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일본 속 우리 고대사⑥ - 일본 생활문화의 뿌리 하타(秦) 가문의 정체

벼농사와 길쌈, 금속·도예·목공기술까지 전수… 일본 왕실의 교토 천도자금 대기도


교토 후카쿠사(深草) 후시미(伏見)의 후시미이나리다이샤(伏見稻荷大社) 본전. 일본 곳곳에 4만여 개나 퍼져있는 이나리 대사의 총본궁이다.
8세기 초 어느 해 가을, 큰 풍년이 들자 야마시로(山城: 오늘날의 교토 지역) 고장의 으뜸가는 신라인 부농 하타노이로코(秦伊呂具)는 기쁨에 넘쳤다. 그는 모두 조상님의 은덕으로 여겨 ‘조상님과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올리자’고 결심하고 하인들에게 햇곡식으로 신주(神酒)를 빚고 흰 떡을 만들도록 했다. 하인들이 떡을 해오자 하타노이로코는 하늘로 휙 던져 올렸다. 8~10세기에 씌어진 <야마시로 쿠니후도키(山城國風土記)>에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일본 왕실문서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농사의 신’을 모시는 후시미이 나리다이샤를 세운 하타노이로코 (秦伊呂具)의 조상. 후시미이 나리다이샤의 신주는 하타 가문의 조상신인 천일창 왕자의 신주로 추측된다.
“하늘을 향해 떡을 휙 던지더니 그 떡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화살에 맞은 떡은 한순간 하얀 ‘백조’로 변신해 날갯짓하더니 산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서는 불쑥 벼 이삭이 솟아났다. 하타노이로코는 몹시 두려워하며 땅에 엎드려 벼 이삭이 솟아난 자리를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하타노이로코는 이곳 후카쿠사(深草) 터전의 후시미(伏見) 이나리(稻荷)산에 농신(農神)의 신주를 모시는 이나리 사당을 세웠다.”

하타노이로코가 세운 후시미이나리다이샤(伏見稻荷大社, 교토시 후시미구 후카 쿠사 68)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당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일본 각지를 돌아보면 어느 곳에서나 흔히 마주치는 사당이 다름아닌 이나리 진자(稻荷神社)다. 2008년 간행된 <이나리총본궁(稻荷 總本宮)>에 따르면 현재 일본 각지에는 “이나리 대사를 총본궁으로 한 이나리 신사 4만여 곳”이 있다고 한다.

1300년 전 처음 선 후시미이나리 대사에서 모신 주신(主神)은 ‘우카노미타마오카미(宇迦之御魂大神)’였다. 이 주신 다음 서열인 둘째 신주는 이른바 ‘쌀밭’이라는 ‘논의 큰 신’ 사루다히코오카미(猿<佐>田彦大神) 다. 본지가 지난 2월호에서 소개한 쓰루가(敦賀)의 게히진구(氣比神宮)에서는 이사루다히코(猿田彦命)가 7명의 신주 서열에도 끼이지 못한 채 문간방 신세를 면치 못했으나 이곳 교토 땅에서는 서열 2위에 당당히 올랐을 뿐 아니라 호칭 또한 ‘오카미(大神)’로 격상되었다. 역시 이곳은 농신의 큰 사당답게 대접이 융숭하다.

그런데 후시미이나리 대사의 주신인 우카노 미타마 대신의 별칭이 만요가나(万葉仮名, 이두식 한자)로 ‘창고 안의 벼’를 뜻하는 ‘구라이네 미타마노카미(倉稻魂神)’여서 관심을 끈다. 이처럼 또 하나의 직설적 호칭이 붙은 이유는 뭘까? 구라이네미타마노카미가 귀중한 생명의 양식인 쌀 곳간을 지키는 신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 산업화 사회에서조차 쌀을 포함하는 식량자원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물며 천 수백 년 전 과학 부재의 시대, 오로지 하늘이 뿌려주는 은혜로운 비와 햇빛에만 의지하던 채집사회에서 쌀의 가치는 훨씬 더 중요했으리라.

