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제1부 광복)

제3장 - [7] 선전포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일황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비록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제로부터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 그림·조이스 진
1931년 12월 17일 아침 중흥여관에서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날 차비를 했다. 김구가 가르쳐준 대로, 그는 폭탄 두 개를 중국 비단으로 만든 길쭉한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 허벅지 안쪽에 묶은 다음 주머니 끝을 배에 묶고 그 위에 팬티를 입었다. 이틀 동안 김구와 함께 지내면서 거사와 관련된 일들을 꼼꼼히 챙긴 터라 따로 할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근처 중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를 주문하면서, 그들은 술 한 병을 먼저 청했다.

술이 나오자, 이봉창이 김구의 잔을 채우고서 씨익 웃었다. “이제 선생님하고 술을 마시는 것도….”

“그렇구먼.”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김구가 병을 받아 이봉창의 잔을 채웠다. “자, 이번 의거를 위하여 건배하지.”

“예, 선생님.”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술 맛이 좋습니다.” 이봉창이 입맛을 다시면서 밝은 웃음을 지었다.

김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병을 들어 잔들을 채웠다. “이 의사, 우리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저 세상 술 맛을 봅시다.”

음식점에서 나오자, 김구가 이봉창의 옷깃을 잡으면서 사진관 쪽을 고갯짓했다. “이 의사,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사진 하난 박입시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 터인데, 함께 박인 사진이라도 하나 있어야….” 흔들림 없는 김구의 목소리가 문득 가라앉았다.

“예, 선생님. 그러지요.”

두 사람은 안공근의 사진관으로 갔다. 그리고 태극기 앞에 나란히 서서 안공근이 다루는 사진기를 향했다. 마지막 사진인지라, 김구의 얼굴에 처연한 기색이 어렸다.

“선생님.” 김구의 얼굴을 흘긋 살핀 이봉창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자 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 우리 기쁜 얼굴로 사진을 박이십시다.”

“맞소. 이 의사 말이 맞소.” 가슴에서 북받치는 슬픔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김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막 속에서 사진기를 다루고 난 안공근이 붉어진 눈으로 애써 밝은 낯빛을 지으면서, 한마디했다.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진관 앞에서 헤어졌다. 택시가 오자, 이봉창은 두 사람과 악수하고 차에 올랐다. 상하이 부두를 향해 멀어지는 택시를 배웅하면서, 남은 두 사람은 그대로 서서 속으로 울었다.

1932년 1월 8일 오전, 도쿄 교외의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천황의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이 열렸다. 천황이나 내각의 승인을 받지 않고, 심지어 육군 본부의 명령도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행태를 덮어버리고 만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관동군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뜻이 있었으므로, 이번 관병식은 예년의 의례적인 행사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만주에 뿌리를 둔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곧 만주국 수반으로 옹립될 푸이도 히로히토(裕仁) 천황과 함께 관병했다.

관병을 마친 히로히토 천황이 궁성의 남문인 사쿠라다몽(櫻田門) 가까이 갔을 때, 관중 속에서 천황의 행렬로 수류탄이 날라왔다. 그 수류탄은 궁내부 대신이 탄 둘째 마차를 맞췄다. 그러나 폭발의 위력이 너무 약해서, 마차의 밑바닥과 바퀴가 파손되었을 뿐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히로히토가 점심을 들고나자, 스즈키 간타로(鈴木 貫太郞) 시종장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허리 굽히고 보고했다. “폐하, 오늘 일은 너무 죄송스러워서, 무슨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즈키 시종장은 히로히토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다가 1945년 4월에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의 패전과 항복을 처리하게 된다.

히로히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암살은 군주의 직업적 위험이라 하지 않소?”

“폐하, 그 말씀을 들으니 저희는 더욱 황공합니다.” 시종장이 허리를 더욱 굽혔다. “흉악한 행패를 부린 범인은 조선인이라 합니다.”

“조선인? 조선인이라면 독립당원이겠지.”

“예, 폐하. 상해에 있는 조선인들의 ‘가정부’에서 보낸 자라 합니다.”

“그자들이 계속 말썽을 부리는구먼.” 히로히토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예, 폐하. 일부 조선인이 우매해서 조선을 덮은 성은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은 소수고 대다수 조선인은 성은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오후에 미국 대사가 총리대신을 방문한다고 했는데, 그 일은 어떻게 되었소?”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시종장이 인사하고 물러났다.

시종장이 물러가자, 히로히토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로선 만주사변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 태도에 마음이 크게 쓰였다. 미국이 만주사변을 기정사실로 여긴다면, 만주는 일본이 무난히 차지하는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일본의 만주 점령에 반대하고 원상복구를 요구하면, 일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강성한 미국과 맞서는 것은 현명한 선택은 못 되었다. 그렇다고 만주를 내놓을 수 없었다. 넓고 자원이 많은 만주를 영유해야, 일본이 강대국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설령 천황 자신이 만주에서 물러나려 하더라도, 군부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민심도 그들을 지지했다. 실은 천황 자신도 넉 달이 채 안 된 기간에 일본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가득해지곤 했다.

