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인터뷰 | 육당 최남선의 長孫 최학주 박사 - “ 3·1독립선언서 등 육당 유품 한국에 기증하겠다”

기념관 세워지면 ‘신문관’ 현판·조선광문회 설립 취지서 원문 등 제공할 터… 조선사편수회 참가는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선 단군역사 정립 노력의 일환


▎최학주 박사는 할아버지 육당이 식자(識者)이기 이전에 출판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나선 식자공(植字工)이라고 말한다.
독일·프랑스·영국 3국과 이탈리아를 가르는 경계선은? 성(城)이다. 이탈리아는 성이 드물다. 모체가 되는 고대 그리스가 그러하듯, 왕과 귀족들만 살아남기 위한 ‘보호막’이 거의 없다. 독일·프랑스와 달리 전쟁이 벌어지면 모두가 나가서 싸워야 한다. 이런저런 핑계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피아자(Piazza), 즉 광장은 성의 정반대 위치에 선 공간이다. 뻥 뚫린 곳에서 신분·계급 관계없이 하나로 연결시켜준다. 광장은 이탈리아 건축의 핵(核)이다. 큰 도시 어딘가에는 반드시 넓은 광장이 있다. 이탈리아인의 생활과 사고 그리고 세계관이 전부 녹아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넓은 광장 내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인들의 ‘정수(精粹)’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광장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어떤 것일까? 청사·분수·도서관·대형조각물·병원·교회·오페라하우스 같은 것이 떠오를 듯하다. 필자는 시계라 생각한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곳에 위치한 커다란 벽시계다. 광장의 심장이자 이탈리아인의 영혼에 해당되는 것은, 허공에 걸려 모두에게 시각을 알려주는 초대형 시계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보통 시침·분침을 가진, 원형으로 이뤄진 큰 시계가 광장 어딘가에 걸려 있다. 청동제 철판을 사용한 예술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에서부터, 정오가 되면 병정들이 나와 춤을 추는 엔터테인먼트 장식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벽시계가 광장의 ‘최중심’을 지키고 있다.자유와 평등의 상징, 광장의 시계


▎가장 많이 알려진 육당의 모습. 육당은 평생 한복 차림에 양말 대신 버선을 신었다고 한다.
공공시계가 왜 광장의 중심이자, 이탈리아인의 정수에 해당될까? 이유는 간단하다. 광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제·오늘·내일’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능동적’으로 판단한다. 시간은 계획하고 실행하며, 평가하는 출발점에 해당된다. 시간에 대한 개개인의 권리나 판단은 21세기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시된다. 16세기 이전만 해도 전혀 다르다. 인간 스스로가 시간을 계획·실행·평가할 수 없던 시기가 중세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사실상 신의 노예에 불과하다. 스스로 시간을 판단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가톨릭에 대한 반발로 프로테스탄트 혁명이 일어나고, 종교개혁이 이뤄지기 전까지의 유럽이다. 오늘과 내일, 수십 년 뒤 사후의 세계로 이어지는 시간을 결정, 통제한 주체는 교회다. 교회 꼭대기에 달린 종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성스러운’ 도구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하고 교회에 갔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를 결정한 것은 교회 첨탑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다. 종소리를 통해 사람들이 모이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무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광장의 시계는 바로 그 같은 어두운 세계를 뚫고 나타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상징에 해당된다. 독일에서 탄생된 속담 중에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말이 있다. 광장은 도시의 중심이다. 시계는 광장의 중심이다. 세속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해준, 도시공기의 기초이자 근거가 바로 시계의 시침·분침 속에 드리워져 있다.

나아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한반도 전체 거주자에게 심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을 뿌리로 한, 한국인으로서의 자주성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게 만들어준 인물은 누구일까? 한국이란 아이덴티티는 어디에서 등장한 것일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그 같은 질문에 대한 최적의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국,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자부심을 갖게 만들어준, ‘광장의 시계’를 창조해낸 시대의 선각자가 바로 최남선이다. 육당이 만든 광장의 시계란 일생일대 사업으로 펼친, 한반도의 역사를 민족이란 틀 속에서 분석한 세계관에 해당된다. 문화적 특징을 기준으로,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독자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다. 토지·혈연·언어·종교·전통·사회조직이란 차원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정체성이 바로 민족의 구성요소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치고 민족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좌·우 이념 차원에서 왜곡되기도 하지만, 정치색을 뺀 역사·문화·언어라는 측면에서의 개념은 모두에게 자명하다. 모두가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절대권위를 가진 개념이 바로 민족이란 말 속에 투영돼 있다. 해방 이후 나타난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더불어, 민족을 주체로 한 민족주의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가치에 해당된다. 그 어떤 이유,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민족의 이름으로’라는 명분 앞에는 새벽의 어둠처럼 사라져버린다.

