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선박왕’ 권혁의 엇나간 야망

한때 250여 척의 배를 거느리며 해운업계 1인자로 군림했던 그가
부도덕한 ‘탈세왕’으로 몰리는 이유는?


▎해운업의 급성장 배경에는 ‘선박금융’이 있다. 부산항 외항에서 접안할 선석을 기다리는 컨테이너선과 화물선.

시도상선 권혁(60) 회장.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거의 ‘유령인물’로 통했다. 철저한 은둔형 사업가였다. 언론에 등장한 적도 거의 없다. 그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 등에 응하면서 일반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금추징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다. 탈세 혐의로 수사의 칼날 앞에서 자기변호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도상선이라는 회사도 일반 국민에게 낯설었다. 도대체 어떤 회사고, 규모가 어느 정도이기에 추징당한 세금이 이처럼 거액인지 큰 관심을 끌었다. 탈세 사건이 불거지면서 회사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시도상선은 모두 170여 척의 상선을 보유한 거대 해운회사다. 그중 40%쯤은 직접 화물운송업에 운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대선(貸船, 선박을 빌려주는 것)을 했다.

그러나 해운업계에서는 규모를 따질 때 보유 선박 수는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해운회사의 규모를 비교할 때는 흔히 재화중량톤수(DWT)를 기준으로 삼는다. 예컨대 국내 컨테이너선 해운업계 ‘빅3’ 하면 현대상선(439만여t), 한진해운(360만여t), STX팬오션(345만여t) 순으로 꼽는다. 모두 DWT를 기준으로 해서 매긴 것이다. 그런데 보유 선박 수를 보면 오히려 STX팬오션(58척), 한진해운(47척), 현대상선(40척)으로 역순이다.

그렇다면 시도상선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DWT 기준으로 1085만여t이다. 이는 현재 운항하는 현존선뿐 아니라 건조 중인 발주선도 포함된다. 구체적으로는 현존선 495만여t, 발주선 590만여t이다. 전체 규모로 따져보면 대략 세계 13위 수준이다. DWT가 1000만t 이상이어야 세계 15위 안에 드는데, 한국인이 운영하는 해운사로는 유일하다. 국적 해운사 중에서는 대한해운(851만여t), SK해운(744만여t)이 그 뒤를 따른다. 국내 해운업계 2, 3위인 한진해운(671만여t)과 STX팬오션(696만여t)이 30위권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시도상선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시도상선은 다양한 선단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척수로는 가장 많은 자동차전용선(PCC:Pure Car Carrier)을 비롯해 벌크선·탱커·프로덕트선·케미컬선 등 거의 모든 상선의 종류를 망라한다. DWT 기준 선박 종류의 보유 비중을 비교하면 탱커·벌크선·PCC 순이다. 벌크선은 곡물·석탄·광석 등 마른 화물을 수송하는 선박이고, 정제한 석유제품을 운송하는 배는 탱커다. 프로덕트선은 액체화학물질을, 케미컬선은 술·사탕수수원액·알코올 등을 운송한다. 새로 발주한 선박의 비중은 프로덕트선·탱커·벌크선 순이어서 시도상선의 앞으로의 사업구상을 엿보게 한다.


▎권혁 시도상선 회장.
세계 13위 규모 회사의 자본금은 1억원

시도상선의 규모와 관련해 지금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자본금이 1억원이라는 것뿐이다. 그 외의 자산·매출·이익 등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시도상선은 비상장 개인회사다. 따라서 재무제표를 공개할 의무가 없어 회사 측에서 관련 사실을 밝히지 않는 한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권혁 회장조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만큼 관련 수치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뱃값·임대료·운임 등 해운업계의 주 수입원은 하루 단위로 오르내리는 특성이 있어 추정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해운업계에서는 시도상선의 회사 규모가 자산 5조원대, 연 매출 2조원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권혁 회장은 다만 회사의 부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은 있다. “170척 중에 부채만 40억 달러며, 이 중 90%가 엔화 부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산이나 부채가 같다.” 물론 이 말은 회사 형편이 추징세금을 낼 형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조금 ‘엄살’을 섞은 발언으로 보인다.

