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 나 오래된 스코트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1994년 탐사전문 작가 송준 씨가 펴낸 시인 백석의 평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은 백석 연구의 초석을 놓은 역작이었다. 푸른 색 표지의 상하 두 권으로 나온 그 책은 우리들의 뇌리에 추상화에 머물던 시인 백석을 생생한 인간으로 복원했다. 시인을 추상화로 고착시킨 것은 다름아닌 남북 분단인데, 작가 송준은 그 경계를 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지난해에 3권짜리 ‘완결판’ 평전과 1권의 백석 시 전집을 탄생시킨데 이어 올해에는 백석이 번역한 번역시집까지 출간했으니 그 노고와 열정이 놀랍다. 백석을 기리는 자, 저자 송준 씨에게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백석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을 10여 차례, 러시아를 다섯차례 이상 방문했다. 시인의 체취가 가장 깊게 남아 있는 이국 땅 일본에도 그 이상으로 방문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백석이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유학한 일본 청산학원(靑山學院)을 다섯 번 넘게 방문해, 재학 당시 백석의 성적표 사진까지 찍는 데 성공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20년에 걸친 백석 연구에 바친 돈이 1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평전과 전집을 팔아 그 비용을 회수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저자는 그렇게 시인 백석을 사랑했다.

1994년 판이 갖고 있지 못한 미덕이 바로 제3권에 펼쳐진다. 3권에는 북한 정주 이후 백석의 삶이 소상히 그려졌다. 그가 6·25 당시 두문불출한 채 외국 시 번역에 몰두했다는 이야기며, 동시와 동화에 작가적 역량을 집중했던 일, 그리고 집단농장에 내려가 평생 해본 적이 없는 육체노동을 했던 저간의 사정이 소상히 기록됐다.

1963년 사망했다는 설을 뒤집고 1996년까지 살아 85세의 천수를 누렸던 것도 밝혔다. 그가 1959년 함경남도 북서단의 삼수군(삼수갑산의 그 삼수군이다)의 집단농장으로 배치돼 양 치는 일에 종사했다는 이야기도 새롭다. 백석은 축사에 덮인 눈을 쓸고, 바닥에 쌓인 분뇨를 치웠다.

백석은 삼수에서 농사일을 할 줄 몰라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농장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음은 불문가지다. 밭갈이를 하는 데 호미로 농작물의 뿌리를 파헤치는가 하면, 어설픈 행동으로 지적을 받고 작업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는 아무도 안 보는 달밤에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 연습을 했다. 백석을 동정한 이웃의 권유로 한밤중에 개인지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석은 삼수에서 37년을 살다, 그곳에서 사망했다. 천애고도에 유배를 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사망 전까지 매일매일 글을 쓰며 보냈는데, 정작 죽기 직전에는 “모든 원고를 불 태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북에서 발표하지 못한 번역이나 창작물이 모두 불태워졌다니 허무한 운명을 타고 난 시인이다.

현재 백석의 부인과 자식들은 함경도와 자강도에 살아 있으며, 장남은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모두 이 치열한 탐사 작가 송준이 밝혀낸 사실이다. 쓸쓸한 백석의 죽음을 떠올리면 일본인 친구 노리다케 가쓰오에게 보낸 그의 시가 생각난다.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트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질 또한 불행해질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1943. 백석 ‘나 취했노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