“문제는 책임이….” 히로히토는 소리 내어 생각했다. 문제는 군부가 일을 저지르면, 궁극적으로 책임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예고대로 그날 오후 캐머런 포브스 주일 미국 대사는 일본 정부와 중국 정부에 함께 보내는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의 1932년 1월 7일자 서한을 일본 정부에 수교했다. 무력에 의한 영토의 변경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개방 정책’의 지지를 담아 뒷 날 ‘스팀슨주의’로 불리게 된 미국의 정책을 천명한 서한이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실행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스팀슨으로선 이런 정책의 천명이 최선이었다. 비록 당시 상황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스팀슨주의’는 그 뒤로 미국이 전체주의에 맞서도록 인도한 원칙이 되었다. 그것은 1940년 소비에트 러시아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및 리투아니아를 병합했을 때 다시 천명되어 1991년 세 발틱 국가가 독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래서 1932년 1월 8일은 역사에서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오전엔 조선 사람들이 폭탄으로 그리고 오후엔 미국 사람들이 외교 서한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적 해외 침략을 거부한 것이었다.이봉창의 일본 천황 저격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받아 절대적 권위를 지닌 천황에 대한 공격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오후 5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는 내각 총사직서를 히로히토 천황에게 제출했다. 히로히토는 사직서를 바로 반려했다. 이누카이 내각은 들어선 지 한 달도 채 못 되었고 이전의 와카스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은 8개월 만에 물러난 터였다. 미수로 끝난 암살사건으로 새 내각이 물러나면, 오히려 민심이 불안해진다는 생각도 있었다. 대신 치안 책임자들을 준엄하게 문책했다.


▎1937년 백마를 타고 사열하는 히로히토 일황. 일황 암살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두 무위에 그쳤다. / 사진·중앙포토
중국의 반응은 당연히 이봉창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저격 실패를 드러내놓고 아쉬워했다. 1월 8일 중국 신문들은 호외를 발행해서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보도했다. 이튿날 상하이의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는 ‘한인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맞히지 못했다 (韓人刺日皇未中)’는 표제와 ‘일황이 열병을 마치고 동경으로 돌아갈 때 갑자기 저격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겨우 따르던 차에 터지고 범인은 바로 붙잡혔다 (日皇閱兵畢返京突遭狙擊. 不幸僅炸副車兇手卽被逮)’라는 부제로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칭타오(靑島)의 [민국일보]는 ‘한국의 잊히지 않을 의사 이봉창이 일황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이루지 못했다(韓國不亡義士李奉昌 炸日皇未遂)’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상하이의 [신보]는 ‘한국 지사 일황을 저격했으나 이루지 못했다(韓國志士 狙擊日皇未成)’이란 표제로 보도했다. 이런 보도들에 중국인들은 환호했다. 덕분에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나빠졌던 중국인들과 조선인들 사이의 관계는 크게 나아졌고, 두 나라가 연합해서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졌다.

중국 신문들의 이런 보도에 일본인들은 격분했다. 칭타오의 일본인들이 [민국일보]를 공격하자, 칭타오 항에 정박한 일본 군함 두 척의 육전대(陸戰隊) 600여 명이 가세해서 난동은 1주일 동안 이어졌다. 육전대는 일본의 해병대였다. 크게 파손된 칭타오 [민국일보]는 끝내 폐간되었다. 상하이에서도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충돌했다. 이 일을 빌미로 일본은 해군 육전대를 상하이에 상륙시켰다. 1월 28일 양국 군대가 충돌한 ‘1·28 사건’이 일어났고 끝내 싸움이 확대되어 ‘제1차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났다.

이봉창의 거사가 크게 보도되자, 상해임시정부는 문득 활기를 띠었다. 천황을 암살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일본을 상징하는 천황을 저격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뜻을 지녔다고 임시정부 요원들은 생각했다. 이번 거사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 동화되지 않고 독립을 열망한다는 것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을 모두 자축했다.

당장 급한 것은 일본 경찰의 습격을 피하는 일이었다. 마침 프랑스 조계 공부국으로부터 김구에게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김구를 극진히 보호해왔지만, 이번엔 일본 정부의 인도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김구는 급히 피신했다.

임시정부는 바로 국무회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했다. 결국 이번 거사를 한국독립당이 한 일이라고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1930년 1월에 조직된 뒤 내놓을 만한 실적이 없었던 한국독립당으로선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기 좋은 기회였다. 한국독립당의 성명은 1월 11일 중국인이 경영하는 [국문통신]을 통해 보도되었다.

“본당은 삼가 한국 혁명용사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는 벽력일성으로 전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신년의 행운을 축복하고, 이것과 같은 소리로 환호하며, 바로 제국주의자의 아성을 향해 돌격하여, 모든 폭군과 악정치의 수범(首犯)을 삼제하고 민족적 자유와 독립의 실현을 도모하기 바란다.”

