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왕도를 말하다 - 이순신, 공존과 공생 추구한 난세의 경영자


▎충남 아산 현충사 본전에 있는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1953년 월전 장우성(張遇聖)이 그렸다.



물나라(水國)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水國秋光暮, 수국추광모)/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驚寒鴈陣高, 경한안진고)/ 걱정 가득 잠 못 드는 밤(憂心輾轉夜, 우심전전야)/ 희미한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지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이란 시다. 전장에서 고뇌하는 장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고독을 창조와 혁신의 기회로 삼은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이 시는 칼이 아닌 붓으로 자신만의 역사를 쓴 선비로 거듭나는 순간을 잘 보여준다.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가 2012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순신은 ‘45전 40승 5무’를 거둔 불패의 군인이다. 다섯 번의 무승부도 명나라 군대가 지휘했기에 실제로는 ‘40전 전승(全勝)’이라 해도 무방하다.

‘일본의 대륙침략을 막은 인물’

한때는 무명의 군인이었던 이순신을 정읍 현감·전라좌수사로 발탁해 조선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그를 ‘군신(軍神)’이라고 평가했다. 지나친 평가라고 할 수 있으나, 류성룡은 단순한 문신(文臣)이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달여 전인 1592년 3월 5일의 <난중일기>에는 류성룡이 저술해서 이순신에게 보내주었다는 병법서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이순신은 “수전(水戰)·육전(陸戰)·화공(火攻)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자세히 논의(論議)해 놓았다.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이론”이라고 경탄했다. 류성룡은 문신이었지만, 병법의 대가였고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다. 그런 그가 이순신을 ‘사람이 아닌 신(神)’이라고 평가한 것은 이순신이 그만큼 놀라운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역사에는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한니발(Hannibal), 나폴레옹(Napoleon), 칭기즈칸(Chingiz Khan), 한 고조 유방(劉邦), 조조(曹操) 등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한다. 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사마중달(司馬仲達)과 같은 탁월한 전략가, 병법의 천재인 태공망(太公望)·손자(孫子)·오자(吳子) 같은 인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신(神)’으로 불리는 사람은 없다.

고대 중국의 병법 시조로 공자(孔子)와 함께 배향되는 태공망, 현대에 와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손자도 ‘병성(兵聖)’에 불과하다. 손자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론은 물론이고 실전에도 눈부신 활약을 했던 76전 64승 12무의 오자는 그저 위대한 전략가일 뿐이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이순신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한 윌리엄 웨어(William Weir)는 ‘세계를 바꾼 50인 군사 지도자’의 한 명으로 이순신을 꼽았다. 일본의 <문예춘추>도 ‘세계를 바꾼 10인의 군사 지도자’의 한 명으로 이순신을 선정한 바 있다. 이들 60명 중에는 앞서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알렉산더, 넬슨, 조지 워싱턴, 제갈공명, 진시황, 마오쩌둥,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알 법한 인물들이다.

그러면 이순신은 세계사의 무엇을 바꾸었다는 말인가? 미 해군 역사가 조지 해거만(Jeorge Hagaman)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300년 동안 멈추게 한 인물’, 미국 리더십 전문가 짐 프리드먼(Jim Freedman)은 ‘일본이 영국처럼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만들 기회를 빼앗은 인물’, 미국 UCLA대학 역사학과 마크 길버트(Marc J. Gilbert) 교수는 ‘히데요시의 범(汎)아시아 야망(Pan-Asian ambitions)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이순신을 평가했다. 이순신 때문에 일본의 정복자·침략자 역사가 300년 동안이나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었던 이순신도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삶을 구석구석 중앙포토들여다보면, 보통사람인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수(德水) 이씨(李氏)의 시조는 고려 때의 무인(武人) 이돈수(李敦守)다. 하지만 조선조에 와서 이순신의 가문은 무인과는 거리가 먼 문인(文人) 집안이었다. 그런 문인 가문에서 돌연변이처럼 무인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도 청소년기까지는 문인을 숭상하고, 무인을 천시하던 시대적 환경과 가문의 영향으로 결혼 직전까지는 문과 공부를 했다.