이를 짐작할 만한 근거가 없지는 않다. 자산 규모의 경우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중고 선박 가격을 적용해보는 식이다. 선박은 종류와 선형에 따라 가격 차이가 들쭉날쭉한 편이다. 해운 전문가 Y씨의 말이다.

“지금은 3000만 달러짜리 배가 2~3년 후에는 1억 달러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지금은 1억5000만 달러짜리 배가 2~3년 후 5000만 달러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해운이다. 2008년 해운업의 대폭락이 있었다. 그 후 선박 값이 대폭락했다. 다시 오를 때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천억원대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고발된 시도상선의 권혁 회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7월 25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 선박투자회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의 중고 선박 가격은 하락 추세를 이어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 시황이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로 인해 현금 확보가 다급해진 해운사들이 선박 매물을 쏟아내 선박 가격은 더욱 하락하는 추세다. 시도상선만 하더라도 2008년 초반에 신조선 발주분을 포함해 250척의 배를 보유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후 80여 척 정도 줄었다. 그사이에 줄어든 수만큼 발주를 취소했거나 선박을 처분했다는 말이 된다.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선박 가격은 가장 싼 선박 종류로 취급받는 벌크선이 12만~16만DWT 전후의 케이프사이즈(Capesize) 한 척에 4000만 달러 정도다. 이보다 조금 작은 수프라막스(Supramax) 역시 2600만 달러 수준이다. 원유 등을 운반하는 탱커는 1998년 건조된 8만~11만t급 아프라막스(AFRAMAX) 선형이 1850만 달러, 2005년 건조한 37K짜리 화학운반선은 2500만~2600만 달러,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LNG선은 보통 벌크선의 두 배가 넘는다.

해운업 시작한 것은 거의 ‘운명적’

권혁 회장의 성장 기록을 보면 그가 해운업을 하게 된 것은 거의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전쟁둥이다. 주민등록상으로 1950년 6월 29일생이다. 대구 수성구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사여서 집안 형편은 상류에 속했다. 부잣집 아들로 별다른 굴곡 없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래 중에서는 몸집도 남달리 굵어 골목대장 노릇을 도맡았다고 한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대구의 명문인 경북중학교를 거쳐 1969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특히 중학교 때는 전교 학생회장을 했을 만큼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는 애초 의대 지망생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의대 입학원서까지 썼지만 어머니가 찢어버리며 말렸다. “의사 인생은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진로를 바꿔 들어간 대학이 연세대 상경대였다. 1974년 9월 이른바 ‘코스모스졸업’을 하고 처음 입사한 직장이 하필이면 해운회사였다. 고려해운이 그곳이다. 그러나 그의 해운업과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이 선박의 입출항과 선적서류를 만드는 일이었다. 일 자체가 단조로웠다. 늘 책상머리에 붙어 있어야 했다. 성격 탓에 뭔가 활동적인 일을 원했던 그에게는 따분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는 회사업무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그러던 1977년 그에게 회사를 옮길 기회가 찾아왔다. 현대그룹 사원공채 모집공고가 눈에 띈 것이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현대종합상사를 지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입국 정책이 한창 꽃을 피우던 당시 종합상사는 최고 인기 직장이었다. 당시 10개 안팎이던 종합상사는 대부분 재벌의 계열사로, 해당 재벌의 수출을 거의 독점하던 창구였다. 그래서 모든 입사 지망생이 선망하는 기업의 꽃이었다. 1979년 그는 입사시험에 당당히 합격했고, 우리 상품을 들고 전 세계를 누빌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운명은 그의 꿈을 또 한 번 비켜갔다. 현대종합상사 근무는 잠깐이었고, 현대그룹 차원에서 재배치받은 회사가 하필이면 현대자동차였다. 주어진 업무도 수출차 수송 담당이었다. 선적서류를 만지는 것이 싫어 전 직장을 탈출했는데 또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짧게나마 해운회사에 근무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 그 업무를 12년간이나 했다. 그의 인생이 뱃전에 묶일 수밖에 없는 ‘팔자’ 타령이 나올 만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그에게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

