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물건의 역사 >> 안경 ①

안경, 역사를 바꾸다


▎김성일이 쓰던 안경과 안경집. 안경알 사이에 경첩이 있어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영화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는 안경을 쓰고 나온다. 임금이 안경이라니, 조금 뜬금없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안경을 쓴 임금은 정조뿐이었던가? 정조는 엄청난 독서와 지식으로 신하들을 압박했으니, 그것은 아마도 안경 덕분일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9세기 풍양 조씨 세도의 핵심인물로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권세가 조병구(趙秉龜·1801~1845)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병구는 신정왕후 조씨, 곧 익종의 왕후인 조대비의 오빠다. 헌종은 익종과 신정왕후 사이에 난 아들이니, 곧 그의 조카다.

눈이 아주 나빴던 조병구는 어느 날 안경을 쓰고 헌종 앞에 나갔다. 헌종은 외삼촌이 안경을 쓴 것을 지적하며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조병구는 고민 끝에 자살했다. 렌즈 둘을 연결한 이 작은 물건이 19세기 최고의 권력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가 만들기도 하지만 전혀 뜻하지 않은 사소한 계기, 작은 물건의 출현으로도 만들어진다. 역사는 의지의 필연과, 그 필연을 벗어나는 우연이 얽혀 만들어내는 불가해한 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그 사소한 물건의 우연한 출현이 만들어내는 역사를 탐색하고자 한다.

안경은 언제 조선으로 들어왔나

1765년 겨울 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꿈에 그리던 북경 땅을 밟는다. 사신단의 서장관이었던 숙부 홍억(洪檍)을 수행하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으므로 공식 임무는 없었다. 북경 시내를 구경하기만 해도 충분했다. 홍대용은 북경의 지식인과 동무가 되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 지적 수준이 맞는, 대화가 되는 사람을 찾을 것인가? 그는 여러 사람을 접촉해봤지만 도무지 자신과 어울릴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하루는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유리창으로 ‘원시경(遠視鏡)’을 사러 나갔다. 어느 가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기성은 안경을 쓴 단아한 용모의 중국 문사 둘을 만났다. 둘 다 근시였다. 이기성이 말을 건넸다.

“나의 친한 사람이 안경을 구했으면 하는데 진품을 구하기 어렵구려. 족하께서 쓴 게 꼭 맞아 보이니 내게 파시면 어떻소? 족하께서는 여벌이 있을 수도 있고, 다시 구입하기 어렵지 않을 것 아니오?”

이 말에 한 사람이 선선히 안경을 벗어주었다.

“그대에게 안경을 부탁한 분 역시 나처럼 눈이 나쁜 모양이구려. 내 어찌 안경 하나를 아끼겠소. 하지만 파는 것은 또 무어란 말이오.”

말을 마친 사내는 옷깃을 떨치고 자리를 떴다.

남의 물건을 빼앗은 셈이 된 이기성은 머쓱해져 그 사람을 쫓아가 “장난 삼아 한 말입니다. 안경을 구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며 돌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찮은 물건이오. 같은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생각해서 주었을 뿐입니다. 어찌 이렇게 좀스럽게 구시오”라고 말했다. 이기성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다 간신히 두 사람의 내력을 물었다. 그들은 과거에 응시하려고 정양문 밖 건정동에 머무르던 절강성의 거인(擧人)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기성은 홍대용을 찾아가 유리창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며 두 사람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홍대용은 두 사람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다. 다음날 이기성은 건정동으로 찾아가 부채와 먹·환약을 예물로 건네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두 사람 역시 깍듯한 예를 차리고 선물을 받은 다음 깃털부채와 붓과 먹, 차와 담배 등으로 답례했다. 이기성은 그들의 언행을 칭찬하면서 남다른 재주와 학문이 있을 것이라며 홍대용에게 꼭 만나보기를 권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홍대용은 두 사람을 찾아가 필담을 나누고 마침내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의 이름은 반정균(潘廷筠)과 엄성(嚴誠)이었다. 홍대용은 귀국 후 주위에 새로 사귄 중국인 친구를 자랑했고, 이를 몹시 부러워하던 이덕무·박제가·박지원 등은 이내 북경으로 가서 반정균과 엄성을 통해 새로운 중국 친구를 사귄다. 이렇게 조선과 중국의 학술적 교류가 시작됐다.


