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行 직전에 만난 김준규 전 검찰총장

“나는 서울대 농법학회 출신…
온건 진보주의자지만 국가보안법은 필요하다”


김준규(56) 전 검찰총장과 인터뷰 약속은 공식 임기가 20여 일 남았을 때 정해졌다. 원래 김 총장의 공식 임기는 8월 20일까지. 하지만 검경 수사권 파동을 둘러싼 갈등으로 김 총장은 7월 4일 전격 사퇴했다.

“임기 중 하도 언론에 시달려 인터뷰에 나서기 두렵다. 그러나 저를 선의로 인터뷰하시겠다면 한번 고려해보겠다.” 그는 첫 통화에서 인터뷰 요청을 반쯤 승낙했다. “8월 말엔 미국 일리노이대학 어바나 샴페인(UIUC) 캠퍼스로 공부하러 떠나기로 결정했으니 만약 인터뷰를 한다면 공식 임기가 끝나는 8월 20일 직후가 좋겠다”고 그가 덧붙였다.

그는 통화 중에도 내내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약속한 8월 26일에 김 전 총장을 서울 장충동에 있는 서울클럽의 한식당에서 만났다. 2009년 청문회 당시 7500만원짜리 VIP 회원권을 소유했다고 시비에 올랐던 바로 그 장소였다. 저녁식사 시간을 서너 시간 앞둔 때라 식당 안은 한산했다.

인사말이 오가고 나자 그는 “어제 지인 모임에서 환송회를 해준다고 해서 술을 좀 마셨다. 숙취를 해소하려고 수영을 하고 나오는 길”이라며 웃었다.

임기 내내 외모(곱슬머리)와 취미(요트·승마·인라인스케이트)가 회자됐던 만큼 그는 리버럴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말투도 행동도 유연하고 거침없었다. 권력기관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조직 중 하나로 꼽히는 검찰에서 자신의 본성을 잃지 않고 27년을 지낸 이 남자. 주변 환경에 끄떡 안 할 정도의 옹고집이 있거나 주변의 눈치 안 보고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실제 그는 검찰 내에서 비주류로 통했다. 검찰 내 실세를 장악해온 TK라인도 아니고 강력 수사 라인도 아닌 법무부 국제 법무과장과 법무실장을 거친 ‘국제통’이다. 경기고와 서울 법대를 나온 사시 21회 출신이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조배숙 민주당 국회의원, 김영란 전 여성 대법관 등 주로 서울 법대 여자 동기들 중에 쟁쟁한 인물이 많다.

김 전 총장은 바로 아래 기수인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 후보자로 내정됐을 때 선배 기수들이 사표를 내는 관례에 따라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마음을 온전히 비웠을 때 그에게 ‘검찰총장’이라는 뜻밖의 기회가 왔다.

그 당시 검찰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다 자살을 했다는 큰 위기 앞에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거기다 천성관 후보자의 청문회 낙마까지 겹치면서 검찰의 위상은 더욱 추락했다. 권위적인 검찰의 기존 이미지를 깨고 변화된 검찰을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김준규 발탁’은 기존의 딱딱하고 위압적인 검찰 이미지를 깨기에 안성맞춤의 카드였다. 예상대로 김 전 총장은 초기부터 ‘검찰의 변모와 수사 패러다임 변화’라는 검찰 내부의 분위기 쇄신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5월 사법연수원에서 강의하고 있는 김준규 전 검찰총장.

“검찰이 공격도 많이 받고 망가졌던 시기였습니다. 검찰을 제 위치로 보내고 위상을 보여주는 일이 급선무였죠. 우선 검찰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검사의 수사는 형사의 수사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구체적으로 압박 수사, 별건 수사를 안 하겠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사답게 수사하자고 강조했죠. 임기 내내 젠틀맨십을 강조하면서 딱딱한 수사 방식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실패한 수사도 발표하라고 했고요.”

실패한 수사를 예로 드신다면 무엇이 있었습니까?

