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예수의 위대한 질문⑳]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 -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마태복음 26:10)

예수의 구원사역을 독려한 한 여인의 숭고한 헌신 … 숭고한 삶은 ‘나’를 밀어내고 ‘이웃’을 중심에 두는 것


▎복음서에는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수에게 기름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머리에, 하나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돼 있다. 신학자들은 두 여인을 동일한 인물로 본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부은 여인의 행위는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숭고한 찬양의식이다. 작자 미상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만찬>(스테인드글라스)
1 임계점

인간이 지내고 보면 순간인 삶을 통해 꼭 시도해보고 싶은 일을 찾았다면, 그는 행복하다.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임무는 가슴속 깊이 파묻혀 있어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진주가 수많은 세월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 심연에 존재하는 진주는 그것을 찾아나서는 거룩하면서도 외로운 내면의 여정을 통해 조금씩 형성된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찾아야 할 ‘진주’가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획일화된 교육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스태터스 쿠오(status quo)’를 통치하고 조절하기 위해 최적의 도구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교육을 받은 보통 인간들은 자기 안에 숨어있는 보화를 찾으려 시도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자기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타인이 정한 전통이나 관습화된 객관적인 체면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처음으로 그런 자신만의 진주 찾기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알 수 없는 타인이 정한 남들의 ‘진주’를 헛되이 찾기 시작한다.

한 인간이 자신만의 진주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것을 채취하려고 시도할 때, 그런 시도는 종종 그를 좌절시키는 방해공작과 조소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대충 인생을 살면 되지, 굳이 그런 시도를 해야 하는가? 너는 보통 인간인데 자신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남들의 평가’에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감지한 심연으로 의연히 내려가면 그곳에는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만의 진주가 기다리고 있다.

심연 여행의 성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최선을 걸어야 한다. 그 최선이란 자신의 목숨이다.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야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태어나며, 자신이 발견한 ‘진주’를 통해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미션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진주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 진주는 우리에게 더 큰 진주로 모습을 드러내고, 결국 우리의 목을 ‘인생이라는 거룩한 기요틴’에서 매순간 요구한다. 이 임계점에서 대부분은 주저하고 과거의 자아,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사회적 자아라는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긴다. 임계점을 넘는 한 여인이 예수의 숭고한 여정에 동참한다.

2 나병환자 집을 찾아온 ‘한 여인’

예수라는 청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사랑’이라고 깨닫는다. 그는 동료 유대인들이 자신만의 별을 찾지 못하고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에 슬퍼한다. 그 종교는 자신만의 왜곡된 잣대로 남들을 판단하고 스스로에게 기쁨을 주는 자기만의 도구로 전락한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전통적이며 권위를 지녔다 할지라도 사회악이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마지막 여정에 기성 종교의 의례행위를 전복하여 새롭게 해석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혁신적이며 감동적인 ‘메시아’를 소개한다.메시아 예수를 알아본 유일한 여인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됐던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 중이던 예수에게 한 여인이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이 행위로서 여인은 예수의 숭고한 여정에 동참한다
예수는 자신의 심연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정을 방문한다. 그는 베다니에서 나병으로 고생하는 시몬의 집에 거주한다. 유대사회에서 나병은 신이 내린 형벌로 생각해 그들을 격리 수용한다. 특히 나병을 당시 불치의 병으로 여겨져 신의 영원한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나병에 걸린 시몬의 집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방문하여 지낸다. 유대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정해놓은 정결법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당시 유대인이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시몬과 식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예수가 식사하고 있는데, 한 옥합을 가져왔다. 이 당시 식사는 탁자가 아니라 마루에서 비스듬히 누어 진행했기 때문에 이 이름 모를 여인이 음식을 대접하는 척하며 왔다가 옥합을 열고 기름을 예수의 머리에 붓는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 기름을 “매우 값진 향유”라 말한다. 향유는 최상급 올리브기름과 중앙아시아에서 대상들이 가져온 향료를 섞어 만든 최고 사치품이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이런 향유는 일반 노동자의 연봉과 값이 맞먹는다.

유대인들은 왕이나 대제사장을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붙는다. ‘기름 붓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는 ‘마샤’다. 이 동사의 수동형 ‘머시아’는 ‘기름부음을 받는 자’란 의미이며 이 단어가 영어의 ‘메시아’가 되었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저 ‘한 여자’라고만 언급한다. 여기에서 ‘여자’라는 칭호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뿐만 아니라 모든 여인을 지칭하는 포괄적이면서도 사적인 용어이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를 지칭할 수도 있다. 느닷없이 등장하여 예수음식을 시중드는 척하다가, 그의 머리에 가장 값비싼 향유, 자신이 소유한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 무명여인의 행위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시사한다. 누가 메시아를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인가? 누가 메시아인가?

