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식의 우리 시대 인물 탐구 >> 오세훈 - 포퓰리즘과 싸우는 보수의 기수로 거듭난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에게는 대개 위엄(威)과 도타움(敦)과 맑음(淸)의 3가지 요소가 있기 마련인데,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에서 만난 신장 180cm의 오세훈(吳世勳) 서울시장에게서는 맑은 느낌을 받았다.

맑음은 탁함을 버린 것이다. 버리면 빈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맑으면 크다고 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버리면 얻는다고 하고 서양에서는 버리면 찾는다고 하는데, 나는 천주교도인 그가 2004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할 때 <코헬렛> 또는 <전도서>에 나오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구절을 알고 있었나 싶어 물어보았지만 딱히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대의를 위한 그의 불출마 선언은 “아! 우리나라에도 저런 정치인이 있었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런 국민적 감동과 함께 그가 만든 정치자금법의 개혁적 이미지, 그리고 TV 사회를 맡으며 쌓았던 대중적 이미지가 합쳐져 그는 자신이 버렸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서울시장 자리를 45세의 젊은 나이에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파생한 그의 새로운 이미지가 결단력이다. “정치권의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너는 정치적으로 대성하지 못할 것 같다. 정치를 하려면 상당히 독해야 한다. 뒤집어엎을 때는 엎을 수 있는 깡다구나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웃어넘겼죠. 봐라, 당신이 파악한 오세훈이 진짜 오세훈인지….”(한기홍, <월간중앙>, 2004년 2월호)

얼마 후 그는 ‘진짜 오세훈’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회의하다 책상을 뒤엎는 단기적(短氣的) 행동이 아니라 정치인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계속 고민해오다 내린 불출마 선언의 독한 결단을 통해서.


▎2006년 7월 3일 오세훈 제33대 서울시장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부인 송현옥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럼 그전까지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무엇이었나? 그건 TV광고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는 것이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기가 너무 셉니다. 절대로 남에게 지고는 참지 못하죠”라는 발언을 한 일이 있는데 이력을 보니 이해가 된다.

사법시험→TV스타변호사→국회의원→서울시장→재선 서울시장 등 지금까지의 인생행로가 ‘거침없는 하이킥’이었다. 가난하게 자라났다지만 그는 자신의 명석함과 능력으로 권력과 명예와 부를 다 거머쥘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과 승기(勝氣)가 서로 피드백되었을 것이다. 그 같은 점이 여소야대의 시의회에서는 무상급식의 문제로 야당과 정면충돌하기에 이른다. 주민투표를 실시할 생각이다. 옳다고 믿기 때문에 물러설 생각이 없다. 시정(市政)을 꿰뚫고 있는 그는 시종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강한 승기가 마음에 걸린다.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승승장구의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고난과 역경이었을 것이다. 맑음은 그릇을 비우고 고난은 그릇 자체를 키운다. 잠룡들 가운데 현재 지지율 여권 2위를 기록하고 있는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과외에서 만난 부인

1961년 서울 성수동에서 아버지 오범환(吳範煥) 씨와 어머니 사문화(史文華) 씨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오세훈 서울시장은 어렵게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가 가장 고달팠다는 자료가 보여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더 어렸을 때는 기억을 못 하고, 세상에 눈을 뜨면서 ‘아 우리 집이 가난하구나, 힘든 집이구나ʼ 그걸 처음 깨달았던 때가 그때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거기가 완전히 판자촌이었거든요. 수도도 전기도 안 들어오는.”

담장에 유리조각이 꽂힌 친구 집에 놀러가 보고 그도 담장이 있는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삼양동 달동네였는데 그곳에서만 계속 산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자주 이사 다닌 그는 마지막에는 부산에 내려가서 나무판자로 막은 사무실 한편에서 지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탔다. SBS TV <갑론을박 동서남북> MC 시절.

부친이 건설회사를 다니셨다면서요?

“네, 회사가 부도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몇 달씩 월급이 안 나와도 지금처럼 다른 직장에 옮길 수도 없으니까 그냥 다니신 거죠.”

그 후로도 집안 형편이 크게 호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가 부업을 했고, 그는 잉꼬·카나리아 등 관상용 새를 키워 팔아 용돈을 마련했다. 중학교 때 짝(조정호)은 “세훈이네 집은 아주 작고 침침했다. 가재도구가 빽빽해 앉기도 비좁았다”고 회고했고, 다른 동창(양재영)은 “학원도 못 다닐 정도였는데 자존심이 강해서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조선일보>, 2006년 5월 11일).

그러나 공부는 잘했다. 이리저리 전학을 다녔던 초등학교 4군데에서 모두 1등을 했던 그는 중·고교에서는 대체로 “10등 안팎을 했었다”고 대일고교의 한 동창생(임혁)은 술회했다.

고교 2학년 때 그는 난생처음 과외공부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봉제 일을 하던 어머니가 남대문에 한두 평짜리 수예점을 냈는데 그게 장사가 잘되었던 것이다. 대학원생에게서 받는 영어 그룹과외였다. 디스크를 앓는 바람에 유급해 같은 반이 된 1년 선배(송상호)와 같은 그룹이었는데, 거기서 연년생인 그의 여동생 송현옥(宋賢玉) 씨를 만나게 되었다.

“어렵게 보내주신 거니 저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싶었겠어요. 그런데 집사람은 농땡이…. 영어를 번역하라면 그 자리에서 사전을 찾아요. 복장이 터지는 거지요. (반대로) 우리 집사람은 나 같은 스타일이 싫었겠죠. 6개월 하고 깨졌어요, 싸움이 나서.”

뒤에 그의 부인이 된 송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때 남편은 1분 1초가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그런데 저는 지독히 공부에 매달리는 세훈이와 공부를 같이 못 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세훈이가 그룹에서 떨어져나갔어요. 그땐 남편이 마마보이로밖에 보이질 않았어요. 게다가 어딜 봐도 남편은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거든요.”(<주간조선>, 2010년 9월 17일)

그렇게 헤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대입 본고사를 앞둔 고3 때였다. 무교동의 국어 고문학원에 등록한 그녀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깜짝 놀랐다. 25명 정원 교실에 그가 혼자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죠. 거기서 세훈이랑 또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이게 운명의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죠.”(<주간조선>)

그녀는 다른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때 남편이 땅콩 먹는 모습을 보고 순수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에 반하게 됐다”고 고백했다(<중앙일보>, 2010년 9월 14일). 과외공부를 하다 싸우고 헤어졌다지만 상대가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학원에서 다시 만났는데 달라진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본고사를 치르고 난 뒤에 제가 데이트 신청을 했죠. 그때부터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입시에서 그녀는 붙고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같은 대학 같은 과 지원이었다. 그때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편입, 그리고 캠퍼스 커플

고려대 영문과에 지원한 것은 둘이 상의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각자 원서를 냈는데 우연히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지원했던 것이라면서 “집사람 머리가 좋은 거죠. 머리가 좋아요. 집사람이 연출한 연극을 보러 가면 천재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라고 그는 아내의 탁월함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한국 철조조각의 1세대 작가였던 고(故) 송영수 교수와 고려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사공정숙 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맏딸인 그의 부인은 세종대 연극영화과 교수다.

학생 때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논리적인 사고력은 그저 남들 수준이었지만 굉장히 감성이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심미적이었다. 그녀의 그런 성향은 전형적인 좌뇌형 사회과학도였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예를 들어 함께 영화를 보면 우리의 감상평은 확연하게 나뉘었는데, 대체로 사회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늘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끄집어내 재미있는 해석을 내리곤 했다. 나로서는 그저 새롭고 놀랍기만 한 우뇌형의 매혹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오세훈, <시프트>, 2009).

