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단점

철저한 중화사상에 젖은 양반들의 특권의식, 관료들의 부패, 민중의 ‘순종적’ 기질이 개혁을 외면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 중에는 한국인을 신뢰하고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의 단점에 눈감은 것은 아니었다. 서구인들은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정체되어 온 이유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쏟아냈다.1886년부터 1908년까지 한국에 머무르면서 교육과 언론 사업을 펼쳤던 호머 헐버트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잘 파악하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한국의 사대주의를 꼽았다. 한국인은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적인 기질과 합리성을 고루 갖추었는데, 이 훌륭한 기질을 발산시키지 못한 것은 한국이 ‘중화사상의 노예’가 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인에게는 냉정과 정열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평온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을 수도 있으며 격노할 줄도 안다. 앵글로색슨 민족이 그토록 강인한 것도 바로 이 두 가지의 상이하면서도 모순되지않는 기질이 융합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그와 같은 유별난 기질을 그토록 발산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중화사상의 노예가 되었으며 자주성과 독자성을 잃었던 것이다. (…)본성을 보나 능력 면에서 볼 때에 한국인은 고도의 지적 능력이 있는 민족이지만 천박하게도 남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행동한다.” _ 호머 헐버트


폴란드 민속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한국의 특권층과 관료제도가 한국의 발전을 방해한 가장 큰 이유라고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만성적인 병폐의 화신은 바로 관리와 양반이었다. 양반은 세습계층으로 유럽의 귀족처럼 모든 종류의 세금과 병무가 면제되는 특권층이었다. 노동을 경시하고, 경쟁과 위기가 닥쳐도 무사태평이고, 스페인의 하급귀족인 ‘히달고’(Hidago)처럼 격식만 차리고 오만하고 뻔뻔한 계층이었다.

서구인의 눈에 비친 양반들은 걸음걸이부터 달랐다. “매우 계산적으로 보폭을 크게 하여 느리게 움직”였으며 “우스꽝스럽게 몸체를 흔들며” 걸었다. 이들은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대체로 게을렀다. 체면과 자존심은 또 얼마나 센지, “육체노동같이 우아하지 못한 일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자살을 택할 것”이고,남에게 구걸하거나 돈을 빌려 쓰느니 오히려 굶어 죽는 편을 택할것이다. 남산 아래에는 이렇게 춥고 배고픈 몰락한 선비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부자들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먹고 자는데 소비한다. 내가 양반을 방문했을 적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을 먹고있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자연히 이런 종류의 생활은 상류층을 연약하고 다소 여성스럽게 만든다. 많은 남자가 감각적인 쾌락에 빠져 말년에는 완전히 파멸하게 된다. 과음하는 습관이 조선에서는 일종의 국민적 습관이며 과식이나 음주 및 다른 악습은 귀족들도 그다지 예외는 아니다. 조선 사람들은 매우 불규칙하게 생활한다.” _ 새비지 랜도어

늘 무언가를 먹거나 잠만 자는 특권층

한국의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관직 이외에는 다른 직업이나 삶의 수단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양반과 관료는 계급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고, 혈연주의와 한탕주의에 기초하여 사회와 정치의 만성적인 병폐를 초래했다. 군대에서도 관리의 착복과

뇌물이 만연해 군사력의 쇠퇴까지 불렀다. 특권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권과 구습을 고수하며 어떠한 개혁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의 민중은 잉여분을 생산해봤자 합법적·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빼앗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잉여분도 생산하지 않으려고 했다. 과거에 일본에게 예술과 과학을 전수해주었던 한국이 창조성의 불모지로 후퇴한 것은 수백 년간 이어져온 관료제의 병폐 때문이었다.

