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미인별곡 >> 조선 최대 스캔들女, 어우동


▎1985년에 개봉된 영화 <어우동>의 한 장면. 주연 배우 이보희의 열연으로 서울에서만 관객 50만 명이 들었다.

어우동은 1480년(성종 11년) 10월 18일 처형됐다. 조선 승정원(국왕 비서실)은 그녀의 죄가 ‘교부대시(絞不待時)’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형 집행은 농사철을 피해서 기다렸다가 추분(秋分, 대개 9월 말)에서 춘분(春分, 대개 2월 초)까지의 기간에 실시하는 대시(待時)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죄가 엄중할 때는 예외로 했다. 악역(惡逆)과 강상(綱常)의 죄가 해당됐다. 세상을 거스른 악질죄인 악역은 부모·친족을 죽이거나 때린 경우며, 기강을 위반한 죄인 강상죄는 노비와 부곡민이 주인을 살해하는 정도의 죄였다. 이럴 땐 형벌 집행 시기를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조선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리라 짐작되는 어우동은 왜 즉결 처형됐을까?

그녀의 죄는 악역이나 강상의 죄로 논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그녀의 죄는 ‘섹스’뿐이었다. 그것도 서로 합의 하에 이뤄지는 간통 행위들이어서, 이 문제에서 비교적 관대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어우동의 논죄는 석연찮은 구석이 느껴진다.

승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 어우동의 처형은 왕실과 상민, 그리고 천민까지를 줄줄이 ‘한 우물 동서(同壻)’로 만들어버린 고약한 상황에 맞닥뜨린 당시의 충격과 당황의 표현이라고 보인다. 이른바 왕국의 골격이 되어야 할 신분제의 권위가, 한 여인의 치마 속에서 마구 허물어진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부부 윤리와 친족 윤리가 파탄에 이르렀다는 개탄 또한 없지 않았겠다.

하지만 그런 충격·개탄·당황만으로 형벌을 과도하게 집행했을까? 절대권력자인 왕의 행위와 행실까지도 목숨을 걸고 적어놓았던 조선의 ‘이성’이, 스캔들이 빚어낸 여론의 광풍 앞에서 잠깐 멎어버렸을까? 이쯤에서 ‘음모론’ 비슷한 게 솟아나게 마련이다. 당시의 군주였던 성종이 자신과 연루된 사건인지라 서둘러 종결하려 했다는 주장도 그 하나다. 이 임금의 품행으로 보자면 그러고도 남았을 분이지만, 안타깝게도 증거는 없다. 어우동의 입장에서 볼 때 ‘왕과의 섬씽’이 있었다면 곤경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그것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 소문과 증언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군주의 간통’만 쏙 빼버릴 만큼 치밀하게 사건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어우동은 승문원(외교문서 담당 관청) 지사(知事, 종3품) 박윤창의 딸이다. 어머니는 정씨라고 한다. <송계만록>에는 <부여회고(夫餘懷古)>라는 시가 실려 있다.

白馬臺空經幾歲(백마대공경기세)

落花巖立過多時(낙화암입과다시)

靑山若不曾緘默(청산약부증함묵)

千古興亡問可知(천고흥망문가지)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흘렀나

낙화암이 들어선 지 많은 세월 지났네

청산이 만약 입 다물고 있지 않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


이 시와 함께 어우동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호서(湖西)의 창(娼)으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다들 싣지 않는다.’

<송계만록>은 16세기 권응인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그는 이황의 제자였지만 서얼 출신이라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설움을 겪었다. 그랬던지라 신분을 막론하고 ‘사랑’을 나눴던 어우동(그 당시로 보면 100년 전 여인이다)이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가 썼을 많은 시 중에서 저 한 편이 살아남은 까닭은 그런 감정이입의 힘이 아니었을까?

