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중국 인물&인문지리지 ⑩베이징(北京) - 제왕의 엄혹한 기운이 서린 곳

황제의 도시이자 슈퍼파워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중국의 핵심… 정치적이며 전략적 마인드, 질서와 위계의 관념 두드러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 중국은 올림픽 개최를 자국이 제대로 일어섰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쾌거로 간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는 베이징(北京)이다. 한반도의 평양과 비슷한 위도(緯度) 에 놓여 있는 이곳은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은 지역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수많은 사람이 다녀왔고, 이제 국력을 키워 바야흐로 지구촌의 슈퍼파워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중국의 정치 및 사회 등 모든 분야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베이징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가 드넓은 천안문(天安門)광장과 고색창연한 자금성(紫禁城), 그리고 만리장성이다. 조선 왕궁인 경복궁에 비해 훨씬 웅장하게 지은 자금성, 그리고 그 앞에 걸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영웅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지은 인민대회당, 아울러 ‘이 자리에 꼭 이 건축이 들어설 필요가 있었느냐’는 물음을 자아내는 만리장성 등은 베이징의 이미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상하이(上海)가 개방과 진취를 표방하는 곳이라면 이곳 베이징은 엄 격한 구획과 질서를 바탕으로 대일통(大一統)의 제왕적 기운을 과시하는 곳이다. 따라서 상하이 식의 자유로움, 개방성은 이곳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구획성에 거대 중국을 끌고 가는 정치적 무게가 더 느껴진다.

이곳은 황제(皇帝)의 도시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아들인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 뒤로 태어난 모든 명나라 황제, 그리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와 베이징을 차지한 뒤 중국을 호령했던 청나라 순치제(順治帝) 뒤의 청 황제 등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 전의 원(元)나라 황제도 여럿이 베이징을 출생지로 두고 있으니, 어쨌든 이곳은 황제의 기운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황제의 기운, 즉 제기(帝氣)는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 중에 가장 강력하다. 이른바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생사를 한 손에 쥐고 농락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대단할까.

그러나 그런 기운은 그것을 손에 쥔 사람에게는 지고(至高)의 쾌락이요 복락(福樂)일 수 있으나, 그 기운에 눌려 몸을 굽히면서 살아야 했을 사람의 입장에서는 발과 손에 나를 묶어두려 채우는 차꼬와 수갑, 즉 질곡(桎梏)의 다른 이름이었으리라.‘엄격함’이 꽃말인 엉겅퀴의 고향


▎중국은 옛 황제의 용맥을 연장해 자금성 정북 방향 12㎞에 베이징올림픽 경기장을 지었다. 새집을 닮았다고 해서 냐오차오(鳥巢)라고 불리는 베이징올림픽 메인스타디움.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여기서 걷어치우자. 억압의 행위자와 그 피해자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베이징을 본다면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방대한 중국의 국토와 그 수많은 인구를 끌고 가는 황제의 통치행위와 그에 딸려 있는 많은 방략(方略)을 읽는 게 우리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다.

베이징의 옛 이름은 꽤 많다. 그러나 처음의 지명은 엉겅퀴를 뜻하는 ‘薊(계)’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베이징의 토양에서 잘 자랐던 식생(植生)이었으니 엉겅퀴는 이곳을 대표하는 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 엉겅퀴의 꽃말은 ‘엄격함’이다. 꽃에 말을 붙이는 관행이야 서양의 발명이겠으나, 어쨌거나 가시가 달린 엉겅퀴는 그런 ‘엄격’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엉겅퀴의 엄격함과 황제의 기운 역시 서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렇게 베이징은 원래부터 황제의 엄혹한 통치와 맞아 떨어지는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이 베이징은 공중에서 보면 뚜렷한 축선(軸線)을 가운데 안고 있다. 천안문광장의 남쪽에는 옛 베이징 성채의 남문(南門)이 있고, 거의 정북(正北) 방향을 따라 마오쩌둥 시신이 놓인 기념관, 광장 한 복판의 인민영웅기념비, 마오쩌둥 대형 초상이 걸린 천안문, 오문(午門), 황제의 집무 장소인 태화전(太和殿), 황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왕조 시절 수도의 신민(臣民)들에게 시각을 알려주던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있다.