운명처럼 무인의 삶을 선택한 계기는 21세 때 찾아왔다. 무과급제자였던 전 보성군수 방진(方震)을 장인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이듬해부터 이순신은 모두가 선망하는 문관·문인의 길, 평안한 출세의 길이 아니라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를 전전해야 하는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인 가문에서 나온 ‘돌연변이’

무과시험은 때로는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시험이기도 했지만, 30명도 채 뽑지 않는 정규 무과시험은 무예에 천재적 소질이 없으면, 어려서부터 공부해도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 그런데도 22세의 이순신은 뒤늦은 나이에 도전에 나섰다. 6년 만인 28세 때 이순신은 무과 별시에 응시했다가,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고, 다시 일어나 시험을 봤지만 낙방했다.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무과시험에 나선 지 10년 만인 32세 때 다시 응시에 29명중 12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당시 이순신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이들의 평균 나이는 34세였다. 이들 중 이순신과 같은 민간인 신분은 이순신을 포함해 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역 군인이었다. 이는 이순신이 그 10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의 첫 직급은 시험 등수에 따라 결정된 관례에 따라 종9품이다. 여진족과 국경을 맞대며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던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영욕이 교차할 군인의 인생을 시작했다. 직급은 낮았지만, 출발은 무탈했다.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서울 훈련원에서 인사담당 실무자인 봉사(奉事·종8품)로 발령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과의 갈등이 아닌 세상과의 갈등으로 시련을 겪기 시작한다. 상관이었던 서익(徐益)이 불합리한 인사를 강요하자 그는 근거를 들어 거부했고, 그것이 훗날 첫 시련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해, 36세의 이순신은 종4품으로 미래에 신화를 쓰게 될 경험을 쌓게 된 전라 좌수영의 발포 수군 만호에 임명되었다. 38세 때는 재앙의 씨앗이 움텄다.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감사를 했던 서익이 이순신을 모함해 파직시킨 것이다. 억울한 파직이었다. 하지만 몇 달 후 훈련원 봉사(종8품)에 재차 임명되었고, 이듬해엔 함경도 건원보 권관이 되었다. 그는 국경을 오가며 침탈을 일삼던 여진족장 울지내(鬱只乃)를 유인해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고, 서울 훈련원 참군(정7품)으로 승진했다.

호사다마였다. 전도양양한 이순신의 길을 가로막는 개인적인 시련이 닥쳐왔다. 정신적 지주였던 부친 이정(李貞)이 사망한 것이다. 관습에 따라 휴직하고 3년 동안 부친상을 치러야 했다. 탈상 후 42세의 이순신은 서울에 있던 사복시 주부(종6품)에 임명되었지만, 여진족 침입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함경도 조산보 만호(종4품)로 발령이 났다. 43세의 이순신은 실력을 더욱 더 인정받아 국경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량을 마련하던 둔전(屯田)을 관리하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까지 겸직했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기습을 우려해 함경도 병마절도사였던 이일(李鎰)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병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번번히 무시당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예상한대로 여진족이 침입해왔다. 그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은 채로 여진족을 추격해 잡혀 끌려가던 100여 명의 백성을 구출했다. 그럼에도 상관 이일은 이순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씌워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이일의 군관으로 있던 선거이(宣居怡)가 이순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고, 죽기 전에 술이라도 한잔 마시라고 위로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오(死生有命 飮酒何也, 사생유명 음주하야)”였다.


▎43척의 거북선 등 각종 전선이 기함인 거북선을 중심으로 마름모꼴을 이뤄 항진하는 조선시대 해진도.




▎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거북선 모형.
거북선 건조는 혁신의 산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死生有命)’라는 말은 그의 삶의 곳곳에, 특히 위기 때에 빈번히 등장한다. 무과시험 강독 때에는 중국 한나라 창업 공신, 장량(張良)의 신선설에 대해 “사람이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입니다(有生必有死, 유생필유사)”라고 신선설을 부정했다.

1592년 부산포해전에서 오른팔과 같았던 녹도 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했을 때도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다. 사람으로서 한번 죽는 것 아까울 게 없다(人生必有死 死生必有命 爲人一死 固不足惜, 인생필유사 사생필유명 위인일사 고불족석)”며 죽음보다 천명을 중요시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 출전 명령을 거부한 죄로 다시 처형될 위기를 맞았지만, 이때도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死生有命 死當死矣, 사생유명 사당사의)라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즉 천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한 사람이었다.

이순신의 여진족 기습 대비과정과 전투 결과를 보고받은 조정은 결국 사형 대신에 백의종군의 처벌을 내렸다.