창(娼)은 몸 파는 여자를 가리키니 기생과는 다른 그녀의 신분을 묘하게 얼버무렸다. 호서는 충청도 지방을 말하는데, 저 시의 배경이 되는 부여가 의미 있게 느껴진다. 충북의 괴산에서 나는 붉은 고추에는 어우동이 먹고 땀을 흘렸다는 기묘한 이야기가 섞여 있는데 절묘한 스토리텔링이 아닌가 싶다. 역사 속의 이야기를 끌어내와서 머리에 쏙 들어오는 야한 상징으로 살짝 전이시키는 맛이 뛰어나다.

그런데 ‘농부의 딸’이었다니 무슨 말일까? 승문원의 고위관리였던 박윤창을 농부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리라 보인다.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상처(喪妻)를 한 박윤창이 충청 어느 지역에 나갔다가 딱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미모의 한 여인이 유학자이면서 농부였던 남편을 억울한 누명으로 잃고 힘겹게 청상으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박윤창은 그녀와 어린 딸을 한양으로 데리고 와 부인과 딸로 삼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혼이 금지되지 않았기에(개가(改嫁)금지법 확립은 성종 대다) 가능한 일이었다.

딸이 자라나면서 그 눈부신 아름다움이 소문나기 시작했고, 왕가의 친척인 종실의 많은 실력자 남성이 탐을 냈다. 이런 가운데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 이 미인을 차지한다. 그 결혼은 한 남자를 기분 좋게 했지만 장안의 많은 남자를 상심하게 했다.

‘어우동’ 이름의 의미

이쯤에서 어우동(於于同) 혹은 어을우동(於乙于同)이란 호칭을 살펴보자. <용재총화>와 <송계만록>, 그리고 <대동시선>에는 어우동이라고 나오고 실록에는 어을우동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게 이름은 아닌 듯하다. 어조사(語助辭)를 겹쳐 넣은 이름도 어색하고 비슷한 이름의 혼재도 얄궂다. 당시 결혼한 여성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르지 않은 습속을 고려한다면, 이름이 아니라 당시에 회자됐던 별칭으로 보는 편이 더 개연성 있다.

‘어우’나 ‘어을우’는 한자 표기나 순우리말일 가능성이 크다. 어을우동은 어우동이란 말에 ‘ㄹ’을 넣어서 발음했던 당시의 상황을 암시한다. 즉 ‘얼우동’이었다고 보이는데 ‘얼우’는 ‘얼우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 의미는, 서로 단단히 교합하다, 혹은 남녀가 서로 결합하다,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 혼인하다 따위다. ‘얼음이 얼다’ 할 때도 물이 단단히 결합하다는 의미가 있다. 황진이의 시조에 나오는 ‘얼운님 오신 날 밤이어든’이란 대목에서 ‘얼운님’ 또한 추워서 얼어붙은 님이란 의미와 사랑하는 님이란 의미를 함께 지닌다. 따라서 얼우동은 ‘동(同)과 얼운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동(同)은 동(仝)과 같은 자이니 얼우동은 ‘동(仝)의 마누라’라는 의미가 된다. 얼우동이라는 말 속에는 ‘유부녀’라는 주홍글씨가 딱 찍혀 있는 셈이다.

더구나 동(仝)을 쓰지 않고 굳이 동(同)을 쓴 데는 당시 상황의 풍자가 숨어 있다. 원래는 동(仝)의 마누라지만, 이제는 모두(同)의 마누라가 되어버린 여자라는 뜻 아닌가? 아버지의 성을 따 ‘박씨’라고 부르지 않고, 어우동이라고 부른 건 당시 남성들의 야멸친 조크일 수 있다. 태강수 이동은 정4품이었고 어우동도 외명부의 품계인 정4품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다. 따라서 그녀를 비웃을 작정이 없었다면 ‘혜인 박씨’라고 불러야 옳았다.