자금성 안의 건축은 모두 옛날 황제만이 거닐 수 있는 황도(皇道) 위에 얹혀 있으며, 그 종루와 고루 의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면 베이징 북녘을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연산(燕山) 산맥이 있다. 중국의 옛 도성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을 중심으로 짓는다. 풍수의 관점에서는 북쪽의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지기(地氣)를 설정하는데, 이 맥이 이른바 ‘용맥(龍脈)’이다.

이를테면, 베이징의 풍수상 주산(主山)은 연산 산맥이며 저 멀리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꿈틀대며 남하하는 용맥은 연산산맥에서 큰 똬리를 틀었다가 곧장 남하해 베이징 자금성으로 이어진다. 그 용맥이 흐르는 곳에 자금성을 비롯한 황제의 상징 일체가 들어선 것이다. 황제의 기운이 바로 이 용맥이며, 이 용맥은 바로 베이징 도시 설계에서의 축선이다. 중국은 이를 ‘中軸線’(중축선)이라고 적는다.

이 축선의 개념은 역대 중국 왕조가 들어섰던 도성에는 반드시 등장한다. 베이징에 앞서 더 많은 왕조가 들어섰던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도 마찬가지며, 낙양(洛陽)도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 장방형(長方形)으로 지어지는 왕조의 도성 한가운데에는 반드시 이 축선이 들어서며, 그 축선은 황제의 상징이 자 드넓은 중국 대륙을 이끄는 왕조 통치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베이징의 축선은 약 7.3㎞다. 세계의 대도시에는 나름대로 축선이 있다. 서울의 예를 보더라도, 북악산에서 흘러나온 용맥은 경복궁에 이어져 남대문까지 뻗는다. 그러나 그 길이는 베이징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베이징의 축선은 세계의 여느 도시가 설정했던 그것보다 훨씬 길고 웅장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베이징에 앞서 많은 왕조가 들어섰던 장안은 8㎞가 넘는 축선을 자랑했다고 한다.

중화민족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을까. 적어도 중국의 많은 이들은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을 중화민족의 커다란 경사로 보는 수준을 넘어, 중국이 제대로 일어섰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민족의 쾌거로 간주했다. 당시의 올림픽에서 중국인들은 제대로 알아차렸지만, TV를 통해 이를 지켜보던 세계인들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있다.축선(軸線)의 설계자들


▎동쪽에서 바라본 천안문의 모습. 옛 왕조의 전통 축선에 걸려 있는 천안문의 마오쩌둥 초상화가 보인다.
앞서 소개했듯이, 베이징의 옛 도시 축선은 약 7.3㎞로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을 지나, 북쪽의 종루와 고루로 이어지는 데 불과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축선을 연장했다. 종루와 고루의 북쪽으로 다시 12㎞를 연장해 지은 건축이 바로 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공원이다. 새집을 닮았다고 해서 냐오차오(鳥巢)라고 불렸던 메인스타디움과 물이 흐르는 큐브 모습의 수영장 수이리팡(水立方), 그리고 올림픽공원 등은 베이징 자금성 정북 방향 12㎞ 지점에 있다. 옛 황제의 용맥을 연장해 지은 이 올림픽공원과 메인스타 디움은 과연 무슨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일까?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중심 축선 모형도.
축선은 황제를 상징했고, 그 황제는 전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축선은 바로 정통(正統) 과 적통(嫡統)의 상징이다. 중국 공산당은 황제만이 거닐었던 그 축선을 과거의 유물로 그냥 두지 않고 길이를 늘였다. 이어 그곳에 메인스타디움 등을 지어놓고 베이징 올림픽을 치렀다. 공산당은 그 축선을 다시 활용함으로써 찬란했던 과거 중국의 정통 계승자가 자신이라는 점을 국내와 국외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거기에만 그칠까? 아니다. 중국을 통치하는 공산당의 사고에도 그런 축선은 생생하게 살아 숨을 쉰다. 중국 공산당의 강령은 당헌(黨憲)에 해당하는 당장(黨章)에 다 들어있다. 그 중국 공산당 당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을 근간으로…”. 그 뒤를 다시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胡錦濤)의 ‘과학발전관’이 잇는다. 앞의 셋이 중국 공산당 당헌의 핵심이다. 공산주의 근본적 이념과 그를 활용해 중국 건국에 성공한 마오쩌둥의 사상에, 개혁과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의 이론을 접목한 구조다. 거기다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지도자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정책적 지향을 다시 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으로부터 후진타오까지 이어지는 게 바로 중국 공산당의 통치 근간이다. 덩샤오핑까지가 핵심 골조를 이루고,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콘크리트로 녹슬거나 느슨해진 부분을 보완한 모습이다. 이는 중국이 사회주의의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개혁과 개방으로 커다란 전환을 이뤄 낼 수 있었던 사상적인 토대에 해당한다.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금성을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옛날 황제들이 제법 그럴듯하게 살았군!”이라며 단순한 감탄만 할 대목이 아니다. 통치의 근간을 초장(超長)의 축선으로 세우고 정통의 근간을 만들어 명분을 제대로 일으킴으로써 드넓은 대륙을 이끌려고 했던 축선의 설계, 또는 그 안에 담긴 방략의 무게를 느끼는 게 필요하다.

