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준비제도(Fed, 이하 연준)는 미국의 중앙은행이다. 그러나 6월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발언 이후의 연준이 단지 미국만의 중앙은행이 아닌 전 세계의 유동성 흐름을 관장하는 기관임을 뼈저리게 각인시켰다.미국 법률이 정해 놓은 연준의 책무는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이다. 연준은 이 책무에 충실하고자 매달 850억 달러의 통화를 시장에 공급해 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미국의 9월 고용지표는 연준이 ‘완전고용’ 책무 달성에 실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연준은 ‘물가안정’ 목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1% 부근으로까지 떨어져 연준이 설정한 2%에 크게 못 미치며 디플레이션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애초 연준은 9월부터 양적완화를 줄여 나갈 것으로 예상돼 왔다. 그러나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를 겪으면서 금융시장은 양적완화 축소 시기가 내년 3월로 미뤄질 것이라고 본다. 9월의 부진한 미국 고용회복세는 시장의 이런 기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연준은 단지 양적완화 축소를 연기함으로써 완전고용과 물가안정 책무를 모두 달성할 수 있을까.최근 미국의 경제와 고용회복세 둔화는 기존 양적완화 정책의 효과가 체감(遞減)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연준은 양적완화 축소를 미루기보다는 오히려 기조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통화정책 목표와 수단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일반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 실업이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오쿤이 입증한 법칙이다. 지난해 3월 버냉키 의장은 오쿤의 법칙을 인용해 “실업률을 1%포인트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경제성장률이 잠재 수준보다 2%포인트 더 높아야 한다. 따라서 미국의 잠재성장률이 2%라고 가정할 경우 실제 성장률은 연간 4%의 속도로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초과 성장을 버냉키 의장은 ‘탈출속도(escape velocity)’라고 칭했다.
10년 전 버냉키가 일본에 권고하기도이 같은 결함은 미국 연준 역시 비슷하게 노출했다. 연준은 ‘고용 시장이 상당한 회복을 보일 때까지 양적완화를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6월 들어서 돌연 양적완화 축소·종료를 시사했다. 자산시장 거품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연준의 목표는 어느새 금융안정으로 돌변했다.경제 주체들은 연준이 상황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목표를 변경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존의 목표가 달성되기 이전에라도 언제든지 부양책을 중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정책 실패를 야기하는 이런 변덕을 두고 ‘중앙은행의 동태적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 문제’라고 부른다.현재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을 이끌고 있는 마크 카니 총재는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시절 “중앙은행이 스스로 자신의 손을 묶어야만 동태적 비일관성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바다의 요정 사이렌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은 오디세우스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고도의 부양정책을 계속 제공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만 경제 주체들은 비관을 버리고 지갑을 열 것이다.벤 버냉키 의장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다. 훈수를 둬본 적은 있지만 스스로는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10년 전인 2003년 5월, 당시 연준의 이사였던 버냉키는 디플레이션에 허덕이는 일본을 위해 도쿄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파격적인 정책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물가상승률’ 목표제를 버리고 ‘물가수준’ 목표제를 도입하라는 게 요지였다. 예를 들자면 물가 상승률 2%를 목표로 할 게 아니라 현재 100인 물가지수를 102로 끌어 올리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얘기 같지만, 둘 사이에는 심대한 차이가 있다는 게 버냉키 당시 연준 이사의 설명이었다.예를 들어 내년 물가지수가 100인 경우 현재 목표대로라면 일본은행은 2년 뒤 물가지수를 102로 높여놔야 한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년 뒤 물가지수는 104.04가 돼야 한다. 그런데 만약 2년 시한 내에 목표 달성에 실패해 물가지수가 101로 오르는데 그쳤다고 치자.그리고 나서 1년 뒤에 결국 물가상승률 2%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물가지수는 103.02로 오르는데 그친다. 그럼에도 첫 2년 동안의 미달성분은 잊혀진 채 뒤늦게나마 목표 달성에 성공한 것으로 일본은행의 실적은 치장되기 쉽다. 이것이 현행‘물가상승률’ 목표제의 결함이라고 버냉키 당시 연준 이사는 지적했다.버냉키 당시 이사의 조언대로 ‘물가수준’ 목표제를 도입한다면 이런 치장이 통할 수 없다. 3년 뒤에 목표로 한 물가수준이 104.04로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물가수준’ 목표제 아래에서라면 일본은행은 2년 간의 부진을 벌충하기 위해 3년차에는 물가상승률을 3%로 끌어 올려야만 한다. 3년차에도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경우에는 4년차에 물가상승률을 더 높이 견인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은행은 통화부양의 강도를 계속 더 높여 나가야 한다. 