이튿날엔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한 데 대한 한국 독립당 선언’이 발표되었다. 중국어로 된 긴 선언문은 일본의 죄악들을 지적하고 천황을 죽여야 할 이유를 열거했다. 그리고 이봉창의 의거는 30년간 이어진 장인환(張仁煥), 안중근(安重根), 이재명(李在明), 신민회(新民會), 강우규(姜宇奎), 양근환(梁瑾煥), 김익상(金益湘), 김지섭(金祉燮), 송학선(宋學先), 조명하(趙明河) 등과 같은 의인과 열사들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 천명했다. ‘신민회’는 1906년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로 1912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의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회원들이 투옥되거나 망명했다. 이 선언문은 여러 중국 신문에 게재되었고 중국 각지의 동포들에게도 배포되었다.이봉창은 대역죄(大逆罪)로 기소되었다. 대역죄는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1907년 일본 형법에 신설된 죄목이었다. 통상 범죄들과 달리, 대역죄는 삼심제가 아니라 최고재판소인 대심원(大審院)의 심리만으로 판결하게 되었다.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박열이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은 1923년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 사진·중앙포토
1947년 대역죄가 폐지될 때까지, 대역죄로 기소된 사건들은 넷이었다. 1910년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사건, 1923년의 박열(朴烈) 사건, 1923년의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 사건, 그리고 1932년의 이봉창 사건이었다. 이봉창 사건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천황 암살 시도였지만, 앞선 사건들은 모두 무정부주의자들의 시도였다.

20세기 초엽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는 적잖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통제가 엄격했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뒤엔 군국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은 일본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제대로 자라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흔히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끌렸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엔 무정부주의가 세계적으로 호소력을 지녔고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는 사정도 있었다.

무정부주의는 모든 정부 기구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이념이다. 사람의 천성이 착하므로 국가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합의로도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정부가 재산권과 계급 차별에 바탕을 두어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질서를 보호하는 기구라고 여긴다. 자연히, 그들은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대신 단숨에 바꾸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솔선수범, 설득, 비폭력 불복종과 같은 평화적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전투적 행동을 선호하는 사람들까지 다 있다. 전투적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적 군중이나 조직이 실행하는 ‘자발적 정의’를 받아들인다. 테러와 같은 ‘직접 행동(direct action)’은 거기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행동양식이다.

거의 모든 철학이나 이념과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의 연원은 고대 그리스다. 무정부주의(anarchism)라는 말은 1840년 프랑스 사상가 피에르 프루동의 [재산이란 무엇인가?]에서 처음 쓰였다. 자신의 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한 “재산은 도둑질이다”라는 프루동의 구호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전투 함성이 되었다. 이어 러시아 사상가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무정부주의 이념과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혁명이나 내전에서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동맹으로 시작해서 대립으로 끝나곤 했다. 기성 정치체제의 파괴라는 목표에선 같았지만, 모든 정부 기구를 없애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협력으로 조화롭게 움직이는 세상을 꿈꾸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국가가 모든 개인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세상을 꿈꾸는 공산주의자들은 공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주도한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떨어져 나와 ‘무정부주의자 인터내셔널’을 세웠고, 러시아 혁명 뒤에 세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무정부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세기 말엽 직접 행동을 선호하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들은 곳곳에서 정부 요인 암살에 나섰다. 프랑스의 사디 카르노 대통령,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황후,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미국의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암살되었다. 암살된 지도자들이 모두 뛰어나거나 평판이 좋았다는 사실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지향점을 또렷이 가리킨다. 일본 정부의 대역죄 신설은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1910년의 고토쿠 슈스이 사건은 한 무리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을 암살하려고 폭탄 제조 시설을 마련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었다. 고토쿠는 당시 일본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도자였는데, 천황 암살 음모를 초기에 알았을 수도 있었지만 뒤에는 분명히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를 포함한 12명의 무정부주의자가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1923년의 박열 사건은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박열이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섭정인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었다. 다이쇼(大正) 천황이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 히로히토는 1921년부터 섭정으로 천황 업무를 맡아왔다. 히로히토를 암살하려고 해외에서 폭탄을 들여오려 했다는 것이 드러나서,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히로히토는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박열은 22년을 복역하고 1945년에 석방되었지만, 가네코는 감옥에서 몇 달 뒤 자살했다고 발표되었다.

박열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은 준식(準植)이었다. 일본에 유학한 뒤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과 비밀 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해서 직접 행동에 나섰다. 해방 뒤 우익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해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한 정부 수립을 촉구한 이승만의 노선을 지지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선 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귀국했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에 북한에서 죽었다. 가네코의 유해는 2003년에 박열의 생가 근처로 이장되었다.

1923년의 난바 다이스케 사건은 무정부주의자 난바가 혼자서 히로히토 황태자를 저격한 일이었다. ‘간토(關東) 대지진’ 때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의 학살을 조장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자, 난바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상류 계급에 속했으니, 할아버지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아버지는 제국의회 의원이었다. 히로히토 황태자가 제국의회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난바는 아카사카(赤坂) 이궁(離宮)에서 도쿄 도심의 의회로 가는 길목인 토라노몽에서 권총으로 저격했다. 그러나 시종장이 부상했을 뿐 황태자는 무사했다.