육당은 그 같은 개념을 생각해내고 한반도 전역에 확산시킨 인물이다. 민족을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야말로 한반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결정하는 중심이념이라 못박았다. 사실, 민족이란 말만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말도 없다. 영어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민족주의라고 번역하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하면 국수주의·국가주의·국민주의·애국주의 등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한국인치고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가령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답은 “같은 민족이니까!”라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민족이 통일의 근거인가?” 다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도 분명하다. “가족이 떨어져 살 수 없듯이, 어떤 이유에서라도 같은 민족이 갈라져서 살 수는 없다.”

최남선은 초등학생조차 ‘쉽게’ 내릴 수 있는, 그 같은 답의 근거를 제시해준 인물이다. 육당이 활동하기 전인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족이란 개념은 한반도에 전무했다. 역사와 생활 속에 존재해왔지만, 언어·가치·신념으로서 확실히 드러낸 적은 없다. 기껏해야 혈육·가문·고향 같은 국지적 개념이 전부였다. 양반·상놈, 여성·남성, 거주지와 출신지에 따른 차이로 인해 한반도 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었던 시대가 바로 육당 이전의 현실이다. 예를 들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위인으로 통하는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그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훈민정음 언해)
독립 필요성을 알린 조선 최초의 민족주의자


▎1. 3·1독립선언서를 만든 죄로 감옥에 수감된 육당. 육당은 평생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일제 하에 두 번, 해방 후 한 번이다. 하지만 육당은 수감 생활을 공부와 수양의 일환으로 여겼다고 한다. 2. 육당 장례식에서 영정을 든 당시 17세의 장손 최학주. 육당이 민족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시기에 8년간 함께 생활한 사람이 손자 최학주 박사다.
어리석은 백성이 자신의 뜻을 능히 펴지 못한 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다. 서방에서의 민족주의란 개념이 탄생되기 이전이기는 하지만, 조선이 중국과 다르다는 식의 발상은 전혀 없다. 어리석은 백성과 똑똑한 양반을 초월한 개념으로서의 ‘민족’을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광장 한가운데로 끌어올린 인물이 육당이다. 1919년 3월 1일, 스스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통해 ‘왜 조선민족이 일본·중국과 다른지, 왜 독립국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모두에게 알린 조선 최초의 민족주의자가 바로 최남선이다.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육당의 장손(長孫)이 미국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성 흑백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최남선의 흔적이 미국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국은 넓으면서도 좁은 곳이다. 예전에 취재를 한 시카고 지인(知人)의 대학 선배라는 것을 알고 연락처를 부탁했다. 육당의 장손은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으로 현재 뉴욕 근교에 살고 있는 최학주(崔學柱) 박사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허락 메시지가 바로 들어왔다. 묘한 흥분이 가슴과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다. 필자 머릿속에 간직된 육당은 단테·괴테·셰익스피어와 동일선에 있는 인물이다.

곧바로 최 박사 집으로 찾아갔다. 가는 동안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2014년 12월호 <월간중앙>에 실린 춘원(春園) 막내딸 이정화 박사가 그러하듯, 최 박사도 이공계 전문가라는 점이 특이하다. 식민지와 해방 이후를 통틀어 한국 최고의 지성인인 두 분의 후손들이 미국에 거주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유를 여러 각도에서 추론할 수 있겠지만, 어둡고 거친 한국의 근현대사의 흔적이란 생각이 든다.

최 박사는 필자를 반갑게 맞아줬다.

