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창조의 본고장’ 바우하우스를 가다⑭] 음악은 ‘소통’, 회화는 ‘생각’이다!

미술, 음악 창조의 원리를 모방하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소’ 그림. 기원전 약 1만 5000 년 전 그림이다. 구석기시대였다. 소를 이용해 경작을 했던 농경시대가 아니다.
#1. 남자가 둘째로 싫어하는 것은 ‘소매치기’다. 그렇다면…

남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당일치기’다. 아, 죄송하다. 느닷없는 ‘아재 유머’에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나는 여수 바닷가에 가까스로 마련한 화실에 앉아 매일같이 이런 허접한 ‘아재’ 생각만 하고 있다. 섬 때문이다. 화실 맞은편에는 작은 섬이 있다. 한때, 여자친구가 생기면 ‘배가 일찍 끊기는 섬’에 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끊긴 선착장에서 울고불고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친구는 알고 보니 샴푸와 로션까지 포함된 1박2일용 세면도구를 완벽하게 준비해왔다는 전설도 있었다. 당시 철없는 사내들은 죄다 그렇게 일찍 배가 끊기는 섬에 가고 싶었다. ‘오빠 믿지?’, 혹은 ‘손만 잡고 잘게!’라는 ‘찬란한 멘트’를 한번쯤은 꼭 날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바로 그런 섬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꿈에 그리던 바닷가 화실이다. 그런데 그림은 안 그리고 이렇게 ‘배 끊기는 섬 생각’만 하고 있다.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막막해서다. 일본 미술전문대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그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아주 멍해졌다.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화실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화실이 생기니 이런 엉뚱한 ‘섬’ 생각뿐이다. 자료를 뒤져봤다. 도대체 화가들은 막막할 때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의 ‘소’ 그림. 이 또한 기원전 1만7000년 전 그림이다. 또 ‘소’다. 왜 인류 최초의 화가들은 ‘소’를 그렸을까?
‘소’다! 인류 최초의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기원전 1만5000년)나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기원전 1만7000년)를 그린 화가들은 ‘소’를 그렸다. 물론 사슴도 있고, 말도 있고, 돼지도 있다. 그러나 ‘소’가 압도적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라스코 동굴벽화 모두 구석기 시대의 그림이다. 소를 이용해 경작을 했던 농경시대가 아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죄다 소를 그렸을까?

소를 그린 화가는 구석기 시대의 화가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이중섭도 소를 열심히 그렸다. 그의 소는 참 다양하다. ‘흰소’, ‘황소’, ‘싸우는 소’, ‘소 두 마리’, ‘소와 소녀’ 등등. 특히 이중섭의 ‘흰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소가 아니다. 거의 맹수 수준이다. 이렇게 강력한 소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중섭이 그리고 싶었던 소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그림은 <길 떠나는 가족>에 그려진 소일 것이다.


▎섬을 마주하고 있는 바닷가 내 화실. 횟집 하다 망한 곳을 아주 저렴한 월세를 주고 임대했다. 이제까지 화실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화실을 구하고, 그럴 듯하게 수리하고 나니 ‘배가 일찍 끊기는’ 엉뚱한 생각뿐이다.
참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그림이다. 소를 끌고 있는 남자는 이중섭 자신이다. 환호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처절한 가난으로부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탈출하는 그 흥분과 기쁨이 그대로 전해 온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은 이중섭에게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기에 그저 가슴이 멍해온다. <길 떠나는 가족>의 스케치는 이중섭이 가족에 보낸 편지 한 귀퉁이에도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빈 귀퉁이가 있으면 꼭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편지 내용과 그림이 어우러져 이중섭의 간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들 태현(일본이름 야스카타)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림 아래의 편지 내용은 이렇다. (언젠가 처음이 편지를 봤을 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야스카타君... 나의 야스카타군. 건강하지? 학교의 친구들도 모두 잘 지내지? 아빠도 건강하게 전시회 준비를 잘 하고 있어. 아빠가 오늘... [엄마, 야스나리군, 야스카타군이 소달구지를 타고... 아빠는 앞에서 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으로 함께 가는 것을 그렸어. 소 위에 있는 것은 구름이야] 그럼 잘 지내. 아빠 중섭’#2. 죄다 소를 그렸다!