당시 낙방했던 그는 후기대학이었던 외국어대 법대에 들어갔다. 처음에 지원했던 영문과와 전공이 달랐다.

법학을 택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아버지가 법대를 나오셨는데 법조인이 못 되셨어요. 아무래도 그런 영향을 은근히 받죠. 평소 부모님이 하시는 말 속에서 나도 모르게 생기는 부모님 한이 다음 대에 투영되잖아요.”

그 뒤 고려대 법대로 편입했지요?

“대학에 들어간 그해 10·26이 납니다. 학교가 전부 휴교에 들어가니 할 일이 없잖아요. 그때 문득 편입 광고를 보게 돼 편입학원을 다니다가 시험을 봤는데, 고려대 법학과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편입은 쉽지 않습니다.”

편입은 3학년 때 하지 않나요?

“그때는 2학년 올라가면서 했어요.”

고려대 법대에 편입한 그는 영문과에 다니던 송현옥 씨와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어떤 회고담에는 “닭살 커플이었다”는 표현도 나오는데 이를 입증하듯 “오 후보는 대학 때 다른 여학생과 미팅도 안 했다”는 기사가 나중에 실리기도 했다(<조선일보>, 2006년 5월 11일).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 등 정치개혁특별위원들이 2004년 초 국회 정치자금법소위에서 정치자금법에 관한 헌법개정안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두 사람의 교제에 대해 송 교수의 친정어머니는 남자가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3∼4년을 지켜보시더니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저 친구는 고시를 붙건 안 붙건 믿을 수 있겠다고요.’”(<여성동아>, 2006년 5월호)

고시 공부는 언제부터 했나요?

“고려대는 (서울대에 비해) 발동이 늦게 걸립니다. 1981년 3학년 말, 미래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을 때부터죠.”

당시는 아직 운동권이 활발하던 시기가 아니었나요?

“아직 소요가 많지는 않았는데 엄혹하던 시기였어요. 전두환 정권 초기였으니 그때는 숨도 못 쉬고 삐라 뿌린다고 나서면 바로 낚아채이고. 막 역량을 비축하고 있던, 끓기 시작하던 시기였죠.”

운동에는 가담 안 하셨나요?

“모순에 대해 인식을 못 했던 것은 아닌데 워낙 엄혹하기도 했고, 제가 빨리 나가 돈을 벌어야 우리 집이 편다는 장남으로서의 중압감, 이런 것 때문에 대학시절에도 고시의 악몽에 시달렸죠.”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있었지만 눈 딱 감고 집안부터 생각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릴 때 아버지가 회사에서 손아래 동생뻘인 회장에게 깍듯이 존대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절대로 샐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고시공부를 하게 된 동기의 하나였다고 한다(오세훈,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 1995).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종기가 엉덩이 살갗 안으로 파고드는 것도 무시하고 눌어붙어 공부하다가 결국은 장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정도로. 그 결과 그는 1984년 사시 26회에 합격할 수 있었다.

햇병아리 변호사의 일조권 승소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사시를 통과한 그는 “사실 시험 운이 내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공부량이 훨씬 많았는데도 계속 떨어졌던 친구들을 보면 내 경우는 모든 것을 운수대통의 팔자소관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고 훗날 펴낸 에세이집에서 토로했다(<가끔은 변호사도…>).

운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후 그의 운세는 정말 승승장구였다. 격으로 보면 종살격(從殺格)인데 행운(行運)이 아주 좋다. 고시를 패스한 신랑감은 1등 신랑감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이미 대학 때부터 그를 사윗감으로 점찍었던 장모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법연수원 입소를 두어 달 앞둔 시점에 송현옥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넷이었고 동기 중에 제일 빠른 결혼이었다. 어쨌든 너무 이르다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고 신혼 1년간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림을 했다. 당연히 연수원에서 주는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다. 양가에서 얼마간의 도움을 받아야 어설프게나마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는데, 그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아내는 거의 매일 새로운 요리 하나씩을 준비했다.”(<가끔은 변호사도…>)

아내의 새 요리가 문제를 야기한 것은 기말평가 때였다. 저녁에 그녀가 만들어준 비지찌개를 먹고 토사곽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다음날 민사재판 실무시험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남들이 2년 다니는 연수원을 1년 더 다녀야 했다.

연수원 17기로 군에 입대했지만 법무관이 아닌 기무사의 행정장교로 가게 되었던 것은 그때 시험을 망친 탓이라고 한다. 1991년 제대한 뒤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들어온 사건이 당시로선 생소한 일조권(日照權) 침해 문제였다. 내용인즉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를 붙여 짓는 바람에 햇볕이 들지 않아 빨래도 마르지 않고 화초도 죽고 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하는 아파트 주민들이 건설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분명 억울한데 거물 변호사들이 다들 못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덤벼들었는데 자료도 없고 판례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추연(공해추방연합)이라고 최열 씨가 처음 만든 환경단체를 찾아갔어요. 뭐라도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해서 갔는데 완전 구멍가게예요. 영세하고 형편이 어려운 다락방에 자료가 있을 턱이 없고.”

그래서 일본어를 배웠나요?

“네, 일본 판례집을 뒤져보니 판례가 있어요. 그래서 일본 이론서와 판례집 등을 번역해봤죠. 그 소송 때문에 학원에 다니며 일본어 공부를 했어요.”(<월간중앙>, 2004년 2월호)

지금도 일본어를 잘하시나요?

“지금은 거의 다 까먹었지요. 일본어라는 게 그래요. 한자가 기본이 되기 때문에 한 달만 공부하면 독해가 가능합니다. 몇 달간 학원도 다니고 스터디그룹도 만들고 열심히 했지요. 실력이 늘어 당시는 일본 판례를 보고 논문도 쓰고 그랬어요. 법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본 판례를 많이 봅니다. 어학은 자주 써야 유지가 되는데 안 쓰니까 까먹게 되네요.”

일조권의 근거법은 뭐였나요?

“당시에도 환경정책기본법은 있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헌법상 쾌적한 환경을 누리고 살 권리라는 환경권인데, 판례가 나오기 전까지는 선언적인 명목상의 권리였지요. 그런데 제가 판결을 받으면서 명목상의 권리였던 환경권이 실질적 권리로 바뀌게 된 거죠. 판례사적 의미가 있는 판결이었습니다.”


▎오세훈 민선 4기 서울시장이 2006년 7월 3일 서울시청으로 출근하면서 꽃다발을 전달받고 인사하고 있다.

13억원을 받으셨던데?

“주민들이 받은 손해배상금이었죠.”

항소심까지 2년 반쯤 걸렸나요?

“네, 승소 판결이 나자 언론이 흥분했어요. 1면 톱으로 쓴 신문도 있었으니까요. 연수원을 갓 나온 신출내기 변호사가 국내 최초의 ‘환경권을 기반으로 한 일조권’을 인정받았다는 거였죠.”(<월간중앙>, 2004년 2월호)

스타 변호사

당시 그 사건을 1면 톱으로 취급한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그러나 그를 스타 변호사로 만든 것은 신문기사가 아니라 그 신문기사를 읽고 대상자를 프로그램에 불러들인 TV였다.

“기사가 나간 직후 MBC에서 출근시간대에 하는 10분짜리 시사뉴스 프로그램에 저를 불렀어요. 일조권이라는 게 뭔데 10억원 이상 보상을 받았느냐, 그 설명을 해달라고 해서 출연했더니 가능성이 있다면서 혹 방송할 생각이 없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을 취한 것은 당시 방송작가였던 김미라 교수(서울여대)였다고 한다.