“한국에서 대학 나온 후, 학군단(ROTC) 출신 장교로 군복무하고, 국영기업체에 취직도 해 일하던 중 미국 대학원 장학생으로 왔습니다. 1972년에 학위를 받고, 논문과 연관된 응용기술을 개발하던 중 제약회사로 스카우트됐습니다. 귀국하기 전에 일을 배우려고 입사했지요. 신약개발 사업 부서에서 공정개발과 설비, 그리고 연방정부 FDA(식품의약청)의 인허가 부분을 주로 책임지고 있다가 얼마 전에 정년퇴직 했습니다. 현재는 신약개발 사업 자문역으로 가끔 회사에 들릅니다. 한국에도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갑니다.”

이공계 출신답게 자기소개가 간단명료하다. 최 박사는 필자의 머릿속에 그려진 육당의 피붙이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두텁고 둥근 안경을 쓴 19세기풍 외모가 아닌, 화공학과 식약품 관련 특허 전문가로 일하고 있었다. 73세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한 모습이다. 친구들과 함께 골프 18홀을 매주 두 번 정도 나간다고 한다.

‘하인 눈에 왕이 없다’는 말이 있다. 왕을 못 알아보는 눈이기에 하인에 머물러 있다는 역설도 가능하겠지만, 사실 가까이서 보면 장점이나 단점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기 십상이다. 객관성이 결여된, 숲이 아닌 나무에 집중하는 좁은 시각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자식의 눈이 아닌, 한 다리 건너 선 손자가 접한 육당이 한층 더 객관적이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판단이 든다.

“제가 1941년생입니다. 할아버지를 가까이 모신 것은 8년 정도입니다. 1957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제 나이가 10대에 들어서면서 침식을 같이한 큰어른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10세부터의 사춘기 기억은 평생 가지요. 막 구입했던 카메라로 할아버지 사진도 찍고, 저의 재산목록 1호인 자전거도 타면서 함께 놀았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었을 때 풍기던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까지 전부 기억합니다. 육당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병석에 계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뒤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다가 구술(口述)하는 글을 제가 기록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는 제가 영정(影幀)을 지켰습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궁금했던 생각을 물어봤다. “왜, 사상과 문학에 심취했던 육당과 다른 길을 걸었는지요?” 일제시대 당시는 물론 해방 후에도 불어닥친 육당 수난사가 다른 분야로 몰아낸 게 아닌가 추정해봤다. 그런 생각은 빗나갔다.중인 집안의 자유로운 가풍


▎육당의 부친 최헌규(崔獻圭). 중인 출신으로 농력과 한약재를 연결한 획기적 비즈니스로 큰 부(富)를 일구어냈다. 17세 육당의 활자사업을 위해 재산의 대부분을 제공한다.
“육당의 집안은 양반 명문가와 거리가 멉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노력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중인들이었습니다. 그 흔한, 가훈(家訓)이란 것도 없습니다. 굳이 찾아내자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는 가풍(家風)이 있다고나 할까요? 선대가 후대에게 뭐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식의 분위기 말입니다. 선대의 사업이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저의 경우,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중화학 분야라고 믿었기에 그쪽으로 갔을 뿐입니다. 거기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육당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자유로운 가풍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

최남선은 1890년 생이다. 공적 차원에서 조선사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년이다. 잡지 <소년(少年)>을 통해서다. 근대적 의미의 최초의 종합잡지로 춘원도 함께 참가한다. 소년이 창간된 11월 1일은 ‘잡지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잡지 <소년>에서 최남선은 스스로,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다. 한문투의 시가 아닌, 근대적 문법과 작법에 의한 시다. 이 모든 일이 당시 17세에 불과한, 청소년의 노력에 의해 이뤄진다.

“육당은 국비유학생 신분으로 14세 때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당시 가장 어린 나이로 일본어가 능통했기에 소년반장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건너간 유학생 대부분이 고관대작의 자식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14세 눈에 비쳐진 세도가 자손들의 모습을 통해 한말의 암울한 상황을 실감했다고 볼 수 있지요.”

최남선은 이후 1906년 16세의 나이로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지리역사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년 뒤 ‘조선왕래조’라는 모욕적인 대학 모의국회 의제에 항의하는 조선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한다. 잡지 <소년>의 창간은 퇴학 직후 한국에 돌아와서 시작한 일이다.