▎이중섭의 <흰 소>. 이렇게 힘센 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되면 소가 아니다. 맹수다. 이중섭의 참담했던 개인사와 도무지 연결이 안 되는 강렬함이다.
근대 회화를 대표하는 피카소도 소를 그렸다. 사실주의적 소의 형상에서 단지 몇 가닥의 선만으로 소의 형상을 단순화, 추상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피카소의 ‘소 그림 연작’은 아주 흥미롭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1945년 12월부터 1946년 1월 사이에 그려진 피카소의 소와 기원전 1만 5000년에 그려진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소가 상당히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피카소가 보여주는 단순화, 추상화의 압권은 1931년 단 4개의 선으로 그린 누드화다. 장난기가 가득한 여인의 누드화에 비해 피카소의 소 그림 연작은 ‘추상화’라는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피카소의 천재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같은 소의 추상화 연작은 피카소 고유의 창조물이 아니다. 피카소에 훨씬 앞서 그려진 아주 유사한 소 그림 연작이 있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의 그림에는 유난히 소를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특히 일본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가난하지만 온 가족이 행복하게 지냈던 1년 동안의 제주도 피난살이를 그리워하며 그린 <길 떠나는 가족>에서의 소 그림은 참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환호하며 소를 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중섭 자신이다.
두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의 소 그림이다. ‘유능한 화가는 베끼고 위대한 화가는 훔친다(Good artist copy, great artist steal)’는 자신의 평소 주장대로 피카소는 두스부르흐가 30년 전에 그린 소 그림 연작을 아주 유사하게 모방했다. 두스브르흐의 소 그림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1916~1917년 사이에 그가 그린 스케치형식의 연작, 소의 형태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구아슈 물감으로 그린 그림, 그리고 완전히 추상화되어 소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그림 등이다.

두스부르흐의 소와 피카소의 소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같은 수준의 추상화에 다다르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두스부르흐의 소에는 곡선이 없다. 직선과 직선으로 이뤄진 사각형만 있다. 피카소의 소는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직선과 곡선의 차이는 엄청나다. 두스부르흐가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를 ‘촌스럽다’고 비웃은 이유는 바로 이 같은 곡선 때문이다.(실제로는 ‘낭만주의자들’이라고 비웃었다. 두스부르흐는 바우하우스에 여전히 남아 있는 반 데 벨데의 아르누보, 유겐트스틸, 표현주의의 잔재들을 통틀어 ‘낭만주의’라고 비난했다.)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은 그가 아들 태현(일본이름 야스카타)에게 보낸 편지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다. 편지를 읽고 그의 그림을 보자면 가슴이 한참 동안 멍해진다. 자꾸 눈물이 난다.
피카소만 두스부르흐의 소를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뉴욕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도 수차례에 걸쳐 두스부르흐의 소를 모방해 그림을 그렸다. 한국 사람들에게 리히텐슈타인은 ‘현대미술과 돈’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가로 유명하다. 2008년 삼성비자금 사건 수사과정에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라는 ‘만화 짝퉁’(!) 작품이 당시 가격으로 87억원이나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주로 만화 캐릭터를 원색의 점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제작한 리히텐슈타인은 한때 추상화에 몰두했다. 그 시절에 남긴 작품들 중에는 ‘소’를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 두스부르흐나 피카소처럼 추상화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두 가지가 있다. 1973년, 1982년의 작품이다. 1973년 작품에는 곡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1982년에는 곡선이 완전히 사라진다.#3. 음악은 ‘소통’이고, 미술은 ‘생각’이다!


▎피카소의 소 그림 연작. 사실주의적 소 형상에서 단지 몇 가닥의 선만으로 소의 모습을 단순화, 추상화의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더 재미있는 것은 피카소의 소와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소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욕구는 ‘흉내 내기’다. 인간은 ‘거울뉴런(Mirror neuron)’이라는 뇌의 신경세포를 통해 상대방의 동작과 행동의 리듬과 같은 다양한 정서표현 방식을 똑같이 흉내 내도록 프로그램이 세팅되어 세상에 태어난다. 흉내 내기로 시작하는 인간의 의사소통은 본능이다. 거울뉴런을 통한 흉내 내기가 없다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아기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흉내 내며 소통하는 방식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을 흉내 내며 그의 내면을 유추한다. 우리가 언어적 소통을 불가능한 외국인을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표정과 몸짓을 따라하기다. 흉내 내면서 그가 사용하는 단어를 따라 하고, 그 단어와 그의 동작, 표정을 연관지어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기가 언어를 배우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정을 통해서다.