이 무명의 여인은 일생 동안 자신에게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킬 카리스마 넘치는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이미 메시아를 인식할 수 있는 영의 눈을 가진 자였다. 그녀는 예수의 행보를 3년 동안 주목하고 있었고 예수가 가는 길을 선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녀는 예수가 유월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자신이 스스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신비로운 감정이자 삶의 원동력인 ‘사랑’이란 현을 연주하려는 계획을 어렴풋이 이해하였다. 예수에게 매료되어 처자식을 버리고 3년 동안 따라다닌 제자들은 예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예수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거룩하게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 경계는 준비 없이는 넘을 수 없는 터부다. 이 여인은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이 경계를 예수에 대한 흠모를 통해 승화한다. 그녀는 자신이 일생 동안 저축하여 구입한 향유로 예수가 가고자 하는 길을 성스럽게 장식한다. 예수의 웅지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간은 그와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아닌 이 무명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최고급 향유를 아낌없이 부음으로 새로운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한다. 구시대의 메시아는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고 군림하는 존재였지만, 새로운 시대의 메시아는 자기 스스로 연민과 희생의 삶을 실천하는 삶의 희망과 모델이 되는 존재다. 인간이 존경하고 기꺼이 따르며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메시아는 위대한 철학자나 권력가 혹은 재력가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인간의 가슴속 깊이 숨겨진 ‘컴패션’이란 위대한 DNA를 건드리는 자다. 그러한 자를 숭고한 자라 부른다. 우리가 가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와 불의 같은 이원적인 판단이 그녀의 춤 앞에서는 강렬한 태양 아래서 눈이 한순간에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이런 대립적인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우리 자신을 무아 상태로 진입하게 하여 감동적이고 희망적이며 삶에 원초적인 힘을 준다, 이 여인은 숭고한 인간 예수를 만나, 자신이 숭고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위도 예수가 지향하는 삶도 숭고하다. ‘숭고’란 자신의 자연적인 조건과 환경을 한순간에 초월하여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서브라임, ‘임계점 넘기’

누가 아름다운 삶을 사는가? 누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까? 우리는 좀처럼 감동받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과 남들에게 감동적인 말과 행동을 할 수 없고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불리는 마사 그레이험(Matha Graham)이 춤추는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든다. 이런 상태를 ‘숭고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숭고함’이란 영어단어 서브라임(sublime)은 라틴어 ‘서브리미스(sublimis)’에서 유래했다. ‘서브(sub)’라는 라틴어 접두사는 ‘-을 넘어서’라는 의미이며 ‘리미스’는 ‘경계; 한계’를 의미하는 ‘리멘(limen)’에서 따왔다. ‘숭고함’이란 이런 임계점을 과감히 넘어서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서브라임’이란 개념은 2세기 로마시대에서 처음 등장한다. 롱기누스(Longinus)라는 로마시대 저자는 ‘서브라임’을 수사학적인 기술로 묘사한다. 대화에서 압도적이며 감동적인 말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기술이다. ‘서브라임’은 18세기부터 문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미적이며 정신적인 삶의 철학으로 등장한다. 특히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 <의지와 표현으로서 세상>에서 ‘숭고함’을 미적인 가치로 설명한다. 그는 ‘아름다움’은 숭고함에 미치지 못하는 세속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는 ‘아름다움’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단계는 아름다운 꽃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꽃을 관찰할 때 꽃으로부터 자연히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우리는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그 쾌락은 꽃을 관찰하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을 넘어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인식의 대상으로서 좋은 감정이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숭고함’은 이런 표피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관찰의 대상과 관찰하는 주체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숭고함의 단계를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숭고함은 객체와 주체를 얼마나 파괴하느냐에 따라 단계가 달라진다.

가장 약한 단계의 숭고함은 빛이 대리석과 같은 돌의 표면과 만나 반사하는 빛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분명 그 반사되는 빛이 관찰자의 눈에 들어와 쾌락을 전달해주며, 대리석은 빛을 반사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한다. 대리석을 보는 관찰자는 그 대상을 100%인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반사하는 빛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

두 번째 단계인 약한 단계의 숭고함은 무한히 펼쳐진 사막을 볼 때 관찰자가 느끼는 감정의 상태다. 관찰자는 사막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대상의 모습을 파괴하여 신기루를 본다. 이 신기루는 사막이란 대상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그 대상이 신기루는 아니다. 관찰자는 흔히 정신줄을 놓게 된다.

