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홀로 있는 사람의 뒷모습

만 가지 색깔로 채색하는 내면세계


▎사람의 뒷모습은 온갖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표정을 감춤으로써 상상은 극대화한다. 살바도르 달리, <창가의 소녀> / 그림제공·정여울
사람의 수명이 점점 더 길어지고,
이혼과 결별이 늘어나며,
살아가는 방식도 점점 더 개성을 실현해나가는
쪽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모든 사람은 현재 외롭거나,
과거에 외로웠거나
또는 앞으로 외로워질 것이다.
-앤서니 스토, <고독의 위로> 중에서
#1. 뒷모습의 아우라를 그리다

눈을 뗄 수 없는 포즈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든, 그림이나 사진 속의 사람이든, 혼자 덩그러니 서있거나 앉아있는 사람의 뒷모습이다. 뒷모습이 유독 고독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뒷모습에도 애잔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뒷모습만 봐도 왠지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은 오만한 등짝도 있다. 고독해 보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바라보는 사람조차 고독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고독이 전혀 싫지 않다. 고독한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그 사람이 등 뒤에 짊어지고 가는 고독의 무게를 가만히 헤아려보게 된다. 그 쓰라린 고독의 풍경을 나도 공유하고 싶어진다.작자미상, <플로라 Flora>, 1세기경


▎꽃다발을 안고 멀어지는 여인의 모습은 2000년의 시간을 초월하는 꽃의 화신으로서 불멸의 감동을 전달한다. 1세기경 프레스코화, <플로라(Flora)> / 그림제공·정여울
몇 년 전 나폴리 국립박물관에서 이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을 처음 봤을 때의 뭉클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라는 정답을 구현해 놓은 그림 같았다. 곧 사라질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 곧 내 앞에서 멀어져 갈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 그것이 뒷모습이었다. 앞으로 질주해오는 생생한 설렘이 아니라,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아련함으로 기억될 아름다움. 그것이 뒷모습만이 가진 매혹이었다. 이 프레스코화의 크기는 상상보다 훨씬 작았지만, 이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실물 크기로 저절로 확대가 되었다. 무려 200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이 그림은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여신의 앞모습이었다면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 같다. 이 그림은 금방이라도 화면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은 싱그러운 앞모습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안타까운 뒷모습으로 말을 걸어왔다.

뒷모습은 내 눈앞에서 곧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처연한 것이었다. 앞모습이 관람객을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라면, 뒷모습은 관람객으로부터 멀어지는 영상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존재의 찰나성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땅 위에서 솟아오른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어루만지며, 왼손으로는 꽃다발을 살포시 안아 들고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은 꼭 신화 속 꽃의 여신 플로라가 아닐지라도, 살아있는 꽃의 화신이 되어 20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살바도르 달리, <창가의 소녀>, 1925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계나 예수님의 ‘윗모습’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를 먼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이 초기작은 문득 낯설게 보인다. 살바도르 달리가 이토록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그림도 그렸다니, 문득 호기심이 일어난다. 초기의 달리는 일상 속에서 소재를 자주 취했다. 여동생 안나 마리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렸던 1920년대 중반, 달리는 ‘모색기의 청춘’이었다. 자신의 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활짝 꽃필지 알 수 없었던 달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그림의 모델로 활용했고 그중 가장 집중적으로 그린 대상이 바로 어린 여동생 안나였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안나는 열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이 그림에도 역시 달리의 ‘초현실성’이 느껴진다. 소녀의 평범한 뒷모습을 그린 것 같지만, 뒷모습의 근육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는 듯, 살아 움직이는 듯 느껴진다. 분명이 정지된 영상인데 아주 생생하게 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고, 흔들흔들 몸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한다. 창문 곁에서 ‘세상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을 달리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풍경으로 아름답게 박제해냈다.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에서조차 뭔가 화려한 색감과 이미지를 뽑아내는 살바도르 달리 특유의 상상력이 이 그림에서도 느껴진다. 소녀는 별다른 치장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타인의 시선에 거의 무방비상태인 채로 자신의 뒷모습을 전적으로 화가에게 내어준 느낌이다.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지 전혀 알 수도 없고 개입할 수도 없는 소녀의 뒷모습은 해맑기 이를 데 없다. 가볍게 나풀거리는 탐스러운 머리카락, 아직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바깥세계를 향해 깃발처럼 나부끼는 흰옷의 춤사위, 생명력이 넘치는 싱그러운 종아리로 소녀가 지닌 영혼의 나이를 짐작할 뿐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이 초기작은 능숙함이나 세련미가 아니라 영혼의 투명도로 승부하는 그림이다.조르주 쇠라, <뒤에서 바라본 모델>, 1887