오로지 벼 생산의 전능한 지배자는 하늘의 천신이었기에 그 으뜸인 고조선의 신주 ‘구마노히모로기(熊神壇, 곰신단)’가 당시 일본 선주민 사회로 전파되면서 이 새로운 신앙이 농업사회 건설의 유일한 디딤돌이 되었다고 본다. 곰 신단을 모시고 온 신라의 천일창 왕자(연오랑) 신주를 쓰루가의 국가사당인 게히 신궁에서 게히오카미(食靈大神) 또는 미케쓰오카미(御食津大神) 등으로 받들듯이, 후시미이나리 대사에서도 주신 우카노미타마 대신을 또 다른 이름인 구라이네미타마노카미라고 불러온 것이다. 더구나 이나리 대사에서는 사루다히코 대신을 다섯 신 가운데 둘째로 높은 신으로 본신당에 모셨다. 그렇기에 이나리 대사의 신라신은 곧 천일창 왕자의 신주가 아닌가 추찰된다.

한민족 고대 신앙으로는 태양 등 천계를 모시는 천손신앙, 산천 등 자연을 숭배하는 산악신앙과 함께 곡령(穀靈)신앙이 이어져왔다. 그 발자취의 하나로 동해를 건너 일본 땅으로 이어지는 ‘천일창 루트’를 거듭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생명의 원천으로서 풍작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소도(蘇塗)의 천신 제사 등 오랜 곡령신앙의 역사로서 일본 서북쪽 쓰루가의 게히 신궁과 교토의 후시미이나리 대사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도쿄(東京)대 사학과 구메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일찍이 천일창이 고대 일본의 ‘시라기노이나이노미코토(新良貴稻飯命)신’(<日本古代史> 1907), 직역하면 ‘신라 벼의 밥신’이었다는 자취를 찾아냈다.

효고교이쿠(兵庫敎育)대 나카가와 도모요시(中川友義) 교수는 <니혼지키 (日本書紀)>의 천손강림 신화는 조선의 개국신화를 쏙 빼 닮았다고 지적하면서 “천손족을 선도한 사루다히코노카미는 본래 조선의 한신(韓神)”이라고 주장했다. 나카가와 교수는 이 같은 전제 아래 “이나리 대사는 하타(秦) 가문의 조상신을 모시는 곳으로 제신(祭神)은 우카노미타마노카미와 사루다히코노카미다. 하타 가문이 대대로 신관을 맡아 제사를 지냈다. 이들 신은 식산(殖産) 진흥의 신으로 전국에 수만 곳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중략) 이루마(入間) 시에는 사루다히코노카미를 모시는 시라히게진자(白鬚神社)도 굉장히 많다”(<渡來した神々>1973)면서 ‘논의 신’인 사루다히코노카미를 모시는 시라히게진자 40여 곳을 예시했다.

나카가와 교수는 신라의 벼농사가 천일창에 의해 동해를 건너 일본 서해안으로 들어온 해상 루트를 ‘벼의 길(稻の道)’이라고 자적하면서 “동조선 난류가 이즈모(出雲) 지방 등이 속한 시마네(島根) 반도를 거쳐 북상해 멀리 노토(能東)반도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錄)>에 따르면 현재의 이루마시의 이름도 이 고장의 지배자였던 고대 신라인 이루마 슈크네(入間宿禰)의 성씨에서 따왔다. 이루마는 물론 시키시(志木)·닛자(新座)·가와 고에(川越)시 등 사이타마(埼玉) 현 대부분의 고장은 천일창 왕자의 연고지로 알려져 있다.

