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탐구 - 우향우 광풍이 戰後 사회적 합의 뒤집다

우리가 몰랐던 ‘일본인의 터부’


▎지난해 9월 1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3차전 응원석에 등장한 욱일승천기.



<악한론(惡韓論)>.지난 4월 말 출간 이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책이다. 타이틀을 처음봤을 때 인쇄를 잘못한 것이 아닌가 착각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한자를 기준으로 할 때, 악한(惡韓)이 아니라, 악한(惡漢)이 바르기 때문이다. 악한(惡漢)은 한국에서 사용하듯 악당, 불한당이란 의미다. 두 한자는 모두 ‘앗칸(あっかん)’으로 발음된다. 다른 한자를 동일한 발음으로 연결시켜 흥미를 이끌어내는 타이틀이라 할 수 있다. 악한론(惡韓論)은 ‘악으로서의 한국’에 관한 글이란 의미다. ‘한국=불한당(惡漢)’이다.

책의 타이틀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다. ‘아마존 일본(Amazon Japan)’에서의 판매 현황을 보면 종합 47위, 사회·정치부문 1위, 역사·지리 부분 1위를 기록하고 있다(6월 5일 기준). 수위를 차지하는 책의 대부분이 만화나 잡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교양서에 한정할 경우 사실상 톱에 해당된다. 보통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최하 10만 부 선에서 출발한다.

아마존 리뷰(Review)란을 보면 <악한론>에 만족한다는 글이 30여 개 올라있다. 만족도는 전체 5개 별 가운데 4.5개다. 책의 리뷰를 정독한 독자도 수천 명에 이른다. 한국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장한 인물은 무로타니 카츠미(室谷克実)다. <지지통신(時事通信)> 서울특파원을 지낸 인물로, 이미 한국과 관련된 책을 5권이나 출간했다.

오사카의 편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다”

과연 어떤 점이 한국을 악으로 규정하게 됐는지 대충 읽어봤다. 한국사회의 어두운 구석만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쓴 책이라 보면 된다. 단기퇴직자, 청년백수, 빈부격차, 대국지향, 학벌사회, 자살대국…. 책을 읽으면서 악한론 내용에 반발하기보다 작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앞섰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한국 역시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책 속에 한국이란 단어를 일본으로 바꾸면, 일본인이 겪는 현재의 상황과 큰 차이가 없는 이슈들이다. 불완전한 자본주의 체제와 룰도 없이 흘러가는 글로벌 시대의 모순들이 한국은 물론 일본·미국·유럽 등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한 상황에 처한 일본이 한국을 악이라 규정하면서 왈가왈부한다는 게 너무도 유치하다.

5월 28일 보도된 오사카(大阪)의 한 아파트에서 발견된 모자(母子)의 시신은 적어도 일본이 한국의 빈부격차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본보기다. 숨진 지 3달 만에 발견된 모자의 머리맡에 일기가 발견됐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먹고 싶다.” 경찰조사 결과 모자는 기아로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통장에 20엔이 전 재산이다. 그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극단적인 가난과 무관심이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한복판 아파트에서 벌어진 것이다.

일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추악한 한국인(醜い韓国人)>이란 책이 있다. 한국인을 가장한 일본인이 쓴 책이라고 알려져 화제가 됐던 책으로 1993년 출간됐다. 내용을 보면 조선이나 한일관계사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 본 서적으로, 결론은 ‘한국이 싫다’이다. 제목에서 감이 잡히듯 ‘혐한(嫌韓)’이 핵심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일본 도쿄 긴자 서점을 장식한 혐한류 만화책(왼쪽). 지난 4월 출판이래 베스트셀러로 자리한 <악한론> 표지.
책이라 불리기에도 어려운 조잡한 수준이지만, <악한론>과 비교해볼 때 우위에 선 것이 하나 있다. 악, 선과 같은 절대적 기준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싫다, 좋다라는 감성적 차원에서 다룬 책이다. 싫고 좋고는 자유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든다고 상대를 악으로, 반대로 자신을 선이라 규정하는 것은 도리를 넘어선 것이다. 악한론은 선(善)의 입장에서 선, ‘선일론(善日論)’에 근거한 것이다. 얼마나 천박한 발상인가?

