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글로벌 파워 피플 (87)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 ‘효율’에서 ‘혁신’으로 국정 대전환 

부친 이어 제2 경제성장 노려 ... 규제완화, 사회안전망 확보에도 주력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 사진:중앙포토
리셴룽(李顯龍·63) 싱가포르 총리는 지난 3월 23일 부친인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초대총리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새삼 주목받는 인물이다. ‘리콴유 없는 싱가포르’를 이끌어야 하는 첫 싱가포르 지도자가 됐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현인’으로 불릴 정도로 미래 비전과 혜안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리 초대총리는 지난 1990년에 31년간 재임했던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선임장관·자문장관의 이름으로 정부 정책 자문에 응하면서 실질적인 조타수 역할을 해왔다.

리 총리는 그런 아버지가 만든 나라를 사실상 물려받았다. 세습 논란이 있지만 싱가포르 정부나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이나 정부, 그리고 이제 고인이 된 리 초대총리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능력으로 자리에 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리 총리의 이력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간 보여준 정부 운영 능력은 물론 국가에 대한 헌신성이나 솔선수범과 같은 지도자의 품성에서도 좋은 성적표를 내왔다. 특히 경력을 보면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그는 싱가포르 독립(1962년 영국에서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 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 전인 1952년 아버지 리콴유와 어머니 콰걱추(柯玉芝)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콰걱추는 남편과 리&리 법률사무소를 공동운영한 법률가였다.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을 마치고 케임브리지대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처럼 그도 학업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를 우등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받았다. 학업 성적이 좋다고 쾌적한 사무실에서도장 찍는 일로 경력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19세 때인 1971년 육군에 입대한 그는 장교로 임관해 13년 동안 장기 복무했다. 그의 경력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군대부터 행정부까지 엘리트 코스 밟아

사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을 군복무를 하면서 마쳤다. 특혜라기보다 싱가포르 특유의 인재 양성 과정의 하나다. 상당수 싱가포르 공무원도 이런 방식으로 학업을 계속한다. 입대한 뒤 군 장학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다녔다. 1974년 대학을 졸업(영국 대학은 고교 졸업 뒤 2년제 예비학교를 마치고 입학하므로 3년제다)한 뒤 귀대해 복무를 계속했다. 1978년에는 미국 육군지휘참모학교의 참모학과에 유학했다. 미군의 엘리트 장교 교육과정이다. 1978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는데 미국 유학기간 중에도 군에 소속돼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그는 1981년 싱가포르군 육해공군을 아우르는 합동참모본부 운용부장을 맡았다. 싱가포르 남부의 휴양지역인 센토사섬에서 발생한 케이블카 사고에서 구출작전을 지휘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84년 6월 싱가포르 역사상 최연소로 준장에 진급했다. 그해 9월에 전역해 국방장관 비서로 일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싱가포르에서 군 장기 복무로 장성까지 올랐다는 것은 단순히 험한 일을 맡고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는 수준을 넘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흔히 싱가포르라고 하면 경제정책에 전력을 기울이는 경제국가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의외로 군사국가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임에도 실제로는 동남아시아의 군사강국이다. 군대에 무척 공을 들인다. 군사비로 국내총생산(GDP)의 3.3%, 정부 예산의 25%를 지출할 정도다. 싱가포르군은 전체 병력이 7만1600명에 이르며 90만명의 예비군을 운용한다.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법적으로는 남녀를 막론하고 16세 6개월 이상부터 40세까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국민이 징병 대상이다. 실제로는 남자만 18세 이후 22~24개월 의무복무를 한다. 장교를 지원하면 3년을 복무해야 한다. 싱가포르가 서울 두 배 정도의 국토에 서울의 절반인 547만의 인구를 가졌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국방에 신경을 쓰는지를 알 수 있다.

리 총리는 국민으로부터 ‘리 준장’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군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것은 물론 군에 상당한 인맥을 심었다. 잠시 국방장관 비서를 하던 그는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입당해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전역한 바로 그해 12월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1986년 11월 인민행동당 집행위원에 선출됐으며 그해 12월 통상산업부 장관을 맡으면서 부친인 리콴유가 총리를 맡고 있던 내각에 들어갔다. 1990년 리콴유 초대총리가 물러나고 고촉통(吳作棟) 총리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계속 내각에서 자리를 지켰다. 1998년 금융관리장관을 겸임했으며 2001년에는 핵심 요직인 재무장관을 겸직했다. 그는 재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적극적인 규제완화 정책으로 싱가포르를 금융 강국으로 키우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방과 규제완화, 낮은 세금으로 해외 비즈니스를 끌어들여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리셴룽은 2004년 8월 싱가포르 3대 총리에 올랐다. 리 초대 총리의 뒤를 이어 1990년부터 2004년까지 2대 총리를 지낸 고촉통의 후임이었다. 그해 12월 인민행동당 총재까지 맡으면서 싱가포르 당정의 최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총리에 취임하고 나서도 재무장관 자리를 내놓지 않다가 2007년 1월에야 물러났다. 한국·대만·홍콩과 더불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하나로 불렸던 싱가포르는 2004년 리 총리 집권 이후 새로운 경제전략으로 제2의 경제 도약을 이뤘다.

