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뉴 랜드마크를 찾아서 - 비미쉬 박물관 절망의 폐광촌에 피어난 꽃


▎비미쉬 박물관에는 추억의 상징인 마을 상가, 가게, 식료품점 등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됐다. 비미쉬와 같은 탄광 마을의 광부들은 주로 월급을 현찰로 지급받았기 때문에 중심거리는 상당히 활성화된 공간이었다.



영국 북동부에 자리한 도시인 더람(Durham)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영국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영국 근·현대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산업혁명과 관련된 곳이기 때문이다. 중세 시기까지는 중동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의 주연료가 나무였다.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나무라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풍부할 것 같던 나무도 15세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이 필요에 따라 삼림을 무차별적으로 훼손했고, 대규모 토목 및 건축 사업과 전쟁으로 인한 군비 경쟁도 한몫했다. 16세기부터는 나무가 부족해 값이 계속 올랐고, 끝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반 서민들이 난방을 위해 충분한 양의 나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주택은 오늘날처럼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겨울을 나려면 난방용 나무가 필요했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심각한 연료 부족을 고민하던 상황에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석탄이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불타는 검은 돌’로 표현한 석탄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독가스를 품어낼 뿐만 아니라 나무처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고갈되는 상황에 이르자 석탄이 나무를 대체할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석탄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땅을 깊게 파서 석탄을 채취하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이를 위해 갱도 건립, 안전, 배수, 수송 등에 이르기까지 기존에 나무를 사용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산업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곧 산업혁명을 촉발시키기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산업혁명은 경제 및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동시에 야기했고, 영국이 그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산업혁명을 경험한 영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 더람은 석탄산업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산업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소년무용수의 삶을 그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탄광촌이 바로 더람이다. 더람은 산업혁명을 출발점으로 기계화와 대량생산, 노동의 혁신 그리고 초기 자본주의 성립 등의 변화 과정들을 앞서 경험한 선구적 도시이기도 하다. 더람에서 조선, 제철, 경공업 등이 연이어 발전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연 석탄의 시대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고작 200여 년에 불과했고,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20세기를 넘지 못했다. 더람같이 도시 전체를 지탱하는 기간 산업이 석탄인 경우 폐광과 함께 도시가 급속하게 붕괴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석탄산업의 특성상 다른 산업으로 발 빠르게 전환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창때는 20만 명 가까운 광부가 일했던 더람의 경우 광산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침체를 넘어 붕괴 직전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탄광에서 평생을 보낸 광부들이 다른 직업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더람은 절망의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시재생 사례 중에서 탄광 지역이 더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만큼 다른 지역보다 도시의 산업구조를 바꾸기 어려운데다가 그만큼 성공을 거두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도시를 위해 단순히 새로운 산업동력을 발굴하는 일을 넘어 오랫동안 진행된 환경오염과 같은 본질적 문제를 동시에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비미쉬 박물관은 “당신은 주고, 우리는 수집한다!”는 슬로건 하에 건립됐다. 이는 집에서 딱히 사용하지 않는 선조나 부모들이 사용했던 각종 생활용품, 대규모 기계 장비 등 지역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수집한다는 뜻이다.
더람의 ‘비미쉬 박물관(Beamish Museum)’은 다른 사례와 확연히 구분되는 탄광 지역 재생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디자인한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지도 않고, 주목할 만한 새로운 산업이나 기업을 유치한 것도 아니다. 산업혁명시대를 거치며 영국을 대표했던 탄광촌으로 자리 잡은 더람 지역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그 자체로 살아있는 산업유산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비미쉬 박물관은 프랑크 에킨손(Frank Atkinson)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탄생했다. 1949년부터 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에킨손은 대단한 예술작품보다 생활 속 소품을 통해 과거의 삶을 생생하게 전하는 방식에 관심을 집중했다. 특히 1952년에 카네기 재단의 후원을 받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는데 전통적인 민속 박물관의 소장품과 운영 방식 등을 주로 살폈다.

당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답사하며 에킨손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과거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필요하다. 지역 주민들이 소유한 물품들을 모아서 잘 보존하고, 알리는 것은 지역의 역사성과 자존심을 유지하는 결정적 수단이다!”

에킨손의 주장이 의미 있는 이유는 ‘장소’를 강조했다는 점에 찾을 수 있다. 즉, 의미 있는 물품들을 모아서 단순히 박물관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 물품들을 사용했던 삶까지 함께 옮겨 놓자는 발상이었다.

광산 노동자의 삶도 고스란히 복원

1958년에 에킨손은 더람의 보우스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됐고, 이때부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의 경험을 포함해 그동안 축적한 정보를 토대로 더람에 ‘야외 박물관(Open Air Museum)’을 조성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지역주민들로부터 각종 생활 소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이 기부받는 형식이었다.

