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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식 혁신의 힘 어디서 나오나 - ‘지식 트라이앵글’로 수평적 협력 

대학-연구소-기업 연계한 ‘유럽판 MIT’ 눈길 ... R&D 투자, 에너지 효율 높여 제조업 혁신 


▎유럽 최고 생산성 공장으로 꼽힌 지멘스의 독일 암벡 공장. 에너지 효율을 높여 제조업 혁신을 이뤘다.
유럽연합(EU)이 2008년 설립한 유럽공과대학(EIT, European Institute of Innovation & Technology)은 ‘유럽판 MIT(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로 불린다. EIT는 유럽의 우수한 인재가 미국 등으로 유출돼 미래 신성장동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탄생했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인재와 우수한 연구기반, 경쟁력 있는 기업이 갖춰졌음에도 미국처럼 그 결과물이 재화나 서비스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 ‘유럽의 역설’ 현상을 타계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EIT가 추구하는 가치는 간단하다. 혁신과 기술이다.

유럽식 혁신은 이른바 ‘지식 트라이앵글’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지식 트라이앵글은 EU가 지난 2005년 헌법을 대체하기 위해 내세운 리스본 협약에서 처음 언급한 개념이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학과 연구소, 기업이 협력해 고등교육과 연구개발 활동을 지원, 사업으로 이어나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각 분야별 활동이 선순환구조를 이룰 때 비로소 혁신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유럽의 역설’ 타개하려는 자구책

이에 EU는 민관협력기구인 ‘지식과 혁신 공동체(KICs)’와 손잡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EIT를 설립했다. 유럽 각국에 분산된 우수한 대학과 연구소, 기업을 모아 만든 EIT의 주요 활동은 혁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다. 프로젝트 주제는 기후변화·헬스케어·정보통신기술(ICT)·원자재·재생에너지로 나뉜다. EU는 EIT에 2020년까지 총 80억 유로(약 9조94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석사 1만명, 박사후 연구원 1만명, 기업 600곳을 만든다는 목표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시장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유럽 전체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EU의 경제혁신지수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스웨덴은 유럽 국가 가운데서도 최고의 혁신 국가로 꼽힌다. 소수의 대기업보다는 창조성과 혁신력을 내세운 강소기업이 경제를 떠받친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전 세계에 북유럽 디자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가구기업 이케아와 무료 인터넷 전화업체 스카이프, 온라인 음악서비스 스포티파이 등 세계적인 혁신기업이 스웨덴에서 출발했다. 혁신은 곧 경제적인 효과로 나타나 새로운 일자리 대부분이 종업원 수 50명 이하인 회사에서 창출된다. 라르스 다니엘손 주한스웨덴대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수용하는 오픈 마인드와 수평적인 조직 문화가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며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과 기업 주도로 혁신을 이룬 게 스웨덴을 혁신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정부는 기업 관계자나 전문가를 대학에 보내 교수와 학생들이 지닌 아이디어가 상업화될 수 있도록 돕는다. 참신한 생각을 지닌 외국인 인재를 받아들여 스웨덴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스웨덴 정부가 주력하는 일이다. 국가기관인 스웨덴 기술혁신청(VINNOVA)과 스웨덴대외홍보처(SI)는 해마다 전 세계를 돌며 ‘이노베이티브 스웨덴’ 전시를 갖는다. IT와 생명과학·생명과학·게임 등 각 분야에서 혁신을 선도하는 스웨덴 기업들과 아이디어를 각국에 소개해 인재를 끌기 위해서다. 이 행사는 지난해 11월 우리나라에서도 개최됐다.

독일은 끊임없는 기술 혁신으로 제조업 강국이 됐다. 연구·개발(R&D)을 거듭해 시장을 넓히고,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각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3위를 차지하는 강소기업을 뜻하는 ‘히든챔피언’이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전 세계 히든챔피언 2700여개 중 절반가량인 1300여곳이 독일 기업이다. 산업 자동화 장비 생산 업체인 ‘에르하르트라이머’는 연간 매출의 10% 가량을 R&D 비용으로 쓴다. 제조 업종인 이 기업은 최근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 소프트웨어 분야가 중요해지면서 투자 비중을 점차 늘렸다. 이 회사 볼프강 메르켈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경제 위기를 오히려 혁신의 기회로 삼아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며 “이미 확보한 기술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넓혀나간 것이 성장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독일 대표 기업 지멘스가 추구하는 혁신은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에너지·발전·전기·전자·산업자동화·도시 및 인프라·헬스케어 등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이 기업은 적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많은 제품을 신속하게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산업 자동화 기술 연구와 지능형 공장 설립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렇게 설립된 독일 암벡 공장은 유럽 최고 생산성 공장으로 꼽혔다. 조 케저 지멘스 회장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멘스가 오랜 기간 살아남을 수 있던 비결은 혁신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사업을 펼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라며 “전력화·자동화·디지털화를 통해 기존 산업의 생산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독일에 비해 경제 규모는 작지만 유럽에서 가장 혁신적인 도시로 꼽히는 암스테르담을 필두로 경제 강소국으로 거듭났다.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작은 나라는 개방형 혁신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한다. 일례로 네덜란드 기업의 협력 단체인 TSM에는 80여개 기업이 속해있다. 각각의 기업은 소규모지만 분야별로 뭉쳐 산업 전체의 혁신 방안을 찾는다. 힘을 합친 덕분에 회원사들은 의료·신재생에너지·ICT·기후변화·지능형 교통시스템·보안 분야에서 전방위 사업을 펼친다. HTSM 회원사들이 하이테크 분야에서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한해 300억 유로(약 37조원)에 달한다. 그중 20억 유로는 매년 R&D에 투자해 지속가능한 혁신을 꾀한다.

일상 속 작은 혁신 이룬 ‘창의적 커뮤니티’

유럽을 바꾸는 혁신은 정부와 기업에서만 이뤄지진 않는다. 작게는 커뮤니티로 불리는 마을 단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밀라노 공대가 출간한 유럽 사회혁신 사례 보고서 ‘창의적 커뮤니티’에서 잘 드러난다. 이 보고서는 유럽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상의 문제점을 개선한 사례가 담겨있다. 네덜란드 아이트호벤의 노인 공동체 ‘아쿠아리우스’는 노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함께 살고 싶지만 프라이버시는 지키고 싶은 노인들이 만든 공동체다. 양로원과 달리 개인 공간과 공동체 공간을 나눠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 내에서 유통·소비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지역먹거리배달서비스(LFLV)도 혁신 공동체로 꼽힌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에지오 만지니 교수는 “공간과 물건을 공유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건강에 좋고 질 높은 식생활을 추구하며 사회구성원이 직접 서비스를 개발하는 등 작은 혁신이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케 했다”며 “아이디어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개인적인 동기를 갖고 일상의 요소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275호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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