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글로벌 파워 피플 (85)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 유대인 대표하는 이스라엘 매파 정치인 

이란·팔레스타인에 강경 정책으로 일관.... 금융·벤처산업 키워 경제적 번영 이끌어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 사진:중앙포토
3월 17일(현지시간) 치러진 이스라엘 총선에서 보수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이 예상을 깨고 낙승을 거뒀다. 리쿠드당은 18일 오전 총선 개표가 99% 진행된 가운데 크네스트(이스라엘 의회) 전체 120개 의석 중 단일 정당으로는 최다인 29석을 확보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총선 직전 이뤄진 이스라엘 여론 조사에서 리쿠드당이 21~23석을 얻을 것이란 예상보다 최대 8석이 더 많은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총선 직후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정 구성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네타냐후 총리는 4선 성공에 유리한 고지를 밟게 됐다. 베냐민 네타냐후(66)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 유대인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이스라엘에서 총리는 최고의 권력자다. 이스라엘에도 대통령이 있지만, 정치적인 실권은 없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매파 정치인으로 이란과 팔레스타인에 강경 정책으로 일관해 국제적인 비난을 사기도 했다. 지난 3월 3일에는 미국 상하 양원 합동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문제 협상을 비난했다. 이번 연설은 오바마의 반대 속에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초청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오바마로서는 미국 정치 자금의 향방을 쥐고 있는 유대인의 대표 격인 이스라엘 총리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북한핵을 보라”며 이란과 아무리 협상을 해도 북한처럼 핵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네타냐후는 사실 이런 강경책으로 정부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에 성공한 총리로 통한다. 금융·벤처산업을 키워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고 있다. 아리엘 샤론 총리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하던 시절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이스라엘을 규제가 적고 경제적 경쟁력이 강한 나라로 키우고 싶어했다. 총리를 맡으면서 계속 추구하는 정책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벤처의 천국이 됐다. 주요 노동조합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몇몇 장관과 맞섰다. 세금 제도도 손보려 했다. 그런 네타냐후는 시장개방과 경쟁력 촉진을 강조하던 유대계 미국인 경제학자 스탠리 피셔를 지난해 초까지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모셨다.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반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네타냐후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복지가 아닌 일을 통한 주민 자립을 추구한다. 유럽발 재정위기로 전 세계 경제 상황이 어려웠던 2009∼2012년 이스라엘 경제는 4년 평균 14.7%의 성장을 구가했다.

2009∼2012년 이스라엘 경제 평균 14.7% 성장

네타냐후는 국회의원이자 국회인 크네셋에서 다수당인 리크루트당의 대표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공공외교 및 디아스포라 문제 장관’을 겸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을 책임지는 자리다. 세계 유대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자리다. 디아스포라는 이산을 뜻한다. 유대인에겐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자신들의 역사적인 고난을 의미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기원전 740년 아시리아에 정복당하면서 고향에서 쫓겨났다가 기원전 722년에 돌아왔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에 유배당한 일이 유명한 일화다.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가 유데아 왕국을 점령해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70년 간 강제 이주시킨 ‘바빌론 유수’도 상징적이다. 페르시아의 키로스 대왕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점령한 뒤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로마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뒤 유대인을 고향땅에서 추방하면서 2000년에 걸친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를 흔히 이스라엘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스라엘 인구는 2014년 공식 추산치가 823만8300명 정도다. 2008년 센서스에서 741만2200명으로 집계됐는데 계속 늘고 있다. 이 중 74.9%인 616만명이 유대인이다. 20.7%인 170만명 정도가 아랍인, 즉 팔레스타인인이다. 이들은 아랍 이스라엘인, 또는 이스라엘 아랍인으로 불리며 기본적으로 병역 의무가 없다. 여기에 인구의 4.3% 정도가 외국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보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이 더 많은 것으로 추산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민 중 많게는 680만명에서 적게는 542만명 정도가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본다.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말한 사람의 숫자다. 지구촌 인구 73억명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지만 영향력은 대단하다. 특히 금융계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벤 버냉키 전 의장과 재닛 옐런 현 의장이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수있다. 뉴욕 월가를 비롯한 글로벌 금융계에서 유대인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학술 분야는 유대인을 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0.25%밖에 되지 않는데도 노벨상 수상자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미디어 분야애서도 유대인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 이 분야 곳곳에서 유대인의 입김이 미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IT)과 같은 창업 분야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구글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는 그중 일부일 뿐이다. 네타냐후가 이런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총리이면서 이들을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공공외교 및 디아스포라 문제 장관’을 맡고 있는 것은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네타냐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미유대인협회 추산에 따르면 전 세계 유대인 인구는 1560만명에 이른다. 조사 주체에 따라 1375만명에서 1820만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된다. 유대인 통계가 이렇게 편차가 큰 이유는 유대인의 혈통 기준은 기본적으로 모계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은 아버지를 따르지만,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어머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라야 유대인으로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스팅]으로 이름을 날리다 2008년 세상을 떠난 할리우드 스타 폴 뉴먼의 경우 아버지는 폴란드와 헝가리계 유대인이지만 어머니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가톨릭교도였다. 자신은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유대사회 내부에서는 그를 유대인으로 치지 않는다. 심지어 유대교를 믿거나 유대 예배당인 시너고그에 정기적으로 가는 사람도 유대교 신자로만 여길 뿐, 엄밀한 의미에서 유대인으로 치지는 않는다. 종교는 유대사회를 이어주는 끈이자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긴 하지만 유대사회가 종교 공동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구조사에서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신고한 사람의 숫자와 유대사회가 보는 유대사회는 조금 다르다. 이 때문에 인구 조사에서 이런 편차가 나오는 것이다. 이 거대하고 힘있는 전 세계 유대사회의 상징적인 수장이 네타냐후 총리인 셈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가문의 상징