“출판사업을 위해, 당시 돈으로 7만원을 (육당의) 아버지인 최헌규(崔獻圭)로부터 받아냈습니다. 이후 ‘신문관’ 사업 경영에 10만원 정도를 더 투자합니다. 제가 계산해보니까, 당시 총액 17만원은 현재 돈으로 거의 200억원 정도에 달하더군요. 17세 나이에 200억짜리 일을 시작하고, 또 그런 일을 선뜻 맡기는 것이 육당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초지일관(初志一貫)해서 밀어붙이라는 것이 선조들의 생각입니다.”

‘출판 구국(救國)’에 뜻을 맞춘 최남선 부자는 17만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을 최첨단 근대기술에 해당되는 활판인쇄 설비를 갖춘 ‘신문관’ 사업에 퍼붓는다. 글을 쓰고 싶어도 실을 공간이 없던 것이 당시 상황이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 당시 유학생 회보에 글을 쓰기도 했다. 활자의 힘, 출판의 영향력, 글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일찍 깨달았다.

“조판 활자 관련 하드와 소프트를 일본에서부터 통째로 들여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 기술자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으면서 스스로 인쇄소 공원이 되어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잡지 하나 잘 만들겠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글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한민족의 문화·역사·의식을 개척하고 지켜나가자는 의미에서의 전방위 문화계몽 활동입니다.”부친, 농력(農曆) 만들어 부(富) 일궈


▎1. 육당의 가족 사진.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육당이다. 육당 바로 뒤 왼쪽에 한복을 입은 인물이 훗날 부산 피난 도중 숨진 큰아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사로 활동한 둘째 아들, 바로 옆이 북한으로 넘어간 셋째 아들이다. 육당의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비극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다. 2. 육당과 어머니. 육당의 정신적 기둥은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다. 강하고 근본을 강조한 인물이라고 한다. 3. 육당 생전의 마지막 사진. 나중에 국무총리에 오르는 동생 최두선과 함께 찍었다. 동생이 온다는 소식에 병환에서 일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육당은 이후에도 꾸준히 또 다른 잡지를 창간한다.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을 만든다>, 1914년에는 <청춘>, 1922년에는 <동명>, 1924년에는 <시대일보>라는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일제 압력으로 문을 닫게 되면, 또 다른 이름으로 계승해나간 것이다.

17세 최남선의 도전은 마치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만난 메디치가(家)의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건물·조각·그림·정원 등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메디치가의 깃발 아래로 몰려 들었다. 가장 천대받던 예술가들을 고용해 일감을 주고, 그들의 작품을 로마에 알리면서 전방위 문화활동에 나선 후원자가 메디치가다. 코지모 로렌초로 대표되는 수백 년 메디치가의 후원과 격려가 없었다면 아예 르네상스가 없었을지 모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부터 미켈란젤로·라파엘로·보티첼리로 이어지는 르네상스 예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메디치가의 열정과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당이 창간한 잡지 <아이들 보이>. 싸고 읽기 쉬운 잡지를 만들어 민족계몽에 활용한다. 일제의 간섭으로 중단되면 또 다른 잡지를 펴낸다.
주목할 대목이 하나 있다. 메디치가가 왜 문화활동 지원에 나섰느냐는 점이다. 자신의 부를 지키고, 권위를 높이기 위한 세속적인 이유가 답이다. 20세기 초 시작된 ‘청소년’ 최남선의 문화활동은 메디치의 동기(動機)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뤄진다. 개인적 영광이 아니라, 당시 사실상 일본에 넘어간 국권을 되찾고 조선인들을 계몽하려는 의미에서 출발한, 우국(憂國) 차원의 사업이다.

아무리 그래도 17세 청소년이 출판이란 전대미문의 사업에 ‘용감히’ 뛰어들 때는 그만한 배경이나 근거가 있을 듯하다.

“육당 아버지 최헌규는 자수성가한 인물입니다. 중인 출신으로 한약방을 하던 집에서 자랐지만, 집안이 어려워 크게 고생을 했습니다. 23세 때 당시의 행정관료시험인 식년시(式年試) 운과(雲科)에 합격한 뒤 관상감(觀象監) 자리에 들어 갑니다. 관직만으로는 생활을 하기 어려웠기에 부업으로 농력(農曆)을 만들어냅니다. 당시 농력은 중국에서 제공된, 이른바 황력(皇曆)을 복사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오늘날의 양력에 근거한 달력입니다. 최헌규는 농력을 활자로 찍어 판매하고, 더불어 중국과의 한약재 수출입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끌어모으게 됩니다. 당시 서울 사대문 안의 집이 전부 2천 채 정도였다고 합니다. 육당의 집안은 그중 80채가량에 달했다고 합니다. 육당이 출판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바로 최남선의 부친이 행하던 농력 배포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농력을 만드는 과정에서 활자의 위력을 실감했을 겁니다.”