축선은 결코 옛날의 일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세상을 뜬 뒤로 그 시신을 축선의 포장 재로 활용하고 있다. 천안문광장 남쪽에 있는 마오 쩌둥 기념관이 바로 그 포인트다. 왜 세상을 떠난 지도자의 시신을 이 축선의 복판에 올려놓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천안문광장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그의 초상은 또 어떤가.

그에 관한 시비는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뜨거운 이슈다. 그는 과격한 좌파주의 실험인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중국 전역에서 연출했다. 그에 앞서서는 더 극좌적인 실험인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을 벌여 적어도 3000만 명의 인구를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형 초상은 오늘도 천안문의 한 가운데에 걸려 있고, 그의 시신은 ‘죽어서는 흙에 들어서야 편안해진다’는 중국 전통의 ‘入土爲安(입토위 안)’ 식 관념을 외면한 채 광장의 남단인 기념관 복 판에 놓여 있다. 왕조 시절 황제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했던 전통의 축선에 그의 초상이 걸리고, 그의 시신이 놓인 이유를 우리는 침착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사합원’에서 읽는 축선

베이징의 대표적 전통주택은 사합원(四合院)이다. 동서남북의 네 벽(四)이 주택 가운데의 뜰(院)을 향해 모여 있는(合) 꼴이라는 뜻이다. 어렵게 이해할 필요 없이, 이는 우리 한옥의 ‘ㅁ’꼴 형태의 주택을 떠올리면 좋다. 가운데 만들어진 뜰을 향해 사방의 벽면이 모여 있는 ‘ㅁ’꼴이어서 이 집은 안에 들어서면 우선 조용하고 은밀해 보인다.


▎황제의 도시 베이징에는 벼슬아치와 유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벽 외면에는 원래 창 하나도 내지 않았던 주택이다. 따라서 사방의 벽은 마치 성채의 성벽과 같은 느낌을 준다. 모든 벽과 건물 구조가 가운데에 있는 뜰을 향해 나 있으니 밖에서는 완연한 폐쇄형 구조다. 내밀하면서 은밀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적합한 건축형태다.

다른 뚜렷한 특징은 남북의 축선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사합원이 많이 생겨나면서 때로는 남북의 축선 구도를 살리지 못한 건축 도 등장했지만, 원래의 전통적 사합원은 남북의 축선에 동서의 횡적인 축선이 분명하다. 남북의 축선을 기점으로 가족 구성원의 서열이 분명해진다. 가장 큰 어른이 북쪽의 축선에 거주하고, 그를 중심으로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짓는 건물에서열을 맞춰 가족 구성원들이 방을 차지한다.