한국에는 예술가나 장인들이 대접받지 못하면서 예술과 수공업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외세 침략에 시달려온 한국은 이웃나라의 욕망과 탐욕을 부추기지 않겠다는 의도로 좋은 집을 짓거나 예술품·사치품을 생산하지 않았으며 애써 지하자원도 개발하려 하지않았다. 해안도시는 나무를 심지 않아 황폐한 채로 남아있었는데,이는 한국을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된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체제로 인해 한국인의 삶에는 초상집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깔려 있나 보다. 모든 것이 억눌려 있어 옆 나라 일본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나진취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인들은 사소한 변화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사회는 마치 오래 앓아서 욕창이 생긴 몸처럼 조금만 바깥바람을 쐬어도 바짝 움츠러든다. 사방에 불신과 의심이 만연해 있어 사적인 관계에서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공적인 문제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고의 폭은 사회 전체에 대한 넓은 성찰로 이어지지 못하고, 지식은 여전히 중국으로부터 전승되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고, 세계관 또한 전형적인 관료 선비의 메마른 유교적 기회주의 안에서 쪼그라들았다.” _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세로셰프스키가 보는 한국인들은 시종일관 어둡고 우울했다. 다른 서구인들도 한국의 관료주의의 폐해를 지적했지만 사회 분위기를 묘사할 때는 쾌활하고 낙천적인 면을 집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세로셰프스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어디를 가나 ‘초상집’ 같았다. 그는 한국사회가 관료제의 부패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예언했다.

젊은 시절, 황제에 대항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한 세로셰프스키는 다른 여행자보다 특권층에 대한 반감이 유독 컸다. 사실 개항 이후, 한국을 찾은 대부분의 서구의 여행자에게는 이미 한국의 특권층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반감은 시민혁명을 경험한 유럽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정신적 유산이기도 했다. 1세기 이전에 이미 귀족계급과 왕권에 맞서 싸웠던 유럽인의 관점에서는,한국사회의 특권층은 가장 전근대적이면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쳤다.

한국의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7년간 체류했던 조지길모어도 다음과 같이 특권층을 비판했다.“한국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 발전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양반들이다. 비록 그들의 재산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육체적인 일이나 생산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양반은 굶거나 구걸할지라도 일하지 않는다. 친척의 도움을 받거나 아내가 생계를 꾸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양반은 절대로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다.” _조지길모어



‘왕은 곧 국가’인 절대군주제에 대한 오해

한국의 구체제는 한국의 개항 이후 20년간 서양의 근대성 앞에 서서히 힘을 잃어 신성불가침한 왕권 개념이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당시 서구인들은 서구문명을 수용하는 한국의 군주제를 바라보면서 한국 왕실이 어느 정도 정부의 구실을 하는지, 이 구체제가 어떻게 서구의 제도와 가치를 받아들여 근대적으로 바뀌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아직 왕실과 정부의 기능조차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정부 기능이 수행된 적도 없었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한국 왕정의 정부체제를 논할 때 ‘민주주의’와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직 한국은 ‘입헌군주제’를 논하기에도 시기상조였던 것이다.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에서는 의회를 소집하여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개항 후 서양 의회의 외양적 틀을 수용해 1890년 11월, 처음으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일본 의회가 민주주의를 시도하며 성공한 듯 보이지만, 봉건제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민주적인 씨눈”(의회)을 신정체제의 유산에 접붙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민주’(Demon)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너무 흔하게 되풀이 되어 일본 정치의 봉건적 특질을 알고 있는 역사학자들에게 흥미거리가 되고 있었다.”한편 한국의 왕정에 대해 다소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길모어의 경우, 한국은 실로 ‘왕은 곧 국가’인 절대 군주제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고 보았다. 그 첫째는 군주의 개인적 성격과 의향이 시정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성이 복종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길모어가 보기에는 군주의 개인적 성향이 시정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유교가 지배하는 한국에서는 헌법이 있는 대신 통치자가 어겨서는 안 되는 전통적인 제약이 있어서 왕과 관리들이 범죄를 다스릴 때 불문법 같은 관습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도 한국의 군주제 내에서 정부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았다. 즉 백성이 원치 않는 정책에 대해서는 대중 집회 등을 통해 그 소식을 왕궁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 항의가 정당함에 기초해 있다면 왕실은 곧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만약 그 항의가 잘못된 것이라면 오해를 바로 잡으려고 거리 곳곳에 ‘방’을 붙인다(처음에는 정중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시작했다가 효력이 없으면 두 번째는 단호한 어조가 나타난다). 그래도 동요가 진정되지 않으면 그때는 군대가 투입되어 평화 파괴자는 체포된다. 일반적인 절대 군주제와는 달리 한국의 백성은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통치자와 피치자 간에는 어떤 ‘인간적인 양심’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나약한 ‘황제’에 대한 기억들