“오 시장과의 인연은 1994년 그가 MBC 방송작가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생방송, 오 변호사 배 변호사>를 기획하면서 참신한 남자 변호사를 찾던 시절이었다. 국내 첫 일조권 소송을 맡은 오 변호사의 방송 인터뷰를 보고 연락해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목소리와 비주얼이 ‘딱’이었다.”(<주간동아>, 2009년 12월 15일)

당시 TV방송계는 교양 프로그램의 신뢰성과 심층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전문가 MC를 기용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전에는 주로 초대 손님이나 상담역에 머물던 교수·의사·변호사·음악가 등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프로그램을 직접 이끌도록 했는데, 이 같은 추세에 어울리는 인물의 하나로 오세훈 변호사가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행운의 시작이었다. 기적은 기적처럼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그에겐 행운의 큰 비를 몰고 올 바다 저편의 손바닥만 한 ‘엘리야 구름’이었던 셈이다.

배금자 변호사와 함께 <생방송, 오 변호사 배 변호사>의 진행자가 된 그는 법률상담뿐만 아니라 토론의 사회도 보고 문제상황을 재현하는 드라마에 대한 해설자의 역할도 매끄럽게 해냈다. 기존의 시사 프로그램이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남성 시청자를 겨냥한 것이었다면, 한 개인의 문제로 시작해서 법률적·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생방송, 오 변호사 배 변호사>는 여성 시청자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적중했다.

약간 허스키한 음성에 눈가에 웃음기가 감도는 친절한 모습으로 어려운 법조항도 예를 들어가며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는 그에게 특히 20, 30대 젊은 여성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미혼여성이 뽑은 가장 데이트하고 싶은 유부남 1위에 뽑히기도 했다.

인기인이 된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각종 광고였다. 아이스크림·건강식품·생명보험·골프웨어·속옷 등 다양한 광고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는 선별적으로 SS패션의 ‘로가디스’ 양복 광고를 선택해 CF를 찍었다. 짧은 광고 한 편에 개런티가 4000만원이었다. 부드러운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부터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얼굴, 변호사라는 고소득 전문직, 깔끔한 매너…. ‘젊은 귀족’이라는 수식어도 생겨났다. 그러자 항간에서는 질투 섞인 비난이 들려왔다.

“‘본업은 뒷전이고 여기저기 얼굴만 판다’ ‘얼굴 팔아 수임료 올리려는 것 아니냐’는 식의 안 좋은 얘기도 많이 듣는다. 법률과 시사 프로그램만 했는데도 ‘딴따라’ 취급하는 사람도 많다. 매일처럼 나가는 법정에서조차 ‘법정에 다 오실 시간이 있어요?’라는 인사말을 들어야 한다. 남들의 시선에 예민한 그에겐 이러한 것들이 때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한국일보>, 1996년 12월 4일)

그러나 그의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그래서 당초에는 “변호사 일에 도움이 될까” 하여 시작해보았다는 방송 일이 <생방송, 오 변호사 배 변호사> 뒤에도 KBS2의 <그때 그 사건>,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등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그 자신의 직업 자체를 바꾸는 계기로까지 발전한다. 왠지 선해 보이고 신사 같아 보이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와 인기를 필요로 하는 곳이 또 있었던 것이다. 정치권이다.

정치권의 접촉

그의 대중성에 주목한 것은 1995년 9월 5일 김대중 총재가 출범시킨 국민회의였다. 국민회의는 당시 네 자리가 비어 있던 서울지구당 위원장 자리 중 광진 을에 TV 출연으로 널리 알려진 30대 후반의 오세훈 변호사를 영입할 생각이었으나 검토 과정에서 추미애 변호사를 택했다.

운세로 보면 아직 때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 뒤 그는 1997년 가을학기를 숙명여대 겸임교수로 일했고, 1998년 1월부터는 방문교수 자격으로 미국 예일대학교에 가 있었다.

정치권에서의 기회는 1999년 6·3재선거를 앞두고 다시 찾아왔다. 당시 국민회의는 3·3 안양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관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당 경력과 인정에 끌려 공천하면 안 된다”면서 전문성과 참신성을 갖춘 ‘젊은 피’를 강조함에 따라 송파 갑에 젊은 후보군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공천 희망자는 송파 갑 지구당위원장을 지낸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TV시사 프로그램 사회자인 오세훈 변호사, TV 코미디 프로그램 사회자를 맡고 있는 고승덕 변호사 등 대략 3명. …오 변호사는 TV출연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졌다는 점이 주무기. 청와대 측은 신진인 오 변호사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지역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를 공천할 경우 또다시 중앙당이 나서서 3·30재보선 때처럼 총력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동아일보>, 1999년 4월 17일)

이런저런 이유로 국민회의는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자민련 측에 송파 갑을 양보했다. 이에 따라 자민련은 박태준 총재의 사위인 고승덕 변호사를 공천할 듯싶었지만 그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는 바람에 오세훈 변호사를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 변호사가 고사하자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낙점을 받게 되었다.


▎1 `2011 하이서울 자전거대행진`에 참여한 오세훈 서울시장(왼쪽 세 번째).

그게 다였나? 아니다. 2000년 봄에는 16대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를 앞두고 1999년 가을부터 다시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여야 동시였다.

당시 한나라당 영입창구는 남경필 의원이었지요?

“남경필하고는 제가 정치하기 2년 전 예일대에 가 있을 때 인연이 생겼죠. 그래서 영입창구로 나섰던 모양인데, 사실 남 의원한텐 뭐한 얘기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고요. 국민회의 쪽에선 정균환 사무총장이 공을 들이고 있었거든요. 몇 번 밥 먹자고 찾아오고, 이제 못 먹습니다 하면 차 한잔 주세요 하고 또 찾아오고. 그래도 안 갔는데 초선이 와서 보자고 하니 한나라당에선 저를 가볍게 여기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회창 총재가 전화를 하셔서 이분과 함께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던 겁니다.”

법조인 이회창은 그의 인생 모델이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전화도 있었다는 설이 있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정균환 사무총장이 영입작업을 벌이시고 대통령은 마지막 꼭지를 따는 작업으로 전화하셨던 거죠.”

그런데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때는 3김정치에 신물을 내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DJ는 바로 그 3김정치의 종착역 같은 존재였지요. 그에 비해 한나라당은 제정구 씨가 들어와서 이회창 총재와 정치개혁 작업을 한창 벌일 때라 이 양반하고라면 정치를 바꾸는 데 내가 일조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에 한나라당을 택했습니다.”

그 선택에 지역적 선호도가 작용했던 것은 아닌가요?

“그런 건 전혀 아닌 게 서울시에 들어와서 제가 호남 출신이라고 소문이 났어요. 무슨 소리냐. 서울시의 인사라는 게 한나라당 시장이 오면 경상도가 출세하고, 고건 시장처럼 호남 시장이 오면 호남이 득세하는 거고. 유명합니다. 공지의 사실이에요. 최근엔 민주당이 다수잖아요. 시의원들이 사석에서 이렇게 물어요. 고향이 호남이라면서요?”

그럼 원래 고향은?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경기도 용인이죠. 거기에 오씨 집성촌이 있어요. 지금은 영호남에 대한 인사편중이 완전 해소됐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서울시 인사정책은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강남 을에 출마했다.

초선의원

공천을 받기까지 그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이회창 총재를 만났더니 희망하는 지역구를 물었다.

“저는 상징적으로 이 총재의 지역구인 송파 갑을 맡고 싶다고 했어요. 그분이 원래 확약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어쨌든 알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얼마 후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송파 지역구를 3개에서 2개로 줄이면서 이 총재 지역구가 없어진 겁니다. 갈 데 없는 상황에서 한 달이 흘렀어요.”

