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디바’ 패티김의 이별무대

폭발적인 가창력과 숱한 화제 뿌리며 54년간 무대에 섰던 가요계 전설…9월부터 JTBC에서 <패티김쇼>로 음악인생을 노래와 함께 회고한다




어느 가수든 반세기가 넘도록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축복이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돌아봐도 그 같은 ‘레전드 클래스’에 오른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패티김은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대중가요계의 정상으로 군림해온 ‘전설의 디바’다. 올해 2월 은퇴를 선언한 그녀가 중단 없이 걸어온 긴 음악여정을 갈무리하려 한다.

그가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서구적 외모와 시원하고 풍부한 성량,폭발적인 가창력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력,깔끔한 무대매너와 철저한 자기관리 등은 그를 한국가요계의 전설로 이끌어낸 덕목들이다.

패티김 노래의 핵심을 꼽으라면 역시 사랑이다.데뷔곡 ‘사랑의 맹세’부터 ‘사랑이란 두 글자’, ‘그대 없이는 못살아’, ‘4월이 가면’, ‘사랑의 세라나데’, ‘9월의 노래’,‘이별’, ‘못잊어’, ‘초우’, ‘사랑하는 마리아’, ‘1990년’,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사랑은 영원히’ 등 그녀의 수많은 히트곡이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했다. 그 품격 있는 사랑 노래는 한국인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패티김이 걸어온 한 걸음 한 걸음은 그 자체로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되었다. 그는 지난 54년 동안 늘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숱한 기록을 남겼다. 광복 이후 일본이 처음으로 초청한 한국가수가 그였고, 최초로 미국무대에 진출한 솔로가수가 그였다. 조용필에 이어 두번째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섰던 그녀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도 공연했고 한때 대중가수에겐 성역과도 같았던 세종문화회관에도 처음으로 올라 대중음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었다.

화려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도 시련과 좌절은 있었다. 그동안 “활동을 오래 하는 것보다 정점에서 아름답게 물러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수차례 공언했던 패티김은 그 약속을 지켰다. 음악활동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그녀가 남긴 모든 것을 정리해보는 작업은 뜻 깊은 오마주가 될 것 같다. 이제 타임머신에 올라 그녀의 탄생부터 현재까지를 꼼꼼하게 되돌아보자.

맞선 보는 자리 박차고 나와 ‘가출’

#1 탄생, 성장기

패티김의 본명은 김혜자다. 1938년 1월 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과 다투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리던 야무진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릴 적 별명은 눈이 가늘다고 해서 ‘실죽이’로 불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대구 피난 중에 이화여중에 응시했다가 떨어져 2차로 중앙여중에 입학했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오면서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가사를 열심히 외울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

중앙여고에 진학한 그는 큰 키인데도 시력이 나빠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공부했다. 학교에서 노래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던 그는 우연히 국악특별활동반의 수업을 구경하다 시조를 따라 읊는 재능을 보였다. 그 인연으로 6개월간 국립국악원에 다녔던 그는 반 년 만에 판소리 ‘심청전’을 완창해 주위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덕성여대 주최 전국중고교 국악 콩쿠르에도 참가해 단가 ‘운단풍경’을 불러 창 부문 1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1958년 봄, 여고 졸업직후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지만 시력이 나빠 원고를 더듬더듬 잘못 읽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2 데뷔 시절

서울 명동거리에서 큰오빠 친구인 기타연주가 곽준용과의 우연한 만남은 그를 가수의 길로 인도해주었다. 오빠 친구의 소개로 미8군 프로덕션 ‘화양’의 전무 김영순(베니 김)에게 오디션을 받고 오산 미 공군기지의 한 클럽에서 첫 무대에 섰다. 첫 예명은 ‘린다김’. 2개월의 견습 기간 후, 미8군 정기 오디션에서 스페셜 A등급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데뷔첫 해인 1958년, 방일공연단 일원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에서 필생의 동반자인 작곡가 길옥윤을 처음 만났다. 길옥윤은 당시 패티김에 대한 첫 인상을 자신의 회고록에 “음성, 태도 모두 서구적으로 시원시원했다.

헌데 한참 선배인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해 인사를 했고, 다리를 꼬고 앉아 큰소리로 웃는 모습이 좀 건방져 보였다”고 썼다. 이처럼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쿨했다.1959년 3월, 패티김은 첫 봉급으로 3만환을 받으며 ‘세계적인 가수 패티 페이지처럼 유명해지라’는 베니 김의 권유로 예명을 ‘패티김’으로 바꿨다. 하지만 큰오빠가 가수활동을 완강히 반대한 바람에 잠시 활동을 접었다. 강제로 맞선 보는 자리에 갔지만 그 일로 그는 가출을 단행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패티김은 1960년 초 조선호텔 나이트클럽무대에 올라 주한외국인들의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3 한국가수 최초로 일본 NET-TV 공식초청을 받다.