음악은 이 흉내 내기가 문화적으로 구조화된 형태다. 도대체 인류에게 음악이 왜 필요했는가에 대한 이론이 많다. 음악의 필요성을 문화심리학적으로 정의내리자면 ‘함께 움직이기 위해서’, 혹은 ‘함께 느끼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 시대 음악은 함께 춤추기 위해서 연주되었다. 불을 피우고 그 주위를 돌며 함께 춤을 췄다.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춤을 췄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도 함께 춤을 췄다. 음악에 맞춰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느끼는 감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같은 정서를 느끼면 ‘같은 편’이 된다. 동일한 정서상태는 소통의 시작이다. 음악은 소통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가 이야기하는 ‘언어습득장치(language acquisition device; LAD)’는 바로 ‘흉내 내기’와 관련되어 있다.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의 다양한 규칙을 습득하고 적용하는 능력인 언어습득장치는 생득적이다. 그러나 촘스키의 이론에는 생득적이라는 언어습득장치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이 빠져 있다. 언어습득장치의 구체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아름다운 누드화를 본 적이 있는가? 피카소가 단지 4개의 선을 가지고 그린 여인의 누드화다. 단순화, 추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피카소의 회화는 여전히 곡선이다.
‘흉내 내기’는 바로 이 언어습득장치의 심리학적 설명이다. 막 태어난 아기도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을 흉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는 아주 고전이다. 타인과 공유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언어를 매개로 한 소통은 단어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흉내 내기야말로 바로 이 ‘공유’의 원천이다. 그러나 아무리 흉내 내기라는 생득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도 그 능력을 끊임없이 활용하며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언어발달은 이뤄지지 않는다.

언어발달을 가능케 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환경을 가리켜 제롬 부르너(Jerome Bruner, 1915~2016)는 ‘언어습득지원 체계(Language Acquition Support System; LASS)’라고 부른다. LASS의 가장 중요한 기제는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시선공유(Joint-Attention)’다. 같은 대상을 볼 수 있어야 그 대상의 이름, 즉 어휘 획득이 가능해진다. 엄마는 아기의 시선을 따라가, 아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그 대상의 이름을 소리 내어 알려준다. 아기는 엄마의 소리를 흉내 낸다. ‘강아지’, ‘자동차’, ‘인형’ 등등. 언어는 이렇게 습득된다. 아울러 ‘언어습득장치’와 ‘언어습득지원체계’를 통해 인간의 사고능력도 발달한다.

타인과의 소통이 내면화된 결과가 ‘생각’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바로 이 ‘중얼거리는 현상’이야말로 ‘생각’의 발생학적 기초가 ‘소통’이라는 증거다. 타인과의 소통이 내면화되어 생각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의 소통’이란 이야기다. 발생학적으로 ‘소통’이 먼저고 ‘생각’이 나중이다. 아동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언어습득 방식은 물론 언어습득의 내용까지 달라진다. 이렇게 내면화된 소통의 형식과 내용을 심리학에서는 ‘인지(Cognition)’라고 부른다.

언어습득지원체계에 관한 제롬 브루너의 이론은 우리의 인지내용이 결코 초월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생각은 철저하게 문화적이다. 이와 관련해 브루너는 가난한 집 아이들일수록 큰 동전은 더 크게, 작은 동전은 더 작게 지각한다는 현상과 같은 일련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950~60년대, 브루너의 ‘문화상대주의적 인지론’은 ‘보편적 인지발달론’(인간의 인지능력이란 동일한 발달단계를 거쳐 보편적 논리의 수준에 다다른다는 단선론적 발달론)이 주도하던 당시 심리학계를 크게 뒤흔들었다.인간의 문화는 흉내 내기의 확장


▎두스부르흐가 1916년과 1917년에 스케치한 소 연작. 단순화, 추상화의 과정이 피카소의 소 연작 (1945년~ 1946년)과 유사하다. 물론 피카소가 두스부르흐를 베낀 것이다. 피카소는 아주 자주, 그리고 잘 베꼈다!
인지발달의 기저에는 ‘시선공유’와 더불어 ‘흉내 내기’라는 메카니즘이 깔려 있다. ‘흉내 내기’는 언어발달은 물론 인지발달에도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초기 아동발달에 있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탐색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이 흉내 내기다. 세상의 모든 장난감이 인형이거나 동물, 자동차처럼 주위의 물건들을 작게 모방한 것이 대부분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상을 작게 ‘재현(representation)’한 것들이다. 생각이란 이 장난감들처럼 외부의 대상이 아이들의 내면에 재현된 결과다.

