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정보전자소재 사업 투자 늘려 … 정유 의존도는 낮춰
▎SK이노베이션이 2007년부터 석유개발사업에 참여한 베트남 15-1 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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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집’이란 은어가 있다. 정유사를 일컫는다. 호황기에 해마다 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그간 본업인 정유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 그랬던 기름집 세계에도 최근 변화 기류가 감지된다. ‘더 이상 기름만 팔아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세계 경기침체와 국제 유가 변동으로 정제 마진이 줄면서 이런 고민은 더욱 커졌다. 정유사들은 기존 정유 부문 외에 다양한 사업을 개척해 활로를 뚫고 있다. 국내 양대 정유사인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의 변신을 짚어봤다.‘해외로, 해외로’. 최근 수 년 간 SK이노베이션의 경영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주력인 정유업이 대표적인 내수업종인 걸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수기업보다 수출기업이란 수식어가 어울린다. 정유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전략 덕에 가능했다.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2020년엔 매출 290조원, 영업이익 14조원을 달성해 기술 기반의 글로벌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란 포부를 밝혔다. 그는 2011년부터 석유화학·정보전자소재 부문 등에서 사업 확장과 기술 개발을 이끌며 회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정유업계는 수출·글로벌기업을 지향하는 SK이노베이션의 발걸음에 주목한다. 눈에 띠는 건 파라자일렌(PX) 관련 대규모 증설이다. 파라자일렌은 합성섬유의 기초 원료로 기존 자일렌보다 순도가 높은 제품이다.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의 열쇠가 돼 석유화학 부문에서 차세대 먹거리로 꼽힌다.SK이노베이션은 올 7월부터 SK인천석유화학을 새 자회사로 두고 인천에서 생산기지 확충에 나섰다. 내년 상반기까지 인천에 1조6200억여원을 투자해 PX공장을 새로 만든다. 이는 석유화학 부문에서 수출 경쟁력을 그만큼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다른 자회사인 SK종합화학도 2011년 일본의 최대 규모 에너지 기업인 JX에너지와 합작법인 설립에 합의했다. 이를 통해 내년까지 경남 울산에 연산 100만t 규모의 PX공장을 건설한다. 아울러 글로벌 파트너들과 합작법인 형태로 설립한 싱가포르 JAC(Jurong Aromatics Corporation, 주롱아로마틱스)의 연산 22만t 규모 공장 착공식을 진행하는 등 PX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PX 생산량은 기존 울산공장(80만t) 등을 더 해 282만t이다. 내년에 세계 5위 규모 PX 생산설비를 갖출 계획이다.파라자일렌에 1조6200억 투자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증설한 PX공장에서 고기능·친환경 플라스틱 등 프리미엄 제품을 개발·생산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며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 수출한다”고 설명했다.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73조330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사상 최대치였다. 세계 경제침체로 거의 모든 업계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수출 경쟁력이 강해졌기에 거둔 성과라는 분석이다. 올 3분기 영업이익은 382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6.7% 감소했다. 세계 경기회복이 늦어지면서 제품 수요가 감소했고 정제 마진이 하락한 게 원인이었다. 정유 부문을 책임지며 전체 매출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SK에너지가 부진한 게 영향을 미쳤다. SK에너지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보다 97% 급감했다.이와 달리 화학 부문은 전체 영업이익의 57.1%인 2186억원을 기록하며 정유 부문의 부진을 만회하는 역할을 했다. SK종합화학이 판매물량을 이전보다 늘리면서 안정적 실적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윤활유 부문을 맡는 SK루브리컨츠의 실적도 양호했다. 이런 성적표는 SK이노베이션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탈(脫)정유와 해외 진출 가속화에 있음을 보여준다. 정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대신 사업 다각화로 활로를 뚫는 전략은 당분간 유효할 전망이다.중·대형 배터리 사업은 SK이노베이션이 수 년 째 공을 들이는 새 먹거리다. 올 초 독일 베를린에서 독일의 자동차 부품회사인 콘티넨탈과 합작해 SK콘티넨탈이모션(E-Motion)을 새로 출범시켰다. 4월엔 베이징자동차그룹·베이징전공과 손잡고 중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 공략을 위한 투자의향서를 체결했다. 7월 초에는 합작법인 설립 계약을 했다.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어찌 보면 정유업과는 대척점에 있다. 휘발유로 달리는 자동차 영역을 침범하는 게 전기차다. SK이노베이션이 미래 지향적으로 탈정유 행보를 바쁘게 선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례다.정보전자소재 사업은 이미 이 회사 매출의 한 축을 책임질 만큼 성장했다. 리튬이온분리막(LiBS) 사업은 점유율이 국내 1위, 세계 3위(19%)다. LiBS는 리튬이온전지의 양극과 음극을 차단해 합선을 막는 핵심 소재다. 2004년 세계 셋째로 독자 개발에 성공했다.지난해 LiBS 생산라인 6·7호기를 상업 가동한 데 이어 올해 안에 8·9호기를 확장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스마트폰 등 IT기기 소재로 급성장하고 있는 연성동박적층판(FCCL)의 2호기를 충북 증평공장에서 증설 중이다. 내년 3월 세계 FCCL 시장에서 1위가 목표다.액정표시장치(LCD) 패널의 핵심소재 중 하나인 트리아세틸셀룰로스(TAC) 필름 부문에선 지난해 10월 같은 공장에서 시운전을 마무리하고 상업생산을 눈앞에 뒀다.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석유개발사업(E&P)에서도 호조다. 지난해 이 부문 매출 9732억원, 영업이익 5285억원을 기록했다. 올들어 3분기까지 영업이익 4110억원을 달성해 3년 연속 영업이익 5000억원 돌파를 눈앞에 뒀다. 회사 관계자는 “석유개발사업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4%로 크지 않지만 전체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8%로 수익성이 좋다”며 “2011년 마무리해 국내 자원개발사업 역사상 큰 성과의 하나로 꼽히는 브라질 광구 매각 성공을 발판으로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것”이라고 말했다.석유개발사업 호조, 수익성 뛰어나기존 정유 부문에서도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SK에너지는 성장이 멈춘 내수 시장에서 눈을 돌려 수출국가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종전의 중국·일본뿐 아니라 인도네시아·홍콩·베트남 등의 고정 거래처를 늘리고 있다. 휘발유·경유를 중심으로 고부가가치 경질유 제품 수출에도 박차를 가한다는 전략이다.일련의 행보는 SK그룹이 올 들어 ‘따로 또 같이 3.0’ 경영전략을 출범시키면서 자율·책임경영을 강화한 것과 무관치 않다. SK이노베이션은 기존의 기술원 개념인 GT(Global Technolog y)를 CIC(Company in Company)로 승격해 운영하면서 경쟁사보다 앞선 기술력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