<악한론>이 베스트셀러라는 사실과 관련해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책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편향되고 섬뜩한 타이틀을 단 책이 베스트셀러로 부상해 일본사회에 파고 들어가게 됐는지?’ 쇼킹한 제목과 글로 사람의 이목을 끌려는 것은 베스트셀러를 노리는 자연스러운 꼼수다.

그러나 그같은 꼼수에 대해 일본인들은 양손을 들어 환영하고 있다. 아마존 리뷰에서 486명이 읽어 474명이 좋은 참고가 됐다고 말한 글의 타이틀을 보자. ‘좋다 싫다를 논하기 앞서, 한국이 왜 악인지를 입증해준 책(好 or 嫌の前に「悪」であることを立証した本)’. 일본 독자들이 어떤 자세로 <악한론>을 대하는지 알 수 있다.

섬뜩한 제목의 <악한론>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최근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우향우 바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지난달 <월간중앙>에 기고한 ‘공기론(空氣論)’에서도 강조했지만, 일본인을 우(右)의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공기가 현재 일본 전체에 만연해 있다. 공기는 열풍(熱風)으로, 이어 광풍(狂風)으로 이어진다.

<악한론>을 읽은 뒤 느낀 첫 인상은 쉽게 말해 ‘갈 데까지 갔다’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더 이상 한국을 나쁘게 말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간 책이 <악한론>이다. 필자가 아는 한, <악한론>은 지금까지 출간된 한국관련 서적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판단된다.

책을 낸 신쵸신쇼(新潮新書)는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유명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출판사다. 최고 출판사가 이웃 나라를 악으로 규정한 책에 손을 댄 것이다. 주간지 수준의 3류가 아니라 1류의 도움으로 역대 기록을 뛰어넘는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것이다.

준(準)외교시설 혹은 대부업 핵심 조총련

<악한론>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 그동안 지켜지던 ‘암묵의 약속’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됐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관련된 터부다.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은 한국을 욕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받아들여진다. 독도, 종군위안부 문제처럼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왜곡 발언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주목할 부분은 왜곡 발언이 이뤄진 출처다. 입으로 먹고 사는 정치가를 논외로 할 경우, 만년 삼류 논객이나 한물간 인물들이 ‘깜짝쇼’처럼 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한국 신문에 크게 보도되는 것과 달리 사실 일본에서는 거의 취급되지 않는 ‘이불 속 잠꼬대’ 정도에 그친다. 파급력이나 영향력도 거의 없다. 적어도 주류(主流)에 속하는 인물이나 조직이라면 한국을 적대시하는 발언이나 감정을 표면화하지 않는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한국과 여러 가지로 얽혀 있고, 한국에 가한 부끄러운 비행(非行)들을 새삼 거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끄집어낼수록 결국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진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에 들어간 때는 1945년 8월 8일이다. 이후 8월 26일까지 무려 57만의 일본군을 포로로 잡아들인다. 이들은 이후 악명 높은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 생활에 들어간다. 송환될 때까지 5만4000여 명이 사라진다. 대부분 기아나 병으로 사망하지만 내부의 일본인에 의해 살해된 사람도 결코 적지 않았다. 살기 위해 벌어진 수용소 내에서의 잔인한 행적은 시베리아 억류 포로들이 결코 입에 올릴 수 없는 ‘터부’다.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 관한 얘기는 소설에서나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귀환 군인은 일생 동안 침묵으로 일관한다. 말할 경우, 살아남는 과정에서 이뤄진 끔찍한 행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일본 지식인이 입에 올리기를 주저하는 터부로 자리 잡아왔다. 베스트셀러 <악한론>은 그러한 터부가 일본의 주류사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우향우 열풍은 한국 관련 터부를 전면적으로 뒤집는 배경이 되고 있다. 금기시 되던 얘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악한론에 이어 터부에서 벗어난 가장 큰 이슈는 조총련이다. 그동안 조총련은 일본 사회가 터부시하는 단체 중 하나였다. 잘 알려진 대로 도쿄의 조총련 중앙본부에 대한 차압이 지난 2007년 이뤄졌다. 조총련이 빌린 627억 엔의 공적자금 회수가 불가능해지면서 차압에 들어선 것이다. 차압만이 아니라 그동안 면제돼왔던 각종 세금 추징도 2006년부터 시작된다.