이처럼 천황 암살은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앞선 두 사건은 예비 음모 수준에 머물렀고 사건이 크게 부풀려졌다. 천황을 실제로 위협한 난바 다이스케 사건은 무기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천황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는 상류 계급 청년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봉창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차별과 감시를 받는 조선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무기를 구해서 몰래 일본으로 들여왔고 천황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는 신문에서 얻었다. 무엇보다도, 난바 사건으로 천황에 대한 경계가 무척 엄중해진 상황에서 저격을 시도해야 했다. 이봉창이 실제로 천황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은 이봉창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증언한다.

이봉창은 성격이 호방하면서도 담백했다. 그래서 붙임성이 있었고 낯선 일본인들과도 이내 사귀고 잘 어울렸다.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상하이에 머문 짧은 기간에도 그는 그곳 일본인들과 친분을 맺었다.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한 경찰 간부와는 절친해져서, 그는 이봉창의 배가 맨 먼저 들르는 일본 항구인 나가사키(長崎)의 경찰 서장에게 이봉창이 도쿄로 유학 가는 착실한 청년이니 잘 인도해주라는 글을 자기 명함에 써서 그에게 건넸다. 이봉창의 거사 뒤, 이 친절한 경찰 간부는 파면되어 일본으로 소환되었고 끝내 자살했다.

이봉창은 1931년 12월 22일 밤에 도쿄에 닿았다. [도쿄 아사히신문]에서 천황이 1월 8일 요요기 연병장의 육군시관병식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읽자, 그는 그날 거사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김구에게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터이니, 안심하시오”라고 전보를 쳤다.

1월 6일 그는 요요기 연병장을 답사했다. 연병장을 본 순간, 그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연병장이 아니라 들판이었다. 하도 넓어서, 천황에게 접근할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관병식 준비에 바쁜 일본군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연병장에서 저격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천황이 오가는 길에서 거사하기로 했다. 연병장을 찾는 길에 그는 승합차 운전사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봉창이 관병식장에 입장하기 어렵겠다고 걱정하자, 그 운전사는 도쿄 헌병대 소속 헌병 조장(曹長)의 명함을 건넸다. 이봉창은 그 명함을 반갑게 받아서 품에 간수했다.

1월 7일 저녁 이봉창은 도쿄 서남쪽 교외 도시인 가와사키(川崎)로 가서 허름한 유곽에서 잤다. 관병식을 앞둔 도쿄에선 검문이 심했다. 여관과 유곽만이 아니라, 진자(神社)와 절, 빈집까지 경찰과 헌병이 뒤졌다. 사탕 상자 두 개 속에 수류탄 두 개를 넣어 지니고 다니는 터라, 그는 아예 도쿄에서 벗어나 밤을 지낸 것이었다.

1월 8일 아침 이봉창은 수류탄 두 개를 바지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요요기 연병장 근처 하라주쿠(原宿) 역으로 갔다. 역 앞 중국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그는 천황의 행렬을 기다렸다. 그러나 경비가 점점 엄중해져서, 행렬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봉창은 하라주쿠에서의 거사를 포기하고 요쓰야(四谷)에서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철로 요쓰야에 도착하니, 신문팔이 소년이 천황은 그곳이 아니라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를 지나간다고 했다. 그는 서둘러 아카사카미쓰케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천황 행렬이 지나간 뒤였다.

이봉창은 천황이 돌아올 때 거사하기로 했다. 그는 아카사카 전철역 근처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들면서 기다렸다. 마침내 라디오에서 관병식이 끝났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가 다시 아카사카미쓰케로 돌아오니, 천황 행렬이 막 지나갔다 했다.

이봉창은 허탈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새벽부터 애를 썼는데, 오늘은 틀렸구나.’

옆에 있던 선로 인부가 흘긋 그를 쳐다보았다.

이봉창은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말을 걸었다. “오늘 천황 폐하를 뵈려고 나왔는데….”

인부가 안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일찍 나오셨으면, 뵈었을 텐데.”

인부가 친절해서 그는 가볍게 물었다. “그렇게 됐네요. 지금 천황 폐하를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시 지름길은 없나요?”

인부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름길이 있습니다.”

인부가 지름길을 이봉창에게 알려주자, 빈 택시가 다가왔다. 인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서, 그는 택시에 올라탔다. “천황 폐하의 행렬을 보러 가니, 빨리 가주십시오.”

택시는 참모본부 앞을 지나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멈춰 섰다. 이봉창은 차에서 내려 경찰이 없는 쪽으로 달려서 경시청 앞에 닿았다. 거기서도 경찰이 가로막았다. 그는 이틀 전 승합차 운전사가 건넨 일본 헌병의 명함을 보여주면서 천황의 행렬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의 허락을 받자, 그는 경시청 현관 앞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천황의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이 여러 겹으로 서 있었다. 이봉창은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행렬이 막 사람들 앞을 지나 사쿠라 다몽 쪽으로 가고 있었다. 맨 앞 마차는 이미 지나갔고 둘째 마차는 막 앞을 지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둘째 마차에 천황이 탔으리라고 판단하고서, 그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행렬을 향해 던졌다.

수류탄은 둘째 마차의 뒤쪽 마부가 선 받침대 아래에 떨어져서 폭발했다. 그러나 수류탄의 위력이 약해서, 마차는 멀쩡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셋째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폭음이 크지 않아서, 셋째 마차 안의 사람들은 폭탄이 터진 줄도 몰랐다.