잡지 창간과 농력 배포를 둘러싼 얘기는 마치 아날로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IT 성공담처럼 느껴진다. 사춘기 소년 육당의 ‘황당한 도전’이 없었다면 춘원이나 다른 문학가들도 빛을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도쿄(東京)를 경유해 잡지를 만들어내거나, 일본인이 소유한 서울 내 몇 안 되는 영세출판사를 통해 조선인의 글과 생각을 실어야만 했을 것이다. 한국 신문학의 개명(開明)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는 육당의 가풍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당 평생의 최고의 업적은 3·1독립선언서가 아닐까 싶다. 29세 나이 때 이룬 일이다. 출판사업이나 시를 쓰는 차원과 전혀 다른, 우국지사로서의 모습이 3·1독립선언서를 통해 나타난다.

“이 3·1독립선언서 원본은 제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일기장 사이에 끼어 있던 것입니다. 현재 제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최 박사가 얘기를 꺼내는 순간, 염치 불고하고 무례한 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원본을 직접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미국을 떠도는 3·1독립선언서


▎육당이 남긴 독립선언서. 육당과 장남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소중한 자료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필자가 독립선언서의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99년 8월이었다. 장소는 미국 수도 워싱턴 한가운데를 가르는 컨스티튜션에비뉴에 접한 국립기록원 (www. archives.gov)이다. 섭씨 40도에 가까운 뜨거운 여름을 국립기록원 앞에서 1시간 이상 보내야만 했다. 초·중·고교생들로 이뤄진 엄청나게 긴 줄 때문이다. 9·11 테러 이전 인데도 보안 검문이 남달랐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또 길다랗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로비의 중심부에 비치된 역사적 문건들을 보려는 행렬이다. 1776년 7월 4일, 미국 의회가 발표한 독립선언서 전시대가 수많은 행렬을 만들어낸 이유다. 길게 기다린 끝에 만날 수 있었지만, 로비 전체가 어두운데다 워낙 작은 글씨로 기록한 것이기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뒤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독립선언서 앞에 머문 시간은 5초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필자가 놀랐던 것은 두 가지다. 미국 전역에 흩어진 초·중·고교생들이 워싱턴에 들릴 때 반드시 찾는 곳이 독립선언서 전시실이라고 한다. 5초를 위해 1시간 이상 기다린다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대하는 학생들의 자세도 특별하다. 마치 성전(聖典)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처럼 엄숙하다.

두 번째는 전시된 독립선언서이다. 7월 4일 발표된 진짜 독립선언서가 아닌, 1823년 제작된 복사본이라고 한다. 독립선언서 원본은 의회 깊숙한 곳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독립전쟁 당시 워싱턴 장군의 비서로 일했고, 이후 미국 제 3대 대통령에 오르는, 민주당의 대부(代父)격인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했다. 그의 흔적이 밴 독립선언서 원본은 ‘너무도 소중하기에’ 일반 공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적의 환경과 안전장치를 갖춘 곳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진본이 아닌, 50여 년 뒤에 만들어진 사본이 국립기록원 중앙로비를 지키고 있다.

솔직히 말해 당시 필자는 한국의 3·1독립선언서가 어디에 있는지, 있기는 한지, 있다면 어떻게 전시돼 있는지조차 몰랐다.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뒤 만들어진 사본이라도 한번 보려는 미국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지나쳤을 부끄러운 기억이다.

“워낙 오래된 종이니까, 잘못하면 상할 수 있습니다. 방충·방부·방산(放酸)을 할 수 있는 특별장치를 주문해둔 상태입니다. 지금은 방산용 액자에 보관해두고 있습니다.”