“그런데 당시 무소속이었던 강남 을 홍사덕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지역구를 당에 반납한 거예요. 제가 홍 의원을 찾아가 강남 을에 출마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홍 의원은 냉정하게 거절하더군요. 당에 입당하면서 공천권을 당에 위임했으니 자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시더라고…. 충격도 받았지만 홍 의원이 참 훌륭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후 강남 을 공천이 제게 떨어졌어요. 그 과정은 잘 모르죠. 이회창 총재가 배려했을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죠.”(이상은, <월간중앙>, 2004년 2월호에서)

오세훈 변호사의 지역구가 강남 을로 확정되자 당황한 것은 여당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입에 공을 들이다가 한나라당에 빼앗겨 허탈감을 느끼고 있던 민주당은 그의 강남 을 출마가 확정되자 대항마를 찾는 데 부심했다. 전국정당을 지향하던 민주당으로서는 한나라당의 ‘강남벨트’를 허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상록 전 삼미 부회장을 영입했으나 고사하는 바람에 다시 ‘민병철영어학원’의 민병철 이사장을 영입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고생 끝에 ‘진주’를 찾아낸 듯한 분위기다. 한나라당 오세훈 변호사의 대항마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우선 인지도에서 오 변호사를 크게 앞선다는 분석이다. 특히 강남에서 16년간 학원을 운영해오는 등 탄탄한 지역기반이 득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서울신문>, 2000년 2월 23일)

그러나 어렵게 찾아낸 민병철 씨가 “전문가로 남고 싶다”면서 공천을 반납하는 바람에 민주당은 다시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 출신으로 서울대를 거쳐 런던정경대학원에 유학했던 이평수 씨를 공천해야 했다. 당시 민주당 조직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씨가 적극적이고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에 비해 나이나 경력 면에서도 별로 뒤질 게 없다는 판단을 했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지만, 정작 선거에서 뒷심을 보이지는 못했다.

강남이 민주당과 배치되는 지역이었던 데다 ‘오세훈 브랜드’를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는 59%의 득표율로 오세훈 후보가 압승을 거두었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환경노동위에 들어갔다. 지난날 일조권 문제로 자료 도움을 받기 위해 최열 씨가 조직한 환경단체를 찾아갔다가 그곳의 영세함과 열악함에 충격을 받고 오히려 그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서 환경운동에 가담해왔던 인연 때문이었다.

“법률상담으로 들어가서 환경운동연합의 집행위원 등 책임 있는 자리를 자꾸 맡게 되어 입법작업을 하는데 국회의원 한 번 만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때만 해도 시민단체가 힘이 있을 때가 아니니까 일종의 로비를 해도 되는 일이 없어요. 답답하고 열 받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내가 국회에 들어가서 직접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는 자신이 환경단체에서 국회에 파견한 전사(戰士)라는 기분으로 환경노동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임위에서 4년 동안 한 일은 세간에 크게 부각된 것이 별로 없다. 그의 전사적인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오히려 당내 소장파들이 결성한 미래연대의 당 정풍운동을 통해서였다.


▎2008년 12월 25일 오후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홍명보장학재단의 `하나은행과 함께하는 SHARE THE DREAM FOOTBALL MATCH 2008`이 열렸다. 희망팀으로 출전한 세훈 서울시장이 경기 전 팬들에게 볼을 선물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태영 선수.

정풍운동

그는 정풍운동을 벌이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 당에 들어오니 숨이 턱 막혔어요. 저도 사회 경험이 있고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제 논리는 깡그리 무시하고 다들 외계인 취급하는 겁니다. 회의할 때 한마디 하면 ‘모르면 가만히 있어’ ‘현실정치는 그게 아니야’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죠. 모든 사안을 지역주의 정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처음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제가 자중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스타 출신 정치인들은 뭔가 튀려고 하고,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초조감 때문에 더 튀려고 하지요. 저는 그런 평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한마디하더라도 오세훈의 말 속에는 뭔가 진정성이 있고 무게가 있다는 평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라는 데 가고 오라는 데 오고, 동원도 되고 했어요. 점차 제가 동화되는 것이죠. 벽이 무너지면서 비슷한 사람이 돼가는 느낌…. 정치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런 위기감을 느꼈어요. 이때 가만히 있으면 저도 이 총재도 한나라당도 위기를 맞게 된다는 감이 생겼습니다.”(<월간중앙>, 2004년 2월호)

그래서 권오을·남경필·원희룡 등 소장의원들과 함께 미래연대를 조직하여 공동대표에 취임했는데, 동료 의원들이 총대를 메라며 그를 앞으로 밀었다고 한다. 국민적 스타인 데다 이회창 총재의 신임도 있으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면서.

미래연대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고 당권과 대선후보를 분리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오세훈 공동대표는 “이회창 총재가 당무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라며 “총재 주변 사람도 물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이회창 총재의 측근인 하순봉 부총재가 “배가 흔들리면 쓸데없는 쥐새끼들이 왔다 갔다 한다”며 정풍운동을 벌이고 있는 소장파를 비판했다.

미래연대는 발끈했다. 즉각 반박 성명을 내고 “당 발전과 정권교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충정을 하 부총재가 ‘쥐새끼’ 운운하면서 경거망동으로 여기는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당의 쇄신을 바라는 모든 분들의 힘을 모아 결연히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소장파들의 명분이 공감대를 얻으면서 당 내분이 더 확산되어갔다.

수세에 몰린 하순봉 의원은 “진의가 잘못 전달되었으며 당원 동지들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부총재직을 전격 사퇴했다. 그러나 미래연대는 그 정도로 물러서지 않았다. 미래연대의 일원인 이성헌 의원은 “이회창 총재는 대선후보로만 남아야 한다”며 당권·대권 분리를 촉구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회창 총재는 오세훈 공동대표를 가회동 빌라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서 오세훈 대표는 “지금은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총재님이 집권하시면 칼바람이 불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런 이미지는 결코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고 당권·대권 분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침내 이회창 총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당권·대권 분리를 선언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전격 수용했다.

5·6공 용퇴론

그 모든 것은 대선 패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길 줄 알았던 이회창 후보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했던 것이다. 1997년 이래 연패를 당한 한나라당은 사실상 패닉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새로운 참여정부도 떴다.

차츰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한 한나라당과 의원들 사이에서는 2004년 총선을 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조해진 당시 한나라당 부대변인도 김용갑 의원의 지역구인 경남 밀양·창녕에 공천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김용갑 의원이 2000년 재선에 도전하면서 “3선 출마 안 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평소 말을 번복하지 않는 분이라 모두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해 8월 21일 김용갑 의원은 천안에서 열린 당원연수회에서 총선 재출마를 강력히 시사했다(<신동아>, 2003년 10월호).

이 발언을 계기로 소장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부터 물밑에서는 한나라당이 지나치게 수구보수로 비쳐 대선에 졌으니 앞으로 총선을 치르려면 인적쇄신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라 불리던 소장파가 수구보수로 비친 ‘60대 이상의 용퇴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고, 뒤이어 오세훈 의원도 “용퇴론은 상향식 공천이란 제도에 안주하려는 일부 중진의원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나온 말”이라면서 “중진들이 끝까지 변화의 흐름을 외면할 경우 더 단호한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전의를 보였다(<경향신문>, 2003년 8월 29일).


▎2009년 중국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시를 방문 중인 오세훈 서울시장(맨 왼쪽)이 중국 관계자들과 함께 세계에서 제일 긴 인공운하인 경항대운하(京杭運河)를 둘러보고 있다.

이에 중진의원들은 서울 강남지역에 초선의원들이 많은 것을 겨냥하여 역으로 ‘강남 물갈이론’을 제기했다. 한편 노익장을 과시하는 당 원로들과 60대 당직자들의 골프모임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70kg 역기를 들어올리지 못하는 사람을 용퇴시키자”는 반발성 제안도 흘러나왔다(<세계일보>, 2003년 9월 1일).

