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가 만난 현대사의 걸물⑥ - “7·4 공동성명 3원칙 중 왜 민주통일 항목 빠졌는가”

재일 <통일일보> 발행인 이영근




이영근(1919∼90) 씨는 1958년 진보당사건 때 일본으로 망명, 일본어 일간지 <통일일보>를 발간한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진보계 인사 중 한 사람이다. 5·16 직후 억울하게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죄목은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신문을 발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이영근 씨의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해, 그가 간첩이 아님을 확인한 바 있다. 남재희 전 장관은 이영근 씨의 동향(충북 청주) 후배로 1960년대 말 이후부터 20여 년간 깊이 교유해, 이씨의 삶과 사상을 증언할 거의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우인(雨人) 송지영 씨의 소개로 창정(蒼丁) 이영근 씨를 알게 되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같이 있으면서 나는 우인의 아낌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여배우 윤정희 씨의 여의도 집에 초대를 받고는 나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그는 나중에 요식 행위일지 모르지만 윤정희 씨와 백건우 씨의 중매도 섰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소설가 김학철 씨와 함께 광복을 맞은 그는 한학자·소설가·언론인으로 마치 <수호지>의 지도자 송강과도 같이 통 크고 발이 넓다. 송강의 별칭이 급시우(及時雨)인데, 송지영 씨의 아호 우인(雨人)도 거기서 한 자를 빌린 듯하다. 그는 나를 과대평가하여 창정에게 추천한 것 같다.

도쿄(東京) 궁성에서 가까운 아카사카(赤坂) 뒷골목에 자리잡은 아주 작은 4층 건물에 일본어로 나오는 한국계 일간신문 <통일일보>의 편집부가 있다. 거기서 이영근 사장과 함께 승용차로 하코네(箱根)로 드라이브. 산맥 속에 아주 큰 호수가 자리 잡고 작은 기선도 있다. 기선을 타고 반대편 마을로 선유. 경관이 수려하다. 일본식 큰 농촌집 같은 온천여관으로 간다. 외부는 시골풍이지만 내부에는 현대적 편의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다. 방마다 독탕이 있는데도 대중탕으로 간다. 온천 맛은 역시 대중탕이란다.

방으로 올라오면 일본식으로 독상인 주안상이 준비되어 있다. 유카타(浴衣)만 입고 마주한다. 팬티가 없으니 서로 중요한 부분이 언뜻언뜻 보인다. 그리고 서울의 정세를 걱정한다. 그는 해방 직후의 정계에서 활약했었기에 정치의 상황이 그때와 같은 것으로 느끼고 분석한다. 1970년대 초의 신문기자인 나로서는 당혹스럽다. 딴 나라 이야기 같아 실감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고난에 찬 망명생활을 생각하여 조용히 들어준다.

“우리의 양곡소요는 ◯◯섬으로 쌀이 ◯◯섬, 보리가 ◯◯섬 생산되지요. 우리가 존절히 아껴먹으면 식량자급은 될 것입니다.” 그는 ‘존절히’란 말을 자주 쓴다. 절용한다는 뜻. 식량문제에 아주 큰 비중을 둔다. “진보를 한다는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 운운하는데, 그거 서양 이야기가 아니오.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립 경제를 이루고, 남북이 통일을 하고, 오순도순 균등사회를 이루어나가야지요. 죽산(조봉암)이 사회민주주의자였다고들 하는데 그 노선은 두산(斗山·이동화)같은 동경제대 출신 학자가 만든 정책이지 죽산은 달라요. 그는 민족자립경제와 수탈 없는 경제평화통일을 주장한 민족주의자였어요.”

엄격한 도덕률 지닌 진보적 망명객의 초상

“박정희 대통령에 기대를 걸어요. 그는 한때 광복군에 몸담았지요. (일본 항복 후의 이야기다.) 박명근 의원 있잖아요. 그분의 삼촌 박승환 씨가 그때 같은 광복군 동지예요. 그래서 박명근 씨를 아껴 청와대에서 쓰고 국회의원 공천도 주고 했지요. 그러한 민족정신이 있는 분이니까 앞으로 기대를 걸만 하지요.” 해방 전후, 특히 이른바 해방공간의 정치담은 밤늦게까지 계속된다.