▎혜원 신윤복의 작품이다. 안경을 낀 영감이 지나가는 아가씨를 내다보고 있다.

문제는 안경이었다. 이기성이 사려고 했던 원시경은 ‘멀리 보는 안경’이니, 근시가 쓰는 안경이다. 홍대용 역시 반정균과 엄성 두 사람을 ‘근시에 걸린 사람(病於近視者)’으로 표현했다. 안경이 18세기 후반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의 직접적 만남을 매개했다. 만약 이기성이 반정균과 엄성에게 안경을 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홍대용은 중국 지식인과 사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후기의 학술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연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는바, 여기서는 그 우연이 안경이다. 곧 안경이 조선후기의 역사를 만들었다.

곽차섭 교수가 번역한 키아라 프루고니의 <코앞에서 본 중세>에 따르면, 안경의 발명자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3세기 말에는 유리 생산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약 700년 전이다. 서양 안경의 역사는 이미 많이 알려진 만큼 이 글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이 글의 관심은 오직 조선 안경의 역사다.

조선의 사정을 돌아보자면 1614년 간행된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안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 “소설에 ‘안경은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은 글자가 크게 보인다(眼鏡, 老年觀書, 小字成大)’고 하였다. 듣자 하니 예전에 중국 장수 심유경(沈惟敬·?~1597)과 왜국의 중 현소(玄蘇)는 모두 노인이었지만 안경을 써서 잔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안경은 대부분 해방(海蚌, 바닷조개) 종류인데 그 껍데기로 만든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안경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다.

궁금한 것은 바닷조개다. 그것이 렌즈를 의미하는지 안경테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안경의 핵심이 렌즈임을 생각하면 렌즈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렌즈는 투명해야 하는데, 투명한 바닷조개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 때문에 뒷날 강세황(姜世晃·1712~1791)은 ‘안경’이라는 글에서 이수광이 안경을 직접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수광이 인용한 ‘소설’이 어떤 책인지도 알 수 없다. ‘소설’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지금의 소설과는 다른 의미다. “안경은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은 글자가 크게 보인다”는 말의 유래를 굳이 찾아보면 청나라 진원룡(陳元龍)이 편찬한 <격치경원(格致鏡原)> 58권의 ‘안경’이라는 글에 “<패사유편(稗史類編)>. 젊어서 들으니, 귀인에게는 안경이 있다고 하였다. 노년에 작은 글자를 보면 크게 보인다”는 말이 나온다.

<격치경원>은 <패사유편>을 인용했는데, 이수광은 청나라가 등장하기 전에 사망했으니 <격치경원>을 보았을 리 없다. 그가 본 <소설>이 <패사유편>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안경을 직접 본 것 같지는 않고 중국의 어떤 책에서 안경에 대한 정보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또 심유경과 현소의 안경 착용도 들은 얘기를 전한 셈이니 이수광은 안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보인다. 심유경과 현소는 모두 임진왜란 때 중국과 일본의 외교관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사람이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무렵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안경이 전해졌지만, 조선에서는 생소한 물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수광과 같은 시기를 산 이호민(李好閔·1553~1634)도 안경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안경명(眼鏡銘)’이라는 글을 1606년 썼는데, 얼추 <지봉유설>이 쓰인 시기다. 그는 “중국인이 밝고 깨끗한 양의 뿔을 사용해 두 눈 모양으로 만드는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쓰면 잔글씨가 크게 보이고 흐릿했던 것이 밝게 보인다. 이것을 안경이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희한한 대목은 양의 뿔로 안경을 만든다는 말인데, 사실인지 의문스럽다. 하기야 지금도 플라스틱으로 렌즈를 만드는 만큼 투명한 양의 뿔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투명한 양의 뿔이 있을까?