그가 현대자동차 입사 초창기에 주로 매달렸던 일은 PCC를 빌리는 일(용선)이었다. 1975년 개발한 국산 첫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는 이듬해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수출을 시작한다. 그리고 신화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현대차의 수출량은 하루가 다르게 신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수출 차량을 실어나를 PCC가 단 한 척도 없던 때였다. 불가피하게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의 PCC를 빌려 운송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업무는 당연히 그에게 맡겨졌다. 과거의 경험뿐 아니라 일본어를 잘하는 덕분이었다.

현대차로서는 PCC 확보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런 상황에서 PCC 확보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도 했다. 현대차에서는 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에 의뢰해 PCC 발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화주(貨主) 입장인 현대차에서는 권혁이 주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오랫동안 관련 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가 선박 건조와 인도·운용·관리 메커니즘을 알게 되는 계기였다.

그러던 중 1988년 1월 그는 일본 도쿄지사로 발령을 받는다. 현대차의 일본 시장 조사담당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자동차에 관한 한 일본은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서가던 선진국이었다. 그에 비해 현대차는 이제 막 수출을 시작한 신출내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시장을 뚫고 우리 자동차를 판다는 건 시간과 인력의 낭비일 뿐이었다. 본사의 판단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1년여 만에 일본 지사는 문을 닫았다.

그가 새로 발령받은 곳은 인도네시아 지사였다. 그가 파악한 바로는 당시 인도네시아 시장은 또 다른 이유로 희망이 없었다. 그 상황을 곧이곧대로 회사에 보고했다. 그는 애초에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돌려 말하는 성격이 못 됐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지만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는 상사들의 귀를 거슬리게 하기 마련이다. 그때 상사와의 마찰로 그는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90년 7월 그는 현대차를 떠난다.

회사를 그만둔 그는 일본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았다. 그가 그동안 ‘배운 도둑질’은 선박 관련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사업거리를 찾는 데 몇 년을 허송세월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마루베니상사는 그가 자주 들락거리던 회사 중 하나였다. 특히 그 회사의 선박 팀에는 자동차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친분을 쌓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마루베니를 찾은 어느 날 그동안 업무관계로 도움을 주고받던 지인이 예상치 못한 사업 아이디어를 귀띔해주었다. 일본에서 나오는 중고 PCC를 구입한 뒤 수리해서 다시 그 선주에게 대선을 한다면 괜찮은 사업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를 솔깃하게 한 제안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배를 빌려 쓸(用船) 화주만 확보하면 이를 증서로 삼아 선박 매입자금을 100% 빌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로서는 당시 엄두도 못 낼 거액이었다. 잘만 하면 인생의 전환점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발전을 거듭해 수출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덩달아 PCC 수요도 폭증했다. 해운업의 성패는 배를 빌려 쓸 화주의 확보 여부가 좌우하게 된다. 그것도 장기 용선이라면 그 사업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현대차 재직 시절 업무상 관계가 깊었던 현대상선을 찾아갔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배를 사용하는 정기 용선(TC) 계약을 해주면 일본에서 PCC를 확보해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렇잖아도 배가 부족했던 현대상선으로서는 그가 구세주였다.