“이런….” 이봉창의 입에서 비참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성능이 강한 수류탄이라서 시험할 필요가 없다는 김구의 말을 믿은 것이 불찰이었다. 실망이 너무 커서, 그는 왼쪽 주머니에도 수류탄이 들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폭탄이 터지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경찰이 몰려들었다. 경찰관들은 이봉창의 옆에 섰던 사내를 붙잡았다.

“아니오! 그 사람이 아니오! 나요 나! 내가 폭탄을 던졌소!” 이봉창은 그 경찰관들에게 외쳤다.일본 천황을 실제로 저격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능력에 운이 따라야 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운도 순수한 운만은 아니었다. 이봉창이 사람들과 잘 사귀고 신뢰를 받았으므로, 낯선 사람들이 그를 도운 것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사형 선고 소식을 담은 1932년 9월 30일 아사히신문 호외. 당시 이봉창의 죄목은 대역죄였다. / 사진·중앙포토
뒷날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봉창의 성품을 솔직하게 술회했다.

“이 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화해하지마는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대인 담론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술은 한량없고 색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가곡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홍구에 거주한 지 1년도 못되어 그가 친하게 사귄 친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왜경찰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현혹되기도 하고, OO영사의 내정에는 무상출입이었다. 그가 상해를 떠날 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짓는 아녀자도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부두까지 나와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친우 중에는 왜경찰도 있었다.

1932년 9월 30일 일본 대심원은 비공개 재판에서 이봉창에게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봉창은 삶을 담백하게 대했다. 그리고 서른두 살에 삶을 마감했다.”

이봉창의 거사로 상하이와 칭타오에서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충돌한 상황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지속하려는 일본에 좋은 구실을 주었다. 이미 상하이에 근거를 지닌 일본은 상하이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유조구 사건’을 조작해서 만주사변의 구실로 삼은 것처럼, 상하이에서도 일을 꾸몄다.

1932년 1월 18일 일본의 토착 불교 종파인 일련종(日蓮宗)의 일본인 승려 2명과 신도 3명이 공동조계안에서 중국인들에게 폭행당해서, 1명이 죽고 셋이 중상을 입었다. 이어 인근 공장이 불탔다. 이 사건은 관동군 사령부의 지시를 받은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육군 무관 보좌관이 꾸민 일이었다.

상하이 경찰은 시위하는 중국인들의 진압에 나섰고 그런 진압은 오히려 시위를 격화시켰다. 거리를 메운 시위 군중은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일본 상품 불매를 외쳤다.

1월 27일 일본 총영사는 상하이 당국에 ‘승려살상사건’에 대해 24시간 안에 시장이 사과하고 가해자를 체포해서 처벌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위자료와 치료비를 지급하고 항일 시위를 엄금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튿날 상하이 당국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일본 총영사관에 통보했다. 그러나 일본군 육전대는 28일 밤 11시에 상하이 부근에 주둔한 중국군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 자정엔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상하이의 민간인 지역을 폭격했다. 1937년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군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 다섯 해 전, 일본군은 세계에서 기장 먼저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 폭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났다.

당시 상하이 근처에 주둔한 중국군은 채정개(蔡廷锴)가 지휘하는 19로군이었다. 로군(路軍)은 중국군에서 2개 이상의 군(군단을 뜻함)이나 상당수의 사단 또는 독립여단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가리켰다. 1938년 이후 집단군이란 호칭으로 대치되었는데, 중공군인 8로군만은 여전히 옛 이름을 썼다.

채정개는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19로군 병사들은 상하이 시민들의 항일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본군에 맞서려는 의지가 굳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으면 이내 퇴각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중국군은 우세한 일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1·28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일본군은 상하이 연안에 전함 30여 척, 항공기 40여 대와 7000명가량 되는 병력을 집결해 놓은 터였다.

19로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자, 상하이 시민들은 의용군과 호송대를 조직해서 19로군을 도왔고 각 지의 인민이 구호 물자를 보내왔다. 상황이 그렇게 바뀌자, 장개석도 일본과의 전쟁을 피한다는 전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맞섰다. 그래서 2월 14일엔 장개석의 심복 장치중(張治中)이 이끄는 제5군 예하 87사단과 88사단을 상하이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증강되자, 전황은 중국군에 불리하게 되었다. 병력은 5만 아래로 줄어들어 10만으로 늘어난 일본군에 밀렸고 함포 사격과 전차의 지원을 받는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2월 29일에 중국군 배후에 상륙한 일본군 11사단을 몰아내는 데 실패하자, 3월 3일 중국군은 상하이에서 물러났다.

상하이를 비롯한 화중(華中) 지역에 이권을 많이 가진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중국 침공에 당연히 반대했다. 결국 일본군도 3월 3일에 전투 중지를 선언했다. 3월 중순부터는 국제연맹의 중재로 휴전협상이 진행되었고 5월 5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상하이는 비무장지역이 되었고, 중국군은 상하이 인근에 군대를 배치할 수 없게 되었고, 반면에, 일본은 일부 군대를 상하이에 유지할 권리를 얻었다.제1차 상해사변이 진행되는 사이, 김구는 일본 경찰을 피해 숨어 다니면서도 다음 거사를 준비했다. 뒷날 그는 [백범일지]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술했다.