강세황은 ‘안경’에서 이호민이 ‘어심(魚魫)’, 곧 물고기 머리뼈로 만들었다고 했으니 그 역시 이수광과 마찬가지로 안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경명’에서 ‘명(銘)’이란 어떤 물건의 표면에 새겨넣기 위한 글이다. 안경에는 글을 쓸 곳이 마땅치 않으니 ‘안경명’ 역시 안경테나 안경 갑(匣)에 새기려 쓴 글이 아닌가 한다.

‘안경명’에서 이호민은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귀 먹고 눈이 머는 것은 상제의 뜻이니, 귀가 먹었다고 해서 귀를 기울여 듣고 눈이 나빠졌다고 해서 물건(안경)을 빌려 보려 들어서 상제의 뜻을 거스를 것까지야 없다고 말한다. 이 말로 보건대, 이호민은 안경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확언하지는 못한다. 다만 이호민의 ‘안경명’이 1606년에 쓰였으니 적어도 이 무렵 조선에는 안경의 존재가 알려진 게 분명하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김득신의 <밀희투전>에 안경을 낀 투전꾼이 보인다.

문헌자료는 아니지만 이수광이나 이호민의 자료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자료도 있다.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착용했다고 알려진 안경이 한 점 남아 있다. 가문의 전승 외에는 다른 증거가 없어 과연 김성일의 안경인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김성일이 썼다면 이 안경은 1593년 이전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김성일은 1577년 1월 사은 겸 개종계주청사(謝恩兼改宗系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윤두수(尹斗壽), 질정관(質正官) 최립(崔岦)과 함께 북경에 갔다 같은 해 7월 돌아왔으며, 1590년에는 통신사의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온 만큼 북경이나 일본에서 안경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김성일의 안경은 당시로서는 극히 희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문득 눈이 나쁜 김성일이 처음 안경을 썼을 때 심정을 떠올려본다. 퇴계 선생의 고제(高弟)로서 공부 잘하기로 이름난 수재였으니, 안경 너머로 환히 보이는 책에 일순 기쁨에 젖지 않았으랴.

종합하자면 안경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에 알려졌고, 이내 수입됐다고 여겨도 무방하겠다.

안경의 유래 탐색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이호민의 ‘안경명’은 안경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지만, 안경의 유래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광명을 찾아주는 이 신기한 물건의 유래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으리라. 박학한 이익(李瀷·1681~1763)이 유래를 밝히려고 나섰다. 그는 <성호사설> 제4권의 ‘애체(靉靆)’라는 글에서 안경의 유래를 상세히 밝혔다.

“애체(靉靆)는 세상에서 말하는 안경이다. 자서(字書)에는 ‘서양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서양의 이마두(利瑪竇)는 만력(萬曆) 9년인 즉 신사년(1581, 선조 14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왔다.”

‘애체’는 안경의 별칭이다. 왜 애채가 안경의 별칭이 되었는지는 뒤에 언급하겠다. 이익은 ‘<자서>라는 책이 안경을 서양의 산물이라고 기록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서양인 마테오리치가 1581년 중국에 왔으니 마테오리치 이후에 안경의 존재가 알려졌으리라’고 주장한다. 이익의 주장이 타당한가 여부를 알려면 <자서>라는 책을 검토하면 좋겠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이 어떤 사전, 곧 ‘자전(字典)’인지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이익의 주장은 마테오리치가 만력 9년 중국에 왔으니, 그 이후 안경이 비로소 중국에 전해졌다는 말이다. 그는 그 증거로 장녕(張寧)의 <요저기문(遼邸記聞)>이라는 책을 인용한다. 이 기록은 뒷날 안경의 유래를 밝힐 때마다 인용되는 만큼 여기서 직접 인용해둘 필요가 있다. 인용에서 ‘나’는 장녕이다.

