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배다리에는 언제 올지 모르는 고단한 사람들을 기다리는 옛 여인숙들이 지금도 여럿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빠~앙~.” 어둠이 깔릴 무렵, 인천항의 뱃고동 소리가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며 저녁 공기를 가른다. 동인천역을 나서는 시민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수많은 행인들 중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상인과 인천항에서 일하는 인부들도 끼어있다. 역전과 마주한 상가 뒤쪽으로 허름한 여인숙 간판들에 희미하게 불빛이 비낀다.한때 이곳 인천에 많았던 성냥공장에서 흘러나온 유황냄새와 양조장의 누룩 향이 코끝에 느껴지던 시절에 생겨났다는 여인숙들이다. 그 여인숙의 온돌방에서는 여행자들이 몸을 녹이고 있고,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정겹게 흘러나왔을 터이다.인천 토박이들은 인천시 동구 금곡동·창영동·송림동 일대를 아직도 배다리라 부른다. 인천 말고도 예부터 작은 배들을 엮어 하천을 건너던 동네를 조상들은 ‘배다리 마을’이라고 불렀다. 경인선 철도가 처음 놓였던 19세기 말, 인천항에서 수문(水門)통 갯골과 이어지는 큰 개울이 있었는데 밀물 때면 배를 대야 건널 수 있어 그리 불렀다고 한다. 인천항에 갑문에 설치되고 이 일대에 큰 건물들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더는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지금은 서울역에서 인천행 전철을 타고 1시간 남짓달리면 닿는 동네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역전 앞의 중앙시장을 기점으로 배다리삼거리, 배다리길, 우각로, 창영1길, 금곡3길, 창영5길로 이어지는 골목 곳곳에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릴 만한 골목들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다.배다리삼거리 근처에 옛날 간판을 그대로 걸고 손님을 받는 ‘여인숙 골목’으로 들어선다. 한때 왁자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주변의 차 지나가는 소리 말고는 적막감이 감돈다. 이제는 이곳에도 대여섯 군데의 여인숙이 남아있을 뿐이다. “80년대까지 만해도 이 일대가 온통 여인숙이었어. 그땐 정말 장사가 잘됐거든. 지금은 다 옛말이 되었지만 말이야.”
▎(좌)1930년대 경인철도역에서 바라본 배다리 일대. (우)1910년 인천시 약도에 소개된 배다리.
골목길 초입에서 50년 넘게 여인숙을 지키고 있는 김정숙(가명·85) 할머니가 마루바닥을 청소하면서 말한다. 골목길을 좀더 들어가보니 또하나의 여인숙이 보인다. 빨강색으로 ‘여.인.숙’ 세 글자를 적은 오래된 간판, 손 떼로 얼룩진 낡은 외벽, 살짝 밀어보면 ‘끼∼익’하고 소리를 낼 것 같은 쪽문, 그 문틈으로 흙 묻은 털신이 한 켤레가 놓여있다. 이 겨울에 주인 할머니가 신는 신이리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날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다.
▎1948년의 배다리 장터. 과거 배다리 일대는 사시사철 시장이 형성됐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서가배다리는 서민의 삶과 애환이 서린 곳이자 고단했던 근대화 시대의 초상을 간직한 곳이다. 1885년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 일본의 조계지가 만들어지고, 경인선이 생겨나면서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수도국산 일대의 송현동·송림동·만석동과 이곳 배다리 일대로 밀려났다고 한다.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에 공장과 시장 등을 하나둘 세우기 시작했다. 배다리 인근의 중앙시장을 거점으로 사철이 없는 큰 시장이 형성됐고, 배다리 마을에서 도원역 쪽으로 이어지는 우각로 일대에는 성냥공장들과 양조장이 들어섰다.1917년 인천부 금곡리에 들어선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는 남녀 직공 500여명에 연간 3만상자의 성냥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그 무렵에는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했는데 여직공들이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와 이 곳에서 하루 13시간 동안 1만 개의 성냥개비를 만들었다고 한다.어린 여직공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고, 금곡동와 송림동, 창영동 지역의 500여 가구 주민은 가내수공업으로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해 생계를 꾸렸다. 온 식구가 이 일에 매달리는 집들이 대부분이어서, 배다리 인근의 도로변에는 햇볕에 말리려고 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이 천지를 이뤄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살림이 넉넉지 않았던 6·25 전란 이후로 배다리는 피란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배다리 공터엔 유랑극단이나 떠돌이 약장수 등이 찾아와 지친 피란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용품을 파는 일명 ‘양키시장’과 ‘한복시장’, 리어카 책방으로 시작된 ‘헌책방’ 등이 생겨나며 한바탕 유명세를 떨쳤다. 