고종의 궁중 고문관으로서 궁궐 생활을 오래했던 윌리엄 샌즈는 특히 관직 임용에 혈연주의와 친분, 뇌물이 얽힌 사례를 빈번히 보았던 듯하다. 뇌물수수가 얼마나 극심한지 이와 관련된 고리대금업까지 등장해서, 지방 관직을 얻는데 필요한 돈을 빌려주고 한 달에 12%의 이자율을 받기도 했다.

관직을 얻은 사람은 이 경비를 마련하려면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었고, 이런 악순환이 한국 사회의 무질서를 불렀다. 관료가 되려는 사람들은 궁궐의 관리나 황실 친척에게 연줄을 대려고 혈안이 됐다.

황제에게 상납할 돈을 들고 직접 황제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운아’였다.“뇌물은 황제에까지 올라가는데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

는 것처럼 뇌물을 그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땅과 백성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왕은 곧 국가다. 모든 땅과 백성은 황제의 것이고, 모든 소득은 황제의 것이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처분된다. 관리들은 황제의 징세 청부업자일 뿐이다.” _윌리엄 샌즈

샌즈가 보기에 고종은 결코 진보적인 인물이 될 수 없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성품을 지녔으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고, 여전히 자신은 ‘백성의 주인이고 모든 것의 소유자’라는 의식을 떨치지 못했다.“(고종은) 점점 복잡하게 변해가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복잡해지는 것에 적응하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적절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으며 뿌리치려고 노력했던 세력들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고통받고 있었다.” _ 윌리엄 샌즈

샌즈가 고종을 알현할 때는 언제나 장막 뒤에서 부스럭거림과 속삭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둘러 싸여 있었고 혼자 있는 법이 없었다. 샌즈는 궁중 고문으로 일했지만 자유롭게 고종을 만날 수가 없었다. 고종을 알현하는 절차는 너무나 까다로웠다. 만약 샌즈가 궁궐 밖으로 나와 있을 때 콜레라가 유행하거나 어떤 끔찍한 참변을 목격했다면, 몇 달 동안 궁궐 출입이 금지되었다.

어느 날 샌즈는 고종을 만나 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중립화’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고종은 그의 말을 경청했으나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한 듯하다. 샌즈는 그날의 알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황제에게 자주 그리고 소상하게 내 소박한 계획을 역설했다. 그는 늘 점잖고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그 불쌍한 황제는 내가 수립한 그 계획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첫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의 골자는 자신이 백성의 주인이고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의사소통은 복잡했고 어려웠다. 왜냐하면 시종들이 그를 홀로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외국인과의 사적인 접견 자리조차도 그 뒤에는 모든 대화나 그 반이라도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의논했던 내용이 나중에 왜곡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몇몇 낭만적인 발루아(Valois, 프랑스의 왕조)처럼 그는 늘 국가의 문제를 털어놓지 않았다. 나랏일이 그를 지겹게 만들었다. 그는 잦은 하품을 섬세한 상아 손으로 가릴 때마다 솔직히 부끄러워하고 너무 졸리다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_ 윌리엄 샌즈

영국의 신문기자인 프레드릭 매켄지도 이런 고종의 유약하고 반개혁적 성향을 지적했다. 고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한 세력들 틈에서 시달려왔으며, 특히 1894년 황후가 시해된 뒤로는 마음이 더 심약해져서 매사를 의심하였다.