“예전 내가 북경에 있을 때 호농(胡豅)의 집에서 그의 아버지 종백공(宗伯公)이 선묘(宣廟, 神宗)에게 하사받은 안경을 보았다. 동전 크기만 한 게 두 개 있었는데, 형태가 운모(雲母)와 비슷했다. 금으로 테를 두르고 거기에 자루가 되는 끈을 만들었다. 그 끝을 합치면 하나가 되고 나누면 둘이 된다. 노인이 눈이 어두워 잔글씨가 보이지 않을 때 이것을 두 눈에 걸치면 글자가 밝게 보인다.”

장녕이 북경에 있을 때 호농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호농의 아버지가 신종에게 하사받은 안경을 보았다는 얘기다. 장녕의 기록을 근거로 이익은 안경이 명나라 신종 때 이미 중국에 들어와 있었으리라고 말한다. 신종은 1573년부터 1619년까지 재위했다. 앞의 이수광의 기록에서는 심유경이 안경을 썼다고 했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전에 이미 중국에는 안경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다만 그 형태는 지금과 달라 안경알을 접을 수 있었다. 그것은 등자갑(等子匣, 천칭저울을 넣어두는 납작한 상자)에 넣어둘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테에 대못을 박아 렌즈가 겹쳐지도록 하는 ‘대못안경’이었을 것이다. 의아한 대목은 테에 자루가 되는 끈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때까지 안경다리가 없었으니 아마도 귀에 걸기 위한 끈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장녕은 <요저기문>이라는 책을 지은 바 없다. 위의 인용자료는 장녕의 문집인 <방주집(方州集)> 26권 ‘잡저(雜著)’에 실려 있다. 잡저는 전(傳)·잠(箴)·명문(銘文)·잡언(雜言)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잡언은 가벼운 에세이로 독립된 책으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여기에 안경에 관한 정보가 실려 있다. 박학하기로 이름난 이익은 왜 <방주잡록>이 아닌 <요저기문>이라는 엉뚱한 책을 출처로 제시했을까? 이익은 명나라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140책에 이르는 <설부(說郛)>라는 총서를 가졌는데 그 137책에 장녕의 <방주잡록(方洲雜錄)>과 전희언(錢希言)의 <요저기문>이 연속적으로 실려 있다. 이익은 <방주잡록>이라 말해야 했는데 뒤의 <요저기문>으로 잘못 알고 인용했다고 봐야 한다. 박학한 이익이지만, 실수가 없을 수 없었다.

위에 인용한 장녕의 글 뒤에는 “서양은 비록 아주 먼 곳이지만 서쪽 끝 천축(天竺)의 여러 나라는 중국과 물화를 무역한 지 오래다. 천축은 또 서양과 거리가 멀지 않다. 그 상황으로 보아 안경은 장차 중국에 전해질 것”이라는 부분이 이어지는데, 이 말은 <방주잡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또 이익의 시대라면 안경이 이미 유행할 때다. 중국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말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역시 어디선가 인용한 것을 바탕으로 썼겠지만 원 자료를 찾기 불가능하니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위의 인용에 이어지는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거가필비(居家必備)>에 “서역 만리국(滿利國)에서 나온다”고 하여, 안경이 서역 만리국의 산물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문제의 만리국은 도대체 어디일까?

조선시대에 박학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덕무(李德懋) 역시 안경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조시대 정국을 쥐고 흔들었던 김종수(金鍾秀)의 형 김종후(金鍾厚)는 이덕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만운(李萬運·1723~1797)의 <기년아람(紀年兒覽)>의 서문에 나오는 ‘애체(靉靆)’라는 어휘를 물어보았고, 이덕무는 자신의 박식을 과시하는 듯 상세하게 답한다.


▎안경을 낀 매천 황현의 초상화.