“부산저축은행 수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론이나 국민이 원하는 거물급이 안 나오니까, 당장 뭐라고들 했잖아요. ‘그 따위로 수사하니 그 모양’이라는 둥 비난이 쏟아졌죠. 예전 같으면 발표도 안 했을 텐데 저는 수사 패러다임을 바꿨으니까 없는 건 없다고 하라고 해서 ‘없다’고 1차로 발표한 겁니다. 비난을 면하려고 짜맞추기를 할 순 없잖아요. 부산저축은행 수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는 취임 초 검찰 인사카드에서 출신지와 출신 학교를 지우게 했고 중수부체제를 상비군에서 예비군체제로 바꾸기도 했다. 화상 시스템 구축도 검찰 개혁의 일환이었다.

초기 경직된 검찰의 수사 패러다임 변화와 분위기 쇄신에 힘을 쏟은 그는 취임 1년 만에 본격 사정 수사에 돌입했다. 청목회 입법 로비사건에 대해 야당은 국회 압박을 통해 정치권을 초토화하려는 무리수였다는 비판도 일었지만 그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면서 수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 후 한화그룹과 C&그룹 불법 비자금 사태, 오리온그룹 비자금 수사 등 정·재계 사정의 칼날을 멈추지 않았다. 임기 말에는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에 수사 인력을 200명이나 투입하는 등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수사 진행 과정에서 ‘김준규 검찰’이 과거보다 수사력이 떨어진다는 평도 나왔다. 그는 성급하게 결과를 바라는 풍토가 문제라고 말했다.

“수사 패러다임의 핵심은 돈 흐름 수사와 장기 수사입니다. 특히 돈의 흐름을 추적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걸 못 기다리고 자꾸 결과를 내놓으라고 하면 검찰은 예전처럼 압박 수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는 부산저축은행 수사도 2, 3년은 해야 다 파악이 되는 사건이에요. 숨어 있는 피의자들은 모두가 하루빨리 수사가 종결되길 바라겠죠. 검찰이 장기적으로 계속하겠다고 해야 그들이 손들고 나옵니다. 외국도 건당 보통 2, 3년씩 수사를 합니다. 그게 선진 수사예요. 저는 그 실험을 한 겁니다.”

그럼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는 어떻게 봅니까? 검찰이 일정 정도 강압 수사를 했다고 인정하십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는 답변 못합니다.”

검찰조직을 장악한 TK 인맥이 아니라서 개혁이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질문이 안 좋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루아침에 그걸 빼내기는 어렵겠지만 앞으로 그렇게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모든 인사기록에서 학교와 고향을 다 뺀 것도 그런 이유고요.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제가 검찰총장이었고, 장관은 호남 분이었고 민정수석은 TK 분이었으니 포지션은 치우침 없이 잘된 거 아닌가요? 굳이 답하자면 그런 면에서의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는 게 제 답입니다.”

진두지휘했던 청목회 수사나 부산저축은행 수사가 정치권의 견제나 압력을 받았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소신대로 수사하신 건가요?

“인터뷰 전에 미리 말한 대로 제가 맡았던 수사는 일절 답변할 수 없습니다. 방금 공직을 물러난 사람의 태도로서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당일 오전에도 이미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런 질문지로는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화를 냈던 그다. 기자가 미리 보내준 질문지에는 김 전 총장 임기 중에 했던 개별 수사의 질문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는 오후에 “그 질문들을 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인터뷰에 응했다.

‘검경 수사권 파동’

27년 검사생활을 마무리한 그의 퇴임은 결코 명예로웠다고 보기 어렵다. 검경 수사권 갈등으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스(검찰총장)가 사퇴했지만 국민의 시선은 싸늘했다. 검찰의 ‘제 밥그릇 지키기 시위’라는 혹평도 나왔다. 그는 사퇴 이후 퇴임식까지 열흘간의 공백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7월 4일에 사퇴 선언을 했지만 열흘쯤 있다 퇴임식을 했거든요.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어 집에만 있었습니다. 그사이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이러쿵저러쿵 저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도 착잡했어요. 그 뒤로는 좀 홀가분해져서 사람도 만나고 여유를 가졌죠.”

하지만 정작 그의 불만은 다른 데 있는 듯했다. 사퇴 소동을 둘러싼 ‘친위대의 반란’이다. 그의 사퇴 발표에 앞서 6월 29일 홍만표 대검 기획조정부장을 시작으로 대검 검사장급 전원이 집단 사표를 냈다. 그의 참모들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규정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수정 통과된 데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속내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검찰총장에 항거한 행위였다는 해석도 나왔다. 김 전 총장은 안팎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마침 사표를 낸 시점이 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홍보를 위해 외국을 순방 중인 시기였고 이런 이유로 “흐트러진 조직을 추스르기보단 자신의 위신을 더 챙겼다”는 비난이 쇄도한 것이다.

