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보내는 유언장’ 추도사로 읽는 세계사 -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1970년대 중국의 자화상

사상 최대 조문객 부른 마오쩌둥


▎미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걸린 앤디 워홀의 마오쩌둥 초상화.



전 세계 미디어에 전해지는 해외의 부음을 접하다 보면,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멀어질수록 부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제한된다. 아프리카 독재국가를 예로 들어보자. 부음 속의 망자(亡者)는 보통 악명 높은 독재자 그 자신이거나, 독재자에 반대해 고문을 당했거나 수십 년 간 감옥생활을 한 사람으로 대별될 수 있다. 예외적으로 환경이나 동물 보호에 나선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는 어떠한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어린이 편지를 40년간 담당한 여성직원, 모래를 대신해 톱밥으로 고양이 분비물을 처리해 특허를 얻은 백만장자, 가부키(歌舞伎)를 영어대사로 바꿔서 미국에서 공연한 일본인, 1차와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전까지 참전한 105살 퇴역군인…. 독재정권이나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부음들이다.

중국발 부음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인물은 어떤 유형일까? 부음 등장인물이 크게 제한돼 있다. 세상에 알려지려면 공산당 그림자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서방이 기억하는 중국발 부음의 인물은 많아야 다섯 손가락 안에 그칠 뿐이다. 중국이 낳은 최고의 부음 스타는 마오쩌둥(毛澤東)이다.

마오쩌둥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초대형’ 추도식을 치른 인물이다. 아무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조문객을 가진 인물이 아닐까? 조문객을 받은 추도식 장소도 한 군데가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져 있다.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 82세이다.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무려 27년간 최고권력자로 군림한 셈이다. 장례식 겸 추도식은 1976년 9월 19일에 치러진다. 천안문광장이 추도 총본부다.


화궈펑이 가진 ‘비장의 무기’

당시 추도식 대표로 나선 인물은 화궈펑(華國鋒)이었다. 마오쩌둥을 잇는 권력자로 추도식 이후 중국공산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르게 된다. 추도식 대표자격으로 마오쩌둥 추도사를 읽는다. 화궈펑이 추도사를 읽은 곳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붉은 대문 위다. 정확히 말해 당시는 물론 지금도 걸려있는 마오쩌둥 초상화 바로 위가 추도사를 읽은 곳이다. 마오쩌둥이 1949년 공산주의 중국을 선언한 바로 그 자리다. 짧은 머리에 검은 인민복을 입은 화궈펑은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연단에 나타났다.

“동지와 친구 여러분! 수도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모인 사회 각계각층의 모든 대표자와 농민, 군인, 그리고 전 세계의 무산대중과 피압박민중 모두는 아주 비통한 심정으로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에 관한 추도식에 임하고 있습니다.”

추도사는 특별한 기복 없이 평범하게 시작된다. 눈물이나 격앙된 감정도 없다. 중국 CCTV의 당시 기록물을 보면 원고를 읽느라 천안문광장 앞에 모인 추도객들에게 눈길을 전혀 주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다.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보듯 전혀 여유가 없이 추도사를 읽기에 급급하다. 자신감이 없다는 의미다.

화궈펑이 추도식 대표 즉,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발탁된 배경은 여러 가지 설(說)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모든 공산독재국가가 그러하듯 절대권력의 승계과정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다. 비화(秘話)라는 식으로 나중에 밝혀지기는 하지만 사람들마다 전부 다르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궈펑 결정설은 마오쩌둥이 전했다는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다.

1976년 마오쩌둥은 노환으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진다. 문화혁명을 주도한 장춘차오(張春橋) 국무원 제2부총리와 왕훙원(王洪文) 제2 부주석이 마오쩌둥의 자리를 넘보는 실력자로 부상한다.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젊은 홍위병’에게 불안을 느끼던 마오쩌둥은 동병상련(同病相憐) 처지인 화궈펑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전달한다.