첫 번째 사형 위기를 넘어섰지만, 두 번째 파직과 첫 번째 백의종군의 시련을 맞았다. 다음해인 1588년, 여진족 부락을 대규모로 공격했던 시전부락 공격작전에 참가해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해제되자,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 아산으로 내려갔다. 1589년, 45세 이순신은 마침 전라관찰사로 임명된 이광(李洸)에 의해 군관 겸 조방장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류성룡이 이순신을 정읍 현감(종6품)으로 발탁했다. 당시 지방관들은 대부분이 문과 출신이 임명됐지만 그 관례에서 벗어나 무관인 이순신을 임명한 것이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기대에 부응해 목민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무관이었음에도 행정은 물론, 재판과 민원처리에도 능숙했다. 이웃 고을인 태인현의 백성들까지도 그의 능력과 인품을 존경할 정도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47세 이순신은 드디어 임진왜란 때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자리가 됐던 전라좌수사에 올랐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혹시 일어날지 모를 전쟁을 준비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임진왜란 신화의 하나인 거북선(龜船)의 제조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 거북선은 1년 후인 1592년, “4월 12일,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탔다.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는 일기에 나타난 것처럼 전쟁 발발 하루 전에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거북선은 조선 태종 때에도 있었던 배였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전선(戰船)이었다. 그것이 이순신에 의해 200년이 지나 홀연히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의 기록, 종군했던 포르투갈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S. J)의 기록, 1883년 영국 해군성의 기록 등이 전하는 것처럼 전례 없는, ‘철로 덮여 조총으로 뚫을 수 없는 철갑선’의 신화를 만들었다.

거북선은 불패의 군인 이순신이 아닌, 창조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계 해전사의 전략·전술을 바꾼 혁신가 이순신을 상징한다. 짐 프리드먼, 마크 길버트는 물론, 인도의 군사전문가 나자레스(Brig J. Nazareth)가 최근에 쓴 <전쟁에서의 창조적 사고(Creative Thinking in Warfare)>에서도 주목한 부분이다.

군인 이순신, 혁신가 이순신은 그 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비무환과 다양한 전략전술을 통해 불패의 전설, 40전 전승을 썼다. 전쟁 기간 중 이순신은 전투만 하지는 않았다. 경영자로 전쟁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먹여 살렸던 탁월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1593년 초부터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으로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틈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어업을 했고, 소금을 구웠고, 장사를 했다.

전란 중 백성 먹여 살린 ‘경영술’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군사들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나갔다.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선조실록>에서는 “서울에서 굶고 얼어 죽은 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 시체들을 큰 시냇가 등에 쌓아 놓아 곳곳이 시체 언덕을 이루고 있습니다”(1593년 12월 11일)라고 기록했다.

더 혹독한 모습은 “굶주린 백성들이 사람 시체의 살점을 베어 먹고 남은 흰 뼈들이 성(城)의 높이와 같았다. 또 죽은 사람의 살점만 먹은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다”(1594년 3월 20일)고 기록했을 정도다. <난중일기>에도 고통당하는 백성과 군사의 모습이 나온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다. 앞으로 어떻게 보호하고 살 수 있게 할지 물었다.”(1594년 2월 9일) “녹도 만호가 와서 병들어 죽은 군사 214명을 거두어서 묻었다고 했다.”(1594년 1월 21일)

전쟁과 굶주림이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시킨 생지옥의 풍경이다. 군인 이순신은 그런 가운데도 군사를 모아 전투를 했고, 승리했다. 경영자 이순신은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먹게 만드는 배고픔의 지옥’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자신이 있는 현장에서 실현 가능한 민생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실천한 것이다.

그의 해결방안은 ‘서로 대립되는 입장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의미의 ‘양편(兩便)’ 사고였다. 백성과 나라 모두 이익이라는 ‘서사양편(庶使兩便)’, 공(公)과 사(私) 모두 이익이라는 ‘공사양편(公私兩便)’, 관계자 혹은 당사자 모두 이익이 된다는 ‘양득기편(兩得其便)’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나라의 정책을 지키면서도 피란민들의 생계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나라의 말(馬) 목장을 다목적으로 활용하는 제안이다. 당시 나라의 말 목장이 있었던 섬들은 농사는 물론이고 백성의 거주까지도 엄격히 금지된 금단의 땅이었다. 이순신은 그 금지구역에 대해 생각을 바꿨다.

“농사가 금지된 돌산도에 백성들을 들여보내 농사를 짓게 해도 말을 키우는데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말도 기르고 백성도 구할 수 있어(牧馬救民), 백성과 나라 양쪽이 모두 편리할 것(庶使兩便)”이라며 조정에 규제개혁을 요청했다. 조정은 처음에는 당장 급한 전쟁에 필요한 말에 주목하고 거부했지만, 이순신의 거듭된 요청과 논리에 설득돼 결국 허용해주었다. 이순신은 말만 기르던 섬에 백성과 늙고 병든 군사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군량까지 확보했다.