지금 돌아봐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보십니까?

“애당초 형사소송법 개정안의 결론은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요약하면 ‘경찰은 수사 개시를 할 수 있고, 검찰은 경찰의 수사 지휘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검찰도 법원의 통제를 받는데 경찰도 통제를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법적인 통제를 받는 유일한 길이 검사 지휘고 이게 세계 공통입니다. 이런 검경 수사권 조정은 이미 합의가 끝난 상태였어요. 그런데 상대방이 합의를 깼습니다. 합의를 깬 사람이 이득을 보는 게 맞습니까? 검찰총장은 법을 수호하는 사람입니다. 법이란 게 약속이고 합의인데 그런 합의도 못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법을 지키겠습니까?”

당초 검경이 합의한 검경 수사 조정권은 국회 법사위에서 법무부령이 대통령령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법무부령은 검찰과 비등하지만 대통령령은 검찰 위에 존재하는 권한을 갖는다. 검찰의 권한이 그만큼 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일단 합의한 약속을 변경했다는 데 화가 났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나기로 미리 결심했지만 마침 서울에서 열리던 세계검찰총장회의 때문에 사퇴 시기를 미뤘을 뿐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 있던 터라 사퇴를 표명한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준비해온 세계검찰총장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사퇴할 수 없었습니다. 전 세계의 검찰총장을 모두 초청해놓고 정작 개최국 검찰총장이 안 나가면 나라 망신 아닙니까? 그래서 시기를 놓친 겁니다. 대통령이 개회식에도 참석하는데, 사퇴해버리면 대통령을 모실 수도 없고, 참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국회 수정안이 6월 30일 통과됐는데 그때가 마침 한창 행사가 진행 중일 때였어요. 그래서 대변인을 통해 행사가 끝나고 월요일(7월 4일)에 입장 발표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입장 발표가 사퇴지 뭡니까? 그렇게 뒤로 미뤄지면서 제가 비난받을 요소가 생긴 겁니다. 국가적인 일이 우선이라 시기를 놓칠 수밖에 없었어요.”

사퇴는 본인의 결단이었나요? 모 고검장이 세계검찰총장회의가 진행 중일 때 김 전 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결단을 내리셔야 한다”고 종용했다는 말도 나왔는데요.

“사실과 다릅니다. 왜 그런 말이 돌았는지 내 참….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의지였고 사정상 시기가 좀 늦춰졌을 뿐입니다.”

사퇴 전후 이 대통령을 만나셨죠?

“세계검찰총장회의 때 오셨죠. 회의 끝나고 사퇴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대통령이 만류하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이제 막 공직을 끝내고 나온 사람으로서 대통령 이야기는 더는 안 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참모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솔직히 말해 그 상황에서 저는 고검장이나 일선 검사장들이 나서주길 원했어요. 그런데 일선 검사장과 고검장들은 가만히 있고, 제 참모들이 사표를 냈죠. 친위쿠데타가 적당한 말은 아니지만 제가 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검 참모는 총장을 지켜보고 보필하는 자리입니다. 제가 월요일에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얘기했는데 그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오버한 겁니다. 홍만표 대검 기획관의 사표는 이해합니다. 그동안 검경 수사권 조정을 위해 애썼고 좌절도 누구보다 더 컸겠죠. 하지만 나머지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론 납득할 수 없지만 그냥 제가 다 책임지고 사표를 반려하겠다고 한 겁니다.”

검사 27년

임기 중 일어난 ‘스폰서 검사’ 파동은 ‘김준규 개혁’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는 일부 미꾸라지 검사의 잘못된 행동으로 검찰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분위기를 억울해했다.

지난해 5월 일산 사법연수원 특강에서 “검찰조직만큼 깨끗한 곳이 없다”고 말해 검찰 내부에서도 파장이 일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검찰이 그렇게 깨끗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전반적으로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보도는 그 장소에 오지 않은 기자가 앞뒤 다 자르고 그 얘기만 따서 쓴 거예요. (손사래를 치며) 지나간 거 또 이야기하기 싫으니 더 이상 하지 맙시다.”

‘스폰서 검사’ 사건이 개혁에 걸림돌이 되진 않았나요?