규제완화로 금융강국 만드는 데 일조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3월 29일 싱가포르대학 문화센터에서 거행된 리콴유(李 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국장에서 리 전 총리에 대한 추도 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그가 취임하기 전인 2001년 세계적인 불황으로 2001년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이 2.2%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자 그해 12월 통상산업부 산하에 경제검토위원회를 발 빠르게 설립했다. 부총리이던 리가 주도한 이 위원회는 싱가포르 경제상황을 포괄적으로 검토해 2003년 21세기 새로운 경제성장 전략을 제시한 보고서를 내놨다. 2003년 2월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싱가포르의 발전을 위한 즉각적인 대처방안과 향후 15년간 적용할 장기적인 전략을 각각 권고했다. 장기 전략의 핵심은 ‘효율’에서 ‘혁신’으로 국가정책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전략은 이렇다. 첫째, 자유무역협정(FTA)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국제·지역적 협력을 확대한다. 둘째, 투자자에게 더 많은 기회와 효율적인 경영환경을 제공해 해외 투자를 유도하고 국제경쟁력을 유지한다. 셋째, 기업가 정신과 창조성을 고양하고, 싱가포르 기업이 도전과 다양성, 실패를 받아들이고 도약하도록 육성한다. 넷째, 싱가포르 성장의 두 개의 엔진인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혁신과 시장개척으로 경제성장을 이룬다. 다섯째,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의 발전에 역점을 두고 인력관리 계획과 훈련계획을 개혁한다. 이밖에 정부가 임금·물가 등 비용 요소들을 적극 통제해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고 기업 부담을 줄이면서 평생교육 및 훈련을 확대하는 즉각 대응방안도 함께 발표했다. 2002년 2월에는 경제 분야에 치우친 경제검토위원회 활동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개발부 산하에 싱가포르 재생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에서는 2003년 7월 국민정체성·규제완화·사회안전망·공동체 등을 다룬 사회·문화·교육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정책이 먹혀 싱가포르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구매력 기준(PPP)으로 했을 때 2014년 추계치로 8만1345달러에 이른다. 명목금액 기준으로는 5만6112달러에 이른다. PPP 기준으로 세계 3위, 명목금액 기준으로 8위의 부자나라다.

싱가포르는 친기업 정책으로 이름 높다. 전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꼽히면서 미국·유럽연합·일본 등 선진국의 글로벌 기업 7000여개가 아시아 지사를 이 도시에 두고 있다. 중국계 기업과 인도계 기업이 각각 1500여개 자리 잡고 있다. 싱가포르 일자리의 44% 정도가 외국 기업이 만든 것이다. 그 덕분에 실업률은 2%에 지나지 않는다.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낮은 세금, 뛰어난 인프라, 우수한 인적자원, 깨끗한 정부와 사회를 갖춘 데다 정부가 쉬지 않고 정책적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짜내고 기업을 지원한 것이 그 배경으로 분석된다.

리 총리의 경제성장 정책 중 눈에 띄는 것이 2004년 카지노를 합법화하고 2개의 카지노 리조트 개장을 허락한 것이다. 관광산업을 진흥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싱가포르에선 카지노 기반의 리조트에 ‘복합리조트(IR)’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일부 대중의 반발을 고려한 완곡어법이다. 싱가포르강과 항구가 만나는 시내 요지에 위치한 마리나 베이 샌즈와 남쪽의 리조트 지역인 센토사 섬에 자리 잡은 리조츠월드 센토사 두 군데가 허가를 받고 2010년 영업을 시작했다. 라스베이거스와 마카오에 카지노 리조트를 건설한 세계 최대의 카지노 운영업체인 라스베이거스 샌즈그룹은 애초 미화 38억5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시해 마리나 베이 복합 리조트의 운영권을 따냈지만 토지 비용 등이 예상을 웃돌면서 개발비만 50억 달러가 넘는 등 총액 80억 달러의 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객실이 2561개에 이르며 카지노 외에도 컨벤션과 일반 관광효과도 상당하다. 직접 고용인원만 1만 명에 이르며 간접 고용유발효과도 2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리조트는 한국의 쌍용건설이 지었다. 마리나 베이 복합 리조트는 2015년 무렵에는 싱가포르 전체 GDP의 0.8%에 해당하는 27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센토사 복합 리조트는 겐팅 싱가포르사가 운영권을 따냈는데 2개의 카지노의 유니버설 테마파크와 세계 최대의 해양수족관을 갖춘 마리나 라이프 파크를 결합했다. 1840개의 객실을 갖춘 이 복합 리조트에는 49억3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이 리조트도 1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호텔과 카지노 영업은 2010년부터 이뤄졌지만 리조트의 최종 완공은 리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카지노산업을 21세기형 서비스산업으로 국가가 주도적으로 키우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행사다. 리 총리는 카지노산업을 유치하는 결단으로 130억 달러 가까운 투자를 받은 것은 물론 2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간접 고용효과까지 따지면 확보한 일자리가 6만개에 가깝다. 싱가포르의 카지노산업 규모는 전 세계 도시 중 마카오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며, 컨벤션산업은 3위로 평가 받는다. 복합리조트는 리 총리가 만드는 새롭게 유연한 21세기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복합리조트 건설로 투자·일자리 늘려

리 총리는 리 초대총리의 별세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워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을 펴왔는데 이는 경제성장이 멈추면 언제라도 도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당제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노동운동의 자유 등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시민의 권리를 제약하는 대신 정부가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해 이를 보상하는 방식이다. 경제성장이 중단되면 언제라도 불만이 터져나올 수 있는 구도다. 이를 지키기 위해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독특한 시스템을 유지, 발전시키고 있다. 성장전략을 앞세워 경제성장을 이루는 관 주도의 경제 시스템이다. 심지어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을 직접 소유,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국영기업 지주회사인 테마섹은 세계적인 투자 큰 손이다. 리 총리의 부인 호칭(何晶·62)은 2004년부터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1280호 (2015.04.1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