▎당장이라도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여인의 관능적인 뒷모습은 신체에서 유일하게 자기 손이 닿을 수 없는 등의 숙명적 고독을 떠올리게 한다. 조르주 쇠라, <뒤에서 바라본 모델>
등이란 나 자신이 영원히 제대로 볼 수 없는 내 모습이다.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위로의 몸짓인 이유는 ‘내가 만질 수 없는 내 몸의 일부’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의 손길뿐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타인의 진심에서 나오고, 그 진심은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통해 전해진다. 쇠라의 그림은 ‘쓰다듬어 위로하고 싶은 뒷모습’의 쓸쓸함을 전해주는 듯하다. 화면 가득 육박해오는 여인의 뒷모습은 다른 어떤 부위보다도 ‘등’이 확대되어 보인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관능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는 쓰다듬을 수 없는 등의 숙명적인 고독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등의 비애는 ‘내 손으로 편안하게 만질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제대로 볼 수 없는 것도 답답한데, 온전히 만질 수 없음은 더욱 답답하다. 목욕을 할 때 ‘등을 밀어주는 일’을 내맡길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는 극히 드물다. 인간의 운명적인 고독이 ‘등을 밀어주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을 낳았을 것이다. 손이나 다리처럼 편안하게 만질 수 없는 등짝의 본질적인 정서는 비애(悲哀)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등짝의 이중성이야말로 ‘등을 어루만진다’는 행위가 위로의 대명사가 된 이유일 것이다.#2. 신비와 관능의 상징, 뒷모습


▎나무 뒤에서 골목을 향해 고개를 내민 여인의 뒷모습은 설렘이 가득하다. 표정도, 연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몸짓만으로도 애절함이 듬뿍 묻어난다. 신윤복, <기다림>
신윤복, <기다림>, 연도미상

신윤복의 그림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의 뒷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 행여나 님이 오실까 고개를 길게 내밀면서, 님이 오실 만한 골목 어귀 어딘가를 향해 머나먼 눈길을 던지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은 설렘과 처연함으로 가득하다. 이 그림에는 여인의 얼굴도 그녀가 기다리는 연인의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능히 짐작케 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바로 뒷짐 진 여인이 들고 있는 송낙이다. 송낙은 당시 스님들이 즐겨 쓰던 모자였기에 그녀가 기다리는 연인은 스님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여인의 치맛자락도 단서가 될 수 있다. 한껏 멋스럽게 들어 올린 치맛자락은 그녀의 신분이 기녀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는 바쁘게 집안일이나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다가 잠깐이나마 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미칠 듯이 뛰어나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들어올린 치맛자락은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활짝 열린 그녀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녀린 목선 너머로 그리움의 향기가 짙게 풍겨오는 듯하다. 외로이 서있는 나무 한 그루와 여인의 뒷모습은 기다림의 애절함을 증폭시키는 사물과 인간의 절묘한 하모니를 보여준다. 화려한 색채도 현란한 장신구도 없지만, 옆쪽 얼굴의 윤곽선만 살포시 드러난 그녀의 실루엣은 그 눈부신 젊음과 싱그러운 설렘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툴루즈 로트렉, <욕실>, 1896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인 욕실에 주저앉아 있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고된 일과를 마친 피로가 느껴진다. 툴루즈 로트렉, <욕실>
뒷모습까지 신경 쓰기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심신이 지쳤을 때엔 더욱 그렇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의식할 수 없을 때.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 속 그녀는 무방비 상태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쳐 쉬고 있는 모습인지도,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적인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뒷모습은 처연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로트렉은 자신의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잘 모르는 상태의 여성들을 많이 그렸다. 춤추는 무희들을 많이 그렸던 로트렉의 그림 속에서 ‘무대 뒤의 여성들’은 한결같이 ‘무대 앞에서’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며 준비하느라 무대 뒤의 모습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치마를 아무렇게나 들어올리고 있거나 스타킹을 신거나 벗는 모습 등 여성들이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틈이 없는 그 찰나의 순간을 로트렉은 빠르게 포착해낸다.