7~8년 걸린 사업 정착기에 PCC 30여 척 확보

권혁에게 투자를 약속했던 마루베니 측은 그를 상대로 네 번에 걸쳐 면접을 실시했다. 성실성·추진력은 물론이고 예의 등 인성까지 그의 모든 것을 꼼꼼히 시험하는 혹독한 과정이었다. 심지어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면접의 일부였다. 현대상선의 정기 용선 보증서를 믿고 마루베니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마루베니의 사무실 한편에 책상 하나를 놓고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1993년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해운사업의 전망이 서자 그는 시도상선을 설립한다. 앞서 말한 대로 자본금은 1억원이었다. 그 돈을 마련한 배경에는 권혁 부부의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현대차 근무 시절 그는 서울 반포 인근에 작은 분식집을 낸 적이 있었다. 만두와 국수 등을 파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주로 부인이 일했지만 권혁도 퇴근 후에는 가게로 달려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도왔다. 부부는 저축 목표액을 정하고 분식집을 해서 남는 이익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저축 목표를 단계별로 몇 번씩이나 수정해가면서 마침내 모은 돈이 1억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도상선은 마침내 일본에서 첫 출항의 돛을 올렸다. 권혁 회장은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개인이 배를 직접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적 선사들이야 정부 지원을 받았지만 개인이 수억 달러를 빌리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마침 일본에서 돈을 대주겠다는 말이 있어 건너갔다.”

그는 사업 시작 후 PCC 중심으로 회사를 운용했다. 그가 운용하는 PCC의 특징은 선원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일본이 선원 인력난을 겪는 것을 간파한 그의 사업적 혜안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화주였던 현대상선의 비위를 맞추려는 목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외국인 선원보다 함께 일하기가 편하기 때문이었다. 권혁의 이 전략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비용·서비스 품질을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신용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현대상선이 시도상선으로부터 10~15년씩 배를 빌리는 장기용선계약(COA)을 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 후 시도상선과 현대상선은 장기용선계약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갔다. 현대상선과 장기용선계약은 시도상선을 탄탄대로에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장기용선계약은 그 자체가 은행 대출을 할 때 보증서 역할을 한다. 이를 들고 가면 선박 건조자금을 쉽게 대출받을 수 있다. 그는 이를 활용해 2000년을 전후해 PCC 30여 척을 보유하게 되었다.

권혁에게 또 하나의 행운은 엔캐리(저금리로 대출한 엔화자금)의 활용이었다. 일본에 본부를 두고 시작한 사업이었기에 엔캐리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다. 엔캐리의 장점은 1~2% 수준의 낮은 이자율이 특징이다. 그런데 해운업의 주 수입원인 운임은 달러화 결제가 일반적이다. 달러화로 약세인 엔화를 사서 부채와 이자를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엔캐리는 기본적으로 이자율이 낮아 경쟁력이 있는 데다 달러화와 엔화의 환율 차이로 추가 이익이 발생하는 이중 수익구조가 형성됐다. 이 경험은 그가 후일 엔캐리 선박투자의 대가로 성장하는 출발점이었다. 회사 설립 후 이때까지의 7~8년이 시도상선의 사업 정착기에 해당한다.

‘수퍼 사이클’ 시기에 대대적 선대 확대

1997년 한국의 IMF 외환위기는 온 국민에게 엄청난 시련이었다. 대부분의 한국기업도 자금 조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권혁과 그의 회사는 또 한 번 도약할 기회를 잡는다. 2000년을 전후해 시도상선은 100억엔(약 7600억원)에 달하는 선박 건조자금 차입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자금으로 한꺼번에 10여 척의 PCC를 국내 조선사에 발주한다. 당시는 한 푼의 외화에도 목말랐던 시절이어서 100억엔을 국내에 들여오는 것은 ‘애국적 행위’로 칭송받을 만했다.

나아가 권혁 회장은 “2005년 이후 60여 척 3조7500억원어치를 한국에 발주했다”면서 한국 경제에 기여한 점을 강조한다. 세금 추징을 당한 후 그가 “시도상선이 한국에 기여한 공로를 알면 대통령이 상을 줄 것”이라고 큰소리쳤던 이유기도 하다.

이때 발주한 선박의 장기용선계약도 현대상선과 당겨 맺어두었다. 2002년 현대상선이 자동차운송사업 부문을 현대차와 발레니우스-빌헬름센(WWL)의 컨소시엄에 매각한 후 두 회사의 협력관계는 많이 느슨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 윈윈하는 좋은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는 3년쯤 후 끝나고 한국 경제는 대체로 정상을 회복했다. 9·11 테러와 닷컴붕괴 사태 여파가 진정된 이후인 2002년 무렵부터는 해운업계에도 봄기운이 찾아들었다. 해운업에서 봄은 기초 수입원인 운임이 오르는 것이 신호탄이다. 그러면 선박 가격과 임대료까지 덩달아 상승하는 것이 해운업의 특성이다. 이는 운송화물은 넘치는데 배가 모자라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해운회사든 화주든 선박 잡기에 혈안이 된다. 배를 확보하는 것이 곧 돈 버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배 가진 사람이 그야말로 왕 대접을 받는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화물선.