1960년 어느 날,AFKN 간부의 주선으로 일본 NET-TV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았다.

당시는 한일국교정상화 이전으로 패티김은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으로부터 정식 초청을 받은 가수”로 기록됐다. 일본의 톱클래스 악단 스‘ 타 더스트’와 3개월 동안 일본 전국 투어를 돌았다. 팝송은 물론, 한복을 입고 장고를 치며‘아리랑 목동’, ‘도라지’, ‘아리랑’ 등을 불렀고 도쿄 최고의 영화촬영소였던 니치게키(日劇) 등에서 장장 7개월 동안 리사이틀 쇼를 성황리에 열었다.

#4국내 최초의 개인 리사이틀 무대

1961년 5월에 일본에서 귀국한 패티김은 서울 반도극장에서 ‘패티김 귀국쇼’를 열었다. 이 무대는 국내 최초의 개인 리사이틀로 기록돼 있다. 성황리에 쇼를 마친 이 무대는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고 가수활동을 반대해온 큰오빠의 마음까지 돌리게 했다.

#5 작곡가 박춘과의 만남 그리고 데뷔앨범 발표

고(故) 박춘석 작곡가와 패티김은 각별한 우정을 이어온 사이다. 박춘석의 빈소에서 패티김이 “때로는 오라버니요, 또 때로는 친한 친구 같았다”고 눈물을 쏟은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박춘석은 그에게 공식 데뷔그러니까 데뷔음반 제작을 도와준 음악의 은인이다. 당시 귀국 리사이틀이 끝난 후 용산 미 8군 무대에 작곡가 박춘석이 찾아와 ‘사랑의 맹세’, ‘파드레’ 등 팝송을 개사해 패티김의 공식 데뷔 음반을 제작해주었다. 그의 데뷔 음반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컴필레이션 음반이 아닌 독집이었다.




길윤옥과의 운명적 만남

#6 솔로가수 최초로 미국 진출 데뷔앨범 발표

이후 탄탄대로를 질주하던 패티김은 걸그룹 ‘김치캐츠’, 이해련과 함께 또다시 일본 투어를 떠나 현지에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내친김에 동남아 투어까지 떠난 그녀는 1962년 5월에 새롭게 개관한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또다시 귀국 리사이틀 쇼를 연속 개최해 국제적인 가수로 이미지업했다. 그해 말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픽업했던 맥 매킨의 주선으로 미국 라스베가스 공연이 성사되었다. 1963년 3월, 한국 솔로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새벽 4시에 하루 일과가 끝나던 고된 시절이었지만 가수로성공하고 싶어 술·담배를 멀리했던 그녀는 현지 언론에 무수하게 소개되며 1965년 유명 TV쇼인 <자니 카슨 쇼>와 NBC TV <투나잇 쇼>에 8번이나 출연하며 한국대중 음악이 우수함을 알렸다.

#7 귀국 그리고 운명적 만남

1966년 1월, 서울로부터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3년 만에 귀국한 패티김은 국제적인 대형가수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방송국에서는 특집 쇼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 일본 삿포로에서 운영하던 클럽이 부도를 맞아 귀국한 길옥균와 기자회견장에서 재회를 했다. 운명적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도쿄에서 처음 만났던 8년 전과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TBC등 방송에서는 외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귀국한 두 사람을 함께 묶은 방송을 기획해 더욱 가까워졌다.

#8국내최초 일일 라이브 토크쇼 TBC <패티김쇼>

패티김은 TBC와 인연이 깊은 가수다. 1966년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가수의 이름을 걸고 매일 30분씩 직접 노래하는 파격적인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노래와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 음악 토크쇼는 그 자체로 신선한 포맷이었고 많은 시청자를 브라운관 앞으로 모이게 했다. 그녀의 성공 이후 여타 방송국에서도 ‘이미자쇼’,‘윤복희쇼’ 등 가수 개인의 이름을 내건 쇼프로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1~2회 특집에 그쳤을 뿐이다. 패티김은 여세를 몰아 TBC <패티김 여행기>를 진행하면서 TBC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9최초의 본격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방송진행자로 명성을 드높인 패티김은 뮤지컬 배우의 영역에도 도전했다. 1966년 10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첫 공연을 올려 큰 파장을 일으킨 <살짜기 옵서예>는 한국 최초의 본격 창작 뮤지컬로 꼽힌다. 패티김은 <대춘향전>까지 대중가수로는 가장 많은 두 번이나 주연으로 출연했다.당시 60명 편성의 오케스트라와 40명 규모의 합창단, 40∼50명 정도의 무용단이 어우러진 본격 뮤지컬은 장안의 큰 화제를 불러왔다.