종실의 역설이 낳은 어우동 사태

어우동 스캔들은 조선사회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며 성장하던 어떤 에너지가 외형 중시 사회의 견고한 막을 뚫고 분출한 사건이다. 남녀 상열(相悅)을 노래하는 에로티시즘이 깊이 스며들어 있던 고려사회의 분방함은 조선이 깃발을 들었던 숭유(崇儒)의 다양한 규제 탓에 여민 옷 속으로 숨어들고 안방 속으로, 이불 속으로 절제된 자리를 잡아간다. 이런 흐름은 체통과 위선을 중시하는 이중적인 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규제 강화 사회 속에서 그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은 바로 ‘권력의 상징’이 된다.

왕조 초기,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왕권을 강화하려면 왕의 가계를 불리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세종 이후 두드러지는 왕실의 다처(多妻) 다자녀(多子女) 집념은 왕권 강화의 실천이기도 하다. 이런 명분은 왕가의 자손들이 열심히 바람둥이 짓을 하도록 권장하는 기이한 풍경을 낳았다. 백성에게는 유가(儒家)의 윤리를 역설하면서, 왕의 종실(宗室)은 유가의 담장을 넘나들며 씨를 뿌리고 다니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우동 사태는 정확히 이 ‘종실의 역설’이 낳은 최대 부작용이다.

어우동은 이동과 언제 결혼했을까? 물론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470년쯤으로 잡는다. 이때 어우동 나이 18세. 결혼 생활은 5년 정도 했다고 보면 23세(1475년)에 그녀는 버림받는다. 5년간 화려한 싱글로 세상을 흔들다가 28세에 남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눈을 감는다. 이렇게 그녀의 생을 구획해놓고 보면 뜻밖에 뚜렷이 드러나는 사실이 있다. 그녀의 생존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렸다는 점이다.

어우동이 시집간 집안은 태종임금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집안이었다. 효령은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다섯째가 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이다. 어우동의 남편이 되는 이동은 영천군의 외동아들이었다. 시아버지가 되는 영천군은 이미 ‘미인별곡’에서 다룬 평양기생 자동선(紫洞仙) 이야기에서 소개했다. 이분은 시도 잘 쓰고 그림도 뛰어났으나 평생의 주특기는 ‘주색(酒色)’이었다고 한다. <용재총화>에서는 그 행각을 이렇게 적었다.

“시골 기생이 처음으로 뽑혀 서울에 오면 곧 집으로 데려와서 화려한 옷을 입혔다. 또 조금 있다가 다른 어린 기생이 있으면 거기에 빠져 기존에 데려온 기생이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 평생 첩으로 삼은 여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영천군이 유명해진 이유는 빼어난 미모의 기생 자동선과의 러브스토리 때문인데, 이때도 다른 여자(청교월, 혹은 청교아)를 좋아하는 상태에서 긴급하게 상대를 바꿔 연애를 진행했다. 이렇게 열심히 숫처녀만을 공격하고 살던 영천군은 32세에 세상을 뜬다. 영천군의 부인 중에는 성씨와 권씨가 있었던 듯하다. 이동은 권씨가 낳은 외동아들 유복자였다. 다행히 아버지의 품행을 보지 않고 태어났던 이동이었지만, 그 DNA는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왕을 포함한 종실 남자들이 부지런히 위험한 ‘어색(漁色, 엽색행각)’을 즐겼듯 그 또한 그를 낙으로 삼으며 무위도식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낚시꾼에게는 원래 제 어망에 든 물고기는 눈에 차지 않고 연못에 있는 고기가 커 보이는 법이던가? 이동은 천하의 보석을 가졌으면서도 그걸 잘 간수하지 않고, 처용처럼 너무 많이 ‘셔블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닐고 다녔다. 남자들이 밤에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사회에서는 여자들 또한 가만히 앉아 있을 분위기일 리 없다. 게다가 어우동은 처녀 시절부터 수많은 ‘팔로어’를 거느리던 여인이 아니던가? 담장을 기웃거리는 사내, 길에서 집적거리는 고관, 메시지를 날려보내는 낭만파들이 곳곳에서 준동했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그녀의 간통 행각과 그 상대를 낱낱이 적시하는 친절함을 보이긴 하나, 그것이 대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난 일인지 또 그때 어우동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또 논죄만 있을 뿐 그녀를 옹호한 변론이나 당사자의 항변도 찾아보기 어렵다. 죽을 죄를 지었을지언정 할 말이 왜 없었겠는가?