후시미이나리 대사의 고문서를 살펴보면 주신인 “우카노미타마 대신은 긴메이(欽明) 천황의 와도(和銅, 서기 708~715) 연간에 처음이나리 세 봉우리의 평평한 곳에 나타나 ‘하타 가문 사람들(秦中家ノ忌寸等)’이 신관으로서 축문을 외우면서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稻荷社禰宜祝等申狀>)고 한다. 하타 가문이 신라 도래인이라는 것은 일본 역사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하타 가문의 정체는 무엇인가? 리쓰메이칸(立命館)대 사학과 야마오유키히자(山尾幸久) 교수는 “거대한 하타 씨족이 야마시로 지역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하타 씨는 본래 울진군(경북 울진)의 호족이며 5세기 말 도래했다”(<日本國家の形成>1968)고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교토부립대 사학과 카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하타 씨족은 고대 울진군의 소군주였다” (<飛鳥> 1995)고 간주했다. 하타 씨족은 벼농사뿐 아니라 금속·도예·목공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필수 생활양식을 일본 선주민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그들의 추앙 속에 지역사회 발전을 이끌었다. 그렇기에 후시미이나리 대사의 신라 농신은 이 고장의 벼농사를 관장할 뿐 아니라 전 일본의 벼농사를 지켜 주는 최고의 신령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굳이 한 가지 더 밝혀두자면 하타 가문의 신라 농신 사당 건립과 제사에 대하여 교토산교(京都産業)대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하타 가문의 먼 조상 이로코하타 공(伊呂具秦ノ公)이 제사지내기 이전부터 이미 이 고장 선주민들이 먼저 신에게 제사지냈다’(<渡來人> 1987)고 주장했다. 이노우에 교수는 2011년 말 필자에게 보낸 책자에서도 “모름지기 하타 씨가 후카쿠사 일대에 정주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고장 선주민들의 제사가 행해졌을 것이고 뒷날 하타 씨의 신앙이 여기에 겹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헌 고증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노우에 교수이지만 이 부분과 관련한 문헌 제시가 없어 아쉽다.볏섬을 모시는 일본 농촌 민가들


후시미이나리다이샤(伏見稻荷大社)는 일왕이 직접 참배할 정도로 이름 높은 사당이다. 후시미이나리다이샤 한편에 일왕이 직접 다녀갔다는 표찰이 보인다.
여기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둘 기록이 있다. 후시미이나리 대사의 또 하나의 중대한 ‘사기(社記)’인 <국수 15개조지해(口授十五個條之解)>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이나리 대사는 “와도 4년 2월 임오일 후카쿠사의 부호 이로코하타 공이 칙명을 받들어 세 분의 신을 이나리산의 삼봉에 제사모신 데서 시작되며, 그해에는 곡식 농사가 대풍이었고 누에치기로 길쌈(蠶織)을 하여 천하의 백성이 복에 넘쳤다”고 기록돼 있다. 벼농사뿐 아니라 누에치기나 길쌈 기술의 보급 역시 신라 하타 씨족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타 씨의 모국 신라의 벼농사와 양잠의 발자취는 2000년 전부터 이미 뚜렷하다.<본지 5월호 참조>

후시미이나리 대사의 중요한 기록을 하나 더 살펴보면 근·현대까지 “하타 가문 사람들이 신관직에 근무”(<伏見稻荷大社年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당 이름인 ‘이나리(稻荷)’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곧 수확한 벼를 담는 ‘볏섬’이라는 뜻이다. 농신에게 감사드리는 ‘볏섬 제사 모시기’는 지금도 일본 각지에서 널리 이어져 흥미롭다.


하타 가문이 가쓰라가와에 둑을 쌓아 관개농업으로 벼농사를 일으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비석. 간무(桓武) 천황의 교토 천도 때도 하타 가문이 천도에 필요한 토지와 비용 일체를 제공했다는 게 일본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간사이(關西)대 다나카 히사오(田中久夫) 교수는 오사카(大阪)부 후지이데라(藤 井寺)시의 농촌지역에 대한 민속조사 결과 “정초에 신에게 바치는 ‘둥글고 큰 찰떡(オカガミ)’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더니 ‘집안에 막 들어선 봉당 한가운데 쌀 10자루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놓고 그 위에 둥글고 큰 찰떡 쟁반을 얹습니다’(<祖靈と稻作>1981)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봉당에 모신 10개의 쌀자루 앞에 머리 숙여 ‘올해도 풍년이 들게 해주소서’ 하고 빈다고 했다. 새해 정월의 신인 쌀자루를 어신체(御神體)로 모시는 예는 교토부 후나이(船井)군 소노베(園部)정에도 있었 다”고 보고했다.