많은 사람은 로트렉의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고도 하고 ‘아름답지 않은 여성의 모습만 골라서 그렸다’고 혹평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로트렉이 그린 여성들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보티첼리의 그림처럼 완벽한 형상화에만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의 여백’을 끌어내는 예술가의 창조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하루를 보내느라 이토록 지치고 힘든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한 존재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이야말로 뒷모습의 신비를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다.벨라스케스, <로커비의 비너스>, 1647-1651년경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도취된 듯한 여인의 뒷모습에는 자기 몸매에 대한 자신감과 과시욕이 읽힌다. 거울 속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관람자는 ‘들켰다’는 당혹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벨라스케스, <로커비의 비너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바라보면서도 왠지 죄책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것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관음증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벨라스케스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비너스의 뒤태’를 마치 인간의 실제 모습처럼 생생하게, 지나치리만큼 리얼하게 그린 것일까? 비너스는 당시로서는 금기에 가까웠던 여성의 누드를 자유롭게 그리기 위한 신화적 핑계가 아니었을까. 이 모든 궁금증이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로커비의 비너스>는 그것이 누드이기 때문이 아니라 ‘앞모습’과 ‘뒷모습’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나에게 말을 건다. 이 그림에 그저 여인의 뒷모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더라면, 아무리 벨라스케스의 그림이라도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이 여자인 나에게조차 ‘죄책감’을 심어준 이유는 바로 ‘거울에 비친 앞모습’이 관람객에게 어떤 신비로운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나는 당신이 내 아름다움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우쭐할 것 없다. 당신은 아름다움의 노예이거나, 내 앞모습을 당당히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보이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림인 것이다. 뿌연 거울 맞은편에서 몽환적인 미소를 뿜어내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앞모습을 숨길 뻔했지만, 동시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앞모습까지 드러냄으로써 ‘바라보는 자’의 시선을 교란시킨다. 그녀는 ‘보여주는 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들을 ‘보는 자’였던 것이다. 보여주는 척하면서 보는 자의 시선은 과연 더욱 도발적이다. 이 그림은 뒷모습과 앞모습의 절묘한 공존을 통해 ‘바라보는 자’와 ‘보여주는 자’의 위치를 역전시킨다. 우리는 시선의 주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시선의 대상’이었던 것이다.에곤 쉴레, <속옷을 입고 앉은 여인>