조총련은 1955년 5월 설립 이후 비과세 특별대우를 받아왔다. 이유는 준(準)외교시설이라는 명분이다. 조총련만이 아니라 북한 국적을 가진 기업이나 개인도 법인세·소득세·주민세에 관한 특별대우를 누린다. 조총련만이 아닌, 한국계의 민단도 대부분 비슷하다. 반한운동에 나서는 일본인들은 조총련과 민단이 누려온 세금면제 관행을 ‘재일특권(在日特權)’이라고 비난한다. 세금징수와 조총련 본부 차압은 그동안의 관행을 한순간에 무시하는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왜 일본이 조총련에 특권을 부여했는지가 궁금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본 패망 직후인 전후 혼란기에 이뤄진 단기적인 방침이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라 보면 된다. 전쟁 때 수난을 당한 한반도 출신자를 상대로 한 마이너리티(minority·소수자) 우대정책이 세금면제나 감면과 같은 형식으로 발전됐다.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 조총련의 검은 비즈니스가 일본 정계를 꼼짝 못하게 만들면서 나타난 결과라 볼 수도 있다. 일본에서 파친코와 대부업의 핵심은 조총련계다. 이들이 뿌리는 정치자금이 자민당 구석구석에 미치면서 결국 조총련이 무소불위의 조직으로 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전후 일본 교육계와 미디어를 장악한 쪽은 좌파들이다. 이들은 국제적 연대라는 차원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주장한다. 조총련이 괴물로 성장하게 된 이유다. 중국문화혁명과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일본 좌파가 조총련의 기반이 된 셈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로 방향을 틀면서 일본 좌파들의 반한운동도 활발해진다. 당시 한국 지식인의 대부분이 일본 좌파의 논리를 통해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2007년 12월 새해를 앞두고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일본 왕실의 가족사진. 앞줄 가운데가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



70년 된 마이너리티 차별 금지도 깨지나

결국 조총련은 일본의 터부로 자리 잡는다. 조총련을 나쁘게 이야기하거나, 세금을 둘러싼 각종 특권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금기시된다. 아무리 떠들어도 신문이나 방송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다. 조총련으로부터의 협박과 항의가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조총련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는 것은 과거 일본이 행한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불쌍한 조총련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비난하고 괴롭히느냐는 것이 터부의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터부는 재일 한국인에게도 적용된다. 형사·민사 사건으로 법의 심판을 받는 범죄자의 경우 한국식 이름을 공표하지 않는 것은 터부의 내용 중 하나다. 한국식 이름을 밝힐 경우 마이너리티를 차별한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 해도 용의자로 오른 인물일 경우 일본 이름으로 보도한다.


▎일본의 국민가수이자 재일동포인 미소라 히바리(왼쪽)와 프로레슬링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역도산.
2005년 발생한 성신(聖信)중앙교회 목사가 일으킨 성범죄가 좋은 예다. 신흥종교단체의 사이비 목사에 의해 7명의 소녀가 성폭행을 당한 사건으로 당시 일본에 크게 보도된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킨 인물은 김보(金保)라는 이름의 재일 한국인이다. 국적이 한국이다. 그러나 당시 신문·방송에 알려진 이름은 ‘나카다 타모츠(永田保)’라는 일본인 이름이다. 재일 한국인에 차별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한국식 이름을 공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재일동포에 대한 터부로 탤런트, 운동선수와 같은 예체능계 인물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 예체능계에서 재일동포의 활약과 지명도는 상당히 높다. 예를 들어, 일본의 국민가수에 해당되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와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같은 인물이 재일 동포 리스트에 올라간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예체능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통 예능계에서 재일동포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예 처음부터 국적이 한국이나 북한인 경우. 둘째, 예체능계에 들어서기 직전에 일본에 귀화한 경우. 셋째, 부모가 이미 귀화한 상태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일본국적을 가진 경우. 일본 매체들은 모든 범주의 재일동포를 다른 일본인과 똑같이 대한다. 한국식 이름이 있더라도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한다. 동일한 권리를 누리는 평등이란 시각으로 해석하기 싶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비즈니스 때문이다.

일본의 예체능계는 개인 중심이 아니라, 프로덕션 중심이다. 회사 차원에서 탤런트·배우·운동선수가 배양된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절대로 혼자서는 활동할 수 없다. 회사에 취직하는 것처럼 프로덕션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으면서 활동한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연예인의 99%는 일본 프로덕션과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 일본은 예체능계조차 개인이 아닌 조직이다. 프로덕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만하는 것이 일본 예능계의 현실이다.