아기들이 처음 배우는 단어들은 이 장난감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물론 아기가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는 ‘엄마’다. 이는 전 세계 공통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단어들은 문화마다 달라진다. 도시에 살고 있는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엄마’ 다음으로 ‘자동차’라는 단어를 익힌다.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 유치원을 다녔던 내 큰 아들은 막 말을 배울 때, 하루 종일 ‘아우토(Auto)’만 외치고 다녔다. ‘아우토’는 자동차의 독일어다. ‘아우토’에 바로 이어 내 아들이 배운 단어는 경찰을 뜻하는 ‘폴리차이(Polizei)’였다.

내 아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독일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는 초록색의 독일경찰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자동차가 꼭 있었다. 게다가 거리를 지나는 경찰차는 꼭 ‘띠또띠또’하는 소리를 냈다.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독일의 아이들은 한결같이 ‘띠또띠또’하고 놀았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이들에서 자동차는 곧 ‘경찰차’였다. 독일사회에서 독일경찰이 갖는 신뢰와 권위는 이렇게 시작된다. 생각은 이렇게 문화적으로 구조화되는 것이다.

강아지를 키우는 아이들은 ‘강아지’란 단어를 먼저 배운다. 아이들에게 다리가 네 개인 동물은 모두 ‘강아지’다. 아이들의 ‘강아지’는 점차 분화되어, ‘강아지’와 ‘고양이’로 분화되어간다. 이렇게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는 대부분 이 같은 추상화, 일반화를 거친다. 물론 구체적 단계에서 추상적 단계로 상승하는 반대의 과정도 있다. ‘레고 블록’처럼 아주 의미 없어 보이는 장난감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레고 블록을 조립하여 주위의 물건을 흉내 낸다. 이미 대상과 똑같이 만들어진 장난감으로는 대상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흉내 내지만, 조립장난감으로는 자신이 파악한 대상의 구조를 흉내 낸다.

세상을 흉내 내며 인간의 소통과 인지능력은 발달한다. 인간의 모든 문화는 바로 이 흉내 내기의 확장형태다. 이를 철학이나 문학에서는 ‘미메시스(Mimesis)’라고 정의한다. 음악은 귀로 들리는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낸 것이고, 그림이나 조각은 눈에 보이는 모습들을 흉내 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통적 흉내 내기’와 ‘인지적 흉내 내기’는 그 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소통적 흉내 내기’는 ‘즉각적 흉내 내기’라면 ‘인지적 흉내 내기’는 ‘기호(記號)적 매개(Semiotic Mediation)’가 포함된다. 인지적 흉내 내기가 한 차원 더 간접적 형태라는 이야기다.

▎리히텐슈타인의 <소 연작(Bull Series, 1973년)>. 이때의 소 그림에는 곡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실제 사물’이 아닌 ‘사물의 표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우리의 뇌 안에서 재현되는 ‘표상’은 반드시 실제의 대상을 언어, 상징 등을 통해 기호화한 결과다. 우리 뇌 안에 소나 돼지를 직접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시 시대 들소를 잡은 사냥꾼들은 자신들이 잡은 소의 수를 기억하기 위해 활의 한 귀퉁이에 칼로 표시를 했다. 이 표시가 내면화되어 기억,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이 같은 기호적 매개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다. 외부 대상을 ‘기호(記號)’를 통해 뇌에 간직하는 방식과 그림으로 대상을 종이 위에 간직하는 방식은 그 원리가 동일하다. ‘표상’과 ‘재현’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단어의 학술적 표현은 동일하다. ‘representation’이다.