고심 끝에 필자는 혜인 박씨 어우동 여사를 2011년 4월 서울 인사동에서 인터뷰하기로 했다. 조선에서 가장 남자 마음을 치명적으로 뒤흔든 팜므 파탈이라는 소문을 완전히 무시하기 힘든지라, 한편으론 두려운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론 기묘한 설렘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뜻밖에 혜인은 키도 아담하고 약간 통통한 체형을 지녔으며 특히 눈매가 예쁜 여인이었다. 당시에 무슨 미백화장품을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살결이 유난히 희고 깨끗했으며 풀 향기 같은 체취가 흘러왔다. 어느 주막에서 막걸리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가채(덧머리)가 인상적입니다.

“먼 길 오는 터라, 긴히 단장을 하였습니다만 흡족하진 않사옵니다. 오다 보니 나와 같은 머리를 한 사람이 없어서 다소 당황하였습지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사옵니다.”

말씀을 조금 낮춰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혜인 마님.

“아니옵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법도의 핵심은 여전하지 않겠습니까? 내 비록 법도에 충실하지 못하여 형장의 이슬이 된 여인이긴 하나, 본분을 아주 잊지는 않았사옵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어색한 듯해 말투를 바꾸려고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사시는 곳은 어디였나요?

“시댁인 영천군 사저가 있던 곳은 안국방(安國坊)이었습지요. 예전엔 이곳에 대군저(大君邸)와 공주들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친정은 가회방에 있었고요. 부친은 제가 시집오던 이듬해에 돌아갔습니다.”

부군 이동과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르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는지요?

“파경이라… 글쎄요. 우린 거울을 함께 지녔던 적도 없었던 듯합니다. 물론 동은 나를 사랑한다고 늘 말했고, 나 또한 그를 사랑했지요. 하지만 그는 늘 딴 잠을 잤습니다. 다른 여자를 집에 데려왔고 술자리를 벌이고 동침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엔 못마땅하여 불평을 넣어보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나의 투기를 원망하고 힐책하였습니다. 시할아버지 효령대군도 평생 그렇게 살았고 시아버지 영천군도 천하의 풍류남이었으며 종실의 라이프스타일이 있지 않으냐, 그걸 문제 삼으면 결혼의 기본이 안 된다, 이렇게 나오더군요. 그래도 그대를 사랑하니, 너무 심려를 하지 말라 하더이다. 저 또한 참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은장(銀匠)이가 오기까진 말입니다.”

은장이라니요?

“하루는 비녀와 노리개를 다듬는 은장이가 지나가기에, 집안에 있던 오래된 물건을 세공하려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일을 시키는 가운데 가만히 살피니 참으로 사내다운 체격과 귀티 나는 용모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잘 다독였는데… 그를 한 번 더 집으로 불렀지요. 그때 그만 여몄던 마음을 놓고 말았습니다.”

신분을 뛰어넘은 스캔들

으음, 그걸 남편이 알게 되셨군요?

“처음엔 물론 몰랐는데, 사랑이 깊어지니 대담해지고 잦아지더군요. 남편에게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하고 애틋한 감정이 끓어올랐습니다. 무엇보다 가슴이 몹시 아팠습니다. 내 변화를 눈치챈 남편이 사람을 붙여 결국 들통이 났지요. 그래도 그는 눈을 감아줬습니다. 얼마 후 왕실의 행사에 참여했다가 내금위(內禁衛)의 구전(具詮)이란 사람과 눈이 맞았고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몇 번 만나자 소문이 돌았던 모양입니다. 시어머니가 저를 불러 사실인지 묻더군요. 저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종실의 체모를 크게 깎아내린 소행이라고 꾸짖으시더니 그날로 저를 내쳤습니다.”