쓰쿠바(筑波)대 이지마 요시하루(飯島吉晴) 교수는 “논을 고사터로 삼아 첫 벼를 제물로 바치는 외에 마을의 터주신, 부엌신 등 집안의 신, 그 밖에 문간·처마밑 등에 제사를 모신다”(‘收穫をいわう穗卦祭と刈上げ祭’ 1981)고 보고했다. 우리나라 민간에서 올리는 10월 상달 고사 역시 추수감사제다. 시루 떡을 쪄 접시에 담아 대청·곳간·장독대·우물 등 집안 곳곳에 바치고 새해의 풍년과 집안의 안녕 등을 기원하는 주부들의 모습은 한국 농촌의 민속이다. 물론 이는 고조선의 추수감사제가 전해진 것이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동명), 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등도 모두 신성한 터전인 소도(蘇塗)에 솟대를 세우고 왕과 백성이 함께 천신에게 햇곡식으로 빚은 신주(神酒)와 떡을 바쳐 감사드리고 나누어 먹는 추수감사제였다.

이러한 곡령신앙의 발자취에 대해 나카가와 토모요시 교수는 “사람들은 철마다 광장에 모여 길흉을 점치고 풍작을 빌며 수확을 감사드리고 술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씨족 중심의 사당(신사)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근처에 묘지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당시에는 왕을 ‘천군(天君)’이라고 불렀다. 이지마 교수는 “중요한 것은 벼 수확 전의 논제사(穗卦祭)와 수확 후의 제사(刈上げ 祭)라는 두 가지 마쓰리 형식이다. 이는 이세 신궁(미에현 이세시에 있는 국가 사당)에서 지내는 왕실 제사에서 첫 벼를 바치는 간나메사이(神嘗祭)와 벼를 수확한 뒤 다시 제사 지내는 니나메사이(新嘗祭)로 나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민간의 벼농사 의례가 왕실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천일창 등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 당시 벼농사와 함께 신라 민간 혹은 궁정의 천신제사 양식이 일본으로 전래된 증거로 보인다. 일본 선주민의 문화인 야요이(彌生) 시대에는 “사냥,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이 중심이었으며 농경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日本史>1991)는 것이 정설이다.

하타 가문에서는 명사도 여럿 나왔다. 특히 6세기 조정 고관이던 신라인 하타노오쓰치(秦大津父)가 유명하다. 하타노오쓰치는 이나리 대사를 세운 하타노이로코의 먼 조상이다. <니혼지키>에는 하타노오쓰치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후카쿠사에 살던 대부호 하타노오쓰치가 말을 타고 이세(伊勢) 지방을 다녀오다 산속에서 한 마리의 늑대가 다른 늑대들에게 물어 뜯겨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목격했다. 하타노오쓰치는 그 늑대를 가엽게 여겨 하인들에게 못된 늑대들을 쫓아내도록 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카쿠사의 하타노오 쓰치 저택으로 왕실의 고관들이 찾아와 ‘천황(欽明, 재위 539∼571)께오서 공을 모셔오라는 어명을 받들고 왔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하타노오쓰치는 천황이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궁금해 하면서 고관들을 따라 나라(奈良) 땅의 조정으로 갔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긴메이 천황은 하타 노오쓰치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함께 식사하면서 왕자 시절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장차 하타노오쓰치라는 사람을 찾아내 크게 위로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천황은 ‘그동안 혹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있었소’ 하고 물었다. 하타노오쓰치는 근자에 크게 다친 늑대를 구해준 사실을 아뢰었다. 그의 말에 천황은 감동하면서 ‘인자한 그 마음씨. 그 가여운 늑대가 필시 그대에게 은혜를 갚게 되었나 보오’ 하고 칭송했다. 그 후 하타노오쓰치는 긴메이 천황의 왕실을 도왔다. 더불어 그의 부귀와 명성 또한 더욱 커졌다.”

이 ‘늑대설화’에 등장하는 긴메이 천황에 대해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1991년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 기고한 글에서 “본래 백제의 성왕(‘二顔大王―百濟王·聖王は欽明天皇だった’)”이라고 주장했다.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고대 불교문헌(<上宮聖德法王帝說>) 등을 예시하면서 “긴메이 천황이 즉위한 것은 539년이 아니고, 제26대 게이타이(繼體) 천황(재위 507~531)이 죽은 서기 531년”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왕은 두 나라를 왕래하며 통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교토에는 백제 성왕의 신주를 모시는 히라노진자(平野神社)가 있다. 794년 일본 왕실이 세운 사당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자세히 기술한다.