이 것이 ‘물가수준’ 목표제의 장점이라고 버냉키 당시 연준 이사는 설파했다.버냉키 당시 이사의 ‘물가수준’ 목표제는 최근 들어 ‘명목 국내총생산(NGDP) 수준’ 목표제로 진화했다. 중앙은행 총재 중에서는 지난해 마크 카니 당시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가 앞장서 주창했다. 연준 일각과 월스트리트에서 제법 광범위하게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명목 GDP는 한 나라의 경제규모를 의미한다.올 6월 말을 기준으로 했을 때 미국의 명목 GDP 는 16조6600억 달러 수준이다. 이는 미국의 잠재능력인 17조1000억 달러에 못 미친다. 게다가 미국의 경제규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약 2년간 축소 내지는 횡보함으로써 기존 추세에 비해 경제 기반을 약 2조 달러나 상실하기까지 했다. 만약 금융위기 이전의 명목 GDP 성장추세가 이어졌다면, 지금의 미국 경제규모는 약 19조 달러에 달해야 한다.따라서 만약 연준이 NGDP 수준 목표제를 도입한다면 ‘2015년 말까지 NGDP 수준을 21조 달러로 달성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연준은 명목 GDP 성장률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이 같은 성장률이야 말로 버냉키 의장이 지난해 3월에 말한 ‘탈출속도’다. 만약 연준이 올해 성장률을 의도했던 것만큼 높이지 못했다면 내년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률을 끌어 올려야 한다.이를 위해서 연준은 통화부양 강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 이것이 버냉키 의장이 10년 전 일본은행에 권고한 ‘수준’ 목표제의 강제적 특성이자 장점이다. 만약 연준이 결국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면, 미국 경제규모는 금융위기로 상실했던 기반을 모두 복구할 수 있게 된다.어떤 중앙은행도 시도 해본 적 없어미국의 명목 GDP 수준 목표제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고용회복의 지렛대가 되는 경제성장이 연준의 직접적인 목표로 설정됨에 따라 금융위기로 상실한 일자리 수를 복구할 수 있게 된다. 명목 GDP 수준의 회복은 인플레이션을 의미하기도 한다. 명목 GDP는 실질 GDP와 달리 경제의 실질 성장뿐 아니라 물가가 상승한 효과까지 내포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연준의 부양정책으로 실질 성장률이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물가를 대폭 끌어 올린다면 명목 GDP의 달성은 가능해진다. 명목 GDP 수준 목표제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은 그래서 이 제도가 연준의 이중 책무 즉,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도모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적어도 고용 침체와 디플레이션 위험 중 하나는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두 가지 책무 모두에서 실패하는 일은 없다는 게 이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명목 GDP 수준’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도입되더라도 연준이 쓸 수 있는 정책수단은 지금의 양적완화나 제로금리 장기 유지 정책 말고는 달리 마땅한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목 GDP 수준’은 목표인 동시에 그 자체로 수단이기도 하다는 게 특징이다.카니 총재는 지난해 명목 GDP 설정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이 목표제에서 과거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며, 중앙은행은 과거에 상실한 경제규모 추세를 복구하도록 강제된다”고 말했다. 즉, 명목 GDP 설정 선언은 중앙은행이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우 강력한 부양정책을 펼 것임을 공표하는 것이다. 이에 경제 주체들은 향후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불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그리고 이때 경제주체들은 경제규모 팽창의 이익을 선점하기 위해 투자와 고용을 경쟁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다. 경제 주체들의 이 같은 선제적인 행동은 중앙은행의 부양 부담을 최소화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즉, 이 제도 하에서는 중앙은행이 종전보다 적은 돈을 풀고도 경제 주체들의 자발적 동조를 동력 삼아 목표달성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이런 제도는 지금껏 어느 나라 중앙은행도 시행해 본 경험이 없다. 그렇기에 이 제도에 잠재된 위험이 어떠하며 얼마나 큰 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만약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이는 양적 완화를 능가하는, 역사상 최대의 통화정책 실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고용과 물가지표는 연준이 이런 실험적 제도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약화되고 있다.무엇보다도 연준의 기존 정책수단은 날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 마침 연준은 의장이 교체되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통화정책을 획기적으로 변경하기에 용이한 시기다. 그래서 내년 2월부터 연준 지휘봉을 잡게 될 재닛 옐런 지명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욱 관심이 모아진다.- 국제경제 분석 전문 매체 GlobalMonitor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