지체 낮은 남자와 가까워진 연유는 종실과의 결혼생활이 불행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이유의 하나이긴 하겠네요. 하지만 저는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기획된 사회에서, 여성은 왜 행복할 수 없는가, 여성은 왜 사랑을 선택할 수 없는가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철저히 자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체 낮은 남자들은 비교적 권력적 망상이 적고 덜 위선적이었지요. 오히려 신분의 차이를 의식해 사랑에서도 저들이 할 수 있는 최선과 진심을 다했지요. 제가 어떤 사회의식을 가지고 평민과 천민 상대를 택하진 않았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당시는 서양으로 치면 르네상스와도 같은 자아 발견과 주체적 의식의 강화가 일어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성적인 분방함은 그런 현상의 일부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와 관련한 스캔들을 봉합하면서 그런 성적 소통을 통한 평등의 기운들은 다시 기어들어가 내면화되지 않았을까요.”

르네상스까지 말씀하셨는데 그런 사례라도 있는지요?

“세종조에 있었던 소쌍 사건은 알고 계시지요? 세자빈 봉씨와 벌였던 대식(對食, 동성애) 스캔들 말입니다. 이 사건이 투기(妬忌)나 민간의 방술(方術) 따위와 뒤섞이긴 했지만 핵심은, 여자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성행했다는 점입니다. 왕궁에서는 이런 행위를 두고 ‘곤장 칠십 대를 때려서 고치지 못하면 다시 일백 대를 때린다(決杖七十 猶不能禁之 加杖一百)’는 규정까지 두었지요.

1477년 6월에는 부림군 식(湜)이 안천군 권팽(權彭, 옹주의 아들)의 첩인 기생 금강아(錦江兒)를 간음하는 사건이 일어났지요. 저의 스캔들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입니다. 금강아는 권팽의 어린 자식까지 두었지요. 종실의 근친상간 사건은 여러 번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종친들이 보쌈과 간음을 일삼다 보니, 서로 중복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여기엔 임금까지도 끼어 있었습니다.”

임금이라… 성종대왕을 말씀하시나요? 그러고 보니 성종과의 밀애설도 있던데 그 부분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마도 미복(微服, 평민의 옷)을 입고 어느 날 다녀갔을지도 모르지요. 호호. 궁궐 담을 뛰어넘어 기생 소춘풍의 집으로 쳐들어가 ‘나, 이서방이요. 문 좀 열어줘’ 했던 왕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군왕과 ‘아기자기’ 사랑을 나눈 기억은 없습니다. 나를 서둘러 처형한 사연에는 성종이 뭔가 찔리는 데가 있어서 그러지 않았느냐는 짐작이 있습니다만, 그 ‘찔리는 것’은 나와 맺은 인연 때문이 아니라 기억도 못 할 만큼 궁궐과 장안을 휘젓고 다녔던 왕인지라 혹여 나의 사건이 자신의 허물과 연결지어져 곤란해질까 봐 저어한 까닭이 아닐까 합니다.

성종은 후궁의 방에 머물러 있을 때 질투에 가득 찬 윤비가 달려와 항의하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바람에, 그녀를 폐비로 만들고 결국 사약을 내렸던 임금 아닙니까? 이 때문에 연산군 대에 가서 큰 사화(士禍)를 불렀고요. 그분은 아마 조선 최고의 바람둥이 군주였을 겁니다. 그런 분이 고려가요 <쌍화점>을 ‘남녀상열지사’로 규정하고 금지곡으로 만들었으니 좀 아이러니하더군요.”

하하. 그렇군요. 다른 얘기를 좀 해볼까요? 시가에서 쫓겨나기 전 겁탈을 당했거나 ‘보쌈’을 당한 적은 없는지요.