주말이면 미제 물건과 한복을 사기 위한 인파로 시장 골목은 꽉 들어찼고, 새 학기가 되면 헌책방 앞은 가난한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하지만 지금은 이 또한 옛 말이 됐다. 중앙시장에 밀집했던 한복가게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적막한 골목에는 한두 곳의 한복 가게만이 남아 지난날의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와 길 건너에 있는 헌책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때 50곳에 달했다는 헌책방은 집현전, 아벨서점, 삼성서림 등 5곳만 남아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예전의 생기는 사라졌지만, 길에 들어서자 쾌쾌한 헌 책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그중에서도 아벨서점은 38년째 제자리를 지켜오는 배다리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주인 곽현숙(62) 씨가 “오늘 들어온 따끈따끈한 책”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책 한 권을 건네준다. 누렇게 바랜 책 표지를 보았더니 출간 연도가 ‘1970년’이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보물’이죠. 이곳엔 지난 시간의 행복한 기억이 다 남아있어요.” 찬찬히 서가를 둘러보니 저마다 사연을 간직했을 듯한 책들이 천장 높이까지 수북이 쌓여있다.이곳의 헌책방은 고 박경리 작가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1948년 당시 22살의 젊은 새댁이던 박 작가는 주안 염전에 취직한 남편을 따라 이곳 배다리에 둥지를 틀었다. 책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그는 중앙시장 등에 있는 고물상에서 책을 하나하나 모아서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고 한다.헌책방이 모여있는 우각로를 좌우로 금곡3길과 창영길 등이 가지를 친다. 우각로는 개항장으로 들어온 서구 문물을 서울로 전하던 곳으로, 이곳을 따라가다보면 인천에서 첫 공립보통학교(1907년)로 세워진 창영초등학교와 여선교사 기숙사 등과 마주하게 된다. 모두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건물들이다.
▎해질 무렵, 송현동 달동네 꼭대기에서 배다리를 내려다보면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배다리 마을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근대와 현대가 만나는 달동네
▎(좌)‘모듬살이’를 했던 달동네 골목골목의 담벼락에는 지금은 화사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우)38년째 배다리를 지키고 있는 헌책방 ‘아벨서점’.
동쪽으로 난 널찍한 송림로를 따라 송현동으로 들어서면,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의 풍경이 펼쳐진다. 미나리길, 총명길, 사랑마당길 등 얼기설기 설킨 옛 ‘골목’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달동네 뒤로는 신식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근대와 현대가 오묘하게 뒤섞여있는 셈이다.원래 이 달동네는 1904년 일제 강점기 왜병들의 강제 이주에 조선민족이 새 거주지로 정착한 곳으로, 한국전쟁 이후엔 피란민과 산업화에 의해 모인 사람들이 3000여 가구를 이루며 ‘모듬살이’를 하던 곳이었다.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이 가까웠던 만큼 이웃 간의 정도 두터웠을 듯하다.그 골목 여기저기에는 화사한 벽화들이 눈길을 끈다. 2008년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이 칠이 벗겨진 벽과 낡은 지붕 등 칙칙한 골목길을 화사하게 바꾸자는 취지로 그린 그림들로 점점 잊혀져 가는 배다리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주민들 말고는 인적이 드물던 이 골목이 따뜻한 벽화로 인해 이젠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주말이면 카메라를 들고 골목길을 누비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골목에는 좁은 계단과 오르막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땅거미가 질 무렵, 이곳을 올라 석양이 비치는 배다리 마을을 내려다본다.개항과 식민지경영, 6·25전쟁, 산업화의 빛과 그늘… 이 마을의 골목골목에는 지난 100여 년의 질곡의 역사가 흐르는 듯하다. 그 역사를 견뎌내고 살아온 부민들은 최근 재개발의 목소리가 크지만 ‘배다리’의 가치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지난날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배다리’의 저녁은 더 아름답다.배다리 가는 길국철 1호선을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중앙시장을 통과하면 굴다리가 나오는데, 여기부터가 배다리다. 중앙시장 건너편으로 바로 헌책방 거리가 나오고, 헌책방 거리에서 우회전해 우각로로 빠지면 ‘스페이스 빔(옛 양조장 공장)’이 보인다. 길을 따라 올라가며 100년이 넘은 창영초등학교와 송현동 달동네로 이어지는 길에서 곳곳에 그려진 아기자기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