이덕무에 따르면 ‘애체’는 자서(字書)에 ‘구름이 성한 모양이다’ ‘애희(靉霼)는 곧 애희(僾俙)다’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이덕무는 ‘애체’와 ‘애희’를 같은 의미로 보았고, ‘애희(靉霼)’ ‘애희(僾俙)’와 같다고 본다. 애체는 원래 구름이 성한 모양(雲盛貌)이라고 하는바 이것은 구름이 잔뜩 낀 모양, 무언가가 잘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뒤의 두 애희 역시 희미하거나 불명료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이덕무는 ‘구름의 애희(僾俙)한 모습을 빌려 안경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말한다. 희미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안경의 이름으로 삼았다니 이해할 수 없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희미한 사물’을 환히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애체라는 말을 택하지 않았나 한다.

이덕무의 발언에서 주목할 대목은 명대 이전에 이미 안경이 발명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송나라의 조희곡(趙希鵠)이 지은 <동천청록(洞天淸錄)>과 원나라 사람의 소설을 인용한다.

“<동천청록>-애달(靉 愛達, 靉靆 의 오류-필자 주)은 노인이 잔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때 눈에 걸면 환히 보인다.”

“원나라 사람의 소설-애체는 서역(西域)에서 나왔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이덕무는 안경이 송, 원대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원나라 사람의 소설’ 운운하는 문장 뒤에 작은 글씨로 주석이 붙어 있어 이상하다. 출처는 <방여승람(方與勝覽)>이고, 그 내용은 ‘만랄가국(滿剌加國)에서 애체가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나라 사람의 소설’을 <방여승람>으로 알기 쉬우나 실제 <방여승람>의 저자 축목(祝穆)은 송나라 사람이다. 그리고 <방여승람>에는 안경을 언급한 내용이 없다. ‘원나라 사람의 소설’ 역시 어떤 문헌인지 알 수 없다. 뭔가 복잡하게 보인다. 그것은 이덕무가 <동천청록>과 ‘원나라 사람의 소설’ <방여승람>, 그리고 기타 애체 관련 자료를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몽땅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자서(字書)란 곧 <강희자전>이다. 이덕무는 <동천청록>과 ‘원나라 사람의 소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동천청록>에는 안경을 다룬 내용이 있을까? 없다!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동천청록>을 인용했지만, 안경을 다룰 때 그 내용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천청록>에는 안경에 관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어찌 된 일인가? <동천청록>을 인용해 안경이 송대에 발명되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독일 태생 미국 동양학자 베르톨트 라우퍼(Berthold Laufer·1874~1934)다. 하지만 왕령(王零)과 조지프 니덤(Josep Needham)은 라우퍼 주장의 근거가 된 <동천청록>의 안경 부분에 관한 서술이 명대에 증보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덕무 역시 명대에 증보된 <동천청록>을 본 것이다.

이덕무는 위의 두 자료 외에 앞서 이익이 <요저기문>이라고 잘못 인용한 장녕의 <방주잡지(方洲雜志)>를 인용했다. 곧 <방주잡록>이다. 이덕무는 이익이 인용한 부분 외에 다음과 같은 자료를 든다.

“또 손경장(孫景章)의 처소에서 두 번 보았는데, 손경장은 ‘좋은 말을 주고 서역의 가호(賈胡) 만랄(滿剌)로부터 사들였는데, 그 이름은 애체(僾逮)라고 들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덕무는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서 안경은 송, 원대에 이미 있었지만 그리 유행하지는 않았고, 명나라 신종 때 좋은 말을 주고 사왔다고 하며, ‘지금은 누구나 사용’한다고 말했다.

박학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안경이라는 물건의 유래를 밝히고자 했던 것 같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세상의 오만 가지 사실을 쓴 에세이 <임하필기(林下筆記)>의 ‘안경’에서 ‘안경은 명나라에 와서 처음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이렇다. 이유원은 유기(劉跂)의 <가일기(暇日記)>라는 책에 사항(史沆)이 재판할 때 수정으로 햇볕을 받아 문서의 어두운 부분을 비추어본 사실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송나라 때는 수정으로 사물을 비추어볼 줄은 알았지만 안경을 만들 줄은 몰랐다고 판단했다.