최 박사는 깊이 보관된 독립선언서를 꺼내 필자에게 보여줬다. 손놀림이 조심스럽다.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필자는 꿇어앉은 자세에서 독립선언서를 천천히 훑어나갔다. 누런 종이 위에 새겨진 활자 하나하나가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듯하다. 글자 한자, 단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정성 그리고 고통이 배어있을지, 왜 육당의 땀과 정신이 배인 독립선언서가 대한민국 한복판이 아닌 이국땅을 전전해야만 하는지… 가슴 저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감정이 요동쳤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이 선언서를 자세히 보면 육당의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제일 앞 문장인 ‘오등은 자에 아 선조(鮮朝)의 독립국임과’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이 아니라, 선조입니다. 3·1운동 직전인 2월 26일까지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육당은 독립선언서는 물론, 출판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일을 혼자 총괄했습니다. 일본인들 모르게 행하는 극비의 행동이었습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육당이 잘못 조판한 것입니다.”한국판 덩샤오핑, 호치민이 됐을 수도


▎1. 금강산에 오른 육당(맨 왼쪽). 국토순례는 독립심을 고취시키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육당은 기행문을 남겨 국토애를 고취시키고자 했다. 2. 육당의 프랑스 유학에 앞서 찍은 가족사진. 단군을 주역으로 하는 불함문화론을 프랑스 학계에 알리고자 파리행을 결심하지만 중단된다. 3. 청계천 광교 부근의 조선광문회 건물. 서울의 도심 개발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최학주 박사는 이곳에 육당기념관이 세워지길 희망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육당은 춘원과 함께 친일인사의 대표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육당의 친일이 어떤 것인지, 춘원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어디까지가 진실에 관한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다만 주목하는 부분은, 근현대를 살아온 한국인으로 친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심정이다. 친일을 미화하자는 뜻은 전혀 없다. 반대로, 친일을 규탄하고 반일을 외치는 본인과 그 주변은 과연 어떠한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유태인 학살에 나선 히틀러의 혈관 속에 유태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는, 하소연할 곳도 없는 총체적 암흑기가 바로 일제시대다.

돌아가신 필자의 숙부는 사할린 탄광에서 10대 청춘을 보냈다. 대소변을 참으며 탄광에서 12시간 일하며 얻은 변비로 평생 고생하신 분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사할린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당시의 상황을 물어봤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일본인 월급의 절반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조선 어디에도 없었다. 번 돈은 전부 고향에 보냈다. 함께 온 조선인 모두가 꿈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숙부를 제국주의에 세뇌당한 무기력한 친일파라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은 예외라고 외치면서, 상대에게는 독배를 요구하는 것이 한국 근 현대사의 살벌한 초상화다. 반일·반공·반미·반군부·반좌·반우… 반(反)으로 시작되는 세계관으로 날과 밤을 샌 나라가 20세기 한국의 모습이다. 모두가 갈리고 서로를 탓하는 과정에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될 정도다. 경쟁적으로 반(反)을 외치는 동안, 모두가 함께 추락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육당이 일제 주도하의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한 것을 두고 친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역이란 의미의 동의어로 말입니다. 육당은 그 같은 비난에 대해 뭐라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만, 육당의 조선사편수회 참여는 조선의 단군을 역사적·세계사적 사실로 정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근대적 학문으로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왜곡하려던 것이 당시 일제의 논리입니다. 그 같은 방식에 맞서 조선도 근대학문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육당은 확신했습니다. 43세 되던 1932년 프랑스 파리 유학을 결심합니다. 머리와 콧수염도 길러서 파리풍으로 바꿉니다만, 서울을 떠나기 직전 포기하게 됩니다. 육당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고 돌아가시면서 기회를 놓친 것이지요. 당시 파리행을 생각한 이유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서양 학문의 중심지에서 역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일본에 맞서는 수준이 아닌, 세계사 속에서의 흐름으로 파악한 인물이 육당입니다. 만약 그때 가셨더라면 한국판 덩샤오핑(鄧小平)이나 호치민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최 박사는 2011년 육당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되살린 글을 한국에서 출판했다.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나남출판사)>란 책으로, 이후 영문학 전공인 부인 김여애(金麗愛)를 통해 영어로도 번역된다. 최 박사는 고맙게도 자신의 책 한권을 선물로 전해줬다.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가장 가슴 아프게 느낀 부분은 육당이 모은 17만 권의 장서에 관한 부분이다. 육당이 평생 동안 모았던 조선 관련 고서 17만 권이 하루 아침에 불에 타 사라졌기 때문이다.“나라는 잃어도 문화는 밝혀야”