재일동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방송국과 프로덕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일본은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듀서보다 바깥의 예체능계 프로덕션의 힘이 더 세다. 방송국 출신 프로듀서가 프로덕션에 들어가 디렉터로 일하고, 방송국 프로그램 자체도 외부 프로덕션이 직접 만든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밝힐 경우 일본 국민이 결코 고운 시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970년대 NHK 연말 홍백전(紅白戰)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한 야마구치 모모에가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만약 야마구치 모모에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피해는 본인만이 아니라 스타 가수를 키운 프로덕션에게도 밀어닥친다. 결국 프로덕션과의 관계를 고려해 재일동포 배경에 관한 얘기가 금기시된다.


▎일본의 극우보수 정당인 일본유신회의 두 수장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왼쪽)과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 도지사.
하시모토 도루, 근본은 역시 못 속인다

재일동포 연예인들의 뿌리에 관한 얘기는 방송 관계자는 모두 알지만, 불확실한 소문 수준에서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조총련에 대한 세금징수에서 보듯, 재일동포에 대한 터부는 최근 들어 획기적으로 풀려나고 있다.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이 한국 국적일 경우 일본 이름이 아닌 한국 이름을 그대로 전달한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것이라 보면 된다.

한국 성(姓)의 임(林)씨는 일본 성으로는 ‘하야시(林)’로 발음된다. 재일동포가 사건의 용의자로 오를 경우 종전의 경우 ‘하야시’로 발음했지만, 최근에는 ‘임’이란 한국식으로 부른다. 이름을 듣는 순간 재일동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연예인 재일동포에 대한 터부도 최근 들어 사라지고 있다. 젊은 탤런트의 경우 자신의 피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스스럼 없이 밝히고 있다. 신문·방송도 과거라면 ‘폭로’ 수준으로 보도했겠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단순한 팩트에 근거한 ‘사실 보도’에 머물 뿐이다. 연예인들이 귀화 3세대로 넘어간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이 약화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도쿄의 경우 7쌍의 신혼커플 가운데 한 쌍이 국제결혼을 통한 관계라고 한다. 외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 연예인에 대한 차별은 곧바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차별이란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일본인보다 마이너리티 연예인을 더 찾는 게 국제결혼한 사람들의 심정이다.

마이너리티라는 위상을 결점이 아닌 장점으로 만든 대표적인 인물은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橋下徹)다. 최근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일본 주둔 미군에 일본인 매춘부를 만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성(性)과 관련된 실언들을 접하면서 일본인 대부분은 비슷한 생각에 도달한다. “역시 근본은 못 속인다!” 하시모토는 일본인 모두가 터부시하는 ‘부라쿠(部落)’ 출신이다. 부라쿠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실제 부라쿠 거주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자살한다.

일본에서 부라쿠란 가장 천대받는 집단촌을 의미한다. 에도(江戸)시대 때부터 만들어진 부라쿠는 가축을 죽이거나, 동물 가죽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구성된 곳이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백정이다. 불교를 믿는 일본에서 부라쿠는 필요악으로 남다른 차별을 받아왔다. 부라쿠 출신자는 함께 모여 살고, 결혼과 교제도 내부에서만 행한다. 재일동포가 차별받는다고 하지만 부라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 이하로 받아들이면서 아예 상대도 안 한다. 부라쿠 출신에 대해서는 말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일본인의 상식이다. 차별을 받을 경우 내부 결집력이 강화된다. 부라쿠 구성원에 뭔가 해를 입혔다가는 당대는 물론, 자손 3대까지 원한이 따라간다. 야쿠자(ヤクザ)의 보복 정도가 아니다. 사실 야쿠자의 핵심은 부라쿠와 재일동포다. 야쿠자 이상의 결집력을 가진 곳이 부라쿠다.

하시모토는 자신이 가진 부라쿠의 배경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패기만만한 일본 개혁안도 부라쿠 출신이어서 가능하다는 평도 받았다. 차별받고 살아온 부라쿠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하시모토 붐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여성과 성에 관한 수준 이하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성원을 보냈던 일본인들은 실망하게 된다. 완화되는 듯했지만 하시모토의 발언 때문에 부라쿠 출신에 대한 터부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시대와 상황이 급변한다는 것은 터부에 대한 일반인의 감각과 직결된다. 악한론에서 보듯 한국에 대한 터부가 사라지고 있는 반면, 기존에 지켜지던 금기사항을 한층 더 강화하는 분위기도 일본 전역에서 느낄 수 있다. 천황에 관한 부분은 아베정권 출범 이후 한층 강화되고 있는 터부다. 지난해 8월 14일 이뤄진 이명박 대통령의 천황 관련 발언은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는 일본 내 절대 터부의 현황을 실감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다.