#10 드라마틱한 사랑, 그리고 첫 결혼

1966년 4월이 지나면 패티김은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 날이 다가오자 대한극장 앞 허름한 여관방에 묵고 있던 길옥윤은 애가 탔다. 이미 사랑의 포로가 돼있었기 때문. 그는 패티김을 한국에 눌러 앉히려고 희대의 작업송(?) 작업에 몰두했다. 봄비가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던 4월 어느 날. 길옥윤은 자정을 넘긴 시간에 패티김이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전화 다이얼을 돌렸고 수화기를 통해 패티김에게 ‘사월이 가면’을 불렀다.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길옥윤의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진심 어린 사랑고백과 달콤한 멜로디에 패티김의 마음은 흔들렸고 결국 출국을 포기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결혼 결심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기막힌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방으로 위문공연을 떠난 두 사람은 공연 후 군 책임자와 차를 마시며 담소하다 타고 가야 할 첫 버스를 놓치고 두 번째 버스에 올랐다. 그날도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런데 앞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져 전복해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생겼다.천신만고 끝에 사고를 모면한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살아갈 운명적인 무엇인가를 느꼈고 결혼으로 골인했다.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

#11 최초의 대중가수 결혼기념 앨범

1966년 12월 10일 두 사람은 워커힐호텔에서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의 주례로 3000여 명의 하객이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패티김과 길옥윤 커플에겐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놀라운 음반이 한 장 있다. 일반 판매가 아닌 결혼식장에 초대된 하객들을 위한 선물로 한정 제작한 싱글 도너스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고백했던 바로 그 노래 ‘4월이 가면’과 ‘사랑의 세라나데’ 두 곡이 담겨 있다. 가수 커플의 결혼식 기념 음반의 존재는 기록이 전무하다.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제작된 대중가수 결혼기념 음반이다.

#12 신혼, 출산, 스캔들, 갈등

일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 두 사람은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67년 5월 신혼여행으로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떠나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국내에 정착한 부부의 활약은 대단했다. 길옥윤은 DBS 전속악단장을 맡아 부부가 함께 <패티와 이밤을>을 진행했다. 1967년 11월 첫 딸 정아를 얻었다. 1968년 11월, 명동 유네스코회관 스카이파크에서 열린 딸의 첫돌 기념식장. 딸의 21세 때를 상상하며 만든 노래 ‘1990년’은 길옥윤이 기타를 치고 패티김이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패티김은 각종 패션쇼에 모델로 출연하는 등 절정의 인기와 생애 최고의 순간을 누렸다. 호사다마일까.

이즈음 그는 일본 대중잡지<주간대중>에 게재된 살색 수영복 누드 사진 사건을 시작으로 ‘이민설’에 이어 ‘유태계 사업가 W씨가 새 애인’, ‘주한 고위 미군 장성 모씨와 동거 중’ 등 온갖 스캔들에 시달렸다. ‘잉꼬부부’로 불렸던 두 사람 사이에도 불협화음이 나오기 시작했다.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패티김에 관한 여러 풍문에 대해서도 살펴보자.패티김은 몇 년 전 한 지상파 TV에 출연해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세간의 풍문에 대해 처음 입을 열었다.




#13 패티김을 둘러싼 풍문에 대한 진실

풍문1. 4개월에 한 번씩 성형수술을 받는다?


“성형수술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 소문이 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만약 4개월에 한 번씩 성형 수술했다면 나는 완전 괴물이죠.”

풍문 2. 재벌가의 자제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다?

“그런 제의가 많았지만 재벌과 결혼했으면 노래를 지금까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래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 없어요.”

풍문 3. 외국 국적이다?

“외국에서 많이 살았고 남편이 외국인이다 보니 오해하시는데, 내 국적은 대한민국입니다. 이제는 소문에는 무관심해졌습니다. 한 번 난 소문은 해명해도 대중은 의심하는 속성이 있더군요. 진실은 그냥 세월이 해결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14 결별, 이혼…그러나 음악은 하나


길옥윤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갈등을 겪었던 이들 부부는 1971년 9월 재즈공부를 위해 길옥윤이 미국 보스턴에 남고 패티김은 귀국을 하면서 별거 상태에 돌입했다. 1972년 5월 길옥윤은 신곡 ‘이별’을 들고 돌아왔다.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했지만 1973년 9월 두 사람은 노래 제목처럼 이혼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혼 후 패티김은 모든 출연 스케줄을 취소하며 두문불출했지만 ‘패티가 이태리인과 결혼하고 이민 간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혼 후에도 두 사람에게 음악적 단절은 없었다. 1974년 6월 패티김은 길옥윤과 함께 제4회 동경국제가요제에 출전해 ‘사랑은 영원히’로 14개국 450곡 중 3위에 입상했다. 이후 미국으로 떠난 패티김은 1976년 3월, 오랫동안 열애설이 돌았던 이태리계 미국인 아바라도 게디니와 뉴욕에서 재혼을 했다. 1983년 활동을 재개한 패티김은 25주년 기념 신보인 박춘석곡 ‘가을을 남기고 간사랑’을 빅히트 시키며 건재를 과시했다. 또한 평양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곽순옥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리메이크해 한반도를 울렸다.