“음, 누가 그런 얘길 하던가요? 술 한 잔 더 주실래요? 숙정문 사건은 진실로 있었습니다. 도성의 북문인 이곳은 처음엔 활짝 열려 있었는데, 숙정문이 열려 있으면 도성 내 부녀자가 바람이 난다는 주장에 따라 폐문이 되었지요. 어느 날 저녁때 그 길을 가다 얼굴도 알 수 없는 건장한 사내의 공격을 받았고, 그곳에서 나는 찢어진 헝겊처럼 한참 누워 있었습니다. 은장이를 만나기 전이었지요. 그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나는 오랫동안 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죽을 듯이 온몸이 아파왔는데, 그때 문득 깨달았습니다. 삶이 아무것도 아니고 몸뚱이 또한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고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잘되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이란 그냥 시늉만이 아니라 미친 듯 몰입해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물론 나를 덮쳤던 그자를 완전히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말입니다.

‘보쌈’은 지어낸 얘기입니다. 당시 과부의 재혼이 금지되면서 외로운 여인들이 모여서 ‘보쌈계’는 했습니다. 과거를 보려고 상경하는 미소년을 보쌈해와 하룻밤을 즐기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갖다 놓는 놀이였지요. 또 한량들이 ‘과부 보쌈’을 했다는 얘기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야 보쌈을 당할 만큼 허술한 집에 살지 않았기에 그럴 일은 없었지요.”

이원의 수화 ‘어우동’

이제 스캔들의 핵심이었던 종실들의 근간(近姦) 문제를 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술 한잔 더 하실까요?

“예. 사실 승정원에서 이 일을 들고나온 것은, 나를 죽여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방책이었을 겁니다. 내가 종실을 모독하려고 수산수(守山守) 이기와 방산수(方山守) 이난과 사랑을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은 내게 외명부 혜인의 자리를 주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을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시댁에서 쫓겨난 뒤에도 태강수 이동은 나를 자주 찾아와 ‘돌아와달라’고 애걸했습니다. 가회방 근처에 집을 얻어 살았던 나는 안국방(시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몸종 은설(銀雪)의 권유로 기방(妓房)을 냈습니다. 아무리 내쳐진 몸이라도 지체가 있었기에 ‘기방’이라고 이름하지 못하고 ‘이원(梨園)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마침 배꽃밭으로 둘러싸인 집이었기에 걸맞다고 여겼지요. 이원에 어우동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풍류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생이 아니지만 거문고도 뛰어나고 시문도 빼어난 절색이 배꽃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사내들에겐 우아한 유혹이었겠지요. 나는 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의 전력(前歷)을 꺼내는 이는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직 이원의 수화(羞花, 꽃들이 부끄러워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로 살고 싶습니다.’ 수화는 손님 중에 직제학 노공필 어른이 붙여준 이름이었지요. 세간에선 나를 여전히 어우동이라 했지만 손님들은 수화라고만 불렀습니다.

태강수 이동 또한 이원에 올 때는 손님 자격이었습니다. 그 이상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태강수 이동의 삼종(三從)형제이자 정종 임금의 증손자인 수산수 이기와 풍류를 나누었다면 기생과 소객(騷客)의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여 대화가 향기로웠고 그런 나머지 연심이 생겼습니다. 어린 방산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종대왕 후궁 신빈 김씨의 소생인 계양군의 막내아들인 그도 수산수와 태강수를 따라왔습니다. 종실끼리 한 여자를 두고 선객(先客)이니 후객이니 하는 말이 나왔다니 우습지만 들여다보면 기방(妓房)에선 흔한 일이 아니더이까? 굳이 쫓겨난 나를 ‘혜인’의 자리로 무늬만 복위시켜 종실 사람들과의 교유를 간통으로 몰아갔으니 선정적인 여론조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 생도 박강창의 팔뚝에 자청(刺靑, 문신)을 한 일은 어떻게 봐야 할지요?