이유원이 명나라 때 안경이 처음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근거 역시 장녕의 <방주잡록>이다. 그는 <방주잡록>을 근거로, 안경은 명나라 때 매우 귀중한 물건으로 황실에서 하사받거나 가호에게서 구입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안경을 사오는 곳인 ‘만자가국’은 도대체 어디며, 가호는 또 무엇인가? 앞서 이익은 서역 ‘만리(滿利)’에서 안경이 생산된다고 하였고, 이덕무는 <방여승람>을 인용해 ‘만랄가국(滿剌加國)’에서 안경이 나온다고 했다. 이유원은 안경을 다룬 다른 글인 ‘학슬안경(鶴膝眼鏡)’에서 안경은 원래 ‘서역의 만자가국(滿刺加國)에서 처음 나왔다’고 했다. ‘자’와 ‘랄’이 섞여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비슷한 한자인 ‘자(刺)’와 ‘랄(剌)’ 자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한국 한자음으로는 ‘만랄가국(滿剌加國)’이다. 이유원 역시 ‘안경’에서 안경은 ‘만자가국(滿刺加國)의 가호(賈胡)에게서 들어왔다’고 했는데, 가호를 ‘배를 타고 중국으로 와서 장사하는 만자가국의 가호’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특이하다. 이것은 나름의 근거가 있는 말이다.

‘만랄가’는 ‘말라카(Malacca)’의 음역이다. 말라카는 말레이반도 남서부 말라카 해협에 있는 도시다. 이곳은 인도양을 지나 중국 남부로 들어오는 항로의 요충이기 때문에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고 동서무역기지로 만들었다. 중국 쪽 기록이 이곳을 서역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이런 사정이 있어서다. 따라서 ‘가호(賈胡)’, 즉 장사하는 오랑캐란 바로 포르투갈 상인을 말한다. 포르투갈 상인이 가져온 안경은 자연스럽게 중국 남부의 광동 지방으로, 그리고 북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것이 장녕의 <방주잡록>에 나오는 안경이 되었으리라 보인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 승려 현소가 안경을 썼다고 했는데,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과 교역했으니 그 안경은 아마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구입했을 것이다.

조선에서 만든 안경

안경이 중국에서 전해졌듯이 조선 사람들이 안경을 구입한 곳은 북경이었다. 18세기 후반 박준원(朴準源·1739~1807)은 ‘안경명(眼鏡銘)’에서 안경은 모두 연경의 저자에서 나와 압록강을 건너왔다고 말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이기성이 유리창을 찾은 것도 안경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유리창은 원래 책을 파는 서점이 몰려 있는 곳이었고, 거기서 골동품·서화·문방구·악기 등도 같이 팔았다. 이 때문에 문인·예술가들이 많이 몰렸으니 거기서 안경을 파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1798년 북경에 갔던 서유문(徐有聞·1762∼?)은 <무오연행록>에서 유리창 안경포의 존재를 간단히 언급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여러 가지 안경집(<韓國의 美>, 국립중앙박물관, 통천문화사, 1988).

“이 가게 외에 또한 두세 곳이 있으나 그다지 볼 만하지 않으며 가게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고이 책으로 꾸며 서너 질 없는 곳이 없으니 저들이 귀히 여기는 바인가 싶더라. 안경포(眼鏡鋪)와 서첩포(書帖鋪)와 그림포가 또한 여러 곳이요, 각양 물화(物貨)의 이름을 새겨 패를 세웠으니 비록 두서너 달을 지냈어도 빠짐없이 볼 길이 없으며, 광대놀음과 요술 구경이 또한 이곳에 많은지라….”

안경포는 바로 안경을 만들어 파는 곳이다. 1803년 북경에 갔다 이듬해 돌아온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여행기 <계산기정(薊山紀程)>을 보면 안경포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왕경문(王景文)의 ‘명감재(明鑑齋)’가 그곳이다.

