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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88]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 DB 외길로 승부 겨룬 ‘실리콘밸리의 악동’ 

1970년대 실리콘밸리 개척자 중 마지막 현역 ... 기술경영으로 경쟁자 물리치고 생존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래리 엘리슨(71) 오라클 회장은 세계적인 부자 기업인이다. 지난 3월 2일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543억 달러의 재산으로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792억 달러), 멕시코의 아랍계 기업인 카를로스 슬림(771억 달러),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버핏(727억 달러)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스페인 의류 브랜드 ‘자라’ 창업자인 아만시오 오르테가(645억 달러)의 뒤를 이었다. 재산 순위가 세계 5위, 미국 3위다.

세계 5위, 미국 3위의 부자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엘리슨은 1977년 오라클 창업 때부터 2014년 9월까지 37년간 CEO로서 경영을 진두지휘했으며,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회장 이사회 의장 겸 최고기술담당(CTO)으로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라클은 2014년 382억7000만 달러의 매출에 109억5000만 달러의 세후 이익의 실적을 올린 세계적인 우량 기업이다. 직원 숫자도 12만2400명이다. 시가총액이 468억 7000만 달러에 이르며 총 자산은 903억4000만 달러로 평가된다. 이런 부자에 이런 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데도 엘리슨 회장의 지명도는 그리 높지 못하다. 오라클은 소비자 상품이 아닌 기업이나 컴퓨터 업체 상대의 비즈니스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오라클은 데이터베이스(DB)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자다.

엘리슨은 실리콘밸리의 초기 개척자 가운데 하나다. 야망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1970년대에 명문 대학을 중퇴하고 실리콘밸리로 와서 컴퓨터를 두들기며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MS를 창업한 게이츠 회장은 IT 분야 일에 몰두하기 위해 하버드대를 중퇴했지만 엘리슨의 사정은 한참 다르다. 그가 대학을 그만둔 것은 실리콘밸리로 가서 창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엘리슨의 복잡한 가정사와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다.

그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시카고에서 자랐다. 1944년 뉴욕시에서 유대계 미혼모와 미 공군 조종사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9개월 때 아이가 폐렴에 걸리자 생모는 양육을 포기했다. 엘리슨은 시카고에 사는 중산층 유대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엘리슨이라는 성은 양부모로부터 얻었는데, 이 유대인 부부가 미국에 도착하면서 처음 상륙했던 뉴욕시의 엘리스 섬에서 따온 것이다. ‘엘리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48세에 성공한 기업인이 돼 생모를 만날 수 있었다.

양어머니는 따뜻하고 자상했으나 양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양부모는 유대인 회당인 시너고그에 빠지지 않고 나가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였으나, 엘리슨은 이를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3세 때 유대교 성인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으며 지금까지 종교가 없다. 스스로 “일부는 종교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회사 이름을 신‘ 탁’이라는 뜻의 오라클로 지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양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명문대인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에 진학했다. 공대와 자연과학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다. 2학년 때 양어머니가 숨지자 기말고사를 보지 않고 학교를 그만뒀다. 캘리포니아 북부에 가서 여름을 지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샌프란시스코만 주변 지역은 히피들의 천국이었다. 현실에서 도피한 사람들이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잠시 시카고에 돌아와 시카고대에 다시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다시 중퇴했다. 그런데 이 한 학기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시카고대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고 그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이다. 시카고대를 그만 둔 22살의 엘리슨은 1966년 다시 캘리포니아 북부로 떠났다. 이번에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히피가 아닌 정보기술(IT)이 그가 캘리포니아 북부로 향한 이유였다. IT맨으로 변한 히피가 나온 것이다.

히피에서 IT 경영자로


▎엘리슨은 하와이주에서 여섯째로 큰 라나이 섬의 부동산 98%를 보유하고 있다.
웰스파고은행 등 여러 회사에 다니며 컴퓨터 관련 일을 하던 그는 앰펙스(AMPEX)라는 전자회사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련 세계에 새롭게 눈을 떴다. 앰펙스는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의 전자회사로 테이터베이스 시장의 개척자 중 하나였다.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엘리슨은 데이터베이스의 사업적 가능성을 확신하게 됐다.

1977년 동료 두 명과 함께 2000달러를 투자해 데이터베이스 업체를 창업했다. 밥 마이너(1941~94)와 에드 오츠(69)가 그와 함께했다. 마이너는 앨리슨이 중퇴한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으며 IT업계에서 제품 설계로 잔뼈가 굵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 오츠는 새너제이 주립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같은 업계에서 일했다. 앰펙스에서 만난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데이터 베이스에 운명을 걸기로 했다. 창업 자본 2000달러 중 엘리슨이 1200달러를 부담했다. 지분 60%다. 나머지 지분은 두 사람이 20%씩 나눴다. 500억 달러가 넘는 지금의 재산은 이 작은 투자금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라클은 중소 규모 업체의 데이터베이스 구축 분야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 분야 비즈니스 성공은 엘리슨이 부를 축적하는 바탕이 됐다. 캘리포니아 북부 샌타클래라에서 창업했으며 현재 본사는 레드우드에 자리 잡고 있다. 모두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도시로 실리콘밸리의 일부다. 오라클은 실리콘밸리가 오늘날의 세계적인 벤처타운이 되는 바탕이 된 기업의하나다. 엘리슨은 실리콘밸리 성공신화의 개척자다. 그는 1970년대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마지막 현역 경영자다.

