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OLOGY - 일본의 부상하는 극우세력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3월 중순 일본 경찰에 한 남자가 체포됐다. 안네 프랑크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기이한 사건이었다.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때 숨졌지만 그녀의 일기가 사후 출간돼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일기는 나치 점령 하의 암스테르담에서 숨어 지낸 그녀 가족의 삶 이야기를 전한다. 그 유대인 소녀가 나치의 집단포로수용소에서 숨진 지 근 70년 뒤, 서유럽으로부터 8850여㎞ 떨어진 도쿄에서 한 일본인 무직자가 체포됐다. 시내 수십 곳의 공립도서관과 서점에서 프랑크의 유명한 일기와 관련 도서 300권 이상을 파손하고 더럽힌 혐의다.

BBC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용의자가 36세의 무직자라고만 밝혔을 뿐 아직 이 황당한 사건의 동기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경찰의 신문을 받을 때 용의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했다는 점을 들어 정신이상자라고 추측했다. 용의자는 도서관과 서점에 침입해 책들을 파손했음을 시인했다고 전해진다. 프랑크의 일기는 1952년 말 일본어로 번역되어 다음 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널려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반달리즘(공공기물 훼손)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평온한 듯한 일본의 저변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극우 세력의 움직임을 반영할지 모른다는 우려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제국군은 나치 독일의 동맹군이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독일의 제3제국 군대가 유럽에서 한 짓과 다르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 내에는 그 군사적 침략기를 두고 비판자와 지지자가 공존한다.

실제로 안네 프랑크 관련서 훼손 사건 이후 일본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은 파손된 책들을 대체하라며 그녀의 일기를 비롯해 기타 관련 서적 300권 이상을 도쿄의 도서관들에 기증했다. 이스라엘 외교관들은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프랑크나 유대인을 향한 어떤 표면적인 반감이나 나치주의에의 공감 표시가 대다수 일본인의 견해를 반영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정부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그 반달리즘을 “수치스럽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일본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유대인 인권단체 사이먼 위젠탈 센터는 그 반달리즘 소동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것을 가리켜 “신성모독”이자 “증오” 범죄로 불렀다. “안네 프랑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에 의해 학살 당한 유대인 어린이 150만 명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이번 사건이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녀의 기억을 폄하하기 위한 조직적인 범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위젠탈 센터의 부소장인 랍비 에이브러햄 쿠퍼가 말했다.

“일본에 많이 다녀봐서 수많은 일본인이 얼마나 안네 프랑크를 연구하고 존경하는지 잘 안다. 다가오는 운명에 맞서 안네가 남긴 용기·희망·사랑의 역사적인 문장들을 훼손하려 했다면 편견과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이처럼 증오심을 선동하는 자들에 단호히 대처하도록 일본 당국에 요청하는 바이다.”

일본에는 실제로 극우단체가 무수히 많으며 대체로 사분오열돼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일본 내 한국계 소수민족을 향한 증오를 부추기고, 중국을 향해 끝없는 적대감을 표출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를 찬양한다(1945년 77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극소수 극단주의적인 일본인이 노골적으로 나치 철학을 신봉하기는 한다. 자칭 국가사회주의일본노동자당이라는 단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증오가 일본 극우이념의 핵심을 이루지는 않는다(어쨌든 일본 역사에 유대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 극우파가 깃털을 곤두세우는 그밖의 적들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일본은 군사적 야망과 능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뒤에도 꺼지지 않은 군국주의 시대에의 향수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전후 시대에도 소규모 우익, 반사회주의 단체는 여전히 존재했다. 종종 조직범죄 실력자(대표적으로 일본의 악명 높은 야쿠자 마피아)나 일부 보수파 정치인들과 연계됐다.

1980년대 들어 극단적인 우익 폭력배들이 밴을 타고 도심에서 차량 행진을 벌였다. 차량의 메가폰과 확성기를 통해 애국적인 구호를 외치고 군사 음악을 방송했다. 툭하면 중국·한국·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런 단체들은 또한 학교 교육에서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현재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수정하려 모색한다.

한편으로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 평화주의자, 여권운동가, 노조운동가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다. 말하나마나 우익 극단주의자들은 일본이 분쟁지역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중국과 영유권 다툼을 벌이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다오)가 대표적이다. 통칭 ‘우요쿠단타이(右翼團體)’로 불리는 이들은 일본 전국에 수천 개의 개별적인 단체를 두고 있으며 10만 명 안팎의 회원을 자랑한다고 일본 경찰은 추산한다.

월터 해밀턴이라는 호주 기자는 30년 넘게 일본을 취재해 왔다. 과거 일본의 파시스트들을 주변적이며 현실과 유리된, 주류 사고와 크게 동떨어진 광신자들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요즘엔 생각이 바뀌었다.