▎일본인들이 성지로 받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절대 터부로 자리잡는 천황과 황실

당시 이 대통령은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다가 천황의 방한 문제를 꺼냈다. “일왕이 한국 방문을 원한다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 이 발언 직후 일본정부는 곧바로 이 대통령에 항의했다. 일본 미디어가 총동원해 이 대통령의 발언을 비난했다.


▎조총련, 재일 한국인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기류가 최근 들어 급반전되고 있다. 재일 한국인 범죄에 대해 단호한 대처를 요구하는 일본인들의 반한 시위.
평소 천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아사히(朝日)신문>도 이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 측이 천황 방한을 요청했을 뿐 천황이 서울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일본 측 주장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 대통령의 8월 10일 독도방문으로 심기가 불편하던 시기였다.

한국 방문 요청 여부에 관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이 대통령이 천황을 입에 올렸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반한(反韓) 데모가 격렬하게 시작되면서 도쿄 내 한국대사관 주변에 경찰이 배치되기도 했다. 1만여 정회원을 가진 ‘재일 한국인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회(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는 당시의 시위를 통해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에서 천황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성역이다. 일단 천황이란 이름 자체를 공식석상에서 꺼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천황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에 관계없이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불경(不敬)하다고 생각한다.

NHK가 주말뉴스를 통해 천황 동정을 보도하지만, 주관을 뺀 지극히 객관적인 톤으로 보도할 뿐이다. 부사나 형용사없이 주어·동사로 끝나는 보도다. 천황을 조금이라도 나쁘게 얘기할 경우,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비난의 화살이 날아온다. 우익단체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역대 총리 가운데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비난을 받은 최악의 인물은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다.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총리로 있으면서 비상국정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했다는 무능한 인물로 낙인 찍혔다. 2011년 9월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한순간에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비운의 정치가다. 1946년생인 간 나오토는 단카이(団塊) 세대의 선두주자에 해당된다. 간 나오토가 사라지면서 단카이도 일본 정치무대에서 사라진다.

무능한 총리란 딱지가 붙은 간 나오토지만, 사실 보통 일본인들이 내리는 평가를 보면 업무 능력에 관한 부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은 총리의 리더십 하나로 결정되는 나라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움직이는 공기 속에서의 움직임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일본인 입장에서 볼 때, 간 나오토는 무능한 인물이라기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총리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 가장 큰 이유는 천황에서 비롯된다.

2011년 7월 16일의 일이다. 도쿄에서 일본 올림픽위원회 창립 100주년 기념 축하식이 열렸다. 축하행사에 천황 부부가 참가했다.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전체가 비상이 걸린 가운데 천황이 부부 동반으로 참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총리는 천황이 부부로 등장하는 공식 모임에는 반드시 참가한다. 특히 올림픽과 관련한 국제적 행사라는 점에서 참가는 의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간 나오토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음날 국회에서 총리를 상대로 한 질문이 쏟아졌다. “어제 뭘 했느냐? 왜 참가를 안 했느냐?” 총리는 지진대책 업무에 참석하느라 축하 행사장에 가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총리의 발언은 거짓으로 드러난다. 대책업무에 참석한 시간과 축하 행사의 스케줄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진 의원은 총리에게 축하식 불참을 ‘불손한 태도’라고 맹비난한다. 가뜩이나 하향세이던 간 나오토의 지지율은 곤두박질 친다.

간 나오토 사무실에 살인 협박이 이어지고 신문·방송도 나서서 총리의 조속한 사임을 촉구한다. 우군인 민주당 의원들도 간 나오토를 비난한다. 사면초과인 상태에서 두 달 뒤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일본에서 단카이 세대는 반(反)천황의 이미지가 강하다. 미군이 시행한 민주주의 교육을 처음으로 받은 세대로 천황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본다. 간 나오토의 추락은 반천황파의 종언(終焉)에 해당된다.