다음날 택시를 불러 달래서 아타미(熱海)역으로 가서 신칸센(新幹線) 고속열차를 타고 동경 야에스(八重洲)역에 도착한다. 평생 드물게 해보는 사치여행이었다. 저녁은 긴자 뒷골목의 일식집. 교(京) 요리라고 교토(京都)식 요리집이다. 마침 도쿄에 들른 송지영 씨도 합류한다. 단골인 듯 일본 옷의 여성이 단정히 앉아 봉사를 한다. 창정은 아주 천천히 하는 예의 바른 일본말로 그 여성을 존중하며 대우한다.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항상 근엄하다. 지사(志士) 기풍이다. 조국(일본에 있으니까 그렇게 표현한다)의 걱정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창정이기에 소설가 나림 이병주 씨와 처음에는 가까이 했으나 나중에 나림이 술에, 여자에 방탕을 일삼고 있음을 알고 난 후는 “국사(國師)급 인물이 일본에 와서 교포들을 지도는 못 할망정 그렇게 타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며 의절했다. 엄격한 도덕률의 적용이다.

창정은 국내의 독립운동 노선배들 10여 명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대접한 일이 있다. 유석현·김재호·권오돈·정석해·송남헌·박진목 씨 등등이다. 그들도 아마 나를 호강시킨 그런 코스가 아니었던가 한다. 절도가 있는 사치여행이다. 나는 근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글을 써서 그를 소개한 일이 있다. (2012.11.11 ‘개혁에는 정책에 앞서 프레임을 잘 짜야’).

“신문기자 생활 후반부에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이 있었다. 여기서 유신 자체를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때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정치적 경직사태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희생을 치르지 않고 지혜롭게 벗어나 정상적인 정치 발전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관심이었다. 물론 유신 반대 투쟁의 길도 있다. 그렇지만 온건론자들은 타협적인 모색을 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 비슷한 개헌 방향을 생각했다.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영예는 그대로 주면서 외교·국방의 권한만 맡기고 그 밖의 내치(內治)는 내각(그러니까 정당들)에 일임한다는 그런 방식이다. 꼭 드러내놓고 이원제(二元制)가 아니고 막연하게나마 범(汎) 국민적 운동체 같은 형식의 울타리는 마련하고서이다.

박 대통령의 오기나 체면은 살리고 저항을 적게 하면서, 그러면서 한 단계 정치 발전을 이룩하는 그런 편법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암암리에 여러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지적하면, 당시 일본에서 <통일일보>를 발행하던 이영근 사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동서로 CIA 파견 주일공사로 있던 최세현 전 고려대 교수를 통해 한국 정치의 중앙을 향해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유석현·권오돈·송남헌 씨 등 독립운동 계열의 인사들로 추진체의 명분상 핵심도 구성해놓았다. 실제로 박 대통령과의 면담이 이야기되었다고 하여 이영근 사장이 서울로 와서 얼마간 대기한 적도 있었다. 최 공사는 지금 미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증언을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나도 미력이나마 ‘유신 2년 유감’(<서울신문> 1974.10.10)에서 몇 년 안에 개헌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하고, ‘정치발전을 생각한다’(<정경연구> 1977년 9월호)란 논문에서 개헌의 방향을 구름잡듯이나마 제시했었다. 그리고 10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그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의욕도 갖고 있었는데 남은 기간이 짧았고, 박정희-차지철의 극단으로 경직화된 체제에서 그럴 틈이 전혀 없었다. 박-차의 벽을 뚫고 들어간 인사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권총 말고는. 이 이원집정부제 비슷한 착상(着想)도 프레임이다.”

이영근 씨의 이름이 언론에 여러 번 난 것은 5·16 후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을 혁명재판에서 다룰 때다. 결국 조용수 사장은 군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되었으며, 민주화 이후 재심에서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고 국가의 보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윤길중 씨의 자서전에서 이 부분을 인용해보자.

“이런 가운데 7·29 총선 때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경북 청송군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바 있는 조용수 군이 혁신계를 대변 할 신문사를 설립할 뜻을 가지고 혁신계 인사들과 의논 끝에 60년 11월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계 선후배와 진주중학 동문들을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펼치었다. 그런데 이 모금과정에서 자금을 후원해준 이영근(전 통일일보 회장) 씨의 자금 출처가 논란을 빚게 되었다.