“당신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你辦事, 我放心)” 정확히 1976년 4월 30일 전한 메시지다. 화궈펑이 자신의 자리를 잇는다면 중국의 미래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젊은 홍위병’들로부터 도청당할 것을 두려워해 발언내용을 종이에 적어 남겼다고 했다. 자신이 후계자임을 밝히기 위해 공산당 원로들에게 마오쩌둥이 쓴 쪽지 글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라는 말은 화궈펑을 따라 다니는 보증수표에 해당된다. 추도식 대표에 올라 추도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화궈펑의 탁월한 지도력이나 비전과는 전혀 무관하다. 마오쩌둥이 남긴 한마디를 통해 최고권력자로 부상한다.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인민군대를 계급투쟁에 나서도록 지도하셨습니다. 중국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모든 무산대중의 지도자입니다. 밖의 적들과의 계급투쟁과 함께 중국공산당 내부의 체질개선을 위한 투쟁이라는 두 단계 투쟁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당 내부의 우파와 좌익기회주의자들과의 투쟁사이기도 합니다. 마오쩌둥 주석의 지도하에 우리 당은 문화혁명 기간 동안 좌익 기회주의자들을 모두 격파했습니다.”

화궈펑은 추도사를 시작한 지 2분여 만에 반당(反黨) 좌익 기회주의자에 대한 비난을 시작한다. 문화혁명 기간 중 처단된 인물들을 한 명씩 호명한다. 마오쩌둥의 지도하에 이뤄진 성과라는 토를 달지만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피가 튀는 경고’쯤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궈펑 말을 거역할 경우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다.

CCTV 화면을 보면 추도사를 ‘열심히’ 읽은 화궈펑 뒤에 ‘단 한 명’의 인물만이 비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궈펑 주변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을 법한데 단 한 명만이 기립한 채 화궈펑을 지켜보고 있다. 언뜻 보면 마치 아버지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아들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다.

예젠잉(葉劍英)이다. 당시 79세로 중국 국방장관이자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과 같은 큼지막한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다. 광둥(廣東)성 객가(客家) 출신인 예젠잉은 중국군을 만들어낸 중국군의 아버지다. 중국군 핵심들이 그의 측근이다.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통해 군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CCTV가 예젠잉의 모습만을 계속해서 비추는 이유는 화궈펑이 군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총칼이 지지하는 화궈펑을 감히 넘보지 말라는 메시지다.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주석이 당과 군사 그리고 인민들에게 수없이 강조한 것 중에 ‘계급투쟁을 계속해 나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은 끊임없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계급간의 갈등과 차이를 극복해야 하고, 호시탐탐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노리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서 계급투쟁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만약 자본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건드린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군 그리고 마오쩌둥 사상으로 단결된 중국은 그들을 인민들의 분노로 가득 찬 바다속으로 몰아 처단할 것입니다.”



마오쩌둥, 살아남기 위해 소비에트와 결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해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에 다녀간 지 4년이 흘렀고, 일본의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마오타이(茅台) 술잔을 나누며 중일 국교회복에 나선 지 5년째 되던 해다. 외교적으로 볼 때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노출할 만한 시기가 지났다. 구체적으로 국가 이름을 거명하지 않는다. 적의 개념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추도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마오쩌둥의 호칭이다. 화궈펑은 마오쩌둥 호칭 앞에 반드시 ‘웨이다링슈(偉大領袖)’란 수식어를 붙여 부른다. 한글로 풀자면 ‘위대한 영도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웨이다링슈’는 과거는 물론,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유일하게’ 마오쩌둥에게만 붙는 극존칭 단어다.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부자를 구별해서 부르는 극존칭형 수식어와 똑같다. 북한이 중국을 흉내 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마오쩌둥에 대한 존칭형 수식어는 극에 달했다. 예를 들어 전우(戰友)라는 말도 마오쩌둥과 관련시킬 경우 그 범위가 크게 제한됐다. 문화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의 전우는 국민당 타도와 항일운동에 나선 장정(長征) 출신자들을 의미한다.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와 같은 혁명 1세대 지도자가 마오쩌둥의 전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문화혁명 때는 오직 한 사람만이 마오쩌둥의 전우로 부상한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며 한 때 마오쩌둥의 자리까지 넘나든 린뱌오(林彪)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소비에트에서 불어온 수정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신 분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결코 넘어다볼 수 없도록 자본주의와 타협을 하려는 소비에트 내 수정주의자들과의 투쟁을 강조하셨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주석은 인류불변의 진리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면서 중단 없는 혁명을 요구했습니다. 국내외 반대세력들과의 투쟁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신 분입니다.”