세 번째 단계의 숭고함에서 관찰자는 그 대상을 통해 자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스위스에 위치한 알프스 산맥의 한 봉우리에 올라섰다고 가정하자. 발아래 펼쳐진 산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혹은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을 때,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황홀한 순간을 경험한다. 이 상태를 ‘숭고하다’라고 표현한다.숭고함의 최고 경지는 ‘거듭남’


▎예수의 발에 값비싼 기름을 붓고 자신의 머리칼로 닦는 여인의 모습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행위이자, 죽음 직전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의 숙명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단계를 넘어선 네 번째 숭고함의 단계는 관찰하는 사람을 압도하여 그를 폭력적으로 파괴시키는 쾌락의 단계다. 이 네 번째 단계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는 첫 번째 깨달음의 단계와 유사하다. 그는 오랫동안의 요가 수련을 통해 황홀을 경험했지만, 이 황홀의 경험이 지속되지 않았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가면, 과거의 싯다르타로 돌아가버렸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실천하여 인위적이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았지만 내공이 부족해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이 그렇게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혐오스러운 자신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진리를 향한 정진과정에서 그는 어렸을 때의 한 순간을 기억한다. 동네 농부들이 봄에 파종하는 모습을 기억해낸다. 농부들은 파종을 위해 밭을 쟁기로 개간하고 있었다. 그는 쟁기가 땅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을 슬로비디오처럼 또렷이 기억해낸다. 그 순간 밭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어린 풀들과 거기에 매달린 곤충들이 죽임을 당했다. 싯다르타는 이 순간에 죽임을 당하는 풀잎과 곤충의 아픔을 느꼈다고 말한다. 싯다르타는 자신은 완전히 없어지고 자기가 관찰하려는 대상에 자신을 이입시킨다. 그는 이 순간을 ‘세토 비뭇티(ceto-vimutti), 즉 ‘심해탈’이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 단계는 관찰자를 무아상태로 진입시키고 우주와 합일이 되어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강력하면서도 압도적이며 지속적인 상태다. 영화<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우주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우주의 끝으로 여행하고 웜홀을 여행하는 느낌이다. 이 단계는 최고의 숭고의 단계이다. 이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이 숭고함의 단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 단계가 바로 ‘거룩’의 단계이다. 스위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우리의 일상과는 다른 ‘절대타자’와의 경험, 최고의 숭고의 단계를 다음 셋으로 요약한다. 첫째는 ‘미스테리움(mysterium), 즉 ‘신비’의 단계다. 신비란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 많은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며 ‘여유’다. 숭고한 어떤 것은, 그것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혹은 우주이든, 신비하다. 두 번째는 ‘트레멘둠(tremendum), ‘전율’의 단계다.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뛰어넘어 분석이나 형용을 거부하여 우리에게 엑스타시의 상태로 진입하게 한다. 이때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감정이 ‘떨림’이다. 관찰자는 그 대상에서 전율할 뿐이다. 세 번째 단계는 ‘파시난스(fascinans)로, ‘매혹’이다. ‘숭고’란 관찰자의 절대충성과 복종을 요구하여 ‘매혹’이라 그것을 한번 경험하고 난 뒤,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다. 무명의 여인은 메시아를 다른 장소가 아닌 나병환자들 사이에서 찾고 있었다. 최근 한국에도 수많은 봉사자가 새로운 메시아를 찾아 자신의 향유를 바친 무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4 ‘나병환자 섬 소록도를 찾아온 두 여인’과 ‘검은 가방’

2005년 어느 날, 신문에 ‘벽안의 천사들’이란 기사가 난 적이 있다. 필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수녀 이야기인데, 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내 심연에 존재하는 거룩한 DNA를 감동적으로 울린 것이다. 이 신문기사의 제목은 ‘올 때 소리 없이 왔으니, 갈 때도 말없이 떠납니다’였다. 제목을 봐선 그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당시 70세가 넘은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란 두 수녀가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한국에 온 것은 1962년. 당시 대한민국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보다 못사는 후진국이었다. 20대 중반의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늘씬한 두 수녀가 한국인들도 금기시하는 ‘문둥병 환자들의 섬’ 소록도에 오기로 결정한 것이다.메시아를 찾아 나선 무명의 여인들


▎‘장소’의 종교는 신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세상과 단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상과 이웃을 향해 나를 내던지는 것이야말로 예수와 여인이 보여준 최고의 가르침이다. 예수가 기도했던 예루살렘 겟세마네동산의 기념교회에 있는 예수가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위.
이들은 왜 자신들이 살던 편안한 오스트리아 수녀원을 떠나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대한민국, 그것도 소록도에 온 것일까? 하루 종일 찬송하고 성경을 읽는 ‘거룩한 삶’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다하는 소록도로 갈 것을 결정했는가?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부모들은 이 결정을 허용했을까? 이들이 소록도에 온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그들이 한국에 찾아온 이유는 단순하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한센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이 한국이란 땅에서 집단 수용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위대한 일을 결정할 때, 그 일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그런 결정은 한 순간에 단호하면서도 강력하여 다른 대안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두 수녀는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 것이다.