▎4·19 직후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를 창간한 조용수 사장(앞줄 오른쪽에서 둘째)과 편집 간부들.
이영근 씨 자금과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죽음

즉 해방 후 죽산이 이승만 정권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던 시절에 그의 비서로 활동한 바 있었던 이영근 씨가, 1951년 12월에 대남간첩혐의로 기소되는 등 정치적인 모략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조총련계 자금으로 민족일보를 설립했다는 죄목을 날조하게 된 것이었다.

1958년 죽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구속되자 피신 중이었던 이영근 씨는 일본으로 밀항, 이강훈(현 광복회장) 씨 등 재일교포들과 함께 죽산의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으며 <통일조선신문>(현 통일일보 전신)을 발간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바로 이 ‘조봉암 구명운동’ 당시, 약관 22세의 나이로 일본에 가서 거류민단계의 기관지인 ‘민주조선’에서 편집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지내며 활동에 전념하던 조용수 군은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하는 이영근 씨를 만나 그를 존경하며 친근히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4·19 후 귀국한 조용수 군은 7·29 총선에 출마하여 진보적인 혁신사상을 지닌 평화통일 지향의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참신하게 엿보여주는 등 혁신계를 대변하는 신문사 설립에 정열을 쏟기 시작했다.

이 신문사 설립의 자금은 대부분 조용수 군의 진주중학 동문들과 민단계 인사들로부터 후원받은 자금이었으며 그중의 일부가 이영근 씨로부터 후원받는 자금이었다.”

좀 앞질러 말하자면, 이영근 씨는 1990년 별세 후 서울의 정부로부터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것 말고는 국내에서 이영근 씨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죽산의 뒤에서 참모를 했으며 일본에 망명한 후 거기서 활동하다가 고독하고도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서는 <한국일보>의 당시 고문인 김창열 씨가 그의 ‘토요세평’(1990.5.20) 칼럼을 한국일보 지면에 남겼다. 그게 드물고도 가장 자세한 정보일 것이다. 김창열 씨는 한국일보의 편집국장·주필·사장을 거친 언론인으로 그의 기록은 믿을 만하다고 본다. 오랜 자료 수집을 거쳐 쓴 칼럼으로 한편의 역사성있는 다큐먼트다.

독보적 통일론과 통 큰 처세로 큰 족적 남겨

“그의 죽음은 국내 신문에 사회면 1단 기사로 보도가 됐다. ‘동경에서 발행되는 통일일보 이영근 회장이 5월 14일 상오 1시52분 동경 국립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비교적 자세하게 그의 경력을 보도한 신문이라야 겨우 그가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의 비서실장으로 농지개혁에 깊이 간여했으며, 1958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창간했고, 조총련계 동포의 고국방문사업을 처음 구상했음을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그 10행 남짓한 짧은 부보를 감회 깊게 읽었을 독자가, 젊은 편집자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특히 우리 현대사를 아프게 살아온 세대, 그 현대사를 관심 있게 읽고, 통일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해본 사람 중에 오래도록 그를 기억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국내 식자들과의 교유 폭이 넓었고, 그가 겪은 우리 분단사의 아픔과 독보적인 통일론, 통큰 처세 등은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를 말하는 모든 사람이 이 점에서 일치한다.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런 전문(傳聞)에서 비롯됐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으므로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들은 것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다만 기구하다면 기구한 그의 정치경력과 활동을 들을수록 그에 대한 관심이 더했고, 글로써 발표된 그의 통일론을 읽은 감명이 지금껏 남아있음을 말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의 경력이 관심을 돋우는 까닭 중의 하나는 그의 정치적 입지와 정견의 남다름이다. 그는 여운형의 해방 전 항일지하조직 ‘건국동맹’의 창설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고, 여운형이 이끌던 건준(建準)의 26세 청년지도자였다. 굳이 색깔을 구분하자면 중도좌파, 그보다는 왼편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광복 후 정국에서 반탁운동에 앞장섰고, 단정(單政)에 대해서는 ‘오직 제주도 하나만으로도 주권국가를 세워 군정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처럼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그다운 민족주의가 그와 조봉암의 접점이다. 이 인연으로 해서 그는 잠시의 비서관 생활을 지내고, 후에 진보당으로 결실이 되는 반(反)이승만 신당운동에 참여,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구형받기도 한다. 그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병보석 22개월 만에 일본으로 탈출한다. 조봉암의 처형은 그 이듬해 1959년이다.