1977년 창업 당시 회사 이름은 오라클이 아니었다.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실(SDL)’이라는, 엔지니어적인 이름이었다. 1979년 회사 이름을 ‘릴레이셔널 소프트웨어’로 바꿨다. 다루는 데이터베이스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로 불리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이 역시 공학적인 느낌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라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82년이 돼서였다. 그 해 회사의 주력 상품인 오라클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한 ‘오라클 시스템스’로 사명을 최종 변경했다.

오라클은 IBM이 지배하던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 끝에 오늘날의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DB2와 SQL/DS 데이터베이스로 시장을 좌우하던 IBM이 유닉스와 윈도즈를 운영체계로 쓰는 중소형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선뜻 뛰어들지 않고 머뭇거렸다는 이유도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사이베이스가 이 분야의 시장을 선도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더 큰 돈을 노려 인수합병을 하면서 일을 그르쳤다. 1996년 파워소프트와 합병하면서 자금난 등으로 차기 기술 개발에 주력하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경쟁사가 인포믹스다. 양사는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인포믹스의 CEO 필 화이트와 엘리슨의 살벌한 싸움은 실리콘밸리의 매체를 뜨겁게 달궜다. 두 사람의 싸움은 화끈한 전개와 달리 갑자기 끝났다. 인포믹스가 1997년 4월 매출과 이익을 수정 발표했기 때문이다. 앞서 과장된 수치를 발표했다가 지적을 받자 고친 것이다. 화이트는 감옥에 갔으며, 인포믹스는 2001년 IBM의 먹잇감이 돼 흡수됐다. 정직과 공정경쟁이 비즈니스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라클은 정직하게 한 우물만 파면서 기술과 서비스로 승부를 겨뤘다.

사이베이스와 인포믹스가 무너지면서 오라클의 시대가 왔다. 엘리슨은 시장 지배자인 오라클의 대표로서 최고의 시대를 구가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마이크로 소프트 SQL 서비스’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이베이스의 원천 기술로 무장했다. 무너진 인포믹스의 소프트웨어를 사들인 IBM은 DB2로 도전했다. 이들은 모두 윈도 운영체계에서 구동되는 데이터베이스다. 오라클은 유닉스나 리눅스 체계에서도 가동되는 데이터베이스로 대응하고 있다. 오라클은 2010년 4월 세계 4대 컴퓨터 서버업체인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74억 달러(약 10조 원)에 인수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길을 열었다. 이로써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MySQL 오픈소스 데이터베이스를 손에 넣게 됐다. 선이 2008년 MySQL을 인수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해 엘리슨은 280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6위의 부자에 올랐다. 고속으로 재산을 불리는 기업인으로도 유명하다. 이듬해인 2011년 엘리슨은 365억 달러의 재산을 기록했다. 1년 새 재산을 무려 85억 달러나 불린 것이다. 2014년에도 1년 새 재산을 57억 달러나 불려 한 해 재산을 증식한 순위 세계 9위에 올랐다. 그는 고연봉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10년 7월 엘리슨을 지난 10년간 가장 높은 연봉은 받은 경영인으로 꼽았다. 10년간 그가 회사에서 급여로 받은 돈이 18억 4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엘리슨이 2013년 946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렇다고 인색하게 산 것은 아니다. 엘리슨은 지금까지 재산의 1% 이상을 기부했다.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내놓자는 ‘기부 서약’에도 서명했다. 이 서약은 2010년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전 세계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운동으로 지난 1월까지 전 세계 128명의 억만장자가 동참했다.

엘리슨은 의료 연구 분야 기부에 열성적이다. 1992년 자전거 충돌 사고로 팔꿈치를 심하게 다친 것이 계기다. 당시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의대 병원 정형외과의 마이클 채프먼 교수의 열정적인 치료로 말끔하게 회복됐다. 감동한 엘리슨은 5000만 달러를 내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로렌스 J 엘리슨 근육골격센터’가 들어섰다. 그의 정식 이름을 딴 정형외과 의학연구센터다. 1998년에는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메디컬 센터의 세크라 멘토 캠퍼스에 ‘로렌스 J 엘리슨 보행 관리 센터’가 세워졌다.

그럼에도 과도한 소비가 수시로 도마에 오른다 자동차·요트·비행기, 그리고 저택 수집이 취미다. 요란한 취미 생활로 ‘실리콘밸리의 악동’으로도 불린다. 요트를 탐닉해 개인이나 팀으로 각종 대회에 참가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승부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액을 들여 세계적인 선수를 초청해 순위를 끌어올리는 것도 예사다.

자동차·요트·비행기·저택 수집이 취미

건조에 2억 달러가 들었다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요트 ‘라이징 선’을 보유하고 있다가 2010년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게펜에게 팔았다. 비행사 면허가 있어 스스로 조종을 한다. 2000년 새너제이 공항에서 심야 이륙 금지 규정을 어기고 비행기를 몰다가 지적을 받기도 했다. 군용기도 수집 대상이다. 이탈리아제 군용 훈련기를 보유하고 있다. 퇴역한 옛 소련제 미그-29기를 구입했으나 미국 항공당국이 수입을 불허해 미국에 가져오지는 못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에 있는 1억1000만 달러짜리 대저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독특한 것은 일본식 건물이라는 점이다. 북미 최대 규모의 일본식 건물로 불린다. 로드아일랜드주에 여름 별장을 마련했으며 개인 골프 코스도 보유하고 있다. 하와이주에서 여섯째로 큰 라나이 섬의 부동산 98%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섬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 전역에서 부동산을 사모으고 있다. 4차례 결혼하고 4차례 이혼하는 등 가정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라클에는 얼씬하지 않고 있다. 평소에도 정치나 사회, 경영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이름 높았던 그가 지난해 CEO를 그만두면서 어떤 새로운 일을 벌이고 세상 일에 개입할지 관심이 모인다.

1281호 (201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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