해운업계에서는 호황기를 ‘빅 사이클’이라 부르는데 지난 50년간 모두 다섯 번의 ‘빅 사이클’을 경험했다. 특히 2004년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가 사상 최대 호황기였다. 그래서 해운업계에서는 이 시기를 ‘수퍼 사이클’이라 부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호황기가 유지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해운에 관한 한 동물적 감각으로 앞을 내다보던 권혁 회장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가장 공격적인 선대확장정책을 펼친다. 이때 시도상선이 늘린 선박만 100척이 넘는다. 시도상선으로서는 2008년까지가 대대적 사업 확장기다.

시도상선이 기존 자동차전용선 외에 컨테이너선·벌크선·탱커·프로덕트선·케미컬선 등 현재의 다양한 선박을 갖춘 것도 이때다. 권혁 회장은 새로 배를 지을 때 같은 조선소에 수십 척씩 대단위로 발주하는 사업전략을 구사했다. 그가 2004년 현대미포조선에 4만7000t급 탱커 40척을 발주한 것은 지금도 세계 해운사에서 미증유의 거대 프로젝트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선박을 무더기로 발주하면 자연스럽게 선박 척당 단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또한 배를 많이 확보할수록 우량 화주와 장기용선계약을 하는 데 유리하다. 이 시기에는 장기용선계약을 하면 선박 건조에 필요한 대출은 배값의 거의 100%를 받을 수 있었다.

권혁 회장은 이 시기에 금융 거래처도 일본 일변도에서 유럽·한국 쪽으로 넓히는 작업을 병행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환율 관리에도 지독할 만큼 신경 썼다. 일본의 해운회사들은 대부분 엔화 대출을 통해 선박 구입자금을 조달한다.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엔 차입금을 달러 차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은행 측과 달러화 헤징 계약을 따로 체결했다. 환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였다.

그는 한때 일본 은행들로부터 대출을 거부당한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독일로 날아가 현지의 한 은행과 거래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독일 은행은 그의 리스크 관리 방법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대출을 꺼렸다. 그는 독일 은행을 상대로 엔캐리 자금을 통한 리스크 관리 방법을 일일이 설명해줬다. 그의 해박한 환 관리 지식과 철저한 리스크 관리에 감탄한 그 독일 은행은 결국 거액의 자금을 대출해줬다.

그는 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일본 조선소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의 종합상사에서 은퇴한 유능한 인재들을 영입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시기에 확보한 선박을 세계 굴지의 해운회사에 7~10년씩 장기용선계약을 했다. 이는 안정적 수입원의 확보를 의미했다.

선박 임대사업은 배에 투자한다는 것만 다를 뿐, 그 기본 구조는 부동산 임대와 거의 흡사하다. 선박을 운항하는 대신 새로 짓거나 중고선을 구입해 5~10년 동안 장기로 해운회사에 빌려주고 임대료(Charterage)를 받는다. 이자와 배당수익 등 모든 비용을 미리 계산해 임대료를 책정하는 만큼 선박을 임대한 기간에는 운임이 떨어지거나 올라가는 것과 상관없이 매월 고정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위험은 배를 운용하는 해운회사가 책임지는 구조다.