천왕을 언급했다고 살해 위협 받는 신문기자

간 나오토의 불참 소식과 관련해 당시 일본 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도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 총리를 비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당시 내용을 보면서 필자가 놀랐던 것은 천황을 지지하는 것이 우익이나 장년층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청년층에게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2030세대의 디지털 놀이터에 해당되는 SNS ‘니챤네루(二チャンネル)’를 보면 총리의 불참을 비판하면서 천황에 대한 절대적 존경과 지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간단히 말해 ‘감히 총리 정도가 어떻게 천황에게 비례(非禮)를!’이란 반응이라 보면 된다. 간 나오토는 시민운동, 환경운동과 같은 젊은 층이 좋아하는 이슈를 통해 총리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천황 문제로 인해 젊은이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이상 정치적 재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터부로서의 천황은 천황 가족이나 친척 모두에게 해당된다. 황태자 나루히토(徳仁)의 부인 마사코(雅子)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은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행사에 불참하면서 사실상 칩거 상태에 들어가 있다. 억측이 난무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은 사실 하나도 없다. 적어도 일본 사회의 주류 미디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역사와 전통을 가진, 뭔가 기득권을 가진 곳이라면 마사코에 대한 보도를 자제한다.

한국과 전 세계에 알려지는 마사코와 황실에 관한 소식은 비주류인 주간지를 통해 알려진 ‘소문’에 불과하다. 주류 신문으로 마사코 관련 뉴스를 전하는 곳은 단카이를 대변하는 리버럴의 대명사<아사히신문>이다. NHK처럼 아주 구체적인 팩트에 근거해 사실을 평이하게 전달하는 수준이다.

추측이나 비평을 하지 않는다. 농담 같은 얘기지만 <아사히신문> 기자는 한 번쯤 살해 위협에 관한 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오보나 편향된 기사때문이 아니라 천황에 관한 얘기를 신문기자가 감히 언급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도쿄 스키치(築地) 아사히 신문사 본사에 대한 우익단체의 방화 위협은 1년 내내 볼 수 있는 주기적 뉴스에 불과하다.

천황과 황실에 대한 주간지의 보도는 사실일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긁어주는 비즈니스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적어도 주류 미디어라면 천황과 황실에 관한 보도를 절대 터부로 받아들인다. 일본 황실은 유럽과 달리 스캔들이 전무(全無)한 곳이다. 황실에 관한 부정적인 뉴스를 들어본 적이 없다. 황실 구성원 개개인이 조심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황실과 천황을 둘러싼 터부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기사가 원천 봉쇄된다는 점이 더 큰 이유다.

현재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우향우 광풍은 터부의 지각변동이란 시각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동안 터부로 여겨지던 이슈나 사항들이 해제되거나, 반대로 더더욱 강화되는 것과 같은 변화가 현재의 일본 분위기를 설명하는 단서라 볼 수 있다. 핵무장·징병제·히노마루(국기)·기미가요(국가)에 관한 얘기는 그동안 일본 주류들이 언급하지 않았던 터부들이다.

간혹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국민적, 국가적 차원과는 거리가 먼 ‘메아리 없는 외침’ 정도에 그쳤다. 시대는 달라졌다. 터부시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10~20대조차 헌법개정, 국방군 창설을 주장하는 판국이다. 원래 공식석상에서 한국과 중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과거 군국주의의 아류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일본 텔레비전을 보면 한국과 중국은 물론, 구체적으로 양국의 지도자를 비난하는 일이 너무도 당연시되고 있다.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반한 시위대의 경우 5년 전까지만 해도 정신 나간 인종차별주의 집단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1945년 이후 이어지던 70여 년간의 터부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세대가 변하고 SNS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일본인이 조심스럽게 대하던 터부의 권위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반대로 더더욱 절대적 위치를 굳히는 터부는 국민, 국가, 천황으로 이어지는 1차원적인 혈통주의로 모아진다. 일본의 경우 터부에 대한 감각이 유별나고 획일적이다. 터부의 종류도 남다르다. 같은 언어와 문화적 유대감이 강한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가 바로 터부라는 공간 속에서 드리워져 있다.

우향우 분위기와 함께 한국과 일본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될 것이다. 새삼스럽게 터부에 대해 연구하거나 일본인의 터부를 따르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일본의 터부를 이해할 경우, 기세를 더해가는 우향우 광풍에 대해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