▎한국문인협회는 1996년 육당의 문학 산실이었던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서 육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현대문학표징’ 제막식을 가졌다.
“육당의 책 수집은 일본에서 돌아온 191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문화·역사·지리·종교·시 등 조선에 관한 모든 책을 수집했습니다. 육당은 글씨가 새겨진 모든 종이를 ‘아주’ 귀중히 여겼습니다. 신문지를 화장실에 들고 갔다가 아주 혼이 난 집안의 어른도 있습니다. 여행을 갈 때마다 주변에 수소문해서 고서를 수집했습니다. 고서 수집과 관련해 육당에게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나라는 보존하지 못할지라도 문화는 밝혀야겠다는 생각에서 조선광문회를 만들고, 국내 서적의 수집에 힘을 써서 무릇 조선 문화의 재료가 될 만한 것은 내용의 경향을 묻지않고 힘이 자라는 대로 극력 수집했다. 그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면의 일을 중히 여기는 이가 없고 가치에 대하여도 정당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도서 수집은 상당히 편리하게 진행됐다(…)’고 하셨어요.

육당의 고서 수집 열정은 동시대인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외국으로 간 수많은 사람이 육당에게 책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전 부통령 이시영이 만주로 갈때 수만 권의 고서를 전해줬고, 2대 대종교 교주인 김교헌도 소장도서를 육당에게 맡기고 만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소중히 모은 책이 1951년 4월 화재로 전부 소실된 것입니다.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뤄진 미군의 서울 대공습 때입니다. 육당은 17만 권이 사라진 것에 대해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습니다.”

육당은 고서가 전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날, 비통한 심정을 담은 ‘길고 긴’ 시를 남겼다.

“십 년 전 골라골라 깊이 소개(疏開) 하여둠이, 십 년 후 화장터를 준비한 것이란 말인가… 술노름, 꽃 대신에 너를 잡고 지냈세라, 설음에 위로받고 기꺼움을 서로 나눠, 놀기도 많이 했거니 떨어져도 보세나… 언제고 정리하여 빛내는 날 있재거니, 수없는 고문서와 23만 조사카드, 마침내 돼지에게 진주더란 말인가…”세월이 갈수록 커지는 육당의 그림자


▎1. 조만식 선생이 육당에게 보낸 편지. 육당은 평양과 서울 양쪽에서 모두 환영받는 인물이었다. 2. 육당이 종이에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광문회 현판인 ‘신문관’. 최학주 박사가 가장 아끼는 육당의 유품 중 하나다.
해방과 뒤따른 분단은 육당을 친일파의 대명사로 만든 것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수집한 육당의 분신을 잿더미로 만드는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육당의 장손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제가 갖고 있는 육당과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모든 자료를 한국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당의 흔적이 새겨진 역사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변 광교 남쪽에 위치한 조선광문회 주변이 최적의 공간입니다. 지금은 서울시 소유 공원부지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건물에 관한 사진이나 자료도 있으니까 그대로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주 작은 공간입니다만, 민족의 정기를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복원·복구가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1910년 20세의 육당이 직접 만든 곳이기 이전에,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된 민족의 성지입니다. 사실 제가 보관하고 있는 육당의 자료 가운데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조선광문회’ 건물 밖에 걸려 있던, 종이에 쓴 ‘신문관’ 현판입니다. 육당의 육필이라 생각됩니다. 육당이 남긴 광문회 설립취지서 원문도 갖고 있고요. 저와 뜻을 같이하는 학계 요청에 대해 서울시는 아직 답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조선광문회가 복원되는 그날, 독립선언서 원본과 다른 모든 자료를 기증할 것입니다. 육당을 기리고, 육당 스스로도 원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민족·독립·단군·자존·정신·자유·개척…. 독립선언서에 등장하는, 육당이 방점을 찍으며 강조했을 법한 단어들이다. 추상명사나 고유명사처럼 다가오던 개념들이 마침내 구체적인 ‘일반명사’로 정착돼 한민족 전체에 퍼져나가게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육당이란 나무가 만든 열매와 그림자는 커질 수밖에 없다. 한민족이란 의식이 강해질수록 그 배경에서 육당의 목소리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민족의식이 약해질수록, 한민족의 재기와 부활을 북돋워주는 날카로운 회초리로서의 육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에 걸린 육당이라는 시계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