이렇게 들어오는 고정수입으로 용선 기간이 끝날 때쯤이면 이미 투자원금과 이자는 모두 회수된다는 것이 해운업계 정설이다.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 역시 상당액을 갚은 상태가 된다. 결국 용선계약이 끝나는 시점에는 그 배는 온전히 투자자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투자자는 이 배를 팔아 시세차익이 생기면 추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해운업의 가장 큰 투자 수입은 배를 사고파는 데 따른 시세차익이다. 해운업계에서도 당연한 얘기지만 배값이 떨어질 때 샀다가 비쌀 때 파는 것이 큰돈을 버는 요령이다. 다만 배값이 오르고 내리는 시점을 정확히 예측하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앞에 말한 ‘빅 사이클’ 시기에는 배값도 덩달아 올랐다. 예를 들면 척당 3600만 달러에 발주한 배가 2007년 말에는 척당 6000만 달러 정도까지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한마디로 이 시기에 권혁은 돈방석에 앉은 것이다.

선박은 자동차처럼 낡으면 감가상각을 해서 가치가 떨어질 텐데 어떻게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을까?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우선 선박의 수명은 부동산만큼은 아니지만 보통 수십 년은 된다. 이 기간에 해운 시황이 좋아 운송하려는 화물에 비해 배가 부족하면 운임이 대폭 상승한다. 이때쯤이면 조선소도 이미 수년 치 일감을 수주해 건조 가격을 높이 부르게 마련이다. 더구나 배는 자동차와 달리 건조하는 데만 2~3년이 걸린다.

이런 조건을 감수하고 발주하더라도 배를 인수할 시점이 되면 이미 해운시장의 시황은 변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호황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비싼 값을 주고라도 중고선을 구입해 운항하는 것이 해운회사에는 이익이 된다. 많은 해운회사가 이런 자세라면 당연히 중고선은 품귀현상을 보이고,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중고선을 구입해 10년 이상 운용하다 되팔아도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는 이유다.

회식 자리에서 자장면 시키는 “짠돌이 회장님”

매각하지 않더라도 배는 자기 소유이므로 다시 임대해 추가로 수익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남은 기간의 임대수익은 모두 순익이 된다. 두 번째 임대기간이 끝나면 부채 없는 배 한 척이 거저 생기는 셈이다. 그 후에는 시세차익을 계산할 필요가 없어 배를 얼마에 팔든 모두 이익으로 남는다. 이런 점이 다른 업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해운업의 묘미다.

아무리 시세차익이 크더라도 차익을 얻으려면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선박 구입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따라서 해운업의 초고속 성장 이유를 시세차익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또 다른 비결은 ‘선박금융’이다. 해운업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레버리지(Leverage)’ 효과다. 레버리지란 한마디로 부채를 이용해 자기자본 이익률을 높이는 것이다.

해운업은 이러한 레버리지 효과를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분야다. 해운사들은 대부분 배 구입자금의 20~30%만 자기자본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은행 대출을 통해 해결한다. 믿을 만한 화주가 선박을 장기 용선해 운항하겠다고 보증할 경우 100% 금융도 가능하다. 자기 돈 한 푼 없이도 전액 대출받아 배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해운업의 급성장 비결이 숨어 있다. 그만큼 해운업과 금융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혁이 해운업에서 성공한 이면에는 사업가로서 안목과 능력 말고도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권혁은 어렸을 때부터 엄한 부모로부터 ‘근면과 성실’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그는 지금까지 하루 5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 나머지 시간은 사업에만 온전히 투자한다.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잠시도 사업에 대한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주말에 골프를 칠 때마저 항상 대화는 시황 분석이나 미래 사업 구상과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시황 변화에 대한 정확한 예측력을 갖추게 됐다.

그는 신용 관리에도 철저하다. 그는 은행 대출금의 원금과 이자를 반드시 이틀씩 미리 지불했다고 한다. 혹 있을지도 모를 송금사고로 인한 연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를 통해 은행들로 하여금 시도상선과 자신을 최고의 고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협력업체에도 이 원칙은 적용해 심지어 브로커에게 지급하는 커미션조차 이틀 전에 줬을 정도였다.

권혁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으로 통한다. 술·담배는 입에 대지 않는다. 그 흔한 동문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출퇴근 때나 외부에 약속이 있어 나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지하철을 타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택시를 이용하는 것조차 그는 사치로 여긴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주로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데 기사 딸린 자가용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식사도 1만원짜리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자장면을 아주 좋아한다. 그가 자란 고향 동네는 중국인들이 밀집해 사는 거리였다. 중국 음식점이 널려 있어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락거렸다. 그때 길들여진 입맛 탓도 있었다.