가을추수가 끝난 후 11월 23일 거행하는 니나메사이라는 일본 왕실의 제사는 천황이 직접 제주로 참여할 정도로 연중 가장 크고 중요한 궁중제사다. 그런데 <엔기시키 (延喜式)>(전 50권, 927년 편찬)라는 일본 왕실의 고문서에는 “이 제사에서는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 가라카미(韓神) 등 세 분의 고대 조선신에게 제사 드린다”고 기록돼 있다. 이 왕실 고문서의 제1권은 신에게 제사드리는 가장 중요한 문서[神祇]다. 30년 전 이 왕실 문서를 처음 봤을 때 그 첫권 첫머리에 “왕실에서 모시는 세 분의 신인 소노카미(園神)와 가라카미(韓神) 세 분(宮內省坐神三座, 園神·韓神三 座)”이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어 눈을 의심케 했다. 그 두근거리던 가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일본 왕실 제사 춤의 뿌리

고쿠가쿠인(國學院)대 국문학과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교수는 왕실 제사인 가라카미노마쓰리(韓神祭)에 대해 “왕실에서 모시는 가라카미 사당(韓神の社)의 제사로 2월 축일(丑日, 소날)과 11월 축일에 거행되며 소노카미노마쓰리(園神祭)도 같은 날 소노카미 사당(園神の社)에서 제사를 올렸다”(<年中行事辭典> 1958)고 했다. 가라카미노마쓰리 연구의 권위자인 고쿠가쿠인대 신도학과 우스다 징고로(臼田甚 五郞) 교수는 가라카미노마쓰리의 ‘한신(韓神)’ 축문을 해설한 그의 저서 <카구라우타(神樂歌, 1976)>에서 “‘한신’ 축문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천황들에 대한 제사”라 고 주장했다.

그런데 교토의 “후시미 이나리 대사에서도 해마다 11월 23일 일본 천황궁과 똑같은 니나메사이 제사를 거행한다. 이때 가라카미닌죠마이(韓神人長舞)라고 하는 일본 천황가의 제사춤도 성대하게 거행한다”고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10여 년 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일본 고대사의 태두(泰斗)인 우에다 교수는 <엔기시키>의 내용과 왕실 제사 관련 문헌들을 상세하게 연구(<神樂の命脈> 1969)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날 우에다 교수를 통해 이나리 대사의 최고 신관인 나카무라 히카리(中村陽) 궁사를 소개받았다. 나카무라 궁사는 “저희 사당에서는 해마다 일본 왕실 의 11월 23일 제사인 니나메사이와 똑같은 제사를 거행합니다. 이때 왕실 제사의 무용음악인 ‘어신(御神)악’을 연주합니다. 또한 왕궁 어신악과 똑같은 가라카미(韓神)라는 한국신을 모시는 강신(降神) 축문을 읽습니다. 이 제사의 춤은 역시 일본 왕실 제사의 춤과 똑같은 가라카미닌죠마이입니다. 또한 미에현 이세 신궁의 외궁(外宮)에 주신으로 모신 도요우케노오카미(豊受大神)는 풍년을 베풀어주시는 저희 사당 주신의 다른 이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신라 농신을 국가사당인 이세 신궁에서 모신다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에다 교수와 필자는 니나메사이의 ‘한신’ 축문을 함께 소리 내어 외웠다. 그날 이후 나카무라 궁사는 필자가 일행(역사학자, 문인들)을 이끌고 단체로 찾아갈 때마다 가라카미닌죠마이라는 제사 춤을 특별 공연해 보여준다.