최병렬 대표가 ‘60대 용퇴론’과 관련해 “재론하면 문책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수도권의 소장의원들은 중진을 물갈이하지 못하면 내년 총선에서 자기들이 죽는다는 절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당의 주축인 보수중진을 용퇴시켜 민정당 이미지를 걷어내지 못하면 수도권 총선에서 유권자의 절반이 넘는 20, 30대 젊은 층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60대란 민정계와 영남, 그리고 보수 이미지가 짙은 중진이다. 한 초선의원은 ‘핵심은 5·6공에 적극 협력한 인사들을 배제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한국일보>, 2003년 9월 1일)

오세훈 의원은 연찬회를 하루 앞둔 9월 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20여 년간 나라에 기여한 것은 인정하지만 건전하고 합리적인 보수를 위해서 5·6공의 탄생과 인권신장에 역행하는 역사적 과오에 핵심적으로 관여한 선배들은 용퇴해달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그러자 중진 모임에 주도적인 김용갑 의원은 “당이 해임안으로 단합을 과시했는데 분란을 일으켜 갈등을 조장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소장파부터 먼저 용퇴하라”고 역공을 가했다.

마침내 9월 4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가 열렸다. 물갈이론 공방은 소장파 의원들이 발언을 시작하면서 격해졌다. 이날 ‘5·6공 출신 의원 용퇴론’을 들고 나온 오세훈 의원은 “민주화 세대에게 한나라당은 5·6공 잔존세력에 불과하다”면서 선배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감이 끝나면 자기도 “지구당위원장과 당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한겨레>, 2003년 9월 5일).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강남 을 지구당 당직자회의를 소집하여 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당직인 청년위원장직의 사표를 당에 제출했다.

불출마 선언

그에 뒤이어 소장파의 박종희 의원이 “희생이 필요하다면 의원직 사퇴도 할 수 있다”고 힘을 보탰고, 권오을 의원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가세했다. 당은 벌집을 쑤신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이후 당내에서 교체 대상으로 거론된 인사는 5공 출범과 함께 군사정부에 참여하여 요직을 거친 인사 10여 명과 민정계 핵심 7∼8명이었다. 이 범주에 들어 있던 김용갑 의원은 기자회견을 갖고 “5·6공 당시 나의 역할에 자부심을 가진다”며 소장파 의원들이 제기한 ‘5·6공 인사 용퇴론’을 정면 반박했다.

그러자 오세훈 의원은 S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김용갑 의원이 보수세력의 이념적 화신인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면서 지금 상황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정당당하지 않다”면서 용퇴할 것을 다시 압박했다.

그러나 물갈이를 둘러싼 소요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유야무야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오세훈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세대의 정서를 선배들은 모릅니다. 5·17과 광주항쟁, 10·26과 12·12를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때 겪었던 세대를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는 불에 덴 상처가 있는데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한 후보가 노무현이었다고 말했어요. 한나라당에 대한 터질 듯한 적개심과 실망감, 그때 인권탄압을 자행했던 인사들이 우리 당에 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386세대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거죠.”(<월간중앙>, 2004년 2월호)

그 무렵 한나라당에 유입되었던 대선 불법자금이 사회문제화되었다. 오세훈 의원은 “천안연수원과 중앙당사를 매각해 그 돈을 갚자”고 제안했고, 남경필 의원은 “대선자금에 대해 지구당 위원장들도 책임이 있는 만큼, 재창당 수준의 당 쇄신을 위해 이른 시일 안에 모든 지구당 위원장들이 사퇴하는 게 옳다”고 밝혔다.

대선자금 유입 문제를 계기로 일단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중진 물갈이론’을 재점화하기 위해 원희룡·남경필·안상수·권오을·전재희·정병국 의원 등 7명이 오세훈 의원의 선례에 따라 잇달아 지구당위원장직을 사퇴했다.


▎2009년 2월 3일, 송파구 오금동 보인중·고교 주변 자전거 도로를 오세훈 서울시장이 자전거로 출근하고 있다.

2004년 1월 6일, 오세훈 의원은 전해 9월에 한 약속을 지켜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때까지 정계 은퇴 및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나라당 중진의원 10명에 뒤이은 11번째의 선언이었다. 선언 후 그는 “비슷한 성향의 판사·검사·변호사가 20년 뒤가 되면 검사는 깡패, 판사는 샌님, 변호사는 사기꾼처럼 변해 있다는 우스개가 있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비판했던 정치인들과 똑같이 동화돼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고 무력감마저 느꼈다”고 말했다(<한겨레>, 2004년 1월 6일).

오 시장의 일대기 중에서 불출마 선언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인데, 당시 정치를 진짜 그만둘 생각이었나요?

“그 진정성이 제 얘기 가운데서 묻어 나오지 않던가요? 정치에 대한 무력감·실망·좌절. 야당 초선의원이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정치를 바꾸러 들어왔는데 한 것이 없다는 죄책감, 이런 것들이 전부 어우러진 상태에서 한나라당에 5·6공 용퇴론을 제기했지요. 다음 대선도 5·6공 인사들로는 가능성이 없다는 절박감에서 했던 것이고요.”

그때 부인도 뒷심이 되어주셨나요?

“찬성했죠.”

어떻게 용기를 주시던가요?

“과정에서 의논을 하거나 하진 않고요. 판단이나 결정을 임기 말에 갑자기 한 것이 아니라 4년 내내 마음속에서는 뭔가 울분과 좌절이 쌓이면서 숙성이 돼가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한 것이죠.”

그의 불출마 선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전도양양한 초선이었던 데다 지역구 기반도 탄탄했던 터라 언론에서는 “신선한 충격”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기사와 사설을 다투어 실었다. 이로써 최병렬 대표가 주도하는 공천혁명도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불출마 선언을 전후해 그가 만든 정치자금법에 대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정치자금법 개정

불출마 선언 전이었지요, 정치자금법 만든 건?

“그렇게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불출마 선언 후에 만든 겁니다.”

그 배경은 역시 차떼기?

“시대적인 배경은 그게 맞는데요. 그보다는 당시 여야 간에 서로 개혁경쟁이 붙었던 상황이 더 직접적인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총선 두어 달 앞두고 3차 정개특위가 만들어졌을 때 저한테 칼자루가 쥐어진 거예요. 당시 최병렬 대표가 저를 부르시더니 불출마 선언을 한 네가 적임자다, 네가 맡아라 그래요. 그래서 저는 못 합니다, 제가 맡으면 아주 이상적인 형태로 할 건데 그렇게 되면 당내 반발도 있고 해서 쉽지 않을 겁니다. 전권을 주면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래서 맡게 되었는데 당시 여당 카운터파트가 천정배 의원이었어요. 제가 굉장히 이상적인 형태로 하자고 하니 그분도 자빠지는 거예요. 그렇게는 못 한다고. 그렇게 3주 정도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죠. 그러자 진보언론 쪽에서 이런 개혁적인 법을 한나라당은 하려고 하는데 개혁정당이라는 민주당이 안 하려 든다는 비판기사가 나왔어요. 과격하게 제안해놓고 조금 다듬으려고 했는데, 그 같은 협상 과정이 생략된 채 초안이 그대로 통과되어버린 겁니다.”

일명 ‘오세훈법’으로도 불리는 새 정치자금법은 정당 후원회를 금지하고, 기업 등 법인의 정치 후원금 기탁을 금지하며,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 상한액을 연 1억5000만원으로 제한한 법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모금액이 5분의 1로 줄었다고 불만들이었다. 그래서 몇 차례 개정이 시도되었지만 여론에 부닥쳐 무산되곤 했다.