1994년 6월 19일 SBS <생방송 길옥윤 이별콘서트> 특별방송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을 감동의 무대로 기억된다. 암 투병으로 생명의 끈이 꺼져가던 길옥윤은 패티김이 자신이 작곡한 ‘사랑은 영원히’를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혼 후 불편한 관계 때문에 방송 출연요청을 거부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패티김은 당당하게 출연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열창해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15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30주년 기념공연

한국사회에는 대중문화는 품격 없는 ‘딴따라의 것’, 순수예술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했었다. 1989년 패티김은 데뷔 30주년과 서울올림픽 1주년 기념공연으로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무대에 올라 성역을 깼다. 서울시의 공연 허가에도 불구하고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문위원을 맡고 있던 순수 예술가들의 반발은 심했다. 논란 끝에 패티김이 무대에 오르자 운영자문위원 중 두 사람이 사퇴하는 일까지 생겼지만, 반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10월 16일 패티김에 이어 이미자 역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펼쳤고 이후 많은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르게 됐다.패티김은 1993년에는 예술의전당 야외무대에서 노래인생 35년을 결산했다.

팬들에게 더 가까이 간 패티김

#16 최초의 서울대중가요 노래비 ‘서울의 찬가’

패티김은 1994년 자신의 히트곡 ‘서울의 찬가’로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었고 1995년 길옥윤의 영결식에서 떨리는 음성으로 노래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 ‘서울의 찬가’는 그해 10월 26일 서울 세종로공원에 노래비로 남게 되었다. 서울 도심에 건립된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였다. 1996년에는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7 데뷔 50주년…객석으로

2008년 데뷔 50주년을 즈음해 패티김은 변신하기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 같은 대형무대가 아닌 전국의 소극장을 찾아가는 전국투어를 시작했던 것. 사실 그녀는 도도해 보이는 스타 이미지 때문에 팬들과의 사이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화려하고 행복했던 긴 노래인생의 뒤에는 늘 외롭고 고독한 길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스타의 이미지를 지키려고 제자신에게도 엄격했습니다. 후회는 없지만 이제는 저를 사랑해준 팬들에게 겸손하고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습니다.”칠순을 넘긴 그의 노래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보다 인간미 넘치는 변신에 대중은 노래 이상의 감동을 받았다.

#18 패티김 라스트 글로벌 투어-이별

패티김은 지난 2월 15일 은퇴 발표 후 전국투어 중이다.투어의 시작은 지난 6월 2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패티김 라스트 글로벌 투어-이별’ 무대. 한국대중음악의 전설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무려 1만 명이 몰려들었다. 20여 명의 오케스트라, 15여 명의 코러스의 협연으로 출발한 서막부터 웅장했다. 대스타는 노래의 끝을 마무리하며 “감사합니다”를 되풀이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19 60년대 패티김 쇼의 재현… JTBC 특별기획 ‘패티김 이별콘서트(가제)’

패티김은 9월말부터 방송되는 JTBC 특별기획 ‘패티김 이별콘서트(가제)’를 통해 자신의 음악인생을 총정리한다. 이번 방송은 은퇴를 선언한 그녀가 방송을 통해 팬들을 만나는 마지막 무대다. 패티김이 JTBC를 마지막 무대로 선택한 것은 TBC(동양방송)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20 은퇴 이후

은퇴를 선언한 올해, 패티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한국 대중가요의 해외진출을 돕고 전 세계 음악인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처음 기획된 ‘서울국제뮤직페어’의 공동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대구시 동구청은 내년 상반기에 금호강변신암동에 있는 공원에 패티김의 노래비를 건립할 예정이다. 그녀가 한국전쟁 당시 신암동에 피란을 와 잠시 살았던 인연 때문이다. 공원에는 패티김의 생애와 음악세계가 담긴 비석을 세우고 관광객들에게 연중 노래도 들려줄 예정이다. 패티김은 은퇴 후에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대한민국 서울 하늘이 잿빛이다. 서울 하늘을 푸른 하늘로 바꾸는 캠페인을 하고 싶다. 미국 LA도 시민들이 나서서 맑은 하늘로 바꿨듯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도 뭉치면 잘할 수 있다.” 패티김은 은퇴했지만 살아있는 전설로 대중의 가슴속에서 함께 숨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