화궈펑은 소비에트(구소련) 자체를 적이라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적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소비에트 내 수정주의자가 적임을 분명히 한다. 화궈펑이 소비에트 내 수정주의자를 적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소비에트가 보여준 반(反)마오쩌둥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소비에트는 중국처럼 1인 숭배에 의한 공산독재에 반대한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독재를 겪으면서 후계자로 나선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스타일의 1인 숭배에 의한 통치를 포기한다. 중국의 경우 소비에트의 변화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배신이라 규정한다. 소비에트 식으로 하면 마오쩌둥이 쫓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념적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과정에서 소비에트와 결별하게 된다.

화궈펑 추도사를 보면 놀랍게도 화궈펑 자신의 생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마오쩌둥 주석께서는’에서 시작해서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으로 끝난다. 중국을 어떤 식으로 이끌 지에 관한 화궈펑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오쩌둥의 과거 행적을 열거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화궈펑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색깔이 없는 후계자, 다시 말해 전임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아가는 후계자는 절대권력 사후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연구·발전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문화혁명의 유지를 계속 이어나가고, 무상대중의 독재를 위해 수정주의자들과의 투쟁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사회주의 중국을 강건하게 만들기 위해 자주, 자력, 자위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세계의 패권을 노리지 않을 것입니다. 두 개의 수퍼파워, 즉 미국과 소비에트가 노리는 세계패권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엄청난 반전이 요구됐던 1976년 중국

화궈펑의 추도사는 최근 방영된 김정은의 신년사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김일성, 김정일을 대신해 마오쩌둥이 들어가있을 뿐이다. 추도사 마지막 부분에까지 마오쩌둥의 유지를 거론하면서 문화혁명을 계속해 나가자고 결의한다.

마오쩌둥이 중국인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마오쩌둥 사상이 영원하며, 중국공산당의 영광과 파워가 전 세계에 퍼져나갈 것이라는 축사를 추도사 마지막 부분에 던진다. ‘영생 불멸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주석 만세!( 偉大的領袖和導師毛澤東主席永垂不朽)’는 20분에 걸친 마지막 추도사의 내용이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은 역사상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인물이 사라진 해이기도 하다. 저우언라이다. 마오쩌둥보다 8개월여 빠른 1976년 1월 8일 세상을 뜬다. 1976년은 중국인들이 역사상 가장 어둡게 생각하는 해다. 마오쩌둥 사망 직전인 1976년 7월 28일 진도 7.8의 탕산(唐山) 대지진이 발생한다.

사망자 수만도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재해다.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사망, 당산대지진이란 3대 악재를 통해 중국인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공황상태에 접어든 때가 1976년이다. 뭔가 엄청난 반전이 필요한 시기였다. 화궈펑의 추도사는 그 같은 반전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지만 감동 없는 1인 모노드라마 수준에 그쳤다. 만약 중국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추도사였다면 이후 닥칠 화궈펑의 운명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화궈펑은 추도사가 끝나는 즉시 권력강화를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내부 청소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들 만한 사람들을 처단한다. 추도식이 끝난 지 한 달도 채 안되던 1976년 10월 6일 문화혁명을 주도한 장칭(江靑)을 비롯한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4명이 전격 체포된다.

이른바 4인방(四人幇)이란 말이 탄생하면서 문화혁명 당시의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쓴 채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권력은 잔인하다. 4인방은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숙청이라 볼 수 있다. 삼척동자도 알고 있지만 문화혁명의 최고 책임자는 바로 마오쩌둥 그 자신이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하수인이었을 뿐이다. 문화혁명의 홍위병이 화궈펑을 덮치기 전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4인방이 체포된 바로 다음날인 10월 7일 화궈펑은 중국 공산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한다. 마오쩌둥의 부인이 잡혀가고 문화혁명의 실력자들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화궈펑에 대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화궈펑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석에 오른 지 불과 26개월 뒤인 1978년 12월 개혁개방을 내건 덩샤오핑에 의해 화궈펑의 모든 실권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1979년 1월 1일 이뤄진 미·중 국교 수교는 개혁개방을 국시로 정한 중국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의 첫 작품이다. 마오쩌둥 사후의 불안과 혼란을 3년 만에 깨끗이 씻어내고 세계의 새로운 파워로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