두 수녀는 대한민국의 한센병 환우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컴패션(Compassion)’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21세기 최고의 지도자와 경영자는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고통을 인문학적인 소양을 통해서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그들의 삶 전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컴패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로 이 마음은 자신으로부터 한걸음 밖으로 나가는 ‘엑스타시(ek-stasis)’의 단계이며 자신을 남으로 채우는 무아(無我)의 경지로 들어가는 행위다. 우리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내가 더 강해져 남을 쉽게 이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시 한 번 뒤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일생 동안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배운다. 그러나 그러한 배움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당겨 첨예한 관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배우는 이유는 내 자신을 벗어나 남의 입장에서보는 연습을 하여 마음에 내재한 ‘컴패션’을 ‘밖으로 꺼내기(e-ducation)’ 위함이다. 최고의 인문학적 소양이란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암기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없애고 남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는 ‘컴패션’이다.

몇 해 전 인세반(스티브 린턴) 유진벨 재단 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린튼 가(家) 선교사집안의 3대 자손으로, 그의 아버지 인휴(휴 린턴) 목사는 “성공이란 많은 사람을,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라 말했다. 우리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두 수녀에게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이었을까? 소록도에 도착한 두 수녀는 당시 한국에는 이들을 치료할 의료시설조차 없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의료품과 지원금을 신청하여, 한국의 한센인을 자신의 자녀로 품은 것이다. 이들은 한센병이 전염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정성껏 43년을 하루같이 보냈다. 상상해보라! 우리의 자녀가 43년 동안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버린 이들과 생활한다면 우리는 찬성할 수 있는가? 도대체 이들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컴패션의 행위를 할 마음을 어떻게 가졌을까?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선행이 외부에 알려지는 일을 극히 꺼려서 수백 개의 감사장과 공로패는 보낸 이에게 되돌아가야 했다. 이들의 삶은 숭고하다.43년을 순간으로 여긴 무명 여인들의 숭고함


▎성경에서 비둘기는 종종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으로 표현되곤 한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장면은 목격자를 무아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두 수녀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 하루 전 소록도 병원 측에 이별 통보를 했다는 사실이다. 순간을 사는 삶의 의미를 가장 의미 있게 전한 철학자들이다. 이들의 삶은 말로만 고상한 삶을 전하는 종교인들이나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전율을 느끼게 한다. 소록도 주민들은 20대 처녀에서 70대 할머니가 된 금발 수녀들을 ‘할매’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미 ‘전라도 할매’가 되어있었다. 두 수녀는 주민들에게 달랑 편지 한 장을 남겼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인해 아프게 해드린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나도 이런 유언장을 남기고 싶다. 숭고한 삶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삶을 뚜벅뚜벅 살 뿐이다.

이 두 할머니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43년 동안 자식처럼 키운 이국의 한센인들을 뒤로 하고 어둠을 뚫고 소록도를 떠났다. 멀리서 가물가물 사라지는 소록도를 보면서 숨죽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 눈물은 숭고하다. 자신들이 한결같이 달려온 거룩한 삶에 대한 축하의 눈물이며 무사히 가야 할 길을 마쳤다는 안도의 눈물이다. 이 수녀들이 소록도에서 가지고 온 짐이라곤 43년 전에 소록도에 올 때 가져온 다 해진 검은색 가방 하나뿐이었다. 가방 속엔 옷 몇 가지, 다 헤진 성경책, 한센인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 몇 장, 그리고 그들이 써준 편지뿐이었다. 이 낡은 가방은 세상의 어떤 명품보다 훨씬 더 명품이다. 그 안에 기막힌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감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전염성이 있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명품의 조건은 ‘영적인 감동’으로 ‘전염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아는 최고의 명품은 이 할머니들의 가방이다. 이들이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하면서 “성당에 나오세요”라고 권유하거나 전도했을까? 필자는 그런 말을 낯간지러워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센병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모마리아였기 때문이다. 사지가 녹아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외면한 한센병 환자가 바로 예수였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예수도, 너희가 평상시 만나는 불쌍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5 나병환자들 가운데 숨어있는 예수

