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제시하고 대규모 투자 결단 …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 독려
▎10월 28일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린 신경영 20주년 만찬. 이건희 회장이 각 계열사가 업의 특성을 반영해 제작·전시한 신경영 조형물을 살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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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 6월 삼성 핵심 경영진과 해외 주재원 200여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들였다. 그는 당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강조했고, 그 후 삼성그룹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0월 28일 저녁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신경영 20주년 기념 만찬’이 열렸다.‘변화의 심장이 뛴다’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만찬에서 이 회장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임직원의 열정과 헌신을 바탕으로 창업 이래 최대 성과를 이루고 있다”며 임직원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어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년 전 신경영을 선포할 때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혁신에 나설 것을 강조한 것이다.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바꿔선 안 될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말고는 다 바꾸라는 주문이었다. 이 회장은 그래야 “비서실이 변하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이 바뀐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5년 간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10년을(당시는 회장 취임 후 5년이 흘렀을 때였다) 해도 안 되는 일은 영원히 안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래도 삼성 사람들은 잘 변하지 않았다. ‘글로벌 일류기업 삼성을 만든 이건희 경영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SAMSUNG WAY』의 공저자인 송재용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6월 ‘삼성 신경영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삼성 경영진은 사실 마누라만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신경영 초기 삼성의 경영진을 만나 보니 여러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자신의 저서 『초일류로 가는 생각』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가 화두였지만 변화는 생각도 못했고 그 어떤 위기의식도 없었다. 1995년 반도체 메모리의 호경기로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자 삼성그룹까지 버블에 빠져 신경영의 추진은 퇴색돼 갔고, 혁신에 대한 저항이 나타났다.”이 회장은 충격 요법을 썼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전자 관계사 사장단과 전자제품 판매장을 찾아 삼성 TV가 매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게 했다. 경쟁사 제품과 함께 사오게 해 분해를 시켜 삼성 제품이 부품 수가 더 많고 선이 더 복잡한 것을 확인하게 했다. 그제야 사장단이 쇼크를 먹었다.삼성이 만든 무선전화기·카폰·팩시밀리 15만여 대를 쌓아 놓고 해머로 부수게 한 후 거기에 불을 지르도록 시키기도 했다. 불량품 화형식 세리머니였다. 불량이 발생하면 생산 라인 가동을 중단시키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할 땐 이렇게 삼성맨들을 설득했다.“나는 이런 불량률 수준이면 삼성이 망한다고 생각하고 여러분은 라인을 스톱시키면 회사가 망한다고 합니다. 이래 망하나 저래 망하나 망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라인을 세웠다가 회사가 망할 지경이면 사재를 털어서라도 내가 여러분들 봉급 줄 게요.” 불량품 화형식을 치른 경북 구미 공장에서 훗날 모토로라를 제치고 국내 정상에 오른 애니콜이 탄생했다. 애니콜을 계승한 갤럭시는 지난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10년 해도 안 되면 영원히 안 된다이 회장은 신경영을 통해 오너 경영의 진수를 보여줬다. 삼성이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고 반도체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직접 결정했지만 일상적인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위임했다. 전문경영인과 역할을 분담해 공동 경영을 시도한 것이다.이 과정에서 그룹 본사 기능을 하는 미래전략실(옛 비서실)이 오너의 의지를 전달하고 계열사 간 이해상충을 조정했다. 오너, 미래전략실, 계열사 전문경영인으로 이루어진 삼각편대 경영이다. 이런 지배구조를 만드느라 비서실 인력을 감축하고 비서실 권한의 일부를 회수해 계열사 사장들에게 넘기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선대 회장은 경영권의 80%를 쥐고 비서실이 10%, 각 계열사 사장이 10%를 나눠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회장과 비서실이 60%(회장 20%, 비서실 40%), 각 사 사장이 40%를 행사하는 식으로 바꾸겠다.”삼성 출신인 구학서 신세계 회장은 “삼성이 잘나가는 건 이병철 창업 회장 시절부터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책임을 지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삼성 출신은 다른 회사로 옮기고 나면 권한이 절반도 안 되더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한다”고 전했다.삼성 신경영은 한 마디로 질 경영이다. 라인스톱제 도입으로 1993년 삼성의 전자제품 불량률은 전년보다 30~50% 떨어졌다. 2010년 삼성은 미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세계 11위에 올랐다. 현재 삼성은 스마트폰, 디지털 TV, 메모리 반도체 등 26종의 세계 1위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신경영 이후의 삼성 식 경영을 삼성웨이로 명명한 송재용 교수 등은 삼성웨이의 근간으로 세 가지 패러독스 경영방식을 손꼽는다. 삼성은 대규모 조직이면서도 스피디하고, 다각화·수직화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문화돼 있고,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의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독보적인 기업이라는 것이다.삼성이 신경영 후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을 접목한 패러독스 경영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일본식 경영이 이미 삼성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으로서는 아버지 호암 이병철 회장이 만든 일본식 경영 시스템을 마다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식 경영은 나름의 강점이 있어 사실 폐기할 이유도 없었다. 패러독스 경영은 이 점에서 삼성으로서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신경영 전 이미 국내 정상의 기업이었던 삼성엔 이렇게 좋은 유산이 축적돼 있었다. 단적으로 이 회장의 유별난 사람 욕심도 호암의 인재관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암은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발전한 건 남보다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다. 나는 그동안 사람을 찾고 기르는 게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일생의 80%를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느라 보냈다.” 이 거인은 심지어 병마와 싸우다 쓰러질 때까지 삼성종합연수원장을 자처했다.신경영은 참 경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취임 2년 후 반도체 쪽에서 큰 돈이 벌리자 전 계열사의 부실을 털어냈다. 그 덕에 삼성은 경영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엔 관행이었던 밀어내기와 가짜 보험계약도 근절시켰다. 정도경영의 기틀을 마련한 것. 그는 또 취임 초 ‘관리의 삼성’을 타파하려 관리손익을 폐지했고 잘나가는 관리 출신 인력을 일선 현업에 재배치했다. 관리 쪽에서 계열사 뒷다리 잡는 관행을 차단한 것이다.세계 최대 브랜딩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는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396억1000만 달러로 평가했다. 세계 8위로 일본 최고의 브랜드인 도요타보다 2단계 더 높다. 박찬수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삼성이 품질을 강조하는 질 경영으로 브랜드 경영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한다. 브랜드와 품질을 잇는 연결고리가 디자인이다.영원한 화두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디자인 세계의 변방이었던 삼성은 신경영 후 디자인 강국으로 도약했다. 삼성전자의 디자인 인력은 1150명에 이른다.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언한 1996년 이래 16년 만에 8.8배로 늘었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세계 3대 디자인 상인 독일 ‘iF 디자인 어워즈’에서 디자인이 가장 뛰어난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지금 삼성의 화두는 무엇일까?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일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퍼스트 무버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이제 벤치마킹 할 대상도 마땅치 않다. 삼성전자가 거둔 찬란한 성공은 그러나 어쩌면 잠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시장은 항상 새로운 승자를 고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