이해응에 따르면, 왕경문은 산동 출신으로 ‘안경 제조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이해응은 왕경문과 친하게 지내는 역관을 통해 왕경문을 방문하였고 왕경문은 술을 대접하였다. 왕경문은 수공업자이기는 했지만 이해응과 필담을 할 만큼 문식(文識)이 있었고, 또 호협한 사나이였다. 아마도 명감재는 조선 사신단의 단골 안경가게였을 것이다. 역관들은 이곳에서 안경을 구입해 한양으로 가져가지 않았을까?

북경에서 수입한 안경이 조선사람들이 착용한 안경의 전부는 아니었다. 당연히 조선에서도 수입된 안경을 보고 스스로 안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1780년(정조 4년) 1월 26일 정조와 승지 김상집(金尙集)은 경주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김상집이 경주에 “수마노가 있고 ‘안경’이 있는데 절품(絶品)이라고 합니다. 또 경주부에서 7리 떨어진 산에서 옥정(玉精)을 채취하는데 민력(民力)을 동원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 폐단이 극심합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그곳의 오정(烏精)은 품질이 아주 좋다”고 하였다. 경주의 안경은 “천하의 안경은 오직 경주 안경을 최고로 꼽는다”고 할 정도로 절품으로 꼽혔다. ‘옥정’ ‘오정’은 검은색 수정을 말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경주옥돌안경, 혹은 경주남석안경으로 불리는 안경이다. 지금의 경주 남산에서 채굴됐기에 남석이라고 불렀다.

흥미롭게도 이 남석안경의 유래는 꽤나 올라간다. 18세기 후반의 학자 황윤석(黃胤錫·1729~1791)은 눈이 아주 나빴다. 그는 엄청난 독서가이기도 했는데, 스스로 평소 잔글씨를 많이 본 탓에 약관 때부터 눈병이 있어 서른일곱 살 때부터 안경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안경의 품질이 좋지 않아 적잖게 고통을 겪은 모양이다. 어느 날 김이신(金履信)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경주의 수정으로 만든 안경을 하나 선물한다. 이 안경이 꽤나 내력이 있는 물건이었다. 김이신에 따르면 민기(閔機·1568∼1641)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구한 안경이었다. 민기는 1636년부터 이듬해인 1637년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직했으니 안경을 구한 절대연대가 확정된다. 이때 구입한 것이라면 남석안경은 그보다 일찍, 즉 안경이 수입되고 나서 별로 오래지 않은 17세기 초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한다.

민기의 후손은 뒷날 조선 팔도에서 알아주는 집안이 된다. 그 아들 민광훈(閔光勳)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민광훈의 아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숙종의 비)의 아버지였으니, 임금의 장인이다. 김이신은 황윤석에게 그 안경이 민광훈의 아들인 민정중(閔鼎重·1628~1692)과 민유중,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閔鎭遠·1664~1736, 인현왕후의 오빠), 그리고 민진원의 손자인 민백상(閔百祥·1711~1761)을 거쳐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안경 하나가 거의 백수십 년을 거쳐온다.

황윤석은 이 안경은 바탕이 두꺼워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 튼튼한 물건으로 북경에서 산 안경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바탕이 흰색으로 새까맣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색 중에서 검은색이 안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석, 곧 수정으로 만든 안경은 조선후기에 널리 유행했다. 유물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홍대용 또한 수정안경의 존재를 증명한다. 홍대용은 1766년 1월 8일 북경의 천주교당(동당·서당·남당·북당 중 남당)을 방문하여 독일인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우관(鮑友官, Anton Gogeisl)을 처음 만난다. 그리고 다시 2월 2일 방문하여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중에는 안경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홍대용은 두 사람이 안경을 쓴 것을 보고, 서양 사람의 안경도 모두 수정으로 만들었는지 묻는다. 이에 유송령은 “수정으로는 안경을 만들 수 없습니다. 눈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수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홍대용은 아마도 조선의 수정안경을 의식하여 물었을 것이다. 다만 서양에서도 수정으로 안경을 만든 적이 있다. 품질 좋은 유리가 발명되면서 유리가 수정을 대체했다.