호주 잡지 ‘유레카 스트리트’에 쓴 글에서 해밀턴은 일본의 현재 분위기를 묘사했다. “위험은 야쿠자나 그들과 비슷한 무리에 연계된 음지의 호전적인 주변 집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광범위한 여론 변화의 지지를 받는 정치적 주류에서 나온다. 호전성이 빠르게 공개담론의 한 스타일로 자리잡아간다.” 실제로 일본은 20여년간 경기침체에 빠져 체력이 약화되고 사기가 떨어졌다. 그런 현실에 염증을 느낀 일본은 아베 신조라는 우익 민족주의자를 총리로 재선출했다.

아베는 분명 극우 극단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일본 방위 시스템의 개선을 추진하고, 논란 많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사자(전범자 포함)를 추모하고, 어느 때보다 막강해진 중국을 향해 공격적인 발언을 퍼부었다. 그럼으로써 보수파와 우익에 어필했다. “일본인들은 말하자면 먹구름 아래서 살아 왔다.

줄어드는 실질소득에 연타 당하고, 고령화하는 인구의 영향에 날마다 직면하고, 정치 지도자들의 반응에 환멸을 느껴 왔다”고 해밀턴은 썼다. “자부심 강하고 근면한 일본인들에게 2류 지위로의 하락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불가피한’ 몰락을 받아들이리라는 가정이 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것은 아주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특히 환멸을 느끼고 소외된 일본 청년층 사이에서 구호를 외치는 우익 민족주의 부활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런 만큼 일본이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해밀턴은 주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70년 동안 일본 공공사회의 특징을 이뤄온 이념적 정체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그가 설명했다. “기존의 억제와 금기가 해제되고 있으며 흩날리는 먼지가 모두 가라앉은 뒤 무엇이 드러날지 예측하기 힘들다.” 일부 일본인들에게는 찬란했던 제국주의 시대에의 향수가 현대의 침체와 쇠락의 아픔을 덜어주는 진통제 역할을 하는 듯하다.


▎모미이 가츠토 NHK 신임 회장은 일본군의 한국인 위안부 동원이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취소했다.



고토 시호코는 워싱턴 DC에 있는 우드로 윌슨 센터의 동북아 담당 연구원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좌익이든 우익이든 극단주의 단체 수를 추산하기는 쉽지 않다고 평했다. “(일본에서는) 아주 작은 규모의 소수파라는 정도로만 말해두자”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극단적 논평이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에선) 공유하기가 더 쉬울 뿐 아니라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일례로 (소치 동계) 올림픽 때 극도로 당혹스러운 논평들이 불거져 나왔다.”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극우파 인사는 아마도 다모가미 도시오일 성싶다. 65세의 일본 항공자위대 막료장 출신으로 최근 도쿄 도지사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61만1000표가량, 다시 말해 12%의 득표율을 올렸다. 무엇보다도 젊은 남성들로부터 많은 표를 얻었다. 유세 도중 아베의 후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경쟁 후보인 마스조에 요이치 전 후생노동상이 아베 총리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필시 내 공약이 아베 정부의 정책과 가장 가깝거나 또는 유사성이 크다.” 선거 직전 기자회견에서 다모가미가 말했다. “역사관과 국가관 면에서 기본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같다고 본다. 일본이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렇게 끔찍하거나 흉악한 나라가 아니라는 관점이다.”

극우파는 지금껏 일본에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이는 더 큰 움직임의 시작일 뿐이라고 일부 관측통들은 우려한다. “(다모가미의) 선거 결과는 일본 내 우익의 부상이 실재하며 단순히 중국의 정치적 선전이 아니라는 또 다른 신호다. 상당히 걱정스러운 흐름이다.” 베이징대학 국제전략연구소 부소장이자 도쿄 정책연구대학원대학의 객원 강사인 유티에준이 타임지에 말했다.

다모가미는 6년 전 그가 쓴 글이 문제가 되어 자위대 보직에서 해임됐다. 글에서 그는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전쟁 범죄 책임을 부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과 중국까지 포함된 국제적인 ‘공산주의 음모’를 주장했다. “계략을 써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유도했다는 내용이다. 다모가미는 몇몇 유명인사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우익 소설가 햐쿠타 나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베의 친구이자 전국 공영방송 NHK의 경영위원이다(아베가 직접 그를 경영위원으로 선임했다). 햐쿠타는 무엇보다도 난징대학살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난징대학살은 1937~1938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강간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잔학행위로 손꼽힌다.

우연찮게 모미이 가츠토 NHK 신임 회장(역시 아베가 직접 선임했다)도 일본군의 한국인 ‘위안부(comfort women)’ 동원을 옹호했다. 세계적으로 그런 관행이 일반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중에 의회에 불려나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해야 했다.

