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장인 키우는 ‘현악기의 성지’ 크레모나
‘가족 같은 분위기’로 노사분규 적고 이직률 낮아수제 현악기의 품질은 철저히 개인의 손기술에 따라 판가름 난다. 일종의 영업비밀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과감히 비밀을 포기했다. 수준 있는 현악기 제작자가 늘어나면 다시 한번 도시가 부흥할 수 있으리란 공동의 목표를 먼저 생각했다. 시메오네의 아버지인 지오바타 모라시가 대표적이다. 현직에서 은퇴했지만 그가 지금도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는 건 단순히 세계적인 명장이어서가 아니었다. 지오바타는 악기 제작보다 사람을 키우는 데 더 신경을 썼다. 교사로, 교장으로 오랫동안 학교에 몸 담으면서 제자를 키웠고, 현악기제작학교가 글로벌 교육기관으로 성장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피렌체 등 지방으로 흩어진 공방을 모두 모아 이탈리아 악기제작협회를 만든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였다.지오바타와 같은 제작자들의 노력 덕분에 도시는 점점 활기를 찾아갔고,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몰려왔다. 실력 있는 장인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각국으로 돌아간 유학생들이 크레모나 현악기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스트라디바리의 고향’ 정도로 잊혀질 뻔했던 크레모나는 이렇게 ‘현악기 제조의 메카’로 다시 도약하는 중이다. 인재를 육성해 산업을 키우고, 지역의 부가가치를 창출해 낸 좋은 사례다.유럽의 많은 장수기업의 가진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한다는 점이다. 오랜 연방제 전통에 기인한 것이지만 유럽 장수기업의 상당수는 수도가 아닌 지방을 토대로 발전해왔다. 중소기업의 70%가 소도시 또는 지방에 소재한 독일과 70%가 수도권에 집중된 우리나라는 차이가 크다. 대기업 역시 지방에 본사를 둔 곳이 많다. 당연히 지역 균형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유럽 주요국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소득·인프라 격차가 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가장 큰 장점은 고용의 안정성이다. 특정 기업이 작은 도시 전체를 부양하는 일이 흔하다는 얘긴데 젊은이들도 굳이 나고 자란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독일 서남부 바트 크로이츠나흐에 위치한 렌즈회사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는 회사 이름에 이미 도시명이 들어가 있다.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약 400명의 직원은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다. 경영진은 직원들에게 대기업 못지 않은 보수와 복지혜택을 주고, 직원들은 높은 생산성으로 보답한다. 요제프 슈타웁 사장(CEO)은 “고용을 했으면 퇴직까지 책임진다는 경영 마인드를 늘 가지고 있다”며 “직원들 역시 혜택을 받는 만큼 회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신의가 있다”고 말했다. 경영자와 근로자가 ‘함께 일구는 회사’라는 인식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자연히 노사 분규가 덜하고, 이직률도 낮다. 직원이 곧 주민이니 직원의 만족도가 높아 지면 지역사회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프랑스 에너지 설비 유통업체 르 고엑스(LE GOUEIX)의 프랑소아 꽁땅 회장은 “많은 유럽 중견기업은 이익을 직원들에게 배당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만큼 가족이나 개인생활에 맞게 일하는 시간을 조절해주거나, 재택 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직원의 만족도를 높인다”고 설명했다. 영국 종 제작회사 화이트차펠 벨파운드리의 앨런 휴즈 대표 또한 “실적이 좋아 보너스를 분배할때도 사장이라고 특별히 더 많은 돈을 받아가지 않는다”며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불만이 없어야 직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기업이 존경 받아야 사회의 부(富)도 증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장수기업 - 기술은 진보를 지향하되 경영은 보수적으로유럽 장수기업의 가장 큰 특징은 범접할 수 없는 기술력이다. 제품군이 좁은 대신 오랜 역사 속에 축적된 전통을 그대로 살려 가치를 높인다. 그만큼 비싸지만 품질이 따라주기 때문에 수요는 꾸준하다. 700년 전부터 지금껏 입으로 불어 유리를 가공하는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이탈리아 조명회사 바로비에 앤 토소(Barovier&Toso),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 제작회사 화이트차벨 벨 파운드리, 100년 넘게 진공펌프 한 분야만 개척해 온 독일의 파이퍼 배큐움 등이 대표적이다. 돈 되는 제품으로 영역을 넓힐 만하지만 그들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기술은 ‘진보’를 경영은 ‘보수’를 지향하는 사업방식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제품군을 확대하거나 신사업에 도전하는 일이 흔치 않다. 해외 등으로 판매망을 확대하는 것도 매우 신중을 기한다. 앞서 프랑스 강소기업으로 소개한 르 고엑스(LE GOUEIX) 역시 당분간 해외진출 계획이 없다. 프랑소아 꽁땅 회장은 “여전히 프랑스 내 유통망을 완성하지 않았다”며 “외국에 나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외부 시스템에 흔들리지 않을 준비가 됐을 때 추진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실적에 따라 ‘고무줄 고용’을 하지도 않는다. 여력이 있다고 고용을 한꺼번에 늘리거나, 어렵다고 직원을 자르는 일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소유 구조에 따라 구분하면 주식시장에 상장하지 않은 가족기업 형태가 많다. 이들은 가족기업의 장점을 살려 대대로 물려받은 기업의 가치를 적절히 계승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왔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특히 가족기업이 자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가족중심 문화가 발달한 역사와 비교적 유연한 상속제도가 그 배경이다. 주주들의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고,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비전에 중점을 두는 것도 특징이다.하지만 최근엔 가족경영의 단점도 부각되고 있다. 의사결정 구조가 단순한 탓에 리더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회사가 일순간에 위기를 겪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급변하는 산업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도 있었고, 상속에 따른 분쟁으로 무너진 가족기업도 많았다. 구찌(Gucci)가 대표적이다. 창업자인 구찌오 구찌가 1921년 피렌체에서 가죽 전문매장을 열며 시작된 꾸찌는 당시 상류층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1953년 구찌오의 사망이후 두 아들 알도와 로돌프가 경영권을 50%씩 나눌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손자 세대에 와서 일이 터졌다. 알도의 아들 파울로와 로돌프의 아들 마우리치오가 경영권 분쟁을 시작했고, 회사는 얼마 못 가 재정난에 휩싸였다. 미국 출신 전문가를 잇따라 영입하며 회생에 나섰으나 1993년 결국 중동 투자회사에 지분을 매각했다. 지금도 구찌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창업자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