일본에 발붙인 뒤 그의 활동은 통일이론의 정립과 그 실천으로 요약될 수가 있다. 망명 이듬해 <통일일보> 전신인 <통일조선신문>을 창간, 4·19 뒤 국내 <민족일보> 창간 주도, 민주조국통일회의 등의 조직활동, 통일학원 등의 교육활동이 그 두드러진 것들이다.

이 같은 그의 초기 활동은 국내에서 보아 위화감을 줄 만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의 통일론은 결국 북의 통일정책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비판하는 데로 귀결이 되고, 아주 정밀한 이론적인 틀과 실천의 명제를 갖추기에 이른다. 그 스스로의 말을 빌면 통일이론의 과학화란 것이다.

그의 통일론은 그가 발행해온 월간잡지 <통일> 창간호(1972년 3월)에 실린 그의 글 ‘통일의 개념 정립과 통일 후 국가상의 범주’, 같은 잡지 제2권 제1호19(73년 1월) 이하에 연재한 ‘민주조국통일론’에 잘 집약돼 있다.

요컨대 그 줄거리는 통일이란 ▷남북분단 장벽의 제거 ▷통일정부 수립 ▷민족동질성 회복에 이르는 것이며, 이 과제는 ▷남북의 통일지향 ▷교류 등 분위기 조성 ▷통일 실현의 단계를 거쳐야 풀 수 있다. 여기에는 온 겨레의 민주적·자주적인 참여총선거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면한 귀결로 4·19 뒤 학생들이 폈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의 통일운동, 임수경 양 방북, 연방제통일안, 북의 남북·미 3자회담, 우리 정부의 4자회담·6자회담론도 다 비판대상이 된다.

▎1 1972년 5월 2일 평양을 극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 가운데는 이후락 부장의 카운터파트였던 김영주 당시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2 1976년 4월 조총련계 동포 모국 방문 당시 김포공항에서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



통일 이후의 ‘국가상’ 제시한 선견지명

물론 이 같은 그의 통일론에 대하여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의 통일론이 보여준 통찰력과 선견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앞에 든 두 글이 1972년 남북 7·4 공동성명을 전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7·4성명 전에 쓴 글에 ‘통일 후 국가상’을 자세히 언급한 것이 돋보인다.

그가 그린 ‘통일 후 국가상’은 ▷통일 전 행위에 대한 보복금지 ▷독재 배제 ▷경제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국유·공유·사유의 병존 ▷자주외교 ▷민족동질성 회복까지 연립정부 등이다. 이 역시 세부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으나, 그의 주장이 남북 간의 흡수통일을 부인하고, 통일로의 접근 가능한 ‘국가상’을 제시한 것은 틀림없다. 6공화국의 7·7선언이 그 같은 비전 제시가 없는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혼란을 빚었고, 그 때문에 ‘무조건 통일’, ‘통일지상’의 기풍이 생겨 공안위기를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이 글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맥락은 같은 것이지만, 7·4성명 이듬해에 쓴 ‘민주조국 통일론’에 이어 성명이 밝힌 통일 3원칙에 자주·평화·민족단결만 있고 민주통일의 원칙이 빠졌음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 역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민주원칙을 뺀 3원칙만으로 하면, 북의 남조선혁명도 가능하고, 남북 당국 간 야합에 의한 통합도 가능하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비판의 이론적인 설명은 상당히 길지만, 그보다는 서울까지 흘러들어온 다음의 에피소드가 그 비판의 타당성을 더 잘 입증해준다. 그것은 평양을 찾아간 이후락 밀사가 통일3원칙을 수락했다는 보고를 들은 김일성이 “그 사람 술에 취한 것 아니냐”고 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북의 대남총책 김중린이 제3국민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북이 7·4공동성명의 3원칙을 성전 모시듯 되뇌는 까닭을 알 만하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읽어보아도 그의 통일론은 매우 신선하다. 그의 통일론은 오늘의 남북 상황에서 그 값을 더해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창열 씨의 칼럼에서는 이영근 씨를 여운형 씨가 구성한 건국동맹의 창설 멤버로 적었는데 나와 여러 번의 만남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건국동맹이 구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름만 있고 실제 활동이 거의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진보당의 학생·청년조직 ‘여명회’가 진보당사건 재판과정에서 떠올랐다. 그 회장은 나와 비교적 가까웠던 권대복 씨다. 그는 국학대(나중에 우석대를 거쳐 고려대에 합병)에 다녔는데 영등포학생회라는 것을 만들어 내세웠다. 그때만 해도 영등포가 서울과는 다른 변두리였기에 그런 학생회도 가능했을 것이다.