후시미이나리 대사는 교토 역에서 JR전철(나라센)로 불과 세 정거장 거리다. 후시미 역에서 내리면 눈앞 동쪽의 나지막한 이나리산(稻荷山, 해발 233m) 언덕 밑으로 전당들이 웅장하게 다가선다. 이 사당은 지난해 2월 초 오일(初午日) 창건 1300년의 오랜 발자취를 자축했다. 교토 리쓰메이칸대 사학과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수는 한반도 도래인들은 4~5세기께부터 교토의 가토노(葛野) 지방에 뿌리를 정하고 “그들은 우선 질척거리는 이 고장 토지를 개량하는 한편 가쓰라가와(桂川)에 큰 둑(大堰)을 쌓고 수량을 조절하는 등 관개를 했다. 일본 댐 건설의 원조라고 한다면 이 일대가 아닐런가. 이 댐 작업은 하타 가문이 건설했는데 천하에 비할 데가 없다는 찬사를 받았다”(<京都>1963)고 썼다. 나라시대(710∼784년)의 사료에도 하타 가문의 ‘가도노의 큰 둑(かどののおおい)’과 관련한 기록이 전한다.

현재 교토 가쓰라가와의 도게쓰교(渡月橋)에서 상류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큰 뚝 건설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대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중엽인 제7대 일성왕 11년(서기 144) 음력 2월 “식량은 백성이 가장 소중하므로 주·군마다 제방을 수리하고 논밭을 더 많이 개간하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신라의 선진 관개농업의 발자취는 근년에 경북 안동 ‘청동기 유적’에서 “2800여 년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청동기시대 습지유적에서 본격적인 저수지며 보의 자취가 발굴”되었다는 것이 2005년 5월 이한상 교수(동양대 박물관장)에 의해 밝혀졌다. 이보다 앞서 발굴된 논농사 유적지는 청동기 전·중기인 서기전 8~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시 무거동과 충남 논산 마전리 유적이다. 역사 기사로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 16대 걸해왕 21년 기사에서 서기 330년 완성된 전북 김제 벽골지 저수지 (사적 111호) 관련 이야기가 전한다.일본 왕실 제사의 축문에 신라 말 ‘아지매’가?


1 아베 스에마사 신관이 일본 천황궁과 미에 현의 국가사당인 이세신궁 등에서 행해지는 ‘한신(韓神)’ 제사 때 행해지는 ‘가라카미닌죠마이(韓神人長舞)’를 공연하고 있다. / 2 일본 도쿄 천황궁에서 행해지는 ‘한신’ 제사 때 읽는 축문의 복사본. 신라말인 ‘아지매(阿知女)’라는 말이 보인다.
필자는 꼭 10년 전인 2002년 7월 11일 도쿄(東京) 황궁 내에 있는 ‘가구라샤(神樂舍)’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당시 EBS에서 광복절 특집으로 이 장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때 천황궁의 아악 최고위 담당관이던 아베스에 마사(安倍季昌) 악장은 제사 춤인 ‘가라카미닌죠마이(韓神人長舞)’에 대해 필자에게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가라카미(韓神)는 한국신”이라는 아베 악장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베 악장은 지난해 8월 18일 서울역사 박물관에서 열린 국제 학술강연에서도 “가라카미는 한국신이며, 중요한 것은 가라카미닌죠마이도 마지막 단계에 춤을 춥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라카미는 간무(桓武) 천황(재위 781~806, 모친은 백제 왕족인 和新笠 황태후)이 교토로 천도(794)할 당시 귀화인 하타 일족이 토지와 비용 일체를 왕실에 제공했기 때문에 이 고장의 가라카미를 제사 지낼 때 ‘가구라우타(神樂歌)’로 집어넣게 된 것” 이라고 밝혔다. 아베 담당관은 8세기 말 백제계간무천황이 교토[平安京]로 천도할 수 있었던 배경에 교토의 호족 하타 가문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는 지금까지 일본 사학계에서조차 논의된 일이 없는 새로운 천황가 내부의 주장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일본 왕실 제사음악인 카구라우타는 축문인 ‘가라카미(韓神)’를 노래처럼 외우는 것이다. 그런데 만요가나로 표현된 축문 마지막 대목에서 놀랍게도 아주머니의 ‘경상도 말’인 ‘아지매(阿知女, あちめ)’, 즉 신라어가 등장한다. 이 마지막 대목의 뜻은 아지매에게 “하늘로부터 왕실의 제삿상으로 내려와주소서”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한글로 옮기면 ‘아지매 오오오오, 오게 아지매 오오오오’가 된다. 아베 악장이 강연문에서 이 부분을 현대어로 풀어 쓴 것은 ‘三島木綿肩に取り掛け我れ韓神の 韓招ぎせむや 八葉盤を手に取り持 ちて我れ韓神の 韓招ぎ せんや韓招ぎ’다. 번역하면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우리 한신의 한(韓)을 모셔오노라. 팔엽반을랑 손에 쥐고 우리 한신의 한(韓)을 모셔오노라. 한(韓)을 모시노라’가 된다.