에킨손은 당시에 “당신은 주고, 우리는 수집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다시 말해 집에서 딱히 사용하지 않는 선조나 부모들이 사용했던 각종 생활용품에서 대규모 기계 장비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삶과 연관된 어떤 것도 수집한다는 뜻이다. 시간대로 보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150여 년 동안 사용했던 생활용품들이 주를 이루었고, 특히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삶의 변화를 가져온 다양한 기계가 포함돼 더욱 값진 결과라 할 수 있다.

더람을 중심으로 기부를 받았으므로 당연히 광산과 연관된 물품이 많았고, 초기에 지역 주민들이 제공한 물품만 수만 점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처음 에킨손이 예상한 것을 훨씬 뛰어 넘는 양이었다. 심지어 에킨손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평생을 산 노인들조차 무릎을 치며 신기해할 정도로 어느덧 사라졌던 물품들이 속속 등장했다.

창고에 꼭꼭 숨어있던 보물들이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기증에 앞장섰던 주민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본인도 무엇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창고를 열어 한 명이 수백 점을 기증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인도 몰랐던 큰 가치가 있는 물품을 창고 한 구석에 처박아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기증에 동참한 주민들은 에킨손이 의도한 박물관을 통하여 지난 시기의 삶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다양한 용품은 각 분야별 기술자와 마을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조심스럽게 작동이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수리 및 보수됐다. 더불어 에킨손의 한결같은 열정과 야외 박물관의 가치를 인정한 지역 기업과 개인의 기부도 이어졌다.

▎1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영국 북동부 지역 도시 더람의 과거 풍경. 2 산업혁명 시절 광부와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사택의 모습.



주민들의 자발적 기부 줄이어

에킨손은 수많은 난관과 반대를 무릅쓰고 지역에서 물품 수집을 계속했고, 1971년에 이르러 첫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비미쉬 박물관의 서막이 올랐다. 처음 야외 박물관에 대한 계획을 세운 이후 13년 만의 결과였다. 에킨손의 목표는 수집한 물품을 건물의 유리관 안에 전시하는 차원이 아니었기에 처음 전시회를 시작으로 하나의 마을 전체를 단계적으로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차근차근 꾸미기 시작했다.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가 거리를 가로지르면서 운행됐고, 각종 상점, 공장, 식당 등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운영됐다. 심지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복장까지 당시와 동일하게 착용함으로써 현장감을 더욱 살렸다.

비미쉬 박물관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에킨손의 관심과 열정으로 시작됐지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 기부와 참여 그리고 응원이 없었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영국 생활기록협회가 영국의 탄광지역을 대표하는 더람의 역사를 보존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에킨손과 지역 주민 그리고 관련 기관의 노력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마을과 탄광촌의 생생한 삶이 재현됨으로써 그 속으로 시간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비미쉬 박물관은 산업유산 재활용의 범위를 하나의 건물에서 마을 혹은 도시적 맥락으로까지 확대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40여 만 평에 펼쳐진 비미쉬 박물관은 규모도 엄청나게 크지만 흔히 말하는 민속촌이 아니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했으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체험할 수 없는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시간을 과거로 돌려서 겉과 속을 모두 복원했다. 그래서 한마디로 ‘살아 숨쉬는 박물관’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증기기관차는 채굴한 석탄을 운반하는 핵심 교통수단이므로 탄광 도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비미쉬 박물관에는 과거와 동일한 방식의 증기 기관차를 운행하여 마을 전체를 순환하며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했고, 증기기관차와 더불어 추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차역도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런가 하면 마을의 중심 거리에는 가게, 은행, 인쇄소, 학교, 펍, 식료품점 등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과거에 그 자리에 존재했던 건물과 시설의 대부분을 복원했고, 당시와 같은 방식으로 직원들이 손님을 맞는다.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비미쉬와 같은 탄광 마을의 광부들은 주로 현찰로 월급을 지급받았기 때문에 중심 거리는 나름 상당히 활성화된 공간이었다. 월급날이면 중심가의 펍에서는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밤새 먹고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흔한 모습이었다.

특히, 1985년에 문을 연 ‘1913 타운(1913 Town)’은 마을을 가로 지르는 전차 레일을 중심으로 1913년 당시의 마을 모습을 충실히 재현했다. 영국의 정체성을 지닌 빅토리안 양식을 따른 건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의 분위기는 영락없이 역사책이나 빛 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다.