▎여인의 등은 당장이라도 어루만져주고 싶을 만큼 피곤해 보이지만, 섣불리 손을 댔다간 여인이 어깨를 흔들어 뿌리칠 것만 같아 조심스러운 느낌을 준다. 에곤 쉴레, <속옷을 입고 앉은 여인>
뒷모습은 존재의 신비와 관능을 드러내는, 아니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기능을 한다. 뒷모습 자체의 아름다움도 물론 충분하지만, 뒷모습의 그림은 앞모습을 굳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신비감을 증폭시키며 동시에 상상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바로 그런 뒷모습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과감한 필치로 드러내 보인다. 이 그림의 매력은 생략과 압축의 미다. 주절주절 선과 색채를 흩뿌리지 않고 최소한의 선과 색만을 이용하여 여인의 뒷모습을 담아냈다. 기괴하게 뒤틀려 있거나 고통을 말없이 감내하는 듯한 웅크린 신체를 보여주는 에곤 실레의 그림은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것’을 통해 ‘아름다움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우리가 ‘스위트홈’이라 부르는 가정의 안전한 보호장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허락되지 못한 관계나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들,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걸이라도 나서야 할 처지의 어머니 등등, 에곤 실레의 주인공은 ‘편안한 얼굴’이 거의 없다. 이 그림은 그나마 에곤 실레의 그림 중에서 가장 ‘굴곡이 덜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뒷모습을 그린 그림에도 에곤 실레 특유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따뜻하게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왠지 그러한 위안의 손길마저 거부할 것 같은 차디찬 등. 위로를 갈망하기보다는 소통을 포기한 듯한 서글픈 뒷모습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 등은 ‘한 여인의 등’을 넘어 ‘등’이라는 것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등을 돌린 자세는 얼마나 완강한가.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거부’의 몸짓이 아닌가. 등은 때로는 위로의 손길과 소통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만, 때로는 ‘당신과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냉정한 거절의 뉘앙스를 풍긴다. 등 자체가 안타까운, 존재의 장벽이 되는 것이다.제임스 맥닐 휘슬러, <살색과 분홍색의 조화: 프랜시스 레이랜드 부인의 초상>, 1871-74


▎하늘하늘한 분홍색 드레스와 고개를 돌린 여인의 하얀 목선은 여성스러움의 정수를 표현하는 듯하다. 제임스 맥날 휘슬러, <살색과 분홍색의 조화: 프랜시스 레이랜드 부인의 초상>
휘슬러의 이 그림을 뉴욕의 프릭 컬렉션에서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이 그림의 미묘한 균형은 뒷모습과 앞모습을 마치 한 화면에 공존시키는 듯한 비스듬한 몸의 기울임에 있다. 이 그림에는 사실 앞모습과 뒷모습, 옆모습이 모두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실루엣은 뒷모습이지만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림으로써 옆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모습을 살짝 암시하는 미묘한 각도가 완성되었다. 모델의 의상이나 머리 스타일, 드레스에 잡힌 주름 하나하나까지 주도면밀하게 연출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눈부신 찰나의 아름다움을 온몸 가득 표현해야 했던 이 그림의 모델은 분명 이런 포즈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인공적 작위성보다는 아름다움을 향한 예술가의 온당한 집착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 그림의 매혹이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기 위해 살짝 입술을 떼어놓는 듯한 순간,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그림이라는 영원한 액자 속에 보관되었다.#3. 생각하는 사람의 뒷모습


▎바위에 올라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는 방랑자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인생의 기로를 마주했다.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고독한 사색의 시간은 누구나 꿈꾸지만 좀처럼 누리기 힘든 특권이기도 하다. 본인이 고독의 시간을 누리려 해도 ‘고독에 집중할 시간과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혼자만의 달콤한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내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되기 위해 고독의 시간을 탈환해야 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는 고독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아름다운 문장을 남겼다. “누구나 내면 깊숙한 곳에 자신만의 작업장을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든 마음대로 그곳으로 들어가 자유와 고독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고독의 필요성을 예찬한 이 문장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 바로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이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고독으로 거대한 ‘무대장치’를 마련한 것 같다. 안개 낀 바다는 경계선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아련한 신비로 다가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고독하게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모노드라마의 연출과 주연을 한꺼번에 맡은 듯 주변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독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고독은 ‘감정과 사색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공간’과 같은 것이어서, 마치 고독이라 부르는 건물을 짓는 심정으로 튼튼히 마음의 요새를 건축해야 한다. 대신 고독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므로 언제든 고독의 요새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는 ‘마음의 문’도 남겨놓아야 한다.