“왕은 자신의 대권 하나 말고는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대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몹시 노력했다. 그러던 중 그의 충신과 외교 고문들이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고 노력한다는 확신이 서자 끝내 반진보적인 집단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말았다.”_프레드릭 매켄지

매켄지는 한국에서 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하는 것은 왕 때문만이 아니라, 왕권을 견제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한국에는 영국의 ‘노르만’(Norman) 귀족처럼 국왕에 맞서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양반 귀족이 있었지만, 이들은 몇백 년간의 군주제 속에서 왕에게 대항할 만한 권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한국 특권층의 반개혁적인 성향은 당시 거의 모든 서구인이 한결같이 비난했던 부분이었다. 그리피스도 한국 귀족의 보수적인 성향은 한국 사람들이 극동에서 유교의식이 가장 철저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열강들은 왜 한국에서 무질서를 부추겼나

샌즈와 매켄지가 보기에, 한국의 개혁을 바라지 않았던 것은 서구열강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있던 외국인 고문관이나 영사들은 한국정부의 반개혁성을 방조하거나 오히려 부추겼다. 서구열강은 오히려 한국의 ‘무질서’를 원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간섭할 구실이 생겨야 계속 자신들의 국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외교관들은 영토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이권이라고 차지하려고 달려들었다. 이권을 따내지 못하면 본국의 지위가 땅에 떨어졌고, 이들은 무능한 외교관으로 찍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권을 독점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의 천연자원은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갔다.

한국에서 이권 외교의 치명적인 결과는 독립의 상실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샌즈의 눈에 한국은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독립을 잃을 게 뻔했다.“한국이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은 일본과 러시아간에 벌어진 경쟁 때문”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됐을 때, 유럽 국가들은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을 막기는커녕, 그 속에 뛰어들어 경쟁을 부추겼다. 저마다 ‘경쟁심과 질시’의 이권 외교 속에서 자신에게 떨어지는 뭔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샌즈는 이러한 과정에서 유럽 국가들이 오랫동안 다져온 제국주의적 속성을 보았다.

앞에서 한국 관료제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세로셰프스키도 서구열강이 한국에서 진정한 개혁을 바라지 않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서구는 유리한 이권만을 챙기고자 한국의 관료들을 추동하고 매수했으며, 훗날 한국의 분할을 위해서는 빈약한 정권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반동적인 성향의 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샌즈는 한국의 내정을 간섭하는 열강 중에 미국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샌즈가 보기에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나 다른 지역에서 영토 분할을 하는 방식의 ‘극단적인 제국주의’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특히 미국은 극동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음모나 야망을 품지 않았다.

1853년 미국이 일본을 ‘개방’시켰을 때 미국은 일본을 복원하는 데 오히려 도움을 주었고, 일본이 자진해서 문호를 개방하도록 해 좋은 평판을 받았다. 미국은 사업이든, 교육이든, 종교든 인도주의적 사명감을 갖고 있는 “신문명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주의자”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샌즈는 열강들 속에서 한국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중립화’라고 믿었다. 한국의 ‘중립화’는 한국 독립의 가장 큰 장애국가였던 러시아와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중립안을 “내가 애지중지하는 아들과 같은 것”이라고 회상했다.샌즈는 한국의 중립화를 위해서 행정 개선, 교육 진작 등의 개혁적인 정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한 개혁 의지는 일본의 무조건적인 반대에 부딪혔으며, 스스로를 자국의 ‘요원’으로 생각하는 서구열강의 고문관들에게 ‘악랄한 음모’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립화와 다국 평화 조약에 대한 희망은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공공연한 반대에 부딪혀 사라져 버렸다. (…)개혁에 대한 모든 희망은 그들 국가의 이익이 그것을 원치않기 때문에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적대감에 의해 사라졌다.왜냐하면 무질서는 간섭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었다.”_윌리엄 샌즈