“한두 사람의 나쁜 검사가 마치 전체인 양 몰아세우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그런 기사 보면 모든 검사가 부끄럽고 힘이 빠집니다. 접대받고 그러는 거 다 옛날 검사들 얘기예요. 요즘 젊은 검사들에겐 스폰서 문화가 없어요. 술을 마셔도 자기들끼리 호프집 가서 먹습니다. 옛날 얘기로 지금의 검사를 욕하니 신임 검사들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진상 조사한 결과도 보세요. 특검까지 갔지만 아무런 결과도 안 나왔잖아요.”


당시 내부에서는 징계 기준을 어떻게 세웠습니까?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일이 너무 커져 만나서 밥만 같이 먹은 검사도 징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사태를 극복해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선배 검사 입장에서 미안하고 답답한 일이었죠. 허름한 횟집에서 밥 먹은 걸로 징계한 건데 그러면 누가 검사를 하겠습니까? 다 나가지.”

마침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한 일간지에 ‘검사들이 떠난다’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조직에 회의를 품고 젊은 검사들이 줄지어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검사들이 쉽게 검찰을 떠나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직이 권력을 가져서 좋아 보이지만, 실제 공직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헌신이고 봉사입니다. 사법연수원 동기 변호사들은 좋은 차 타고 비싼 집 사는 거 보면서 남의 눈치도 많이 봐야 하고 좋은 차도 못 타는 검사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어요. 또 욕은 욕대로 먹지 않습니까? 저도 검사장 되고 나서 차가 나왔지만 부장 때까지는 제가 몰고 다녔어요. 그 보상이 저는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검사란 직업은 더 명예로워야 하죠. 그런데 세태가 공직의 명예심은 오간 데 없고 다들 깎아내리기에 급급하잖아요.”

27년 검사 시절을 돌이켜볼 때 개인적으로 검사 자질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생각하세요?

“고검장 그만두고 쉴 때 저를 한번 돌이켜봤어요. 그동안 제 스스로 굉장히 합리적이고 엄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쉬면서 생각해보니 굉장히 감상적인 사람이더라고요. 좋은 뜻에서는 전략적인 사람이고요. 검사라면 합리적이고 엄격해야 하고 그 모델이 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일반적인 검사 스타일과 달라서 겪은 충돌이나 힘든 점은 없으셨습니까?

“힘들었죠(웃음). 다르니까 충돌도 생겼고요. 더 이상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법대를 지망했지만 그의 몸속엔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듯하다. 가풍 때문이었을까? 그의 부친은 서울대 음대에 몸담았던 김형근 교수다. 음악계의 원로로 국내에서 베토벤 ‘열정’을 초연한 피아니스트다. 김 교수는 도쿄대 음대의 전신인 일본 우에노대학 음대를 나와 자비로 스위스 취리히에 유학할 정도로 엘리트 음악가였다. 그는 중등부 검정필 교과서를 처음 만든 인물로도 알려졌다.

부친께서 음대 교수를 하셨으니 시대 상황으로 봐선 꽤 부유한 가정형편이셨겠네요?

“교수 아들이니 유복하게는 살았습니다. 부친이 우에노를 나왔다고 청문회에서 친일파로 몰기도 했는데 조부께선 홍문관 교리를 하셨어요. 홍문관 교리란 게 왕자의 스승 아닙니까? 순종의 선생님이셨죠. 순종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왕이었다면 영의정까지 오를 자리였다고 할 정도였어요. 조부 시절에도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부친도 그래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우셨고요.”

보수냐, 진보냐의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묻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본인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보십니까?

“(잠깐 뜸을 들이다) 엄밀하게 보면 보수보다는 진보 쪽에 가깝습니다. 더 정확히 구분하자면 ‘온건 진보’쯤 되겠네요. 세상을 바꿔야 한다,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예전부터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진보 쪽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로 나뉘잖아요. 사회로 바로 뛰어들어 바꾸느냐, 일단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운 후 바꾸느냐 중 저는 후자 쪽에 가까웠죠.”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신정동 공터에서 야학을 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했던 멤버가 삼성전자 이인용 전무와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회장 등이라고 했다.