그런 강력한 법을 만들게 된 배경은?

“제가 제일 자존심 상했던 게 정치인들이 일할 생각은 안하고 맨 사업가들 사귀러 다니는 거였어요. 2∼3년 하니까 감이 잡히더라고요. 공식이 딱 나와요. 선수를 늘려가면서 자기 말 잘 듣는 이른바 계보를 만드는 방법은 그 사람들한테 밥 사주고 술 사주고 골프 치고 해외여행 같이 다니고 하면서 내 사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밤마다 기업인들 만나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게 결국은 후원금 채우려는 거죠. 이게 금권정치지 바람직한 정치냐. 4년 동안 소신이었습니다. 칼자루가 있으니까 해버린 거죠.”

그 법은 혼자 만드셨나요?

“아니죠. 참모들이 도왔죠.”

‘오세훈법’을 만든 뒤 변호사의 본업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의정활동을 하고 남은 돈 중 1500만원은 환경재단에, 1000만원은 서울문화재단에 기부했고, 신문광고 출연료로 받은 3000만원은 장애 아동과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기탁했다. 이런 기부활동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 그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이야기는 엉터리입니다. 제가 조금 기부를 했더니 자꾸 정치활동으로 연결한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기부를 안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머니투데이>, 2005년 3월 11일) 불출마 선언조차도 서울시장 출마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부인했다.

실제 정치권을 떠난 그는 정치와 관계없는 분야에서 매우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느닷없이 철인3종경기에 출전하는가 하면 영화 <뫼비우스의 띠>에 출연하기도 하고, 국립발레단 해설을 맡는가 하면 새로 창간된 월간지에 인터뷰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도 세간에서는 여전히 그가 서울시장에 출마할 뜻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보냈다.

서울시장 출마

지방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한나라당에서는 지방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서울시장 후보에 맹형규·이재오·홍준표 등 3선의원급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선거지형은 행정수도 이전 논란을 계기로 확산된 반여(反與)정서가 굳어져 누구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기만 하면 서울시장에 당선될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재선에서도 박성범·박진·원희룡 의원이 속내를 보였고, 초선에선 진영·이종구 의원이 열의를 보였다. 이들과 함께 원외인사로 거론된 사람이 바로 오세훈 전 의원이었다.

초기에 그는 의향을 묻는 기자에게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그로부터 한 달 뒤의 여론조사에서 “서울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열린우리당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을, 한나라당은 오세훈 전 의원을 꼽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연합뉴스>, 2005년 6월 14일), 다시 8월 말 여론조사에서도 한나라당 1위로 나타나자 “사실 그런 여론조사가 나오면 나도 사람이니까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고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오마이뉴스>, 2005년 8월 31일).

그러나 그해 말쯤 그는 불출마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고, 당에서도 영입작업을 중지했다. 이에 따라 당내 경선은 ‘맹형규·홍준표 구도’가 확실시되었다.

그런데 사람 운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강금실 후보가 ‘보라색 돌풍’을 일으키면서 ‘오세훈 카드’가 다시 살아난다. 여론조사 결과 강금실(46.8%) 대 맹형규(33.8%), 강금실(48%) 대 홍준표(30%)로 나타나자 ‘강금실 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카드는 오세훈 전 의원뿐이라는 소장파의 주장이 먹혀들어갔던 것이다.

마침내 오세훈 전 의원은 4월 9일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그러자 일부 언론에서는 아무런 사과나 해명 없이 정치에 복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칼럼과 사설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선언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그는 열린우리당의 강금실 후보와 막상막하의 지지율을 보였다. 그를 출마시키는 데 앞장섰던 정병국 의원은 “우리도 그 정도로 나올지 몰랐다. 깜짝 놀랐다”며 고무된 표정을 보였다(<국민일보>,

2006년 4월 11일).

오세훈 후보를 찍겠다는 이유로 유권자들은 “잘생겨서” “이미지가 깨끗해서” “잘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주를 이루었다. 이미지 정치라는 비난이 당 안팎에서 일었다. 이에 대해 그의 부인 송현옥 교수는 “사람들이 남편에게서 ‘클린 이미지’를 봤다면 그것이 그에게 체화된 때문 아닐까요? 이미지는 날조한다고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세월을 거쳐 서서히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여성동아>, 2006년 5월호)라고 옹호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지는 결국 알맹이의 반영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정치 현실에서는 선거의 승리를 가져오는 필수요소라는 점이다.

‘오세훈 바람’이 일면서 박계동·박진 의원이 후보 경선을 사퇴했고, 이로써 당내 경선은 맹형규-홍준표-오세훈의 3파전으로 좁혀졌다. 본선은 몰라도 당내 경선은 맹형규·홍준표 후보 쪽이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공천 수뢰사건이 터지면서 행운의 여신은 다시 오세훈 후보를 도왔다. 당원들의 마음이 개혁 정치자금법을 만든 오세훈 후보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의 지지율이 강금실 후보와 슬슬 차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청렴성과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이미지가 비슷했지만, ‘오세훈 바람’이 ‘강금실 바람’보다 강했던 것은 열린우리당에 비해 한나라당 지지율이 높은 구도적 문제였다고 당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거기다 행운의 여신이 다시 도움의 손길을 뻗쳐왔다. 즉 5월 22일 찬조연설을 하기 위해 오세훈 후보의 신촌 유세장에 들렀던 박근혜 대표가 괴한으로부터 면도칼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이 피습사건은 밋밋한 지방선거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지지층의 결집과 부동층의 표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하여 오세훈 후보는 5·31 지방선거에서 61.6%의 압도적 표차로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문화시장과 문화도시

서울시정을 인수받을 때 공동인수위원장으로 환경재단 대표 최열 씨를 영입하셨지요?

“보수가 진보를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안아서 뭔가 화합적인, 통합적인 그런 인사운영을 통해 국민께 희망을 드리는 것이 좋은 메시지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발이 컸지요?

“보수진영 쪽의 반발이 컸지요.”

행정경험도 없었는데 어떻게 드센 서울시 공무원들을 통솔했나요?

“사실 처음에 굉장히 겁먹고 들어왔어요. 처음 하는 얘기인데 정말 긴장했어요. 하도 험한 소리들을 많이 하기에 바짝 긴장하고 들어왔는데 지내고 보니 정말 마음으로부터 도와줬던 것 같아요. 그동안 조직 내 저항을 수반하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문화일보>, 2008년 7월 3일)

저항이란 산하 직원까지 모두 6만6000여 명에 이르는 시청공무원 조직의 비효율성을 바로잡기 위해 무능공무원 3% 퇴출제를 실시한 것에 대한 반발을 가리킨다. 당시 그는 서울의 균형발전과 문화·관광 등을 통한 경쟁력 강화, 대기환경 개선 등을 시정목표로 내놓았다. 그는 마거릿 대처 총리가 취임 후 첫 각료회의에서 실업과 침체에 빠진 영국 경제의 탈출구로 “디자인 아니면 사표!(Design or Resign!)”를 외쳤던 사례를 인용하고, 다시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구호를 “바보야, 문제는 문화야(It’s the culture, stupid)”로 패러디하여 디자인과 문화를 강조하기도 했다(<시프트>).


▎2009년 개장을 앞둔 광화문 광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

한강에 나가보니 잘해놓았던데 문화시장·문화도시 콘셉트는 오 시장 자신의 발상이었나요?