집, 치과, 펍, 마구간, 창고, 잡화상, 가게, 공장, 자동차 정비 업소 등은 하나같이 방문객으로 하여금 쉽고 편안하게 시간 속 여행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이는 비단 더람 지역만의 독특한 모습이 아니라 당시의 전형적인 영국 중소 도시의 삶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방문객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길가에 늘어서 있는 상점들을 들락날락하는 이유는 단순히 겉모습만 똑같이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내부에도 에킨손이 수집한 다양한 물품으로 꼼꼼히 꾸며 어느 것 하나 어색하거나 인공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어색한 부분이 있다면 그곳을 찾은 방문객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광산 노동자의 삶도 고스란히 복원

뭐니뭐니해도 광산 도시인 더람의 정체성은 ‘광산촌(Colliery village)’이 대표한다. 비미쉬 박물관에 조성된 광산촌은 실제 사용했던 석탄 갱도를 중심으로 석탄을 채굴하고, 제련하고, 운반하는 모든 과정을 당시의 기계설비 시설을 토대로 복원됐다. 조랑말이 끄는 석탄차는 신기하게 보일 따름이다. 그런가 하면 당시 광부들이 사용했던 각종 장비, 도구, 인쇄물까지 모두 꼼꼼하게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석탄 갱도의 경우 내부까지 실제로 들어가는 ‘갱도 체험’을 운영하는데 전직 광부가 당시의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어둡고 비좁을 뿐만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갱도에 들어서면 당시 광부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단박에 느낄 수 있다.

한편 방문객이 원하는 경우 단순한 눈요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석탄을 채굴하는 작업까지 직접 할 수 있다. 당시 매일같이 작은 전등에 의존해 목숨을 담보로 갱도로 들어갔던 광부의 생활과 가족들의 삶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일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숙연함까지 갖게 한다.

광산촌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시설 중의 하나는 채플이다. 늘 위험에 노출된 광부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삶에서 종교적 믿음과 신념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위안을 제공해주었을 터이다. 광산촌 한켠에 자리한 조그만 채플은 이들에게 어느 화려하고 웅장한 대성당 못지 않은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3개 학급에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광산촌 학교는 광산마을의 어린이 교육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역 특성상 안전 등과 관련해 매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진 비미쉬 학교는 당시의 교과과정을 토대로 주변 지역 학생들이 반나절이나 하루동안 동일한 체험 교육을 받는 장소로 현재 활용되고 있다. 학생들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하기에 이보다 좋은 효과가 어디 있을까.

한편 광부와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사택은 당시 광산 노동자의 삶을 고스란히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당시 더람 지역에서 광부들이 경제적으로 못 사는 계층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삶을 산 것도 아니었다. 비미쉬 박물관의 광부 사택에 비치된 가구와 가재 도구들은 소박함이 묻어나는 광부 가정의 모습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은 집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음식은 주로 무엇을 먹는지 등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고 나면 새롭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오래전에 생선을 먹지 않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는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몇 주, 심지어는 한두 달이 걸리기도 하는데 그동안 가족들은 아버지의 안전을 걱정했고, 그렇게 해서 잡아온 생선을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돈을 주고 석탄을 배달시켜서 편안하게 집안을 따듯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석탄 자체가 큰 관심의 대상일 수 없고 딱히 그럴 필요도 없을 듯싶다. 그러나 그 석탄을 채굴하려고 매일 컴컴한 갱도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둔 가족들에게 석탄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미쉬 박물관의 광산촌은 비록 자신과 무관한 광부들의 모습일지라도 한 시대를 살았던 옛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박물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넘어섰다.

현재 비미쉬 박물관에서 살고, 일하는 주민의 상당수는 그 옛날 광부의 가족들이다. 일부는 오래전에 마을을 떠났다가 비미쉬 박물관으로 이 지역이 활기를 되찾자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다. 비미쉬 박물관은 한때 영국을 대표하는 탄광 마을을 재현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비미쉬 박물관이 진정으로 재현한 것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탄광 마을의 ‘자부심’이다. 역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유적이나 건물을 가진 지역 주민들만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이 살았던 지역에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다. 더구나 21세기인 지금 광산 지역은 나라와 지역을 불문하고 기록만 남았을 뿐 어느덧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광부로 보냈다는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옛날 광부로 살았던 것을 부끄러워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손에 깊이 배인 검은 석탄가루 흔적을 감추려고 사람들과 악수를 꺼려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광부였던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나는 지금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역사의 한 부분에 나의 삶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절망 속에 피어난 희망의 꽃

인류가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을 건립하는 이유는 결국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분명히 소중하고 값진 일인데 박물관은 단지 간접 체험을 제공할 뿐 직접 체험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박물관이 가진 치명적 한계는 당시의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고, 이는 곧 과거를 기억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에킨손이 그토록 줄기차게 ‘야외 박물관’의 건립을 주장했던 것은 바로 당시의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산 세대의 삶을 체험하는 것은 곧 우리의 뿌리를 살피는 작업이다. 더군다나 비미쉬 박물관과 같이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산 광부들의 삶을 조명하는 광산 마을은 신기함을 넘어 진한 감동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을 연 지 40년이 넘은 비미쉬 박물관은 여전히 해마다 수십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