바닷가라는 환경을 이용해 어업도 했다. “송한련·송한 등이 말하기를, ‘청어 1천여 두름을 잡아다 널었는데, 통제사께서 행차하신 뒤에 잡은 것이 1800여 두름이나 됩니다’라고 했다.”(1596년 1월 4일) “청어 1만3240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이종호가 받아갔다.”(1595년 11월 21일) 또한 당시 아주 귀한 나머지 ‘작은 황금’으로 불리던 소금을 굽기도 했다. “쇳물을 부어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만들었다.”(1595년 5월 17일) “김종려를 소음도 등 13개 섬 염전의 감독관으로 정해 보냈다.”(1597년 10월 20일)

▎이순신 장군이 자주 올랐던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 경내의 수루



백성의 안전과 삶을 우선 고려

군인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전선(戰船)을 혁신했다면, 경영자 이순신은 백성의 생존과 무관하게 금단의 땅으로 남은 나라 목장을 혁신해 농토로 바꿨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뛰어넘어 물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꾸고, 소금을 구워 팔아 군량을 만든 어부이자 제조업자, 상인이었다. 그러나 붓을 든 장수 이순신은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백성들이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맹자가 말한 “인자무적(仁者無敵), 즉 어진 사람에게는 대항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실천했다. 자신의 군사보다 백성의 안전과 삶을 우선해서 고민했다. “토병(土兵) 박몽세가 석수로서 선생원의 쇠사슬 박을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 까지 피해를 끼쳤기에 장(杖) 80대를 쳤다”(1592년 1월 16일)며 군인의 민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적선에 갇힌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들을 찾아내 생환시키는 것과 일본군의 목을 베는 것이 같다며,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고, 이를 지키도록 했다.

그런 이순신이었기에 승리를 지켜본 피란민들은 기뻐서 울부짖었고, 한산도에서 잡혀 한양으로 호송될 때는 “이제는 우리는 죽었다”고 땅을 쳤다. 그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을 때는 거꾸로 “우리는 살았다”며 기뻐했다. “백성이 하늘”이라는 유학의 원칙을 몸으로 실천했던 선비가 바로 이순신이다.

<난중일기>에는 ‘홀로(獨)’ 밤새 번뇌하는 이순신 혹은 ‘울보’ 이순신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마음이 아주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1594년 7월 12일)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에 취하며 노래했다.”(1596년 2월 15일)


▎제승당 수루에 걸려 있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섬 달 밝은 밤’의 시조 현판.
남해바다 섬 위에서 홀로 바다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지독하게 고독하게 있는 이순신의 모습이다. “달빛이 대낮같이 밝았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피 우느라(悲泣) 밤늦도록 잠들 수 없었다.”(1597년 7월 9일) “촛불을 켜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1595년 1월 1일) 늙으신 어머니 걱정과 나라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이순신의 모습이다.

죽을 힘 다해 충성하거나, 농사 짓거나

그의 고뇌는 현대인들이 자주 범하는 자신을 파괴하는 고뇌가 아니었다. 새로운 창조를 하는 여백, 잠든 두뇌를 깨우는 울림을 만든 고뇌였던 것이다. 그 고뇌가 우리 역사에 거북선을 등장시켰고, 일본의 조총을 능가하는 정철총통을 만들었고, 굶어 죽는 백성들을 먹여 살릴 혁신적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그의 눈물은 곧 뜨거운 사랑의 증거다. 어머니와 가족, 백성과 군사의 고통을 스스로 느끼고 승리를 다짐하고, 끝내는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낳은 보석 방울이다.

고독과 눈물로 스스로를 갈고 닦았기에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하고 불과 12척의 전선만이 남아있을 때에도, “신에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죽을힘으로 막아 지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출사력거전 즉유가위야).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 즉불감모아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참된 선비의 행동처럼,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뜬구름 같은 영화를 탐내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라며 평생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았다. 그러나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는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힘을 다해 충성하고,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 또한 족하다(丈夫生世用則效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장부생세 용즉효사이충 불용즉경야족의)”며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였기에 그가 최후를 맞았던 노량해전 전날인 1598년 11월 18일 저녁에도, “원컨대 하늘이시여 속히 이 적들을 멸하게 해주소서. 적을 물리치는 그날에는 신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겠습니다(願天速滅此賊賊退之日臣以死報國, 원천속멸차적 적퇴지일신이사보국)”라며 나라와 백성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다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7년 전쟁의 마지막 날에 그의 보은 결의에 대한 하늘의 답변처럼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 생명이 붙어 있던 그 짧은 순간에도 그는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그의 왕도(王道)를 정리해 보면, 단 세 글자였다. 인간적 야망과 욕망이 아닌 언제나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세인 ‘참 진(眞)’, 시련을 이겨내고 일에 몰두할 때의 자세인 ‘최선을 다할 진(盡)',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을 하면서 백성과 군사와 함께 미래로 가려는 자세인 ‘나아갈 진(進)’이 그것이다. 그는 3진, ‘진(眞), 진(盡), 진(進)’의 자세로 하늘을 감동시켜 마침내 13척으로 133척을 맞서 싸워 기적의 승리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