“그 야학을 ‘신정 모임’이라고 불렀는데 가수 김민기도 우리 멤버였죠. 지금까지도 그 모임이 유지돼요. 모두가 사회 요소요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어 뿌듯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학도호국단이 생기고 안기부 사람들이 학원에 돌아다니던 긴급조치 시절이었죠. 이 얘긴 잘 안 했는데…. 사실 제가 운동권으로 유명한 서울대 농촌법학회 출신입니다. 안기부에서도 저를 계속 따라다녔어요.”

대표적인 진보계 인물인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도 농촌법학회 출신이라던데요.

“유 대표는 학원 자유화가 된 다음에 나온 세대죠. 저는 긴급조치 마지막 세대고요. 우리 시절에 농촌법학회 활동은 더 위험했고 긴장감이 있었어요.”

스스로 온건 진보주의자라고 하시니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국가보안을 위한 형사법은 필요하다는 검찰의 공식 입장이 제 입장입니다. 더 이상의 개인 생각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임기 중 가장 힘든 점을 꼽으신다면?

“정치 공세와 언론의 왜곡 비난이었죠. 방어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사실을 약간 틀어서 비난하면 국민은 비난만 따라갑니다. 사실이 틀어진 걸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요. 예를 들면 ‘곱슬머리’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취임하자마자 검찰총장이 파마하고 다닌다고 비난했는데 사실 파마가 아니라 원래 제 머리가 곱슬머리예요. 이건 단적인 사례고 그 밖에도 수많은 왜곡 보도와 정치 공세가 있었죠.”

비록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질문은 자연스럽게 수사 얘기로 흘러가버렸다.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부터 C&그룹 불법 비자금 수사와 퇴임 직전 오리온그룹 비자금 수사까지. 임기 중 정계보다는 재계를 향한 사정 칼날을 세운 그의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치 수사보다 기업과 재계 비리에 힘을 실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제일 중점을 둔 건 부패 수사였어요. 숨은 비리와 신종 부패를 찾아내자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방산 비리 수사하고 교육 비리 수사하고 그랬던 겁니다. 그다음 주목한 게 예산 문제, 즉 나랏돈 빼먹는 사람이었어요. 국부 유출 범죄, 해외 비자금, 해외 뇌물 수사도 강조했죠. 해외 쪽은 그동안 우리 검찰이 국제수사체제를 잘 만들어놔서 이젠 힘이 발휘되는 시기입니다. 얼마 전에도 국내에서 몽골로 빼돌린 범죄수익을 환수했잖아요.”


▎인라인스케이트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김준규 전 검찰총장. 최근에는 자전거를 즐겨 탄다고 한다.

부산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 수사 같은 금융 비리 수사에도 열정을 보이셨죠?

“취임 1년 뒤 중수부가 다시 가동되면서 금융 비리에 주목했습니다. 금융 수사의 기본은 돈 흐름 수사예요. 돈 흐름을 추적해 비리의 시작을 찾아내는 거죠. 저축은행, 즉 제2금융권과 무허가 사채 또는 사채 쪽에서 흘러들어간 돈, 증권 조작 뒤의 돈줄, 상장 폐지 회사, 상조회사 수사가 모두 돈 수사죠. 그리고 저축은행 사태가 난 거고 거기에도 총력을 쏟은 겁니다.”

한화그룹 수사는 남부지검이 하고, 그보다 작은 규모인 C&그룹 수사를 중수부에서 한 이유는 뭡니까?

“외형만 보면 한화는 큰 회사고 C&은 망한 회사니까 큰 회사를 대검이 해야 된다고들 했지만 아닙니다. 범죄로 봤을 때는 C&이 훨씬 부패한 범죄였어요. 한화는 그냥 비자금이 흘러간 거였고 C& 비리는 더 큰 사건이었죠. 저축은행 수사도 처음엔 중수부한테 하라고 하니까 ‘무슨 저축은행을 중수부가 하냐’고들 난리더니 나중에 엄청 큰 범죄란 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도 있고 부산저축은행 수사는 앞으로 계속돼야 합니다.” (그와 인터뷰를 마친 3일 후 캐나다로 도피했던 부산저축은행의 로비스트 박태규가 자진 귀국, 수사가 진행 중이다.)

제2의 인생…

음대 교수인 부친의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받아서일까. 그는 경기고 시절 조소반에서 활동했다. 홍익대에서 주최하는 고교 미술 실기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실력도 있었다. 훗날 미대 진학도 꿈꿨지만 결국 법학도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안 하고 조소만 했어요. 나중에 공부를 따라가려니 힘들더군요. 미대 갈 생각도 잠깐 했지만 금세 꿈을 접었죠.”