권대복 씨가 조직했다는 여명회는 다만 이름뿐이었던 것 같다. 그가 만들었던 영등포학우회를 중심으로 국학대학의 학우들을 얽어매고, 신범식 씨가 주도하던 사회문제연구소에서 사귄 친구들을 끌어넣은 정도였을 것이다. 기간을 볼 때도 그 정도라고 여겨진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 운동에 진력한 이유

4·19 전후로 하여 서울문리대의 신진회(新進會)가 유명했고, 서울법대의 신조회(新潮會)도 있었다. 내가 관계했던 신조회는 몇 번 모임을 가진 정도다. 조직체로서의 정체성이나 소속감의 형성은 요원했다. 그리고 이름만 걸었던 회원도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신조회와 자매조직인 신진회도 대동소이했거나, 아니면 약간 나은 정도가 아니었나 짐작한다.

그런 것을 정보기관에서는 엄청난 것으로 상부에 보고한 것 같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 때 조재천 법무장관이 국회에서 학원에 큰 불순조직이 있는 것처럼 보고한 것을 기억한다. 올챙이들을 왕두꺼비나, 과장해서는 공룡처럼 본 것 같다. 다만 이들 모임은 당시 서울문리대 정치학과의 민병태 교수가 소개한 영국의 페비아니즘에 영향을 받고 그 사상을 따른다고 했다. 최근 김학준 교수가 <공산 민병태 교수의 정치학>이란 책을 냈는데 좋은 참고가 된다.

나는 건국동맹도 그 전 차원에서 생각한다. 몽양이 만들기는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활동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러기에 이영근 씨는 건국동맹 이야기를 전혀 안 했다. 다만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산하에 조직된 치안대 이야기는 거듭거듭 이야기하며 그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해방 후 우선 치안을 유지하는 일이 대단히 급했고, 그 일을 치안대가 맡았는데, 그때는 전선에 가있던 학병들도 귀국하기 전이니, 우선 유도사범들이 핵심이 되어 치안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유도사범 장권(張權·YMCA 체육부 간사) 씨가 중심이었다는 설명이다. 창정은 그 치안대 창설에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설명이 아주 구체적이다. 그러니까 여운형계는 맞다.

그리고 젊은 동지들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전력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거듭거듭 이야기한다. 그때가 그의 활동의 절정기인 것 같다. 구체적인 기록도 남겼다. 해방정국의 이해를 위한 좋은 자료다. 당시 미군정의 적극적인 뒷받침도 있고 하여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 박사 간의 좌우합작운동이 매우 활발했으니 이해할 만하다.

그 후 몽양에서 죽산으로 옮겼는데 거기에 관한 설명은 못 들었다. 몽양이 괴한의 총탄에 의해 변을 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한다. 여하간 그는 죽산이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을 때 그의 최측근 정치참모로 활약했다. 창정이 비서실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비서실장은 아니고, 그렇지만 그는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죽산이 정당을 만들 수 있는 기초 작업으로 농민조직에 착수하고, 농민신문을 구상하는 등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권력에 의해 구속된다. 그 이야기는 앞에 나왔다.

죽산이 진보당을 창당할 때 창정은 병보석 중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진보당사건이 일어난 1958년에는 서울의 한 병원에 있었다. 윤길중 씨의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진보당에 검거선풍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이영근 씨로부터 들은 박진목 씨가 죽산에게 당분간 망명하도록 권유했을 때도 죽산은 죄도 없이 왜 도망가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진목 씨는 죽산에게 인도 행을 권했다고 한다. (죽산이 진보당에서 남로당계는 배제했기에 그는 당원은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잘 납득이 안 되겠지만 그때는 인도가 동서대립에서 제3지대, 또는 제3의 길처럼 여겨졌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도 주인공이 인도 행을 택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

죽산에게 검거선풍을 경고한 창정은 곧바로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이종률 씨(4·19 후 <민족일보> 초대 편집국장)에게 밀선 비용을 변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한다. 밀선을 빌리려면 운임 말고도 발각될 때 배를 몰수당하므로 그 위험부담까지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우선 오무라(大村)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재일교포 유지들이 힘을 써서 석방되고 체류 허가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그를 도와준 이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강훈 씨와 원심창(元心昌) 씨 등이다. 빈손으로 일본 땅에 망명하여 일간신문인 <통일일보>를 발행한 것은 대단한 성공담이다. 그만큼 그가 유능했다는 이야기다. 비상한 인물이다. 그는 경복고(그때는 제2고보)를 나온 후 연희전문에서 홍이섭·이용희 교수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의 친형은 한민당계의 제헌의원인 이만근 씨다.