▎지난 3월 3일(현지시간)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기 앞서 네 타냐후 총리가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네타냐후 총리 집안은 이스라엘에서 명문 중의 명문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가 아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가문의 상징이다. 그의 아버지 벤지온 네타냐후(1910~2012)는 지금의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저명한 유대 역사학자로 시온주의에 입각한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의 이론적 틀을 마련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벤지온은 네타냐후 총리를 포함해 3형제를 뒀는데 모두 전쟁영웅이다. 중동 전쟁이 발발하면 해외 아랍인들은 혹시 징집될까봐 연락을 끊은데 반해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위기에 빠진 조국의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항으로 달려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는 전설이 아니고 실화다. 바로 네타나후 가문의 젊은 아들들이 이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네타냐후 총리의 형 요나단 네타냐후(1946~76)가 1976년 엔테베 작전을 지휘한 전쟁영웅으로 그 작전에서 유일하게 전사한 전설적인 군인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64년 이스라엘군에 사병으로 자원 입대했으며 뛰어난 능력과 용기로 장교 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공수부대에 지원한 그는 1967년 시나이에서 이집트군과, 고란고원에서 시리아군과 싸웠다. 그는 적진에서 낙오한 전유를 구하기 위해 작전에 들어갔다가 팔꿈치에 부상을 입었다. 6일전쟁이 이스라엘 승리로 끝난 뒤 그는 미국 하버드대에 진학해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967년 이집트군이 이스라엘과 수시로 무력 충돌하자 이듬해 이스라엘의 헤브루대로 학교를 옮겼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군대로 달려가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 초 이스라엘의 최정예 특수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에 지원했으며, 1972년 이 부대의 부사령관에 임명됐다. 이 부대에 있는 동안 그는 시리아군 고위 장교를 납치해 이스라엘군 포로와 교환하는 대담한 작전을 수행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에도 참전해 숱한 훈장을 받았다.

두 번째 3선 총리

네타냐후의 막내 남동생인 이도 네타냐후(63)는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극작가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교육 받은 그는 코넬대를 다니던 중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이 벌어지자 즉시 귀국해 군에 자원 입대했다. 위험한 작전을 도맡아하는 이스라엘군 특수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에서 복무했다. 이후 예루살렘의 헤브루대 의대를 마치고 방사선과 의사가 됐다.

네타냐후 총리도 용기와 재주에선 다른 형제에 뒤지지 않는다. 194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난 네타냐후는 건국 뒤 태어난 세대로선 첫 이스라엘 총리에 올랐다. 1967년 6일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군에 입대해 정예 특수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에 자원했다. 네타냐후는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MIT 슬론경영대학원에서 1977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인재였지만 나라의 부름을 받자 주저하지 않고 목숨을 내맡겼다. 특수부대원으로서 1968년에는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침투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전사들과 싸운 ‘지옥 작전’을 수행했다. 같은 해 팔레스타인 해방전선(PFLP)의 이스라엘 여객기 공격에 보복하기 위해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 대담하게 침투해 10대가 넘는 항공기를 파괴하고 공항을 불바다로 만든 ‘선물 작전’에도 참가했다. 1972년에는 팔레스타인 검은9월단이 납치해 텔아비브 국제공항에 억류돼 있던 밸기에 사베나 항공 571호편에 진입해 테러범을 사살하고 승객을 구출한 ‘동위원소 작전’을 성공적으로 맡았다. 한결 같이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다. 1973년 욤키루프 전쟁에선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렀다. 부대를 이끌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본토에 진입하기도 하고, 시리아 전선에선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해 고위장교를 포로로 잡아아오기도 했다. 대위로 전역하기 전까지 어께에 총탄을 맞은 것을 비롯해 2차례 부상을 당했다. 리쿠드당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유엔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지냈으며, 1996년 총리가 돼 1999년까지 첫 임기를 마쳤다. 선거 패배로 야당 생활을 한 그는 2002년 아리엘 샤론 정권 아래에서 외교장관(2002~2003)과 재무장관(2003~2005)을 지냈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가자지구 정착촌 건설 문제로 샤론과 틀어지면서 끝내 결별했다. 2006년 총선에서 다시 야당이 된 리쿠드당은 2007년 당 대표직을 차지했으며 2009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면서 다시 총리가 됐다. 총리로서 치른 2013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해 총리에 3선을 했다. 그는 초대 총리였던 다비드 벤구리온에 이어 이스라엘 정계에서 총리를 3선한 두 번째 인물이 됐다. 그는 2010년과 2012년 이스라엘 일간지 예루살렘 포스트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1위에 올랐다. 2014년 포브스가 뽑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6위를 차지했다.

1278호 (2015.03.30)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