홍대용이 언급한 조선의 수정안경은 수정이 산출되는, 민기가 처음 수정안경을 손에 넣었던 경주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세황은 ‘안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안경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으며, 안경알이 단단한 것도 있고 무른 것도 있다. 일본에서도 안경이 생산되는데, 품질이 극히 좋은 것이 있다. 다만 일본의 안경은 수정으로 만든 것은 아주 드물고, 유리로 만든 것이 많다. 우리나라 경주에 또한 수정이 나는데, 경주 사람들이 ‘본떠서’ 안경을 만든다. 하지만 제조하는 기술이 정밀하지 않고 수정에도 또한 흠이 많아 끝내 중국이나 일본 것만 못하다.”

위 인용에서 ‘본떠서’의 원문은 ‘의양(依樣)’인데, 아마도 중국(혹은 일본)의 안경을 본떠 만든다는 뜻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강세황이 주로 활동하던 18세기 중·후반 경주에서는 수정으로 안경을 만들었고, 그것은 민기가 안경을 손에 넣었던 17세기 전반에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수정으로 만든 안경은 수정의 빛깔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마련이다. 강세황은 ‘안경’에서 “안경은 유리 혹은 수정으로 만드는데, 흰색·검은색·푸른색·보라색이 있고 크고 작은 것이 있어 같지가 않다”고 말한 뒤 “수정으로 만든 안경은 투명하여 흠이 없어야 가장 좋은데 그 성질이 단단해 깨질 염려가 없고, 바탕이 맑아서 어둡고 흐릿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검은 수정이나 보라색 유리로 만든 안경은 투명하기는 하지만 색이 어두워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편하지만, 투명하게 보이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수정과 유리를 합쳐 들고 있지만, 수정의 색깔과 투명도에 따라 다양한 렌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남석안경의 제작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 경주남석을 채취하여 안경을 제작하는 공방이 여럿 있었고, 또 1979년 남석안경을 제작하는 전문가와 그의 공방이 경주에 있었으니 20세기 후반기까지 전통이 이어졌다. 다만 경주의 남석안경 제작은 1939년 경주남석의 채취가 금지됨에 따라 타격을 받았다. 그 뒤 사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경공방은 여전히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남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됨으로써 수정 채취가 영원히 금지되고부터 남석안경의 제작도 불가능해졌다.

경주 외에도 안경을 제작하는 곳이 있었다. 서울이다. 19세기 후반 쓰인 문헌인 <동국여지비고>의 ‘장방(匠房)’, 곧 ‘수공업자의 공방’에 관한 부분에 “안경방은 여러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19세기 전반 혹은 그 이전에 서울 시내에 안경을 제작하는 공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서울이 안경의 수요가 가장 많은 곳이었으니 안경을 제작하는 공방의 출현은 시간문제 아니었을까?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의문 하나. 안경은 렌즈와 테, 그리고 다리로 구성되는데 보통 테와 다리는 대모(거북이 등딱지) 쇠뿔 놋쇠, 그리고 드물게 옥을 사용했지만 서울의 안경공방에서 사용한 렌즈는 무엇이었을까? 강세황은 ‘안경’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시대까지는 조선에서는 유리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유리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 중국인 역시 유리 만드는 법을 서양인에게서 배웠고 지금은 유리 값이 매우 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아직도 그 제조법을 모른다. 약물로 녹여 만드는데 아직 배울 수 없다니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자료로 보아 강세황의 시대까지는 조선은 유리를 만들 수 없었다. 유리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이용익(李容翊)이 국립유리제조소를 건립하고부터다. 조선시대에 안경방은 수정을 렌즈로 가공했을 것이다. 만약 유리렌즈를 썼다면 그 유리는 북경에서 수입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유리가 어떻게 수입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다시 막연해진다. 우리는 조선후기 사람들의 일상품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