▎윤봉길은 호방한 데다가 풍류를 아는 이봉창의 성격과는 달리 매사에 진지했다. 현실에 거대한 분노를 품은 그에게는 우국지사의 풍모가 어렸다. / 사진·중앙포토
“일본군은 상해 갑북(閘北)에서 불을 지르고는 화염 속에 남녀노유(男女老幼)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던져 넣어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참혹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프랑스 조계 안에서도 곳곳에 후방 병원을 세워 전사병의 시체와 부상병들을 트럭에 실어 날랐다. 나무 판자 틈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 가득한 열성으로 경의를 표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우리도 어느 때에 저와 같이 왜와 혈전을 벌여 본국 강산을 충성스러운 피로 물들일 날이 있을까,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려 길가는 사람들이 수상히 여길까 봐 그 자리를 물러났다.”

거사엔 자금과 사람과 표적이 아울러 필요했다. 이봉창의 거사 뒤 자금과 사람은 사정이 좋아졌다. 미주 동포들이 의연금을 보내왔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려는 젊은이들이 김구를 찾아왔다. 일본군이 상하이에 들어오자, 둘레에 표적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김구는 왕웅으로 통하는 김홍일과 자주 만났다. 상해사변 중에 김홍일은 19로군의 후방 정보국장을 겸임했는데, 그의 주요 임무는 일본군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일본군의 주요 군사 시설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황포강(黃浦江)에 정박한 일본 군함 ‘이즈모(出雲) 호’에 눈독을 들였다. 일본군 사령부로 사용되는 배라서, 그것을 폭파하면, 일본군 수뇌부를 없앨 수 있었다. 바로 앞쪽의 홍구 부두엔 일본군 군수창고가 있어서, 이즈모 호가 크게 폭발하면, 군수창고도 불이 붙고 탄약이 폭발할 수 있었다.

김구와 김홍일은 물밑 선각에 항공기용 폭탄을 설치해서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거사 날짜는 2월 12일로 정했고 점심 시간에 장교들이 배의 식당에 모이는 것을 노려 낮 12시 30분에 폭파하기로 했다. 중국인 잠수부 둘을 매수해서 하루 전에 예행 연습까지 마쳤다. 그러나 겁을 먹은 잠수부들이 머뭇거려서 예정된 시간에 이즈모 호에 접근하지 못했다. 예정대로 폭파 스위치를 눌렀을 때, 폭탄은 이즈모 호에서 10여 미터 밖에서 터졌고 잠수부들만 폭사했다.

김구와 김홍일은 홍구 부두에 있는 군수품 창고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당시 군수품 창고에선 물품들을 나르고 정리하는 일에 일본인 노동자들이 부족해서 중국인 노동자들도 썼다. 김구와 김홍일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쓰는 것과 같은 도시락과 물통 안에 시한폭탄을 장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시한폭탄의 제조와 시험에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전투가 끝났다.

애써 준비한 거사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김구는 국내와 만주의 일본 고위 인사들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먼저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조선 총독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어 유진식(兪鎭植)과 이덕주(李德柱)를 각기 3월과 4월에 국내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4월 9일 황해도 신천에서 체포되었다. 이어 만주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대장과 남만주철도회사의 우치다 야스야(內田康哉) 총재를 암살하는 임무를 주어 최흥식(崔興植)과 유상근(柳相根)을 각기 3월과 4월에 대련으로 보냈다. 거사는 리튼 조사단이 대련에 도착하는 5월 26일로 잡았다. 이들도 결국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거사에 실패했다.“감사하오. 저녁 잘 먹었소이다.” 김구는 안주인에게 인사했다.


▎일본군은 제1차 상해사변을 일으켜 민간인에게까지 폭격을 감행했다. 중국군은 강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많은 병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 그림·조이스 진
“선상님께서 소찬에두 맛있게 드시니, 지가….” 숭늉 대접을 상에 내려놓으면서, 안주인이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띠었다. 그녀는 전차검표원으로 일하는 계춘건(桂春建)의 부인이었다.

김구가 숭늉 대접을 집어 드는데, 문밖에 기척이 났다. “형수님.”

“예, 삼춘.” 아낙이 몸을 돌렸다. “어서 와유.”

“형님이 오늘 선생님께서 오신다 해서 일찍 들어왔는디, 선생님 오셨어유?”

안주인이 김구를 흘긋 돌아보더니, 문을 열었다.

“아, 계시네.” 윤봉길이 반갑게 말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선생님, 오늘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선생님, 그동안 안녕히 지내셨는지요?”

“윤군, 어서 오시오. 반갑소.”

김구는 손을 내밀었다.

“삼춘, 저녁 드셔야쥬?” 윤봉길이 밥상을 놓고 김구와 마주앉자, 안주인이 물었다.

“예. 형수님, 그런데 술잔 먼저 주세유.” 윤봉길이 들고 온 꾸러미에서 술 한 병을 꺼내 놓았다.

