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면세점 코엑스점. 쾌적하고 품격 있는 매장으로 인기가 많다. 넓은 규모(4283㎡)를 잘 활용한 소비자 동선(動線)은 이 매장의 백미. ‘도심에서 즐기는 VVIP 쇼핑’이라는 컨셉트에 꼭 맞는다는 호평이 줄을 잇는다.AK 코엑스점이 처음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건 아니다. 2008년 매장을 재단장한 뒤 소비자 반응이 180도 변했다. 코엑스점이 재개장한 2008년 12월 이후 한 달 매출은 리뉴얼 직전 달보다 198% 증가했다.고객은 230%가량 늘었다. 공간 디자인과 인테리어의 무서운 힘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디자인은 김영민 컨티늄코리아 대표의 작품이다. 인테리어 설계·시공은 김영진 킹스맨코리아 대표가 맡았다.이름이 비슷하다. 예상대로다. 두 사람은 ‘다른 게 많은’ 형제다. 성격도, 경영스타일도 다르다. 형(김영민 대표)은 털털하지만 동생(김영진 대표)은 세심하다.형은 신중한 경영을 중시하지만 동생은 다소 공격적이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한 법. 두 사람의 인생 항로는 얼굴만큼이나 쏙 빼닮았다. 무엇보다 외국계 기업의 장수 CEO다. 형은 11년, 동생은 13년째다. ‘외국계 CEO는 파리목숨’이라는 통념을 극복한 용감한 형제다. 약속이나 한 듯 전공을 버리고 디자인 분야에 뛰어든 것도 똑같다.형제의 합작품 AK 코엑스점형은 기계공학 석사를 마친 뒤 디자인을 다시 공부했다. 동생의 전공은 수학통계학이다. 수리 능력은 부친인 수산학원(여주제일 중·고등학교) 김연수(75) 이사장의 유전자를 받았다. 김 이사장은 공인회계사다. 디자인 재능 역시 부친의 DNA가 그대로 이어진 듯하다. 김영민 대표는 “아버지께선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림을 무척 잘 그리셨다”며 “형제가 디자인 계통에서 함께 일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공학도의 운명적 변신 = 김영민 대표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는 글로벌 디자인 기업 컨티늄의 한국인 최초 수석 디자이너다. 세계 3대 디자인상(IDEA·iF Award·Red Dot)을 휩쓸어 디자인 업계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직접 디자인한 유명 제품도 많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옷·모자·장비, 글로벌 시장에 출시된 100달러 랩톱 컴퓨터 등이다. 미국 MIT에서 개발한 랩톱은 저개발 국가 어린이를 위한 PC다. 필립스 휴대전화의 중국·유럽향 휴대전화도 그의 작품이다.하지만 김영민 대표조차 이런 위치에 오를지 예상하지 못했다.20대 초반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디자이너를 꿈꾸지 않았다. 운명이 얄궂은 장난을 칠 때까진 말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수학과 역학에 능통한 기계공학도였다. 미 카네기멜런대에서 학사·석사를 마쳤다.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지도교수와 동기생들은 당연히 박사 과정에 입문할 것으로 봤다. 부모도 그걸 원했다.그런데 그는 ‘운명의 장난’에 홀린 듯 인생의 방향키를 갑작스럽게 틀었다. 돌연 같은 대학 산업디자인학과(3학년)에 재입학한 거다. 주변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석사가 학사로 다시 들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며 뜯어말리는 친구도 있었다. ‘공부한 게 아깝다’는 핀잔도 들었다.◇ 인턴의 도발 = 운명적 끌림은 인턴 시절에 더 강렬해졌다. 대학 4학년 때 그는 세계적 디자인업체 헨리 드라이퍼스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이 회사는 검은색 다이얼식 전화기를 디자인한 곳이다. 그런데 떨어진 업무는 허드렛일뿐이었다. 일주일 넘게 한 일이라곤 제품 모델을 깎은 것뿐이었다.성에 차지 않았지만 인턴 신분인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는 털털하지만 조용한 성격.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오죽하면 자신이 공동 집필한 『미래를 위한 투자, 디자인』의 프로필에 이렇게 썼을 정도다. “컨티늄 대표이사 겸 디자인 디렉터다. 여러 가지를 배우고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18년째 디자인컨설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김영민 대표는 헨리 드라이퍼스의 CEO를 직접 찾아가 작심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제 포트폴리오를 봐주십시오. 디자인 실무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진심은 얼어붙은 부뚜막도 녹인다고 했던가.