기호학적 매개에 기초한 ‘생각’은 ‘그림’이고, 즉각성과 현재성에 기초한 ‘소통’은 ‘음악’이다. 발생학적으로는 음악이 먼저다. 비고츠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소통’이 문화적으로 내면화된 결과가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글로벌하게 공유 가능하지만, 미술은 한 박자 처지게 세계화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요상한(?)’ 손가락질을 하면서 흑인풍의 힙합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의 춤과 음악을 지구 반대편의 남미 청소년들이 따라 하며 열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음악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아주 쉽게 공유된다. 발생적으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흉내 내기’라는 소통의 욕구, 소통의 본능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화는 조금 다르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장난 같은 그림, 원숭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그림이 왜 훌륭한지 ‘그림을 전공한(!)’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토록 비싼 값에 거래되는지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현대회화의 본질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책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4. 미술은 음악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두스부르흐의 <소(de koe, 1917년)>. 소의 형태가 남아있지만, 직선과 사각형으로의 추상화 경향이 분명해 보인다.(좌) / 두스부르흐의 <소>. 추상화가 극에 달해 더 이상 소의 형태를 떠올릴 수 없다. 피카소의 소 추상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두스부르흐의 소에는 직선과 사각형만 있다. 피카소의 소에는 여전히 곡선으로 된 소의 형태가 남아있다.
오늘날 ‘미술평론가’와 ‘음악평론가’의 위상은 완전히 다르다. 음악을 감상하는 데는 평론가의 전문적 도움이 그리 크게 필요하지 않다. 들으면, 좋은 음악인지 싫은 음악인지가 바로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평론가의 해설이란 주로 작곡가나 연주자의 이름을 언급하며 음악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정도다. 음악평론가의 평가가 음반 판매량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다. 그러나 미술은 다르다. 미술평론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들은 도대체 미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겁먹기 일쑤인 일반인에게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지 규정해준다. 매일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음악에 비해 미술은 마음 크게 먹고 갤러리에 방문하지 않는 한,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물론 평판이 높은 외국의 평론가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우, 미술시장의 규모로 인해 미술평론가에게 그리 큰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미술시장이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천정이 낮아서다.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천정도 낮고, 벽의 크기도 옹색하다. 그림을 걸기에는 벽이 너무 작고 낮다. 제대로 된 명화 달력 하나 걸기도 벅차다. 한국의 미술시장이 확대되려면, 주거공간부터 바뀌어야 한다. 천정도 높아져야 한다. 도무지 그림 걸 벽이 없으니, 그림을 살 사람이 없다. 그저 미술관 컬렉션이나 재테크를 위한 미술품 구입이 대부분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스스로 눈앞에 있는 미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림이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다. ‘제가 그림을 잘 몰라서…’.

그림을 잘 모른다면서 유명그림의 가격은 줄줄이 꿰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그림 이야기는 ‘그림의 가격’ 이야기다. 그림 내용에 대해 달리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주로 그림 가격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림 가격의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비싼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해가 어려울수록 이야기는 길어진다. 한국남자들이 모여 앉으면 군대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도대체 청춘의 그 귀한 시간에 땅 파고,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하며 보낸 합당한 이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림 가격의 결정 또한 전적으로 갤러리 운영자들과 유명 미술평론가에 의해 결정된다. 인상주의 이후로 엄청나게 생겨나는 미술계의 무슨 무슨 파(派)의 결성 배경을 살펴보면 대부분 화랑주인, 미술평론가, 화가, 대학의 미술교육 담당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던 권력다툼의 결과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각 도시마다 결성되었던 ‘분리파(分離派; Secession)’는 괜히 ‘분리파’가 아니다. 기존의 권력 시스템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의미에서 ‘분리파’다.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은 기존의 시스템을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갤러리 운영자와 미술평론가가 미술시장을 좌지우지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그저 소처럼 끌려 다닌다. 한국의 경우, 외국의 유명한 누군가가 어떤 그림을 비싼 가격으로 샀다고 하면, 해당 작가의 그림 가격은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작가들의 느닷없는 출세는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황당한 거래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음악에 비해 미술가의 천재성, 비극적인 운명, 정신병으로 인한 고통과 같은 전설이 끊임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미술작품의 가치를 달리 평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와 신화로 유지되는 미술시장이다. 그래서 음악가에 비해 미술가들 중에 ‘비극적인 인물’, 혹은 ‘또라이’에 관한 신화가 많은 것이다.수학적 원리로 창조된 ‘하모니’


▎리히텐슈타인의 <소 연작(Cow Going Abstract, 1982년)>. 10년 간격을 두고 그려진 이 소 그림에는 곡선은 완전히 사라졌다.
예술가의 천재성에 대한 신화, 고통스러운 예술가의 삶에 대한 전설과 이 어처구니없는 미술시장의 평가시스템은 동전의 양면이다. 개인의 창조성 차원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는 미술이라는 예술장르의 특성 때문이다. ‘똑같이 그리기’가 미술작품의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일 때는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렌즈, 사진기와 같은 온갖 광학기술이 개발되고 누구나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똑같이 그리는 미술가들’의 설 자리는 없어졌다. ‘정확한 재현’이라는 미술의 오래된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사진기보다 정확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는 없다.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한 돌파구 찾기는 마침내 음악을 흉내 내기로 결정한다. 음악은 대상을 재현할 필요가 없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악보 위에 음표를 그려 넣어 창조하는 음악은 자체 완결구조를 갖는 장르다.