윤봉길은 충청도 사람이었는데, 작년 초여름에 상하이에 나타났다. 그는 동포 한 사람과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으나, 영업이 부진했다. 그래서 상당히 큰 말총 제품 회사를 운영하던 박진(朴震)에게 공장을 넘기고 자신은 그 회사에서 일했다. 김구가 자주 박진을 찾았는데, 그때 윤봉길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여겨, 한인애국단이 이봉창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상해사변이 일어나 북경으로부터 말총을 들여올 수 없게 되자, 박진의 회사도 어려워졌다. 윤봉길은 거기서 나와 계건춘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홍구 시장에서 채소와 밀가루 장사를 했다.

안주인이 술잔을 내왔다. “안줏감이 없는디, 어떡하나?”

“이거면 됐습니다.” 김구가 웃으면서 상의 반찬들을 가리키자, 안주인은 다시 수더분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 돼지고기 좀 샀어유.” 윤봉길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자상두 허셔라. 그럼 이거 삶아올 게유.”

“형수님두 한 잔 하실래유?”

안주인이 환하게 웃었다. “먼저 드세유.”

“형수님 친정이 제 고향입니다.” 안주인이 나가자, 윤봉길이 설명했다. “충청남도 예산군인데, 저는 덕산면이구 형수님은 예산읍냅니다.”

“아, 그래요? 여기 상해 와서 고향 사람 만나면, 반갑지. 자, 듭시다.”

“예, 선생님.”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그래 장사는 어떻소?” 입맛을 다시면서, 김구가 물었다.

“지금 뭐 되는 게 없잖습니까? 그래두 걱정했던 것보다는 낫습니다.”

“다행이오.” 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역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도 하나님의 은총이오.”

“저두 그렇게 생각하구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윤봉길이 문득 정색을 했다. “제가 고향을 떠나 여기로 올 때는 제 나름으루 뜻이 있었습니다. 비록 날마다 채소 바구니를 메구서 시장에 나가 호구지책을 삼지만, 그 뜻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김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한 일이오. 윤 군의 뜻이 가상하오.”

“그런데 저 혼자 아무리 생각해보아두, 그 뜻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이번 상해사변두 일본이 원하는 거 다 주구 끝나는 것 같습니다. 만주사변하구 똑같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힘이 없구 열강들은 나서려 하지 않구. 지금 상해에선 왜눔들만 기세가 등등합니다.” 속에서 무엇이 솟구친 듯, 윤봉길이 잔을 들어 술을 마저 마셨다.

김구가 병을 들어 윤봉길의 잔을 채웠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이 윤군 말대로요.”

“그래두 선생님께서는 길을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매하지만, 선생님께선 저번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을 갖구 계실 것입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그 은혜는 죽어두 잊지 않겠습니다.”

“좋은 말씀이오. 내 명심하리다. 자, 한잔 듭시다.” 속에서 문득 솟구친 감동을 애써 감추면서 김구는 잔을 집어 들었다.

그동안 김구는 점점 커지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봉창의 거사로 동포들의 기대가 한껏 커지고 송금도 부쩍 늘었는데, 뒤를 잇는 거사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즈모 호 폭파 계획’부터 꾸민 거사마다 실패한 터에, 상해사변이 끝나서 목표들도 사라졌다. 그래도 목표야 찾으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중대한 임무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여기 새로운 인물이 나온 것이었다. 윤봉길은 뜻이 굳었다. 조선을 떠나 상해임시정부를 찾아 오는 길에 윤봉길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달포 만에 풀려나자, 주저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가까스로 발해만을 건너 칭타오에 닿았지만, 상하이로 갈 여비가 없어서 한 해 동안 일본인의 세탁소에서 일했다. 그리고 여비가 마련되자, 바로 상하이로 온 것이었다.

“하아, 술 맛이 좋네.” 배추김치 접시로 젓가락을 뻗으면서, 김구가 얼굴에 웃음을 올렸다. “윤군 덕분에 오늘….”

“별말씀을… 자주 뵙지 못해서, 선생님께 늘 죄송한 마음을 품구 있습니다.” 윤봉길이 허리를 굽혔다.

김구는 마음속으로 윤봉길을 이봉창에게 비겨보았다. 둘 다 젊은 지사들이었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이봉창은 자유로운 넋이었다. 구김살 없이 호방한 성품이었고 사람들과 잘 사귀었지만, 무슨 인연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떠돌며 살았다. 삶의 모든 맛을 탐했고 주색에 절제가 없었지만, 부도덕하다는 느낌 대신 오히려 삶을 담백하게 대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일본 노래들을 좋아하고 일본 옷을 즐겨 입었지만, 그의 정신은 가장 조선적이었다. 이봉창에겐 세속의 계율을 훌쩍 뛰어넘는 선승(禪僧)의 기품이 어렸다. 지팡이 하나를 들고 표표히 세상을 떠도는 선승의 풍모를 지녔다. 다만 그가 지닌 지팡이는 조국의 원수들을 벨 칼날을 속에 품은 ‘시코미주에’였다. 원래 시코미주에는 닌자들이 애용하는 무기로 적을 먼저 치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의 성품이 담긴 칼이었다. 그 칼이 이봉창이라는 선승 아닌 선승에게 잘 어울릴 터였다.