이 사합원은 베이징의 또 다른 상징이다. 그 사합 원 주택 양식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여 년 전의 서한(西漢) 시대 무덤에서 ‘ㅁ’자 형태의 사합원 초기 모형이 출토되고 있으니 그 역사는 매우 장구한 편이다. 중국 북방의 대표적 민가 형태라고 볼 수 있지만, 베이징의 사 합원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남북의 축선이 명료한 이 주택은 질서와 위계(位階)의 관념을 자랑한다. 번듯한 구획(區劃)의 의미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베이징 사람들의 인문적 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질서와 위계에 관한 의식이 분명한 만큼 사람들은 정치적 소양이 매우 발달해 있다. 아래위를 가르는 게 권력을 사이에 둔 정치적 행위의 근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아울러 적장자(嫡長子) 중심으로 서열과 위계를 매기는 전통적 종법(宗法) 사회의 구조에 딱 들어맞는 구조이기도 하다. 중국 사회가 오랜 농업의 역사를 지녔고, 그런 흐름 속에서 적장자 중심의 종법제도를 발전시켜왔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종법사회 전통에 가장 잘 맞는 주택이 사합원이요, 그 사합원이 대표적 민가 형태로 자리를 틀었던 곳이 바로 베이징이다.

사실, 이 축선의 구조와 그를 현세의 생활에 제대로 구현해 활용하는 중국의 전통적 사유형태는 더 차분하고 깊게 들여다볼 주제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이 축선의 개념을 지닌 장치는 매우 많다. 그러 나 이 글에서 그 면모를 충분히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그저 베이징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긴 도시의 축선을 지닌 곳이고, 전통의 주택마저 그 축선의 개념을 매우 발전시켰다는 점을 우선 말해두기로 하자.

단지 하나 부연할 게 있다. 축선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경계다.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하며,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구획의 선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이 나눠지면서 누가 높고 누가 낮은가의 존비(尊卑)에 관한 관념도 모습을 드러낸다. 일종의 배열(排 列)이며, 이는 사물과 현상을 보는 철학적 사유를 대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축선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다. 아울러 세상을 어떻게 다룰지에 관한 경세(經世)의 근간이 기도 하다. 베이징 사람들이 대개 정치에 매우 민감하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어쩌면 이런 축선과 관련이 있는 대목일지 모른다. 베이징 택시기사들은 낯선 손님을 태우고서도 천안문광장 근처의 중국 권력층에서 벌어지는 정치 ‘뒷담화’를 즐겨 입에 올리는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울러 축선은 전략의 기초다. 중요한 것과 그렇 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준비해야 할 일의 순서를 매 기는 것이 바로 전략의 토대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뒤로 미루고, 우선 중요한 사안을 먼저 정리하고 그 자리를 잡아두는 것인 전략의 기초다. 따라서 축선이 발달한다는 점은 전략의 사고 또한 매우 풍부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연산산맥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풍수상의 용맥을 살려 그 위에 황궁을 짓고, 황도를 건설해 통치의 근간을 삼았던 전통 왕조의 ‘방략’은 오늘날의 중 국 공산당 통치술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광장의 넓은 대지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다. 그곳에 광장을 만들어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할 때 희생당한 많은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인민영웅기념비를 만들었다. 고색이 창연한 자금성도 그냥 두지 않았다. 천안문 가운데에 마오쩌둥의 거대 초상화를 걸었고, 그의 시신을 광장 남쪽의 기념관에 ‘모셨다’.

공산당의 당헌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맨 앞에 세운 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이어서 배열했다. 중심축이 분명한 건축의 구조와 닮았다. 덩샤오핑이 사회주의의 토대 위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갖다 붙이는 개혁과 개방에 성공한 이유도 다 여기서 나온다. 거대한 혼란을 불러올 수 있었던 실험임에도 축선의 바탕을 그대로 살리면서 현실적 측면에 자본주의의 요소를 도입하는 절충형으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

이는 ‘배열’에 관한 매우 두드러진 사유의 형태이 자, 내가 얻어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는 전략적 사고의 특징에 해당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하며, 아울러 전략의 마인드가 풍부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축선의 사고와 연관이 깊어 보인다. 베이징의 인문적 분위기는 대개가 그렇다. 정치적이며 전략적이다.