이처럼 ‘가라카미’ 제사 축문에서는 한신에게 ‘무명’을 바친다고 했는 데, 고대 사료에서도 이와 관련한 자취가 발견된다. “신라 왕자 천일 창의 의복을 무명과 삼베(麻布)로 만드는 일을 관장한 조정의 기관이 아파기부(阿波忌部)였다”(<古語拾遺> <職官考> 등)는 기록이 있다. 아베 악장은 축문의 “아지매(阿知女)는 천·지 ·인(天地人)”이라고 ‘천부경(天符經)’의 원리를 밝히면서 “신에게 올리는 제사로서 하늘은 오래고 땅은 영원하며 그 속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살도록 기도하는 축의(祝儀)를 노래로 부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렇듯 축문은 만요가나로 되어 있거니와, 만요가나는 본래 백제와 신라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니혼지키(日本書紀)> 번역본으로 유명한 고단샤(講談社) 간 <니혼지키>서문에서 번역자 우지타니 쓰토무(宇治谷孟) 교수는 <니혼지키>에는 수수께끼가 많다면서 “기록의 편찬에는 한적(漢籍)과 한자(漢字)에 통달한 백제와 신라로부터 건너온 도래인 교양인들이 관계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요가나의 한자 사용에는 갑류(甲類)와 을류(乙類) 두 종류의 구별이 있다. 이 두 종류는 당시 기록에 관계한 사람들의 출신지 방언(方言)의 차이다. 즉 백제계와 신라계 두 가지 계통이 있다는 것이 지적된다”고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또한 일본 왕실음악인 아악(雅樂)의 바탕은 신라악·백제악·고구려악으로 뒷날 여기에 당악이 들어와 합쳐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에 한국 고대악기들이 등장했고 그 실물이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 경내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잘 보존돼 있다. 이를테면 ‘시라기고토(新羅琴)’라고 부르는 일본 국보 가야금(伽倻琴) 3대를 비롯해 ‘구다라고토(百濟琴)’로 부르는 공후(箜篌), 고구려의 ‘요코후에(橫笛, 횡적)’와 ‘코시코(腰鼓, 장고)’, 이른바 ‘야마토고토(和琴, 화금·와콘)’로 불리는 악기도 있다.

이 야마토고토는 비단실로 엮은 여섯 줄의 현을 퉁기는 악기로, 본래 고구려의 거문고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일본 왕실 아악의 좌우 두 갈래 중 “우방악은 고구려 음악”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연주 악기로는 야마토고토, 즉 거문고가 주축이다. 야마토고토에 대해 음악학자였던 도쿄음악학교 교장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 1883 ~1978) 교수는 ‘금(琴)’을 가리키는 일본어 ‘고토(コト)’에 대해 조선의 ‘거문곳(玄琴)’인 “고구려 때의 옛말 ‘곳(琴, kot)’에서 일본말 ‘고토(koto)’가 생긴 것”(‘音樂から見た古代日本と朝鮮’ 1973)이라고 주장했다. 다나베 교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조선 왕실의 “이왕직 아악부를 지원 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필자는 도쿄의 황궁에 들어갔던 날 아베 악장의 안내로 왕실제사용 악기들을 두루 살피며 고구려 악기들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특히 가구라샤의 공연 무대 오른쪽에는 커다란 고구려북(高麗大鼓, こまたい こ)이 덩그러니 서서 위용을 자랑했다.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 일본 센슈대학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단국대 대학원 일본역사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왕인학회장, 한일천손문화연구소장. 저서로 <일본문화사신론> <일본 속의 백제>(총3권) <메이지 유신의 대해부>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만든 일본국보> 외 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