윤봉길은 매사에 진지했다. 학식도 넓었고 어릴 적에 한학을 배워서 글도 좋았다. 생김새도 단단해서 바위와 마주앉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속에 거대한 분노를 품은 바위였다. 그래서 아직 20대 초반인 그에겐 전형적인 우국지사의 풍모가 어렸다.

‘선승과 지사라….’ 그런 비유가 그럴 듯해서, 김구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가 아직 안 나오는데, 선생님….” 윤봉길이 가벼운 웃음을 띠고서 김구의 잔을 채웠다.

“이만하면 안주가 좋은데, 뭐.” 잔을 잡으면서, 김구는 순간적으로 결심을 했다. “윤군, 내가 할 얘기가 하나 있는데….”

김구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느낀 윤봉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예, 선생님.”

“방금 윤군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는데, 우리 한인애국단으로선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얘기요. 윤군과 같은 지사가 나서야, 무슨 일이든 성사가 되는 것이오.”

“감사합니다, 선생님.”

“유지자 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 했으니, 윤군의 뜻이 끝내 이루어질 것이오. 이번 전쟁 중에 연구해서 실행하려 한 일이 있었는데, 준비가 부족해서 실패하였소. 요사이 내가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번민하던 참이었소. 윤군의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문득 밝아지는구려.”

“선생님, 감사합니다.” 윤봉길이 허리를 깊이 굽혔다.

“아마 윤군도 신문에서 보아서 알고 있을 것이오. 이번에 왜놈들이 싸움에 이겼다고 축하회를 여는 모양이오. 왜황의 생일이라고 천장절(天長節) 행사도 겸해서 성대하게 여는 모양이오.”

“예, 저두 보았습니다. 왜눔들이 떠들썩하게 행사를 한다구.” 윤봉길이 무심코 대답하다가 김구의 말 뜻을 깨달았는지 김구를 쳐다보았다.

김구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늘이 주신 기회요. 나와 함께 연구하고 준비해서 군의 일생의 대목적을 그날에 달성해봄이 어떻소?”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왜놈들 경축식이 4월 29일이니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오.”

“아이고, 불이 시원찮아서 너무 오래 걸렸네.” 안주인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구수한 고기 냄새가 풍겼다.

“이거…, 고맙습니다. 윤군하고 아주머님 덕분에 오늘 내가….” 김구가 껄껄 웃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었는데, 고기 냄새를 맡으니….”

“선상님, 밥배가 따루 있구 고깃배가 따루 있다구 그러잖아유?”

“그 얘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집 주인이 없는 사이에 우리끼리 먹으려니, 좀…. 계군은 언제 들어오나요?”

“좀 있어야 들어오니께, 선상님허구 삼춘허구 두 분이 먼저 드세유.”

“형수님두 같이 드시쥬.”

“내가 먹을 건 냉겨놨슈. 이따가 형님 들어오면…. 선상님허구 먼저 드세유.”

고기를 들면서, 김구는 그동안 생각해온 거사 계획을 윤봉길에게 설명했다. 윤봉길은 열심히 들으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자세히 물었다. 윤봉길은 이봉창의 거사 준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했다.

“이봉창 의사는 홀몸이었소. 고국에 형님 한 분이 계셨소.” 이봉창의 거사에 대한 얘기가 끝나자, 김구가 처연한 낯빛으로 말했다.

“아, 예.” 윤봉길이 김구의 말뜻을 새겼다. “저는 가족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둘이라 했던가?”

“예. 둘입니다.” 윤봉길의 목소리엔 어쩔 수 없이 애틋한 기운이 어렸다. “집을 떠날 때 내자에게 일렀습니다, 오늘부터 두 아이는 아비 없는 자식이다. 잘 키워라.”

김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가족을 남겨두고 조국을 떠나 여기까지 온 분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소.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게 길을 주셨습니다.”

“이제 가봐야겠소. 오늘 밤 잘 곳을 찾아야지.” 김구가 웃음기 없는 웃음을 얼굴에 올렸다.

이봉창의 거사 이후 김구는 공개적 활동을 중지하고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일본 경찰을 피했다. 식사는 동포 집을 찾아 다니면서 해결하고 잠은 동지들의 집이나 창기들의 집을 하룻밤씩 이용했다. 처음엔 상하이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김구를 체포하러 나섰으나, 성과가 없자, 일본 사법성은 이봉창을 수사한 검사인 가메야마(龜山)라는 자를 상하이로 파견했다고 했다. 지난달엔 대심원 검사국의 검사가 상하이로 나와서 수사를 지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간에서 두 사람은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김구 혼자 살그머니 밖으로 나갔다.복거일(卜鉅一) -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87년 소설 [비명을 찾아서] 발표. 이후 50여 권의 저술을 펴냄. 최근에는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와 6·25 전쟁사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및 전기 [리지웨이, 대한민국을 구한 지휘관]이 있다.조이스 진 - 연세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14년 봄에 첫 전시회를 가졌고 4월부터 [동아일보]에 [세상의 발견]이란 제목으로 그림과 글을 연재 중이다. [그라운드 제로] [서정적 풍경 1,2]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등의 책에 삽화를 그렸고 연극 [아, 나의 조국]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의 미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