일본에서 우선 죽산 구명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을 규합하여 민족·통일운동을 일으켰다. 이 청년학생 운동에서 만난 동지들이 나중에 <통일일보>의 간부가 된다. 이승목(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 동기) 씨는 편집국장에서 사장이 되고, 황명만 씨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거류민단의 사무국장으로 옮겼다.

또 손성조 씨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개인사업을 하여 나중에 창정이 별세하자 도쿄 교외에 있는 절 경내에 가족납골당을 마련하는 등 힘을 썼다고 한다. 현재도 <통일일보>는 한·일 간 가교 역할 및 재일동포 권익을 옹호하는 민족지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사장은 강창만 씨로 1960년대부터 <통일일보>와 인연을 맺어 이영근 선생의 비서실장과 영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창정은 죽산의 잔혹한 사법살인을 보았기에, 더구나 망명한 몸으로, 처음에는 남과 북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들어 남쪽 정부 지지를 분명히 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철저한 서울정부 옹호파가 되어 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선봉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정부도 그 신문을 대량으로 구독하는 방식으로 도와주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비밀리에 갔다 와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을 때 그 3원칙이 자주·평화·민족단결이었고, 거기에 민주의 원칙이 빠졌다고 지적하며 비판한 것이 창정의 <통일일보>다. 정확한 지적이다. 왜 민주원칙이 빠졌는지 모를 일이다.

창정의 정치감각은 대단히 현실주의적이다. 그에게 허튼소리가 전혀 없다. 실사구시의 리얼리즘이다. 그는 힘의 소재를 중시했다. 그러기에 주 일본 한국대사관측과 접촉함에 있어서 특히 중앙정보부(KCIA) 파견관들을 주목하고 유대를 강화했다.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모국방문도 그의 발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반에 알려지기로는 KCIA 주일공사, 오사카 총영사였던 조일제 씨의 제의로 되어있으니 정확히는 모를 일이다.(통일일보 측에서는 조총련 동포 모국방문 사업구상은 이영근 선생이 1975년 초 조일제 씨에게 제안했고 그해 9월 실현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의 진보당에 대한 비판은 결국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1970년대 후반 일본 벳푸 온천에서 만난 소설가 선우휘 씨(왼쪽), 이영근 씨(가운데), 마라토너 손기정 씨.
이데올로기, 이념 둘러싼 분쟁에 강한 거부감

여기서 이영근 씨의 입장은 짐작컨대, 청곡의 생각을 이해하기는 하나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R대령의 현실감각이랄지 지혜를 따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와의 많은 대화를 종합해보면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식민지 하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에 따른 좌우익간의 처참한 싸움을 몸으로 겪고 그 어리석음을 느낀 사람이다. 그리고 좌우합작 운동에 헌신하면서 좌우합작의 이론적 근거를 모색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것이 아마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실사구시의 태도일 것이다. 현실에 바탕하여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기본정신이랄까 원칙은 민족, 또는 민족주의이다.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는 정책은 허황될 수가 있다. 또 잘된다 하더라도 현실에 바탕하여 출발한 정책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에 따른 좌우익 간의, 서로가 서로를 부인하는 싸움은 무익하고 무모하다. 서로가 민족의 바탕에서 실사구시로 우리 민족이 잘 살아나갈 길을 모색하면 된다.

그는 그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한 듯하다. 따라서 죽산은 진보당을 만듦에 있어서 민족통일, 민족자립경제, 대동사회 등 민족주의적 정책만 내세우면 되었지 굳이 사회민주주의 운운의 또 다른 외국서 수입한 이데올로기를 내세울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운운은 죽산의 생각이 아니라,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유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한 두산 이동화 씨가 정강·정책 기초를 주재하면서 죽산이나 진보당에 덮어씌운 것이다. 두산을 아주 오래 사귄 나로서도 사회민주주의 운운은 두산이 죽산에게 입력한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거기에 역시 동경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문리대 교수를 지낸 신도성(나중에 통일원 장관) 씨도 정강·정책 기초에 참여하여 역할을 했다고 본다.