음표는 ‘온음(Ganze Note)’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둘로 나누면 ‘2분 음표’가 되고, 이를 또다시 나누면 ‘4분 음표’, ‘8분 음표’, ‘16분 음표’ 등으로 계속 나뉜다. 이렇게 수학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음의 길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면 ‘리듬(Rhythm)’이 되고 음의 높낮이를 가지고 조합하면 ‘멜로디(Melody)’가 된다. 높이가 각기 다른 세 개 이상의 음들이 모이면, 각 음들 사이의 간격을 통해 ‘하모니(Harmony)’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음들의 수직과 수평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리듬’, ‘멜로디’, ‘하모니’는 지극히 수학적이다. 음악은 외부세계의 재현과는 아무 상관없는, 수학적 구성원리를 가진 예술이라는 이야기다.


▎자동차 장난감.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아기는 ‘엄마’ 다음으로 ‘자동차’와 관련된 단어를 배운다. 독일에서 자란 내 큰아들은 ‘엄마’ 다음으로 ‘아우토(Auto)’와 ‘폴리차이 (Polizei)’를 배웠다. 독일 경찰이 강력한 이유는 당연하다.
시작은 칸딘스키였다. 1910년, 그는 자신의 추상화 이념을 음악과 연결시켜 조목조목 서술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ber das Geistige ni der Kunst)>를 발표한다. 바그너·드뷔시·슈만·쇤베르크 등의 음악가를 언급하며, 칸딘스키는 재현할 대상이 없는 음악의 자유로움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음악을 모방하여 회화가 가야 할 방향에 관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음악의 소리는 영혼에 이르는 직접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다. 음악의 소리는 반향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음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랑, 오렌지색, 빨강은 기쁨과 풍요의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표현한다.’(들라크루아, Delacroix) 이 두 개의 인용문은 전체 예술, 특히 음악과 회화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회화는 ‘통주저음(Generalbaß, 通奏低音)’을 가져야 한다는 괴테의 생각은 음악과 회화의 이처럼 분명한 연관성에 기초해 만들어졌음에 분명하다. 괴테의 이 같은 예언자적 주장은 오늘날 회화가 처한 상황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회화가 자신이 가진 수단을 통해 추상적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순수한 회화적 구성(Komposition)에 도달하게 되는 길의 출발점이 된다. 이 같은 구성에 도달하기 위해 회화에는 두 가지 수단이 제공된다. 1. 색, 2. 형태.”

음악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음악을 음표라는 기본 단위를 가지고 리듬, 멜로디, 하모니를 표현하듯, 회화도 색과 형태를 가지고 대상의 재현과는 무관한, 독자적인 세계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에게 보낸 편지에서 칸딘스키는 회화에서 사용되는 선이 대상의 재현과 무관하게 사용되어도 그 선 자체가 주는 느낌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글자가 그 ‘단어의미’와 상관없는 글자의 형태만으로도 사람에게 독특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듯, 회화에서 사용되는 선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적 구성을 모범으로 하는 추상회화의 가능성에 대한 칸딘스키의 주장은 유럽 곳곳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5. 두스부르흐와 ‘데 스틸(De Stijl)’ 운동


▎1920년대의 두스부르흐. 그는 가명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음이 사후에 밝혀졌다.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글을 이 다양한 가명으로 잡지에 기고했다. 그의 천재성은 다들 인정하지만, 그의 성품에 관해 긍정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근대 회화의 위기를 유럽의 거의 모든 화가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두스부르흐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13년 추상주의에 관한 칸딘스키의 주장을 접한 두스부르흐는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독자적으로 추구한다. 앞서 소개한 ‘소그림 연작’이 바로 이때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두스부르흐는 제대 후, 잡지사에서 일하다가 자신보다 여덟 살 위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몬드리안 또한 칸딘스키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칸딘스키가 음악에서 추상회화로의 탈출구를 찾고자 했다면, 몬드리안은 수학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수학자 마티외 스훈마케르스(Mathieu Schoenmaekers, 1875~1944)였다. 몬드리안이 자신이 추구하는 추상회화의 세계를 ‘신조형주의(Le Neo-Plasticisme)’라고 불렀다. ‘신조형주의’라는 용어는 스훈마케르스가 만든 ‘신조형(Nieuwe Beelding)’에서 따온 단어다.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의 원칙으로 원색만을 사용한 것도 스훈마케르스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우주에는 노랑·빨강·파랑만이 존재한다고 스훈마케르스는 주장했다. 노랑은 수직선이고, 빨강은 수평의 창공을 표현하는 색이며, 빨강은 노랑과 파랑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수직과 수평으로 구성되는 우주의 근본원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완전히 상반되면서 근본적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힘의 수평선이다. 수평선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적이다. 다른 하나는 수직선이다. 수직선은 태양의 중심에서 시작되는 광선의 완전히 공간적인 운동이다.”