집안의 반대가 있었습니까?

“집안 반대는 없었고 그냥 중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성적이 떨어지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열심히 한 거예요. 중학교 때 반에서 1, 2등을 도맡아 했는데 고등학교 때 조소에 빠지면서 46등인가로 떨어지더라고요.”(웃음)

부친이 피아니스트셨는데 미술 쪽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제가 손이 큽니다. 피아노를 했어도 되는데 아버지가 일부러 피아노를 안 가르치셨어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는 호기심이 많아 취미도 많다. 승마에 요트까지. 임기 중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한강변을 질주하는 모습이 발견돼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요즘은 인라인보다는 자전거를 탑니다. 스케이트랑 스키도 좋아해요. 청문회 때 나를 오렌지족으로 몰았는데, 뭐 그냥 승마장에서 승마 배운 거고, 부산에서 세일링 요트를 배워서 탄 거예요. 호화 요트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해본 겁니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바빠서 거의 음악을 못 들었는데 퇴임 후 집에서 칩거할 때 다시 음악 CD를 꺼내 들었어요.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의 ‘열정’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초연하신 곡이죠. 베토벤의 ‘황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좋아합니다. 주로 업 다운이 많은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죠. 남들 술 먹고 골프 칠 때 음악 듣고 취미생활을 했습니다. 창원지검 차장 할 때는 색소폰도 시작했어요. 대전지검장 하면서는 트럼펫을 잡았죠. 낮게 깔리는 색소폰보다 높으면서 더 맑은 소리를 내는 트럼펫이 좋더라고요.”

검경 수사권 반란 사태만 없었어도 그는 세계검찰총장회의 마지막 날 트럼펫을 불려고 했단다.

김 전 총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얼마 전 작고한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김준규 검찰총장은 중학생 주일학교 교사가 되겠다며 2년째 자원봉사를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인터뷰 이틀 전에도 그는 교회 장로 시험을 치르려고 막바지 공부에 한창이었다.

“미국 워싱턴 법무관 시절 운명처럼 믿음이 왔어요. 그전까지는 기독교에 의문이 많았는데 어느 날 성경책을 보다 거짓말처럼 그 의문들이 사라지더군요. 검사 시절 집 가까이에 있는 온누리교회에서 8~9년 동안 주말마다 청소년 자원봉사를 했죠. 하용조 목사님은 제 영적 멘토였어요. 가까이서 본 하 목사님은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었죠. 개인적으로는 기독교계의 김수환 추기경이라 생각합니다. 하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우울증 비슷한 게 올 정도였습니다. 힘들 때마다 항상 의지가 돼주셨던 분이었죠.”

김 전 총장은 앞으로도 종교적 삶을 충실히 이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주일 뒤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검찰을 나온 직후 곧바로 미국행을 결심한 배경은 뭘까?

“군대까지 치면 공직생활이 30년이 넘습니다. 6개월은 좀 쉬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검찰총장 한 뒤 곧바로 변호사 활동을 하면 후배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도 있고요. 검사장 시절 저도 전직 총장 선배한테 전화도 받아봤는데 부담도 되고 기분이 썩 안 좋더라고요. 국민의 시선도 그렇고요. 퇴임 후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은 총장 되고 1년째 됐을 때부터 했던 결심입니다. 미국에서는 형사법에서의 국제 협력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강의도 할 계획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주석도 달아서 연구 논문으로도 만들고 영어책으로도 출간할 생각이에요. 골프도 10년이나 안 쳤는데 공무원이라서 못해본 취미생활도 다 해볼 생각입니다. 6개월 후엔 와서 변호사 해야죠.”(웃음)

김 전 총장은 두 딸을 두었다. 큰딸은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동 대학에서 로스쿨을, 작은딸은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는다. 그의 미국행은 오랜만에 가족끼리 같이할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뜻도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검찰총장은 법을 수호하는 사람”이라는 김 전 총장의 말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아 “청문회 때마다 검찰총장들이 위장전입 문제에 시달리는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위 공직자 후보자를 죄인 취급하며 일하기도 전에 국민 앞에 사생활을 낱낱이 밝히는 청문회 방식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즉답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