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군수나 시장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게 된 주민이 얼마든지 그를 ‘고소’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엄격하게 금지됐을 뿐 아니라 위반했을 경우 무거운 처벌까지 받았다. 상하 간의 기강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소한다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분수’를 어기는 잘못된 행동으로 여겼기 때문이다.“부민(府民·해당 고을에 사는 백성)과 수령은 부자·군신의 관계와 같아서 절대 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이 수령의 허물을 고소하는 것은 신하와 아들이 임금과 아비의 잘못을 들추는 것과 같습니다.” 세종 대에 이 조판서를 지낸 허조(許稠)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상하관계가 개인적인 충효윤리와 동일시되는 분위기도 있었다.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인 ‘부민고소 금지법’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이다.세종은 이 부민고소 금지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탐욕스럽고 난폭한 관리들이 이 법만을 믿고 거리낌없이 불법을 자행한다.”(세종7.3.24)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게 되면 원억(원통하고 억울한)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그래서 세종은 고소 자체는 계속 금지하더라도 “자신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리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여 처리해줌이 어떻겠는가”라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면서 “원억한 마음을 다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정치하는 도리이겠는가. 만약 수령이 잘못된 판결을 내려 백성의 논밭을 가져갔다고 했을 때 백성이 관청에 소장을 제출하고 개정을 요구하는 것을 어찌 고소라고 하겠는가. 부득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세종13.1.19)라고 말한다.이는 윤리·기강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당연히 해주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왕과 신하의 밀고 당기기 세종이 원억한 일을 당한 백성의 고소를 받아들여 주려 하자, 허조는 “전하께서 젊은 신하들의 광언(狂言)을 좇아서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법을 정하려고 하시는데 반드시 후회하게 되실 것”(同.6.14)이라고 비판했다.그는 백성의 원억과 관계된 일일지라도 절대 고소장을 수리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고소에 예외를 허용할 경우 그틈을 간사하게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어서 고소가 남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령은 제대로 고을을 다스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백성이 당한 억울한 일은 관찰사나 중앙에서 파견한 어사가 수령을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동의하지 않았다. “당장 해결이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정된 인원인 관찰사나 어사가 과연 수많은 고을의 세세한 일들을 모두 다 점검해 줄 수 있는가?”그래서 세종은 “약자인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억울함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이치가 세상에 어찌있을 수 있겠는가”(세종15.10.23)라고 말한다.그리고 “생각하건대, 만일 백성들이 고소장을 제출할 수가 없다면, 억울함을 해소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임금이 정치를 펼쳐가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 고소를 이유로 잘못 판단한 수령의 죄를 처벌한다면,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이 되므로 옳지 못하다.지금부터는 고소장을 수리하여 올바르게 판결하여 주되 관리의 오판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도록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분수를 보존하게 하라”(同.10.24)고 결론을 내렸다. 백성의 고소는 받아들이되 고발된 관리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한 것이다.그런데 ‘원억한 일’이라는 것의 기준이 주관적이다. 고소 주체의 허용범위도 불분명하다. 직접 당사자여야 하는지, 가족이나 친인척에 관한 것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제 3자로서 보고 들은 일도 가능한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한 것이다. 이상에 관해 명료하게 정리되지 못한다면 고소가 남발되거나 사적인 목적으로 고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고, 혹은 원억한 일을 당했는데도 ‘원억한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무고죄로 처벌받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아울러 고소의 이유가 된 관리의 오판이 단순한 실수에 의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쁜 마음을 품고 고의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데도해당 관리가 처벌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반감을 살뿐 아니라, 공직기강이 흐트러질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세종 사후에도 계속 보완작업이 이어지게 된다.임금에게는 부민고소를 허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백성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은 결국 신하들이기 때문에 신권 견제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수령들의 부정과 탐악을 징계한다는 명분도 훌륭했다. 그래서 세조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 고소를 허용하여 탐욕스럽고 잘못된 행위가 고쳐지도록 하겠다”(세조1.11.8)고 천명하는데, 이는 ‘고소는 금지하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경우에 한하여 고소를 처리해주고 고소한 것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는 기존의 방침과 차이가 있는것이었다. 원억한 일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고소를 허용한 것이다.관리 부정 고발하는 노비에 상 주기도거기다 세조는 부민들이 수령을 고소하면 즉시 수령을 잡아오도록 했고, 관리의 부정을 고발하는 노비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세조가“백성의 고소를 듣고 그 원통함을 풀어주어서 아래의 사정이 위로도달하게 하려 했으나, 고발하고 들춰내는 것이 풍속이 되어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도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고 아전이 관리를 고발한다.그렇다고 이를 금지하게 되면 언로가 막히어 백성들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풀어줄 수가 없을 것이고……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同.4.2)라고 고민하였으나 자신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조의 조처는 세조대의 일시적인 일로 끝났고, 신하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다시 세종이 낸 결론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조차도 반대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세종의 교시까지 뒤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마침내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명문화된다.‘종묘사직과 불법적인 살인에 관계된 것이 아닌 이상, 각 관청에서 일하는 아전이나 종들이 관리를 고발하거나 벼슬아치·아전·백성이 관찰사나 고을 수령을 고발하더라도 접수해주지 않고, 고발자를 장(杖)100대에 도(徒:중노동형) 3년에 처한다.… 다만 자신이 당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경우에는 그 내용을 빠짐없이 듣고 심리하여 주되, 거짓을 꾸며 고발한 자는 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에 처한다.”이후에도 “백성들이 고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수령들이 저지르는 불법을 어찌 알겠는가?”(성종12.9.20), “부민의 고소를 허락하고자 한다. 이 법이 세워지면 다소 소란스러워지겠지만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백성에 대한 침탈을 그칠 것이 아닌가”(명종6.7.13)라는 왕들의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강한데다가 상하 간의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 윤리의 원칙은 왕이라 해도 허물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 민고소’는 끝내 허용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