노랑·빨강·파랑의 삼원색과 수평선과 수직선, 혹은 이 수직과 수평의 조합인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몬드리안 특유의 ‘신조형주의’는 이처럼 스훈마케르스의 ‘수학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칸딘스키의 음악적 구성원리를 추구하는 추상회화에서 출발한 두스부르흐가 이 같은 몬드리안의 수학적 신조형주의에 그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음악 역시 음의 수직적, 수평적 결합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의 구성원리가 수학적 원리에 따른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 또한 수학자 피타고라스다. 아울러 근대 음악을 완성한 바흐의 대위법은 철저하게 수학적 원리에 기초한 ‘벽돌쌓기’로 평가된다. 음을 수학적 계산에 따라 벽돌처럼 쌓아나가는 방식이라는 이야기다.

네덜란드의 데 스틸 운동은 회화적 창조의 ‘구성단위’를 음악처럼 명확히 해서 순수추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새로운 시기가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음악처럼 미술에도 ‘편집의 단위’를 명확히 하고, 편집의 원리를 모색하는 ‘에디톨로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두스부르흐와 몬드리안은 의기투합하여 1917년 ‘데 스틸(De Stijl)’이라는 예술혁신운동을 조직한다.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가 설립되기 2년 전이다. 아직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이기 때문에 중립국을 표방했던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러나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은 전쟁 이후에 다가올 새로운 사상과 변화를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었다.‘데 스틸’은 ‘양식(style)’을 뜻하는 독일어 ‘der Stil’에서 따온 단어다. 이 이름은 1860년 독일의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 1803~1879)가 발표한 <기술적, 구조적 예술에서의 양식 혹은 실용 미학(Der Stil in den technischen und tektonischen K nsten oder Praktische sthetik)>이란 책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한 ‘양식’의 구체적 의미는 ‘양식(der Stil)이란 특수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것’이라는 스훈마케르스의 정의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스부르흐의 <반(反)구성>’.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가 수직과 수평에 집착하고 있다며 비판하며 두스부르흐는 ’대각선‘을 변화와 발전을 구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몬드리안은 데 스틸 운동의 이론과 구체적 작업을 담당했고, 두스부르흐는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 이듬해인 1918년, 두스부르흐와 몬드리안 이외에 화가인 빌모스 후사르(Vilmos Husz r, 1884~1960), 바르트 판 데르 레크(Bart van der Leck, 1876~1958) 등과 건축가인 헤리트 리트펠트(Gerrit Rietveld, 1888~1964), 로베르트 판트 호프(Robert van’t Hoff, 1887~1979), 야코뷔스 아우트(J.J.P. Oud, 1890~1963) 등은 잡지 ‘데 스틸’ 2호에 게재된 선언문에 함께 서명한다.

선언문에서 이들은 회화에서 ‘개별적인 것(das Individu elle)’과 ‘보편적인 것(das Universelle)’이 대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개별적인 것’은 낡은 시대의식이며, ‘보편적인 것’은 새로운 시대의식이라고 강조한다. 자신들이 추구할 ‘새로운 예술(Die neue Kunst)’은 이제까지 억눌려왔던 새로운 시대의식, 즉 보편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선언한다. ‘개별과 보편의 이원론’을 극복한 균형론을 주장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데 스틸 운동의 본질은 이제까지 억압되었던 보편적인 것을 적극 추구하는 데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창조적 역량에 기초하는 근대 예술관의 부정을 의미한다.

보편적인 것의 부활은 극단의 추상주의적 형태언어를 추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여겼다. 극단의 추상주의적 형태언어란 모든 색을 빨강·노랑·파랑의 3원색과 흑백으로 환원하고, 구성은 수직과 수평만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억압되어왔던 보편성이란 형태와 색상의 극단적 조형원리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연의 우연적 형태인 곡선은 부정된다. 오로지 명료한 직선만을 사용한다. 언제든 어디서든 동일하게 반복할 수 있어야 보편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라고 주장한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통찰은 탁월한 것이었다. 두스부르흐는 후일 자신이 만든 잡지 <데 스틸>의 이름을 원래 ‘직선(The Strainght Line)’으로 하려고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철도는 직선이다. 신은 곡선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직선으로 신이 창조한 세상을 바꿨다. 철도가 시작이다.
대각선으로 변화와 역동성을 실험하다