“호호. 객주의 은밀한 놀이가 이렇게 수백 년을 넘어 알려지다니 소문이란 대단하네요. 박생도는 전의감에서 일하는 의원이었습니다. 이원의 출입이 잦아지고 교분이 쌓이면서 저를 연모하는 마음이 커졌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몸에 내 이름을 새기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렸습니다. 언제라도 만나는 사람을 굳이 수지부모(受之父母)한 육신에 자청할 이유가 무어 있겠느냐고. 그래도 그 사람은 고집을 부렸습니다. 날마다 그 이름을 보면서 함께 있는 듯 살고 싶다고 말입니다. 나는 허락하고 말았지요. ‘수화이원(羞花梨園)’ 네 글자를 써주었더니 박생도는 바늘뭉치를 쥐고는 먹이 지나간 곳을 쉼 없이 찌르더군요. 피가 송알송알 돋아오르니 수건으로 꼭꼭 누르며 다시 찔렀습니다. 입묵자자(入墨刺字)를 다 끝내고 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껴안았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되었노라 말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 저도 그랬지요. 그런데 박생도가 나와의 친밀을 과시하려고 팔뚝의 자청을 술자리에서 내놓았던가 봅니다. 일시에 소문이 나고 몇 명의 한량이 다시 달려와 자신도 그 이름을 새겨달라고 졸랐습니다. 몇은 거절했으나 도저히 뿌리치지 못한 몇은 등짝에도 새기고(서리(書吏) 감의형), 엉덩이에도 그려넣게 됐지요. 일종의 유행 같았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을 소유하거나 그들이 나를 소유했다는 징표가 아니라 아픔을 감수하면서 애정을 호소하는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나중에 도덕군자들은 이런 사랑의 놀음을 해괴하다고 말하며 도덕파탄의 증좌로 삼더군요.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어우동 리스트’ 같은 명단이 나옵니다. 모두 어떤 관계입니까?

“위에 거명된 분 외에도 병조판서 어유소, 학유 홍찬(과거에 합격했으나 저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합니다), 생원 이승언, 서리 오종련, 양인 이근지, 사노 지거비 등의 많은 사람이 회자되는 줄 압니다. 물론 저를 논죄할 때 거명이 되었던 분들이기도 합니다만. 물론 제가 거명한 사람은 아니며 소문으로 도는 이름의 주인을 불러 조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분들은 대개 이원의 빈객일 뿐입니다. 물론 살을 섞고 마음을 내준 이가 없지는 않으나, 내가 색정(色情)이 유난하여 당대 사내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진 않았습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보다 약간 뒷세대인 송도기생 황진이나 임제의 연인이었던 한우 같은 여인이 훨씬 더 리버럴한 성생활을 즐겼다고 압니다. 다만 나는 ‘혜인’이라는 계급적 족쇄 때문에 본보기로 죽임을 당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올가미에 든 나를 세상에 우스꽝스럽게 노출시키며, 남성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굳혀갔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어우동의 섹슈얼 코드는 만들어졌을 뿐입니까?

“호호. 술잔이 몇 순배 돌아 마음이 풀어지면서 취기가 도는군요. 제가 후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긴 했으나 매력이 비범하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나와 한 번 눈길을 마주치고 술잔을 부딪치고 침소에 들었던 이는 어김없이 어우동 마니아가 됐으니까요. 제 어미 정씨는 나를 치죄(治罪)하던 때에 끌려와 이렇게 말하더이다.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다만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게 심할 뿐이오.’ 오늘 수백 년을 돌아, 내 얘기를 들어주는 한 사내를 만나니 마음이 향기로워집니다그려.”

인터뷰는 여기까지가 좋겠습니다. 몸종 은설 씨, 서울의 밤은 아직 춥습니다. 이원(梨園)호텔까지 잘 모시고 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