“문화는 시민들의 삶의 질도 올리지만 도시경쟁력을 높이고, 경제적 활력까지 만들어낸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

“정치를 그만두고 2005년 <우리는 실패에서 희망을 본다>라는 공저를 낼 때입니다. 이 책은 제가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펴낸 책이죠. 각 방면의 괜찮은 콘텐츠를 가진 교수님 7∼8분을 제가 섭외하고 주제를 나누어드리고 1년 가까이 토론하고 스터디한 결과 GNP 3만∼4만 달러로 가자면 대한민국 국가브랜드는 서울시가 만들어내고, 서울시는 문화와 디자인으로 브랜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비전과 전략을 설정하게 된 겁니다.”

디자인 서울 등 문화도시를 만드는 것은 좋은데 추진 과정에서 전시행정, 비용 과다지출이라는 비난도 있었는데?

“디자인 서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디자인 행정이란 몇 개의 건축물이나 하드웨어가 아니고 소프트웨어죠. 경관의 일관성과 다양성, 역사성을 추구하면서 몇 개의 디자인 원칙과 디자인 콘텐츠를 가지고 프로세스 디자인을 통해 내실을 채워가는 작업이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디자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치적 라이벌들이 디자인이라는 어휘에 착안해서 전시행정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거죠. 비용을 많이 썼다는 것도 음해에 가까운 얘기입니다. 디자인 예산은 서울시 전체 행정의 0.5%도 되지 않습니다.”

역사성을 추구한다고 했는데, 가령 청계천에 아이스크림 탑 같은 설치물을 한옥 정자로 바꾸면 어떠냐는 지적도 있던데?

“행정을 좀 이해하신다면 말입니다. 서울시 디자인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지 행정가들이 하는 게 아니죠. 그분들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역사성을 복원하는 거예요. 디자인이라니까 뭔가 현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반발하는 것이지만 역사성을 무시하고 디자인을 할 수 있겠어요? 그건 비판을 위한 비판입니다.”

그래도 인사동에 가보면 (전통거리로서) 역사성이 안 보이던데?

“디테일 하나하나를 비판하는 건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서울시의 디자인 원칙은 역사성이에요. 인사동·청계천·광화문 모두 최고의 설계자에게 설계 공모를 해서 하지 않았겠어요? 디자인은 공모를 해서 사회의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선정한 겁니다.”

최고면 오류가 없는가? 그 순간 나는 하버드대 출신의 수재들로 팀을 꾸렸던 케네디 행정부가 어떻게 몰락했는가를 그린 데이빗 할버스탐의 명저 가 문득 생각났다.

서울시정

광화문 광장이 국격에 맞지 않는다고 이어령 전 장관이 비판을 하셨던데?

“광화문 광장에 대한 많은 비판은 대개 왜 나무가 없느냐, 왜 세종대왕 동상은 그렇게 크고 고압적이냐 하는 두 가지로 집약되죠. 이어령 선생님이 표현하신 것에 이것도 포함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광장에 나무를 심으면 광화문·경복궁·북악산이 다 안 보입니다. 또 이순신 장군 동상이 그런 크기와 모양으로 서 있는데 세종대왕을 조그맣게 만들었다면 신하는 큰데 대왕이 작다며 난리가 났겠지요. 그런 모든 경우의 수를 놓고 만들었어요. 다 뜻이 있고 원칙이 있고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비판도 있던데요?

“그건 뭐 답할 가치를 느끼지 않습니다.”

광장을 원천봉쇄해서 왈가왈부한 일이 있지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광장을 폐쇄하자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폐쇄되었던 건 사실 아닌가요?

“중앙정부에서 경찰차로 둘러싸버렸으니까요. 경찰권이 산하에 있지 않으니 여러 경로를 통해 이건 잘못된 결정이다, 장례식 치르는데 왜 이걸 둘러싸서 감정을 건드리느냐 하고 여러 차례 건의를 했어요. 그래도 말을 안 듣더니 불통(不通)이라는 소리를 싸잡아들었죠. 행안부 장관하고 시민단체와 미팅을 주선했고요. 또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는 똑같은 실수하지 말라 해서 바로 서울광장에서 조문할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자료를 보니 그렇지 않은 기사들도 있던데요?

“좌파 쪽에서 그렇게 공격하는 거죠. 나는 찬성을 했어요. 행안부 장관한테 전화해서 청와대에 얘기해서 풀어달라고. 그렇게 한 걸 다 알면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매도하는 거죠.”

서울시의회가 서울광장의 사용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자 상위법에 어긋난다며 조례개정안 공포를 거부한 일이 기억났지만 시기적으로는 나중의 일이라 더 물어보지 않았다.

2009년도의 용산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당시 서울시 직원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성심성의껏 협상을 했습니다. 김영걸 제2부시장이 협상단장이었는데 1년 내내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도덕적으로 나쁜 집단이 되어가면서까지 협상 과정을 철저히 보안에 부쳤어요. 유가족 마음을 생각해서 철저히 피해자 편에서 협상했던 내용이 백서로 소상히 만들어져 있습니다. 언젠가 밝혀질 겁니다. 그때 보안유지를 하면서 철저히 유족 편에 서서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협상이 가능했지 만약 다른 정치 집단처럼 숟가락 얹고 편승하는 데나 신경을 썼다면 절대 타결이 안 되었을 겁니다.”

갈등의 현장을 피했다는 비판에 대해 오세훈 시장은 ‘유족의 마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비밀협상을 벌였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민선 5기 선거가 다가오면서 그는 ‘따뜻한 보수’를 내세웠다. 그러자 후보 경선에 나선 원희룡 의원은 “서민들의 삶에 너무 소홀했다”면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따뜻한 보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강남 오렌지 시장’이라고 봐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한국일보>, 2010년 2월 19일).

그러자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오세훈 시장과 원희룡 의원을 각각 ‘강남 오렌지’와 ‘양천 오렌지’라고 싸잡아 비판했다(<오마이뉴스>, 2010년 2월 26일).


▎2006년 6월 이명박 서울시장이 시청을 방문한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있다.

또 원희룡 의원은 오세훈 시장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프트(장기전세주택)도 서민용이 아닌 ‘중산층 로또’라고 비난했고, 강남·강북 격차 해소를 위해 추진되었던 뉴타운 정책이 잘 조정되지 않으니까 이를 중단하고 추가 재정도 마련하지 않았다고 공격했다.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보 경선에 나선 나경원 의원도 “시중에 ‘이명박이 청계천으로 성공하니까 오세훈이 한강르네상스를 한다’는 이야기가 돈다. 다음 대선을 위해 전시성 사업을 하는 거 아니냐”고 꼬집었다(<시사인>, 2010년 4월 19일).

가장 강력한 공격을 해온 것은 “생각을 바꾸면 사람특별시가 열린다”면서 오세훈 시장의 토건 중심 서울시정을 비판한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였다.

롤러코스터

이변은 없었다.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출대회에서 오세훈 시장은 68.4%로 경쟁자인 나경원 의원(24.9%)과 김충환 의원(6.7%)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나 본선은 쉽지 않았다. 천안함 정국으로 여당이 여유 있게 이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물밑에서 꿈틀댄 정권심판론의 정서는 간단치 않았다.

“그는 부인 송현옥 씨와 TV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10시 50분께 한명숙 후보가 4700여 표 차이로 역전했고, 결국 그는 다음날 12시 30분께 캠프를 방문해 ‘패색이 짙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공개발언을 남기고 공관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캠프 관계자들과 나눈 격려의 악수는 사실상의 작별인사였다. 오 후보의 측근은 ‘실제로 당선에 비관적이었고 민선 5기는 없겠다고 판단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강남 3구의 개표가 진행된 4시 15분께. 오 후보가 1500여 표차로 재역전했고….”(<한국일보>, 2010년 6월 4일)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4차례나 뒤집히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다. “한 후보의 막판 추격전을 힘겹게 따돌린 그는 결국 오전 8시가 다 돼서야 당선을 확정지었다. 두 사람의 득표율은 47.43%(오세훈)와 46.83%(한명숙)로 불과 2만6412표 차이였다.”(<세계일보>, 2010년 6월 4일)

2006년도 선거에선 서민의 아들 이미지가 강했는데 2010년에는 강남시장 이미지가 형성돼 고전했다는 설이 있던데?