그 자장면과 관련된 한 가지 일화가 사원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가 모처럼 회사 사원들과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있었다. 장소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참석자들은 평소 비싸서 먹지 못했던 요리를 맘껏 먹을 수 있겠다며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맨 처음 종업원에게 자장면을 주문했다. 물론 좋아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바람에 그 뒤로 이어진 주문은 회장님 눈치 보느라 자장면이나 짬뽕이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나중에 ‘회장님은 짠돌이’라는 뒷담화가 무성했음은 물론이다.

“집도 회사도 홍콩에 있다” 국내 비거주자 강변

권혁 회장은 1995년 부산에 시도상선(주) 한국법인을 설립했다. 선박 관리를 전담하는 회사였다. 나머지 법인은 모두 그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2002년 시도홀딩·시도탱커홀딩(케이만제도), 2004년 시도상선(홍콩), 2004년 유도해운(한국), 2005년 자동차운송서비스(홍콩) 등이다. 그리고 2006년에는 본사를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전한다. 그 이전 이유가 조세 피난에 있었다는 것이 해운업계의 정설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홍콩은 “개인 소득세는 월급에서 1% 수준이며, 16.5%의 법인세만 내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다른 수익에 대해서는 별도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4년쯤부터 일본에서 세무 압박이 와서 옮겼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결국 일본 당국이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개인 소득세 20억엔을 부과해 이를 납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때 그는 국내 비거주자로 사실상 인정받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 근거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은 이중과세부과금지협약에 따라 국내 비거주자로 보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번에 권혁이 국세청에서 세금을 추징당한 이유는 사실상 한국에서 회사를 경영했다는 의심 때문이다. 형식상 대리점 계약을 하고 있는 한국 법인이 본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연간 180일 이하 거주’라는 국내 비거주자 요건을 맞추려고 일부러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고의성이 있다는 게 국세청의 주장이다.

그는 당시 한국으로 본사를 옮기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한국에 배 한 척을 등록하면 평가가치의 5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국에서 사업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처럼 한국에서 부동산이 아닌데도 등기를 해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배다. 그렇지만 그는 최근 “이번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면 국적 선사를 설립하거나 혹은 부실업체의 인수를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권혁은 홍콩의 시도상선이 명실상부한 본사임을 극구 주장한다. “본사 집무실에서 의사결정을 다 내린다”는 것이다. 국세청이 “휴대용 저장장치(USB)와 구두지시 등을 통해 한국에서 회사 운영을 지휘해왔다”고 밝힌 데 대한 반론이다. USB 관련 시비는 권혁이 한국에서 회사를 직접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는 뜻이었다는 설명이다. 이에 권혁은 “노트북 들고 다니기가 무겁고 힘들어 USB에 챙겨 다니는 것도 문제가 되느냐? 한국대리점 직원들의 이름도 잘 모르는데 여기가 본사라니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다.

홍콩에 있는 집 문제를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홍콩에 모두 관사가 있으며 세 곳에서 산다”는 것이다. 홍콩 집이 장모 집 아니냐는 의혹이 일자 그는 한 기자에게 “홍콩 카울롱 하버사이드 타워…”라고 직접 주소를 불러주는 촌극도 벌어졌다. 그는 홍콩에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것을 밝힌 적도 있다. “2013년에나 나올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다.

권혁 회장과 국세청이 다투는 쟁점은 국내 거주자인가, 아닌가가 핵심이다. 그는 “비거주자 요건을 맞추기 위해 1년의 절반 이하만 한국에 머물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형식적 요건을 갖추었으므로 추징세금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검찰 수사 방향도 탈세가 아닌 리베이트 문제로 방향을 전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권혁 회장이 ‘탈세왕’으로 결론이 날지, ‘선박왕’으로 다시 명예를 회복할지 이제 최후의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