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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으로 맺은 우정과 나눔 

김재찬 박사·피오 보파 대표 

조용탁 이코노미스트 기자
이탈리아 3대 와이너리 오너 … 와인 자선경매 열어 서울대에 고가 의료기기 기증

▎김재찬 박사(왼쪽)와 피오 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앞에 놓인 것은 피오 대표가 서울대에 기증한 뇌산소포화도측정기.



7월 5일 오전 8시 서울대 어린이병원. 벽안의 노신사가 의료기기 ‘뇌산소포화도측정기’를 흐믓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탈리아 3대 와이너리인 피오 체사레의 피오 보파(59) 대표다. 132년 전통의 피오 체사레는 안젤로 가야, 프레스코발디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3대 와인 명가다. 그는 서울대 어린이병원에서 열린 의료기기 기증식에 참석하려고 전날 밤 한국에 도착했다. 피오 대표가 기증한 의료기기는 환자의 뇌 속에 산소가 얼마나 있는지 측정하는 3000만원대 장비다.

피오 체사레의 4대 경영자인 피오 대표는 오랫동안 가문이 모아온 빈티지 와인을 팔아 기금을 마련했다. “와인이 아깝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와인의 존재 이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죠. 아픈 어린이를 돕는 일에 저희 와인을 사용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안면기형 환자 도우며 우정 깊어져

이탈리아 와이너리 대표와 서울대 어린이병원을 이어준 인물은 서울 강남의 유명한 치과의사 김재찬(60) 박사다. 두 사람이 연을 맺은 연결고리는 와인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와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자 피오 대표도 한국을 자주 찾았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어느 와인 행사장에서 제 아버지가 만든 와인을 음미하는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1954년산 피오체사레였지요. 빈티지 와인을 조용히 즐기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찾아가 인사를 했지요. 그가 김재찬 박사였습니다.”

김 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와인 고수다. 서울대 치대 출신의 김 박사는 1984년 일본 유학시절 와인을 처음 접했다. 와인의 그윽한 향과 맛에 반한 김 박사는 30년간 꾸준히 와인을 공부하고 수집했다. 해외에 나갈 때면 지역의 와인을 미리 알아본 다음 골목을 뒤지며 와인을 모았다. 그는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어 신문과 잡지에 맛집 기행을 연재한 미식가이기도 하다.

당시 빨간 나비 넥타이를 맨 김 박사가 나타난 레스토랑의 주방은 비상이 걸렸다. 김 박사는 “와인을 고를 때 브랜드나 가격이 아닌 자신의 취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셀러에 두고 자랑할 생각 말고 누구와 언제 마실지 생각하며 와인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와인 전문가와 와이너리 오너는 의기투합했다. 피오 대표는 김 박사의 해박한 와인 지식과 음식 문화를 바라보는 식견에 감탄했다. 이후 피오 대표는 일본 도쿄에 들를 때마다 김 박사에게 연락했다. 김 박사도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시간이 나면 피오 대표가 한국으로도 건너왔다. 그는 김 박사를 종종 이탈리아 피에몬테로 초대했다. 피오 체사레 와이너리를 직접 소개했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며 우정을 쌓았다.

와인으로 이어진 우정은 김 박사가 열정을 쏟는 ‘동그라미’(선천성 안면기형 환자를 돕는 재단법인)를 통해 한층 깊어졌다. 동그라미는 1996년 김재찬 박사와 박영선 남포교회 목사, 김석화 서울대 소아성형외과 의사,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 등이 모여 만들었다.

동그라미는 입술이 좌우로 갈라져 ‘언청이’로 불리는 구순구개열(입술입천장갈림) 환자의 무료수술, 특수 우유병 임대, 선천성 안면기형 무료 수술 등의 사업을 벌인다. 김 박사는 해마다 약 1200명의 구순구개열 환자가 태어난다고 말했다. 치료 하려면 세 차례 정도 수술해야 한다. 치료 비용은 200만원 정도가 든다. 동그라미는 지금까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 600여명을 치료했다.

김 박사를 통해 동그라미를 알게 된 피오 대표는 2008년부터 대표 행사인 동그라미 캠프 기금 마련을 도왔다. 안면기형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집밖에 나가길 꺼린다. 동그라미 캠프는 외모 콤플렉스 탓에 집에서 머무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 같은 대형 레저시설에 전국의 장애 어린이와 부모를 초대하는 행사다. 이곳에서 유명 연예인의 공연을 즐기고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마음 편하게 어울릴 수 있다. 보파 대표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사를 지원했다. 지난 5년간 기부 행사가 열리면 고급 와인을 보내 기금 마련을 도왔다.

“그동안 다양한 자선 행사에 참여해왔습니다. 항상 느끼는 일인데,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더 많이 배웁니다. 그래서 나눔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를 풍성하게 해주니까요. 더욱이 우리 와인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준다는 사실에 와이너리 대표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피오 대표는 동그라미 설립자중 하나인 서울대 어린이병원의 김석화 교수와도 친분을 쌓았다. 어린이 병원에 필요한 의료기기가 있는데 자금이 부족해 구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바로 뇌산소포화도측정기다. 그는 김재찬 박사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다가 아예 한국에 와서 기부 행사를 열기로 했다. 4월 18일 서울 청담동의 레스토랑 ‘에오’에서 와인 경매가 열린 배경이다.

와인 8병 2200만원에 낙찰

그동안 와인을 많이 보내긴 했지만 한국에서 직접 와인 자선 경매 행사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오 대표는 1989년 빈티지 바롤로 와인을 비롯해 1981년 피오 체사레 설립 100주년 때 공개한 1974년 빈티지 바롤로 와인 등 희귀한 와인 8종을 이탈리아에서 직접 들고 왔다.

행사는 성황을 이뤘다. 와인 파티 겸 경매 행사에 참석한 30여명은 새로운 와인이 소개될 때마다 환호하며 경매 금액을 올렸다. 와인의 낙찰가는 평균 20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경매 최고가는 370만원으로 1974년산 빈티지 바롤로 와인이 기록했다. 그는 “여덟 병의 값을 다 합치면 2200만원 쯤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어린이병원은 그가 기부한 금액으로 뇌산소포화도측정기 1대를 구입했다.

7월 5일 기부 행사를 마친 피오 대표는 오후 1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10월에 한국에 다시 온다. 이탈리아 주요 와이너리 오너가 참석하는 와인행사가 서울에서 열린다. 피오 대표는 벌써부터 다음 기부 행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와인 패밀리의 참여를 유도해 기부 행사의 판을 더 키울 생각이다. 병원에 고가의 의료기기를 기부한 독지가를 이탈리아의 주요 와이너리로 초대해 특급 대접을 할 계획도 있다.

“와인 애호가는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어 즐겁고, 저희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치료 받는 이는 몸이 건강해지고, 의사 선생님은 더 쉽게 환자를 치료할 수 있어 좋습니다. 더 좋은 와인을 더 많이 들고 와서 자선 행사를 준비할 생각입니다.

1198호 (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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