NHK 경영위원의 발언 중에서도 어쩌면 하세가와 미치코의 발언이 최대 망언일 성싶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노무라 슈스케라는 극렬 민족주의자를 찬양했다. 슈스케는 1993년 주류 진보 성향의 아사히 신문 건물 안에서 권총 자살한 인물이다. 자신의 조직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에 항의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세가와는 이렇게 썼다.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은 신뿐이다. 정말 올바르게 바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제물이 있을 수 없다. 20년 전 (노무라가) 아사히 신문 본사에서 자살했을 때 그는 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노무라는 자기 배에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그뿐 아니라 죽기 전 일왕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하세가와는 그에 대해 찬가를 불렀다. “‘인간선언(패전 후 쇼와 천황이 현인신으로서의 신격을 부정한 선언)’이나 일본 헌법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 없이 천황 폐하께서 잠시나마 다시 현인신(現人神)이 되셨다.” 일본 역사에서 1946년의 한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일본 패망 이후 승전국들의 요구로 히로히토 일왕이 살아 있는 ‘신격’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 이전의 일왕들은 신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 헌법에선 일왕이 국가의 ‘상징’에 불과하다고 못박고 아무런 정치적인 권력도 부여하지 않았다. 노무라를 지지하는 하세가와의 발언에는 명백한 의도가 보였다. 헌법에서 그런 제약을 벗겨내고 일왕의 높은 지위를 복원하기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분명 아베가 NHK의 성향을 오른쪽으로 돌려놓으려 애쓰는 듯하다.


▎반한 우익단체들의 ‘혐한’시위가 갈수록 과격해지며 증가한다.
요즘 다모가미는 일본 극우 민족주의의 떠오르는 목소리로 손꼽힌다. 이민의 중단 또는 억제와 외국인의 투표권 제한을 촉구하며 대규모 군중 집회를 개최한다. “일본인들이 국가에 대한 긍지를 잃고 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자기 비하적인 일본 역사를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다모가미가 캠페인 중 군중에게 목청 높여 외쳤다고 저팬 타임스가 보도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다모가미 같은 선동 정치가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앞으로 더 심해질 듯하다.” 도쿄에서 활동하는 정치분석가이자 MIT 국제연구소의 연구원인 마이클 쿠세크가 타임지에 말했다. “이번 (도쿄 주지사) 선거는 사실상 다모가미의 자금과 회원 모집 운동이었다. 그의 집회에 참가하는 인원이 전에는 수천 명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긴장이 고조되는 도쿄 신-오쿠보 지역을 살펴보자. 소수민족인 한국계가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최근 몇 달 사이 메가폰을 손에 쥔 호전적인 극렬 민족주의 운동가 등의 반한 시위대가 수시로 이 지역에 나타났다. 일부 시위자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경고하며 한국인들을 위협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

한편 “이 동네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가스실을 세우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일본은 현재 고비를 맞고 있다.” 그런 증오 발언을 규제하는 법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 아리타 요시후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상황은 전후 지금까지 7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의 니시다 료스케 부교수는 극우파가 전국적으로 의미 있는 지지를 받는 날이 오리라고 보지 않는다. “극우파는 인터넷 이용도가 높다. 따라서 인터넷에 다모가미의 동조세력이 많다. 그들은 서로 댓글을 달고 리트윗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이 다수세력은 아니다.” 니시다가 타임지에 말했다.

일본 극우파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은 이시하라 신타로다. 도쿄 도지사를 지낸 고령의 소설가다. 공산주의 중국과 미국 모두를 목청 높여 비판해 왔다. “내 조국 일본은 중국에 농락당하고 미국의 꾐에 넘어가 정부 노릇을 해 왔다. 일본이 더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일어설 수 있게 될 때까지 눈을 감을 수 없다.” 2012년 도쿄 도지사에서 물러난 뒤 이시하라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신타로의 단호한 민족주의적 어조는 다모가미와 마찬가지로 번영과 위용을 자랑하는 나라로의 복귀를 갈망하는 일부 청년층에게 어필했다.

그러나 극우단체들은 여전히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으며 그 운동을 단합시킬 만한 중심인물이 없다고 고토는 평했다. “하지만 더 광범위한 국가 정치적 담론에서 민족주의 색채가 짙어질수록 지금까지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견해가 인정받기 쉬워진다”고 그녀가 덧붙였다.

“민족주의는 실업자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하지만 일본의 세계적인 위상이 더 확고했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로의 복귀를 갈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큰 울림을 얻는다…. ‘강한’ 일본의 필요성을 외치는 주장이 요즘 정치적으로 인정받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