여하간 창정은 이데올로기 운운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사회민주주의 운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 번 그런 거부의 표현을 들었다. 그렇지만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쳐 사회민주주의가 진보당의 이념처럼 되고, 진보당에 참여했던 정태영 씨가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사>를 쓰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찬반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농업 중심의 사회이고 공업화는 매우 초기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계급분화가 거의 안 된 때) 이데올로기에의 얽매임에 이의를 제기한 창정의 생각을 수긍할 만하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달리 말해 현실을 바라보는 일종의 ‘작업가설(作業假說·working hypothesis)’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실에 바탕하여 정책을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 쌓여서 작업가설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된다.

창정은 또한 죽산 조봉암 씨가 동암(東庵) 서상일 씨와 헤어진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비판했다. 자유당 정권의 4사5입 개헌 후 호헌(護憲) 신당운동이 있을 때, 김준연·조병옥 씨 등과 대립하면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주장한 이른바 민주대동파가 동암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후 죽산과 손잡고 진보당을 만들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결렬되어, 동암과 이동화 씨 등은 민주혁신당으로 나뉘어 나갔다.

동암은 한민당의 8총무 가운데 경북을 대표하는 총무로 보수의 본류였다. 죽산이 그 보수 본류인 동암과 굳건히 손잡았더라면 이승만 정권이 감히 사법살인의 음모를 꾸몄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진보당 안에 확고한 큰 파벌을 이룬 함경도파(흔히 약수동파라 한다)가 동암을 배제해버렸다고 판단했다.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반동분자’ 운운하며 모욕을 주었다는 구체적 사례까지 예시했다. 함경도파로는 윤길중·이명하·김기철·전세룡 씨 등 주요 간부의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고 이들이 죽산을 에워싸고 있었다는 분석이다. 창정은 동암 한 분과 손잡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그들을 모두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정당은 큰 인물 중심이다. 예를 들어 YS(김영삼), DJ(김대중), JP(김종필) 등 한 인물의 비중이 얼마나 큰가? 그때는 더욱 그랬다. 창정은 죽산과 동암 두 사람이 손잡고 있으면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 아주 쉬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창정의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 죽산의 정치적 갈림길이었다.

창정의 <통일일보>는 박 대통령 말기에 가면서 박 정권 지지 성향을 더욱 분명히 했다. 청와대 핵심을 향하여 개헌 공작을 진행하고 있던 때이기도 하니 박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민이 보기엔 DJ에 대한 비판이 너무 심하다고 느껴졌다. 개헌공작 말고도, 혹시 한국 정부의 집단보급에 크게 의지하던 판매정책 때문인가, 아니면 오랜 망명생활 때문에 조국 서울의 국내사정에 관한 이해와 판단이 둔해진 탓인가.

청곡 윤길중, 이영근 영결식에 감동적인 추모사 남겨

나는 그 무렵 그를 만나고 와서 한 잡지에 ‘어느 재일 우국인사와의 대화’란 글을 쓰면서 “원거리에 따르는 미화(美化)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서울에서 가능한 미시적 관찰에서 얻어지는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간과하기가 쉬울 것이다”고 완곡한 표현을 써서 걱정을 했었다. 그가 암으로 별세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 분단된 조국을 계속 고민했고, 줄기차게 통일노력을 해온 한 망명 우국인사의 수난의 일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점차 그를 나의 정치적 멘토로 삼게 된 게 아닌가.

도쿄의 아오야마(靑山) 장의소에서 치른 그의 영결식에 국내에서는 윤길중·송지영·송남헌 씨 등이 참석했는데 나도 함께 갔다. 일본의 장례 절차는 우리와 다르다. 우선 가족만으로 화장을 하는데 그것을 밀장이라 한다. 그리고 열흘이고 그 이상 여유 있게 영결식 날짜를 잡아 지인들에게 연락한다.

아오야마 장의소는 아주 넓은 공간이었다. 꽃으로 장식한 벽면이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의 가야금에, 고인을 애도하는 창이 애절하다. 청곡 윤길중 씨는 참 감동적인 추모사를 했다. 그로서는 죽산을 그렇게 비극적으로 보내고 난 후 아마 그 다음으로 가슴 아픈 이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