‘관개운집(冠蓋雲集)’이라는 중국 성어가 있다. 관(冠)은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를 의미한다. 개(蓋)는 벼슬아치들이 즐겨 탔던 수레 위에 올린 우산과 같은 장치다. 맑은 날에는 햇빛을 가리고, 비가 올 때에는 비를 막기 위해 수레 위에 올린 것이다. 사모관대(紗帽冠帶)의 벼슬아치, 그리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수레의 우산과 같은 장치들이 사나운 비 내리기 전의 구름처럼 새카맣게 몰려 있다는(雲集) 상황을 형용한 말이다. 베이징은 그 관개운집의 전형이다. 우리말에도 ‘서울 가서 벼슬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베이징은 더 그랬던 모양이다. 수도에 거주하며 공직에 다니는 벼슬아치, 즉 경관(京官)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게 분명하다. 아울러 황제 밑의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즐비하고, 총리를 비롯한 장관급의 벼슬아치들이 줄을 이었으니 함부로 제 관직의 위계를 자랑하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었다는 얘기다.베이징의 인문 풍경

이 글이 중국의 각 지역의 인문적 특성과 그 고장이 배출한 인물을 소개하는 마당이지만, 베이징이 낳은 인물을 꼽자니 매우 막연해진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명대와 청나라 때의 황제들이 사실은 다 베이징 출생이다. 몽골이 통치한 원나라 때부터 많은 황제가 이곳에서 태어나 중국을 다스렸다. 아울러 비록 이곳을 출생지로 두지는 않았지만, 명대와 청나라 때의 수많은 경관도 베이징의 인문적 특성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너무 많아서 딱히 몇 명을 특정해 거론하기가 힘든 곳이 바로 베이징이다.

베이징은 그 자체보다 상하이와 비견할 때 특징이 두드러진다. 중국에서 흔히 남북의 문화적 차이를 이야기할 때 즐겨 등장하는 대표선수가 바로 베이징과 상하이다. 베이징은 북녘의 인문을 대표한다고 해서 경파(京派)라고 적고, 상하이는 남녘의 인 문 전체를 대표한다고 해서 해파(海派)라고 적는다.

이 경파와 해파의 구분은 사실 문학에서 비롯했다. 1930년대 중국 문단의 유파(流派)적 논쟁에서 시작해 한때 중국의 문학 독자들에게 많이 회자됐던 용어다. 그러나 나중에는 인문적 차이에 관한 논설들이 쏟아지면서 각자 남북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던 용어다. 상하이는 앞 회에서 소개한 대로 전통 주택인 석고문(石庫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혼융의 개념을 문화 바탕에 깔고 있다. 베이징은 그에 비해 전통주택 사합원이 말해 주듯이 질서와 위계의 관념이 매우 두드러진다. 아울러 남들과 섞이고 뭉치는 혼융의 개념보다는 사방을 가리는 벽에 갇혀 내밀함과 은밀함을 추구하는 쪽에 가깝다.

전통주택인 사합원이 남북의 축선에 따라 위계의 관념을 발전시켰듯이, 베이징의 일반인들도 그 위계에 따른 처신이 매우 발달해 있다. 아울러 지고지존(至高至尊)의 황제를 정점으로 해서 그 밑에 수를 헤아리기 조차 힘든 수도 벼슬아치들이 살고 있었다. 황제 아래 사는 신민(臣民)이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고, 매일 부딪치는 사람들이 벼슬아치들이다. 따라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서열에 민감하며, 관본(官 本)의 사고 취향도 뚜렷하다.

사람의 성향으로는 대개 충후(忠厚)함을 꼽는다. 상하이 사람들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취향이 강한 것과는 달리, 변화에 둔감하며 행동 등에서 명분 찾기를 즐긴다. 좀 더 정치적인 계산을 하는 까닭에 행동이 그렇게 재빠르지 않은 편이라는 평가도 있다. 혼자 즐기기를 좋아하며, 한적한 공원에서 홀로 산보를 하는 취향도 강하다고 한다. 세련된 정치의식으로 남과의 말싸움을 즐기는 편이라는 말도 듣는다.

세계를 향하는 중국의 전략적 바탕은 베이징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중국 전역을 통치하는 공산당은 워낙 은밀해 그 속내를 잡아내기 참 힘들다. 중국을 통치하는 그룹의 구체적인 사고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과거의 중국 통치자, 그리고 현재의 중국 통치자들이 그 사고의 바탕 요소를 바깥으로 뭉쳐 만들어낸 축선에서는 중국을 크게 읽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베이징의 축선이 지니는 인문적 요소를 먼저 소개했다. 다음에는 베이징이 대표하는 중국 북부지역의 문화와 인물들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