이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나도 이런 고독의 풍경을 짓고 싶다’는 부러움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뒤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남자의 고독은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든든한 철옹성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고독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인간의 이성이 지닌 최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발견한 칸트의 뒷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삶을 사랑하는 능력이 곧 철학임을 믿었던 니체의 고독한 뒷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이 그림에서 ‘고독한 철학자의 뒷모습’을 읽어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누구나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사유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재현>, 1937


▎거울 속에서조차 끝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완강히 거부하는 조용한 몸짓이다. 타인의 관심을 거부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재현>
저 완강한 뒷모습 저편에는 그의 진실이 있을까? 저 쓸쓸한 뒷모습 저편에는 그의 앞모습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늘 관람객으로 하여금 질문을 하게 만들고, 그의 그림 자체가 질문의 화살이 되어 관객의 심장을 꿰뚫는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쩌면 서로에게 끊임없이 뒷모습만 보여주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뒷모습 뒤에는 또 다른 뒷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진짜 앞모습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서로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오늘도 저 사람과 소통에 실패했다’는 쓰라린 패배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조차, ‘나는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나는 평생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것을 앞모습이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부부가 함께 잠들 때 한 사람이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워 자는 것은 상대방을 가슴 아프게 한다. 등을 보이는 것 자체가 거부의 몸짓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친구와 헤어질 때도 너무 빨리 등을 홱 돌려 가버리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저 사람은 나와 그토록 빨리 헤어지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등을 ‘바라보는 자’의 입장에서 등은 소통의 불가능성을 환기시키는 가슴 아픈 상징이 된다. 우리는 과연 서로를 잘 알고 있을까? 서로의 앞모습을, 그 복잡다단한 마음의 앞모습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평생 서로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해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누군가의 뒷모습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소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뒷모습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매우 친밀하거나 익숙한 관계일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 사람에게서 도망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모르게. 그 사람을 전혀 기분 나쁘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나의 뒷모습만 봐도, 사람들은 내게서도망치고 싶어할까? 그렇다면 뒷모습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알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영혼의 명함’은 아닌지. 뒷모습조차도 정감 어린 사람, 뒷모습조차도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람이 되는 마음의 행로가 아닌지.

때로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훨씬 정직하다. 앞모습은 이리저리 치장할 수 있지만, 뒷모습의 표정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 종일 걸을 수도 없다. ‘뒤통수가 따갑다’는 것은 내 뒷모습에 대한 자의식이 선명할 때의 이야기다. 뒤통수를 신경 써야 할 특별한 경우에만, 우리는 뒷모습을 ‘연기’할 수 있다. 우리는 좀처럼 스스로의 뒷모습을 의식하지 못한다. 앞모습만 건사하기에도 바쁜 세상이기에. 물리적으로 ‘뒷거울’을 비추는 행위 정도로는 뒷모습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다. 언젠가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 뒷모습이 왜 이렇게 우중충하니? 비 맞은 솜이불처럼 축 늘어져가지고는.” 친구의 정감 어린 핀잔이었지만, 불에 덴 듯 뜨끔했다.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깜박한 것이다. 내 뒷모습이 내 감정을 그토록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눈·코·입의 움직임은 우리가 신경 쓸 수 있고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하지만, 뒷모습은 제어가 되지 않는다. 걸음걸이, 어깨의 각도, 고개의 기울기, 전체적인 밸런스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완벽히 ‘통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뒷모습은 훨씬 정직하고 적나라하게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타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나 조건이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투시하는 느낌이 좋아서였다. 수학공식처럼 명백하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뒷모습에는 타인의 ‘얼’과 ‘넋’이 담겨 있다. 뒷모습은 마치 지문처럼 그 사람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거나 발걸음을 빨리 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숨길 수 없는 마음의 무늬, 그것이 뒷모습이 그려내는 영혼의 지문이다.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