한국사회의 개혁 세력에 관심이 높았던 샌즈와 매켄지가 구한 말의 역사에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까지 2년여 동안 활동한 ‘독립협회’의 해체였다. 독립협회는 어수선한 정세 속에서 토론과 집회를 통해 민주주의의 싹을 보였던 한국최초의 근대적인 단체였다. 매켄지는 서재필이 직접 쓴 글을 인용하며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나(서재필)는 우선 <독립신문>이라는 한글판 신문과 The Independent라고 하는 영자 신문의 발행을 시작했다. (…)국민들은 국자지(國子紙)를 열심히 읽어 발행 부수는 급속히 증가했다. 나는 매우 고무적이었으며 그것이 뭔가 좋은 일을 위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신문은 관리들의 극악무도한 부패행위를 중단시켰으며 백성들은 이 신문이야말로 그들이 지배자에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언로(言路)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종이 쪽지는 서울과 그 근교뿐만 아니라 전국의 벽지에까지 퍼져나갔다.한 구독자가 그것을 받아 보고 다 읽은 다음에는 이웃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문을 적어도 200명 이상이 읽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면서도 흥미 있는 일이다.”(프레드릭 매켄지)

가치 있는 통치 기구가 될 수 있었던 독립협회

매켄지는 <독립신문>을 발행한 단체가 어떻게 독립협회를 결성하게 되었는지 서재필의 목소리를 빌어 이렇게 적었다.“신문이 고무적으로 전파되자 나는 독립협회라는 한 토론회를 창설하(였다). (…)당초에 이 모임이 조직되었을 대는 5~6명의 회원만 있었지만 3개월이 지나자 회원은 거의 1만 명으로 증가했다. (…)

토의된 주제는 대체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문제였으나 종교와 교육의 문제도 짚고 넘어갔다. 처음에는 한국인들이 청중 앞에 서서 공개 연설을 하는 데 수줍어했으나 몇 번 지도해주고 격려해준 다음에는 그중 수백 명이 매우 효과적인 연설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발견했다. (…)

창립 1년 만에 독립협회의 영향력이 매우 강대해지자 회원들은 독립협회야말로 이제까지 한국에서 생성했던 조직 중에서 가장 찬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목격한 것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토록 복잡한 의회 제도의 규율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데 매우 빠르고도 이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몇몇 젊은이가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나는 자주 목격했는데 이는 매우 주요한 일로서 서구라파의 노련한 의회지도자들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_프레드릭 매켄지

당시 독립협회가 정부에 요구한 것은, 외국의 통제를 배격하고 이권을 줄 때는 신중할 것, 중요 범죄자는 공개재판에 회부할 것,국고를 정직하게 처리할 것, 모든 사람에게 정의로울 것, 그리고 인민의 대표를 선출할 것 등이었다.그러나 독립협회의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독립협회가 몇 백 년 간 내려온 왕의 권력과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공화국을 세우려고 한다는 여론이 돌자, 이를 확신한 고종은 독립협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지도자들을 투옥시켰다.

수만 명의 군중이 대궐 앞에 앉아 14일간 밤낮으로 독립협회 해산과 투옥을 철회하라는 침묵시위를 벌였다(이렇게 며칠씩 대궐 앞에 앉아 있는 것은 한국 민중들이 오래전부터 행해온 시위 방식이었다).결국 독립협회를 성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보부상들이 동원되었고, 이 민중파와 수구파 간에 유혈이 낭자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마침내 황제는 내각을 개편하고 독립협회의 요구를 승낙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됐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한 독립협회는 그 후 내부의 불화가 겹치면서 다시 조정의 탄압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1898년 12월 대부분의 협회 지도자가 체포됨으로써 해산됐다.

서재필의 회고록의 전문을 독자에게 들려주었던 매켄지는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적었다.“황제는 자기가 개화파를 분쇄하도록 했는데, 그 시간이 바로 황실의 어두운 운명을 선언했고 자기의 국토를 외국인에게 넘겨줄 순간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해체될 즈음에 샌즈는 막 한국에 부임했으므로, 며칠 동안 벌어지는 투석전을 직접 목격했다. 샌즈는 독립협회가 해체된 것은 “황제가 독립협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과 비교하여“가치 있는 통치 기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내내 독립협회의 개혁시도가 좌절된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만약 러일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쉽사리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