“선거에서 진 쪽의 논리지요. 오히려 2006년보다 2010년 선거에서 강남·강북 편차가 줄었습니다. 통계를 봐도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25개 구에서 이긴 곳은 8개 구밖에 없었는데?

“강남부터 개표를 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겼을 겁니다. 막판에 서초 표가 나오면서 역전이 되니까 그런 오해를 하시는데 그건 한마디로 민주당 주장입니다. 지난 4년 동안 강남·강북의 격차가 줄었어요. 제가 취임하고 나서 재산세·공동과세·조정교부금제도를 도입해서 강남·서초·송파에서 거둬들인 세금 재원으로 비강남지역을 도와줘 15 대 1의 편차를 4 대 1로 줄여드렸습니다. 전 그 덕분에 이번 투표가 그렇게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의 차이일까? 당시의 신문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후보는 14.9%포인트 차로 이긴 관악 정도를 빼면 전 지역에서 오 후보를 0.1∼7.5%포인트 차로 이겨 고른 지지를 받았다. 오 후보는 서초와 강남에서 한 후보를 23∼25%포인트 차로 압도했다. 8%포인트 차로 이긴 용산 외에 중구·양천은 0.5%포인트 안팎의 차밖에 나지 않아 사실상 ‘강남 몰표’가 서울시장의 승패를 갈랐음을 알 수 있다. 오 후보에게 ‘강남시장’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경향신문>, 2010년 6월 4일)

서울시 구청도 25개 중 21개는 야당인 민주당으로 넘어갔고, 서울시의회도 106석 중 79석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시의회와 구청장 비율이 여소야대가 됐는데요?

“장수들을 다 잃은 고독한 대표 장수의 심정이다. 앞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써야 할 것이다. 가슴을 열고 대화를 하겠지만 큰 틀에서 원칙은 지키겠다.”(<한국일보>, 2010년 6월 7일)

그러나 여소야대의 정국은 쉽지 않았다. 그는 민주당이 장악한 서울시의회의 혹독한 견제를 받았다.

“제가 시장에 취임하고 나서 6개월 동안은 그분들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주일에는 저녁식사 5번을 다 시의원들 모시고 할 정도였어요. 선거 국면에서 생긴 오해들이 있잖아요. 디자인, 한강르네상스, 문화를 둘러싼 오해. 하나부터 열까지 색이 칠해진 상태에서 일부러 오해한 것들도 있고, 그런 것들을 벗겨내기 위해 6개월 동안 참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무상급식 조례였죠.”

무상급식은 진정성 문제

초등학교 무상급식을 추진한 것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었다. 서울시의회는 교육감이 추진한 무상급식 조례를 제정했다. 이에 오세훈 시장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며 시의회 출석을 거부하자 시의회는 그의 역점사업인 한강예술섬 조성과 서해뱃길 등 주요 사업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대신 친환경 무상급식 695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그리고 허광태 시의회의장이 의장 직권으로 조례를 공포하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했다. 그러자 오세훈 시장은 대법원에 조례안 재의결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시의회에 따르면 무상급식하는 데 연 700억원이면 된다던데?

“저분들 주장에 따라도 초등학교 2500억원, 중학교 1500억원, 도합 4000억원이 필요합니다. 그럼 700억원은 어디서 나왔느냐? 50%는 교육청, 20%는 구청이 부담할 테니 서울시는 30%, 곧 700억원만 부담하라는 건데 숫자로 착각을 유도하는 거죠.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오 시장이 몽니 부린다고 공격하기 위한 주장이고요.”

그는 무상급식보다 범죄와 폭력, 준비물, 사교육비가 없는 ‘3무 학교’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상급식을 전혀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소득 하위 30%까지만 하고 전면적인 부자급식은 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최대 쟁점의 하나였던 무상급식에 반대한 한나라당은 6·2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런 것을 계속 주장하면 손해 보는 장사가 될 것 같은데?

“인정합니다. 제 트레이드마크가 합리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무상급식 국면에서 냉정하고 전사적 이미지가 투영되면 개인적인 브랜드에 상당히 손상이 온다는 걸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더군요. MB 눈에 들기 위해 그런다,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기 위해 그런다, 시의회를 굴복시켜야 대선 꿈을 실현시킬 수 있으니 그런다, 중도사퇴의 명분을 쌓기 위해 그런다 등등….

“제가 진돗개처럼 끝까지 물고 가는 걸 보고 당황스러움에서 나온 구구한 해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민투표가 끝나는 순간 모든 오해는 사라지고 제 진정성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지금 서명을 받고 있지요?

“이미 41만8000명 이상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41만8000명은 주민투표를 성사시킬 수 있는 서울시 유권자의 5%다. 무효 표가 생기니 100만 서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대략 8월 10일쯤 실시될 주민투표에서 그는 자신이 이길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여론조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이 주민투표가 내년 선거를 앞두고 쏟아져나올 과잉복지, 무차별적 복지공약 시리즈를 억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봤다. 그는 서울시의 자립형·참여형·맞춤형의 ‘그물망’ 복지체계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걸 제대로 이해하실지 모르겠다”는 말을 두어 번 했는데,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복지는 지속 가능한 것이고 재원을 생각지 않는 복지는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는 언성을 조금 높였다.

“어느 나라는 망하는 줄 모르고 과잉복지 했겠습니까?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엔 저 같은 정치인이 없어서 그랬겠어요? 선거 때만 되면 표 이기는 장사가 없는 겁니다. 지금 보면 한나라당이 더 먼저 나서잖아요. 사회당만 복지정책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선 자민당이 한술 더 떴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계속 경고하는 겁니다.”

이미 화제는 무상급식을 주도한 시의회가 아니라 야당을 넘어 국가, 국제로 확대되어 있다. 그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대선출마에 대해 물어보았다.

(4월)하버드대 방문 중 대권 출마를 시사하셨다면서요?

“아까 무상급식이나 국가적인 화두, 앞으로 우리의 비전이 뭐가 돼야 하느냐는 질문에 담긴 것과 같은 종합적인 의미의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을 그렇게들 해석한 겁니다.”


▎강준식
가능성은 열어둔 채 요령 있게 핵심은 빠져나간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복지, 그리고 품격 있는 문화가 핵심 가치로 구현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았다.

정치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반보 앞서가는 통찰력으로 늘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가치인지 제시하고 그걸 설득해내는 작업, 그것이 정치라고 저는 그렇게 개념정리를 합니다.”

그는 세련된 인물이다. 대중의 열망과 현실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대중의 눈에는 그가 개혁적으로도 보인다. 탐욕은 없다. 그러나 1980년대의 시대상황을 비켜갔던 것처럼, “두 딸이 모두 대학 다닐 때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고 정서적 동조를 보이면서도 논리적 결론은 반값 등록금을 반대한다는 식으로 그에겐 시대의 아픔을 비켜가는 모습이 있다.

그래서 맑음(淸)과 밝음(明)은 보이는데 도타움(敦)과 너그러움(寬)은 잘 보이지 않는다. 승기가 강하니 앞날은 힘찰 수도 있다. 그러나 당내 경선의 어려움 등을 감안할 때 그의 가능성을 점치는 정치 옵서버들은 많지 않다. 지지율은 현재 여권 2위다. 그의 관운 또는 무운을 빈다.

■ 강준식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동아일보> <뉴욕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김우중의 대도전> <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