마리안느와 마가렛과 같은 성서의 이 여인. 무명의 여인이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 여인은 유대인 율법으로 가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값비싼 향유를 바친다. 이런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아직도 예수의 거룩하며 숭고한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한 여인의 이런 행위에 분개한다. 그들은 말한다.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꾸짖었다.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신이 원하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불평들을 해소하기 위해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부를 나누는 것은 의롭게 바람직안느와 마가렛과 같은 성서의 이 여인. 무명의 여인이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 여인은 유대인 율법으로 가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값비싼 향유를 바친다. 이런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아직도 예수의 거룩하며 숭고한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한 여인의 이런 행위에 분개한다. 그들은 말한다.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꾸짖었다.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신이 원하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불평들을 해소하기 위해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부를 나누는 것은 의롭게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이 여인의 숭고한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마리아와 마가렛에게 소록도로 오는 대신, 자신의 고향에서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은 이 여인과 예수의 숭고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들은 아직도 예수가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자신들이 권력을 휘어잡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지향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출세를 애타게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종교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성적이지도 않고 현대인들의 삶에 그다지 도움 될 것 같지 않는 종교에 왜 매달리는가? 우리는 종교를 우리에게 멋진 선물을 선사하는 마술 지팡이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는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너희들은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 여자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예수는 이 여인의 행위를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이 여인이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아름다운 일’을 행동으로 옮겨 예수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이 여인이 한 행동은 자기 자신의 최선을 아낌없이 줌으로서 그 최선의 행위를 받는 대상인 예수의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아낌없이 줌으로써 영광을 드러내다


▎오스트리아에서 소록도로 찾아와 평생을 봉사하다가 떠난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젊은 시절 모습(오른쪽). 이들은 43년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일흔 살이 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에게 한센병 환자들은 섬겨야 마땅한 예수였을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빵을 주러 온 경제학자나 사회사업가가 아니었다. 좀 더 근본적인 삶에 대해 깊은 울림을 주기 위해서 왔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예수의 죽음을 예측하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인기로 정권을 잡아 세상을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장님’들이다. 자신들의 스승이 이 여인의 행위를 자신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자 제자들은 눈이 똥그래져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예수가 전하고 싶은 숭고한 인생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죽은 후, 한참 후에나 그 의미를 파악한다.

이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뿌린 행위는 새로운 개념의 ‘메시아’ 등장을 의미한다. ‘메시아’는 인간의 심연에 숨겨진 컴패션이란 DNA를 작동하기 위해 스스로 기꺼이 거룩한 희생양이 되려는 사람이다. 이 무명의 여인의 행위, 그 자체가 숭고하며 메시아적이고,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서 마음의 망설임이 있는 예수에게 십자가의 숭고한 길에 대한 강력한 격려였다. 그녀는 예수의 궁극적 숭고의 행위인 죽음의 길을 준비한 것이다.

6 ‘당신이 가지고 갈 가방은 무엇입니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상정한 신을 자신들이 만든 종교시설에 가둬놓고 가끔 보러 간다. ‘장소’의 종교가 역사를 통해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진화론자 E.O. 윌슨은 “이타주의자는 스스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족에게 보답을 기대하며, 그의 선한 행위는 종종 완전히 의식적이며 계산적이고, 그의 술책은 사회의 복잡한 승인과 요구에 따라 세밀히 조직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이 수녀들의 행위를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호혜적 이타 주의(Reciprocal Altruism)’라고 주장한다면, 인간의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시시하게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서 주위로 밀어내고 이웃을 내 삶의 중심에 위치하게 될 때 가장 인간답지 않을까? ‘톨레랑스’나 ‘호모 심비우스’라는 개념도 그 중심이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컴패션’으로 자신을 승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건너가야 할 죽음의 강 앞에서 무명의 여인이 등장해 예수에게 확신을 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강, 그 죽음의 강을 건널 때, 우리는 어떤 가방을 가져가야 할까? 두 오스트리아 할머니처럼 인생을 ‘호모 카리타스(Homo Caritas)’, 즉 이웃의 희로애락을 내 희로애락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컴패션이라 보기엔 보잘것없지만 감동이 있는 ‘검은 가방’을 가지고 가고 싶다. 예수는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배철현 - (eduba@naver.com)은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문헌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 문명학부 교수이며, 최근에 대한민국 인재양성기관 건명원(建明苑)을 기획해 출범시켰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주길 기대했다. 예수는 기대와 달리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숭고한 자기 희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