).”―이제 윤필용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추락한 상황을 말씀해주시죠.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습니까?“1973년 3월 8일 수경사 장교식당에서 윤필용 사령관, 참모들과 점심을 먹는데 지성한 대령이 들어와서 윤 사령관에게 귓속말을 해요. 사령관의 얼굴이 확 변하더니 ‘보안사에 갔다 오겠다’며 급히 나가더라고요. 가서 강창성 사령관을 만난 듯해요. 돌아와서는 ‘아무것도 아냐. 각하께서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라더군요. 나는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신범식(<서울신문> 사장) 등과 술 마시면서 ‘각하가 노쇠…’ 운운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어요. 그저 이분이 술 마시고 또 뭔가 실수를 했나 보다 했죠. 그런데 곧바로 윤 사령관이 보직 해임되고 후임 수경사령관으로 진종채 정보사령관이 임명되는 거예요. 3월 13일에는 저도 15사단 부사단장으로 발령 나더군요. 발령 난 것을 알고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을 찾아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강창성이가 각하께 뭔가 얘기해서 오해가 생기신 것 같아. 일단 가 있으면 곧 오해가 풀릴 거야’라고 합디다. 나도 대통령이 나에게 매를 때리는 정도로 생각했어요. ‘윤필용이 감독 잘하라고 너를 보냈는데 왜 감독 잘 안 하나’라고 잠시 벌주시는 걸로 여겼지요. 그때 제가 관리하는 부대 운영비가 있었는데, 한 2300만원 됐어요. 그 돈으로 식사비도 쓰고, 전방 사단장들이 오면 금일봉으로 주기도 했지요. 사용 내역도 노트에 다 적었습니다. 전두환·권익현도 이 돈 많이 얻어 썼어요. 윤 장군이 ‘후임 사령관에게 절반을 주고, 나머지는 보관하라’더군요. 그래서 진종채 사령관에게 1100만원을 주고 나머지는 집사람에게 맡겼어요. 근데 나중에 이게 다 범죄로 취급받더군요.”―고문도 당했죠?“15사단에 부임하고 며칠 안 됐는데 사단 보안부대장이 와서 ‘보안사령관이 찾는다’며 가자더군요. 서울에 가보니 사령부가 아니고 서빙고(보안사 분실)였어요. 한 놈이 종이에 쓰인 걸 읽어요. ‘대통령 명에 의하여 육군 준장 손영길의 쿠데타 모의에 대해 조사하겠습니다.’ 깜짝 놀랐죠. 옷부터 벗기더군요. 밤새 고문을 해대더니 아침에 김기수 보안사 참모장(준장)이 찾아와 ‘예편하라’는 거예요. 거절하니까 일단 귀대시키더군요. 1주일 후 보안대원 5~6명이 다시 나를 연행했어요. 506보안대로 끌려가 약 20일간 정말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었습니다. 명색이 장군인데…. 창피해서 말도 못 하겠어요. 발가벗겨 놓고 비행기 태우고, 수건 씌워 코에 물을 붓고, 엄지손가락 통해 전기고문하고…. 특히 내 전속부관이던 P대위를 바로 내 앞에서 고문할 때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자살도 생각했지만 이대로 죽으면 누명만 쓸 것 같아서 ‘반드시 살아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결국 쿠데타 혐의는 거짓이었지 않습니까?“제 혐의가 업무상 횡령,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도망 방조, 총기 불법소지 등 5가지였어요. 다 말이 안 되죠.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대장)이 박 대통령에게 선물한 권총이 있었는데, 손잡이를 상아로 씌운 것이었죠. 제가 베트남 간다니까 대통령이 그 총을 제게 하사했어요. 그 권총까지 ‘불법 소지죄’로 엮더군요.”―징역 1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재판 받으면서도 ‘각하의 오해가 풀리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윤필용 장군에게 ‘형님이랑 나랑 괜히 각하와 싸우지 말고 조용히 감옥 갑시다’라고 했어요. 안양교도소 4동 2층의 방 50개를 다 비우고 나와 윤 장군 딱 둘만 집어넣더군요. 그때 나이 마흔둘인데, 12년 후면 54살이잖아요. 배신감에 잠이 안 왔어요. 누군가 준 법정 스님의 <무(無)>를 시작으로 불교서적들을 읽으면서 분노를 삭였습니다. 일기도 썼는데, 어떤 날은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1000번 이상 되풀이해 쓴 적도 있습니다.”(손영길 씨는 1년간 수감 후 건강 악화로 국립의료원에 입원하면서 형 집행이 정지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최규하 대통령 시절인 1980년 2월 29일 재야 정치인 등과 함께 특별사면(복권은 아님)을 받았다.)―감옥에서 나온 후 전두환·노태우 씨를 만난 적 있습니까?“형 집행 정지 중에도 내 주변을 삼엄하게 감시하더군요. 그런데 1974년 광복절 경모(敬母)님(손씨는 육영수 여사를 깍듯이 경모님이라 호칭했다) 저격사건이 나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나자 감시가 싹 끊어졌어요. 그 즈음 전·노 두 동기생이 찾아왔기에 물었죠. ‘내가 부정을 했나? 각하께 불충했나?’라고요.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의리 지키고 국가에 충성하기로 맹세하지 않았나. 맹세 어기면 스스로 자결하기로 하지 않았나. 너희라도 각하께 내 말 해드렸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죠. ‘박종규 실장이 워낙 서슬이 퍼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보세요. 두 사람 다 나중에 경호실 차장보를 지내지 않았습니까? 1980년 사면 후엔 전두환이 찾아왔어요. 똑같이 물었습니다. 내가 쿠데타를 했느냐, 불충을 했느냐고요. 박종규가 날아간 뒤 네가 경호실 있을 때는 왜 말씀 안 드렸냐고 했죠. 지금도 인간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5공화국 들어 육사 후배들 덕분에 도로공사 사장, 전매공사 이사장 등을 지낸 윤필용 장군과 달리 손 장군은 계속 찬밥 신세였지요.“김우중 대우 회장이 도와주어서 1980년 사면 직후부터 3년간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의 대우 지사에 가 있었어요. 귀국해서도 대우의 주선으로 사업체(동주산업)를 꾸려 운영했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을 원망하지 않습니까?“아닙니다. 지금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내게 밝은 면만 보여주다가 그 사건으로 어두운 면을 보여주었어요. 권력의 어두운 면이죠. 덕분에 내가 인권에 대해, 인간 세상에 대해 깨닫게 됐어요. 인간에 관해 함부로 말할 게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됐고요.”(그의 사무실 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한 친필 휘호가 걸려 있었다. ‘자주국방태세 확립-손영길 대령을 위하여. 1971년 1월 6일. 대통령 박정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