그의 요구는 선뜻 받아들여졌다. 김영민 대표의 간청을 들은 헨리 드라이퍼스의 CEO는 포트폴리오를 꼼꼼하게 검토한 뒤 디자인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천운이었다.AT&T가 새로 출시하는 PC의 디자인 작업을 옆에서 지켜봤으니 말이다. 그가 ‘산업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맘먹은 것도 바로 이때다. 인턴을 마친 김영민 대표는 대학 졸업 직후 컨티늄에 입사했다.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다. 컨티늄의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책임감도 컸다. 10년가량 걸리는 수석 디자이너에 단 6년 만에 오를 정도로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98년엔 삼성 정수기 디자인으로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레드 닷’을 받았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컨티늄 그룹 CEO의 적극적 후원이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안프랑코 자카이 CEO는 다양한 문화와 경험을 중시했다. 한국에서 날아온 검은 머리의 디자이너 ‘김영민’은 자카이 CEO에게 아시아 문화를 알려줄 적임자였을 게다. 반대로 자카이 CEO의 철학을 아시아에 전파할 메신저로도 적격이었다.김영민 대표가 2000년 컨티늄코리아의 CEO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10년 넘게 CEO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김영민 대표는 ‘욕심 부리는’ CEO가 아니다. 날마다 나오는 ‘성적표’에 얽매이지 않는다.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디자인의 가치”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디자인으로 때론 기업의 컨셉트가 바뀌죠. 사회를 밝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컨티늄과 컨티늄코리아의 경영철학입니다.” 하지만 디자인의 힘을 너무 과신한 것은 아닐까. 디자인으로 기업의 컨셉트를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왠지 지나쳐 보인다. 김영민 대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모엔 샤워기의 사례를 들었다.◇ 누드족과 동고동락 = 김영민 대표가 컨티늄 수석 디자이너로 있던 1998년. 샤워기 제조업체 모엔의 CEO가 찾아와 이렇게 부탁했다. “품질 좋은 샤워기를 만들 수 있도록 디자인해 달라.” 김 대표의 머리는 하얗게 변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샤워 전문가 아닌가. 품질 좋은 샤워기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찾아야 답이 나온다.답을 알아야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 그는 곧바로 물 연구팀(Wet LAB)을 조직했다. 소비자를 손수 찾아다니며 설문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누드족을 섭외해 24시간 관찰했다. 그 결과 뇌리를 스친 ‘뭔가’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다.‘…미국 사람들은 평균 12~13분 샤워를 한다. 뜻밖에도 샤워할 때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물을 피하는 것이다. 면도를 하거나 머리를 감을 때 물을 잠그지 않는 버릇 때문이다. 이를 잘 조절하는 샤워기를 만들면 된다…’.김영민 대표는 물 세기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제품을 디자인했다. 샤워기 머리에 달려 있던 물 세기 조절기를 아래로 옮겼다. 조절기를 만지다 물에 맞는 불편함을 없앨 요량이었다. 이런 디자인으로 출시된 모엔의 샤워기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놀라운 것은 샤워기 제조업체에 불과했던 모엔의 컨셉트가 ‘물을 잘 전달하는 기업’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김 대표는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무형의 뭔가도 변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컨티늄코리아의 구성원 분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회사엔 디자이너만 있는 게 아니다. 전체 인력 중 30%는 심리학·경영학 전공자다. ‘소비자의 요구를 제대로 읽어야 진짜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김 대표의 소신에서다.
형은 낭만, 동생은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