▎최초의 추상화로 여겨지는 칸딘스키의 무제의 수채화. 이는 1913년에 그린 <구성 7>을 연습한 것으로 보인다. 칸딘스키의 추상에는 ‘곡선’이 계속 존재한다. 반면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추상화에는 ‘곡선’이 사라지고, ‘직선’만 살아남는다.
직선의 가장 대표적 형태는 철도다. 인간이 창조해낸 근대 산업의 가장 위대한 생산물이다. 산이 막히면 터널을 뚫어 연결했다. 강으로 막히면 다리를 세워 연결했다. 곡선의 자연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직선으로 개조되었다. 근대 사회은 이렇게 직선으로 건설된 것이다. 당시 인간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던 철골과 유리 건물 또한 직선의 조합이었다. 직선은 인간의 창조영역이다. 곡선으로 세상을 창조한 신처럼, 인간들도 직선으로 자신들의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반복 가능한 것’은 언제든 ‘예측 가능한 것’이고 ‘통제 가능한 것’이라는 과학발전에 기초한 근대 세계관이 예술영역에도 이렇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예술의 근본을 바꿔놓겠다는 웅대한 포부로 시작한데 스틸 운동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선언문에 서명한 동료 대부분은 바로 데 스틸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두스부르흐의 독단적 성격 때문이었다. 동료들이 떠나면 두스부르흐는 바로 자신의 이념에 동조하는 다른 동료들로 채웠다. 데 스틸의 구성원은 수시로 바뀌었다.

두스부르흐와 몬드리안의 결별도 극적이었다. 두스부르흐가 느닷없이 ‘대각선(diagonal)’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1923년부터 두스부르흐는 수직과 수평에 대한 몬드리안의 원칙고수를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는 수직과 수평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변화의 원동력이 되는 ‘대립’과 ‘불균형’, 그리고 이를 통해 일어나는 ‘역동성’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이때부터 두스부르흐는 대각선을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성의 근원적 형태로 여기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여 실험하기 시작한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Schwarze Quadrat)>.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과는 확실하게 대립하는 그림이다. 말레비치의 회화는 ‘기하학적 추상’이라 불린다.
비슷한 시기에 두스부르흐는 자신들보다 앞서 추상회화의 다음 단계를 모색하던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 vim)’ 예술가들과 접촉하며 자신의 생각을 넓혀나갔다.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겪은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Russian avant-garde)’로 불리는 당시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움직임은 희한한 단체이름으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절대주의(Suprematism)’, ‘미래주의(Futurism)’, ‘광선주의(Rayonism)’,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 등등. ‘구성주의’도 그중 하나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폭발적인 시도가 일어날 당시, 칸딘스키도 모스크바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뮌헨에서 ‘청기사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러시아와 독일은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의 문화예술기관에서 주도한 문화예술연구소 ‘인후크(INKhUK)’ 설립에 적극 관여하여 자신의 추상주의를 구체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비정형적 추상’은 심리주의, 혹은 정신주의에 기초하였기에 혁명의 유물론적 이상을 구현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비난받는다.

이때, 칸딘스크의 ‘표현적 추상(expressive Abstr aktion)’에 대립되는 ‘기하학적 추상(geometrische Abstraktion)’을 들고 나온 이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다. 결국 칸딘스키의 ‘곡선적 추상주의’가 말레비치 등의 ‘직선적 추상주의’에 밀려나고 만다. 소비에트의 현실과 자신의 예술관이 어울릴 수 없음을 깨달은 칸딘스키는 1922년 6월 그로피우스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선생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스부르흐는 말레비치와 더불어 러시아 구성주의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이었던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1890~1941)와 긴밀히 교류하며 자신만의 ‘요소주의(Elementarism)’를 적극 펼쳐나간다. 자신의 의견과 대립되는 주장이 나타나면 ‘본젯(K. Bonset)’, 혹은 ‘알도 카미니(Aldo Camini)’와 같은 가명을 사용해 잡지에 기고했다. 반대자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에 많은 동조자가 있는 것처럼 조작도 했다. <데 스틸> 잡지를 마치 자신의 개인 홍보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그의 사후에 밝혀졌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두스부르흐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밀어 붙이는 인물이었다. 뛰어나고,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졌지만, 파이닝거의 평가대로 ‘포악’한 사람이었다. 이 ‘어마무시한’ 인물이 ‘예비과정’에서 전횡을 일삼는 이텐에 흔들리고, 바이마르의 극우 정치세력에 공격받고, 경제적 궁핍함을 벗어날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1922년 4월에 도착한 것이다.김정운 -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화심리학(박사)을 전공했다.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교수를 사임한 후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학에서 일본화를 전공, 2015년 수료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 머물며 그림과 저작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에디톨로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등이 있다. <애무> <보다의 심리학>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