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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래된 초상화 한 점이 있다. 그렇다고 그림 속 인물이 어느 나라 왕이나 공주처럼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시대)에는 집집마다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유행이었다.부유하지만 권세가 약한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초상화를 남긴 것이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잘 차려 입은 옷차림을 보아 당시에는 힘깨나 쓴다는 집안 아무개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초상화는 시간이 지나며 그 가치를 잃고, 이젠 어느 집 다락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먼지 덮인 고물이 되기 일쑤다.영국의 젊은 미술가인 채프만 형제는 이런 초상화를 벼룩시장이든 어디서든 헐값에 사들였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은 그림은 갈라지고, 부패하기도 했다.형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초상화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최신작 ‘One Day You Will No Longer Be Loved Ⅹ(that it should come to this…)’이다.<사진>작가의 손을 거친 초상화 속 주인공은 깨지고 금이 간 얼굴로 변했다. 흉측하기까지 한 얼굴은 작가가 손을 대지 않은 본래 그림 속 고운 손, 화려한 옷차림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형제 작가 중 동생인 제이크 채프만은 8월 22일, 서울 청담동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초상화들처럼 우리 삶도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라며 “부가 영원할 것 같지만 예술의 세계에선 무의미한 가치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영국 ‘yBa(young British artists)’ 출신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채프만 형제(Jake and Dinos Chapman)의 개인전 ‘The Sleep of Reason’이 12월 7일까지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yBa는 1980년대 말 이후 나타난 영국의 젊은 미술가를 지칭하는 말로 영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주역이다.흔히 ‘yBa 그룹’으로 불리는 이 군단에는 채프만 형제를 비롯해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게리 흄 등 영국의 내로라 하는 젊은 작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이들은 1988년 졸업을 앞둔 데미안 허스트의 기획전에 참여하며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후 영국의 대표적인 컬렉터이자 딜러인 찰스 사치가 yBa의 작품을 대거 사들이며 유명해졌다. 이들의 출현은 영국 현대미술이 새로운 부흥기를 맞는데 일조했다고 평가 받는다.채프만 형제의 개인전이 국내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다. 전시를 주최한 송은 아트스페이스는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나 국내에서 선보인 적 없는 해외작가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이번 채프만 형제 개인전도 그 일환으로 열렸다. 친형제인 제이크와 디노스 채프만은 각종 사회·정치·종교적 현상에 대해 풍자 혹은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인 걸로 유명하다.전쟁, 대량학살, 죽음과 소비지상주의 등의 주제에 대해 때로는 적나라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이들의 표현방식도 회화·조각은 물론 판화·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형제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19세기 초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를 꼽을 수 있다.이번 전시의 제목 역시 고야의 대표적인 에칭 작품 중 하나인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1797~1799)에서 따왔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뜻으로, 형제는 이성과 상상 사이에서 균형 잡힌 예술을 추구하고자 했던 고야의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했다.채프만 형제는 이성의 개념이 채 적립되지 않은 아이의 시각에서 경험한 전쟁·재난·학살 등의 도덕적 공포는 어른의 시각과는 다르게 해석된다고 본다. ‘Minderwertigkinder - Rat Child’는 이러한 작품 세계를 잘 표현한다. 전시장 초입에 들어서면 작품을 감상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먼저 만날 수 있다.아동복 마네킹 크기인 이들은 얼핏 보면 전형적인 영국 어린이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눈을 제외한 코와 입은 쥐나 당근·늑대 등으로 표현했다. 채프만 형제는 “일반적으로 세계 어디를 가나 아이들은 순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며 “우리는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어린이들의 상상 속 세상이 오히려 더 잔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봤다”고 설명했다.이번 전시에는 공동 예술 사업체인 RS&A London의 의뢰로 만들어진 ‘Chess Set’(2003)를 비롯해 고야의 오리지널 에칭 작품을 재해석해 9.5kg의 순은으로 제작한 ‘The Same Thing But Silver’(2007)가 전시된다.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No Woman No Cry’(2009)와 펭귄들이 점령한 남극의 참혹한 최후를 표현한 설치 작품 ‘Unhappy Feet’(2010) 등 200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총 45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특히 ‘One Day You Will No Longer Be Loved Ⅹ(that it should come to this)’를 비롯한 신작 페인팅 5점은 국내외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관람료는 없고, 일요일에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