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ted.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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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가 화두다. 벤처는 대기업이 갖지 못한 스피드와 적응력으로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지금처럼 변화 무쌍한 시대를 리드하기에는 몸집 큰 대기업은 한계가 있다. 벤처는 변화 그 자체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혁신의 꽃을 피운다. 또한 벤처는 우리 사회의 큰 이슈인 청년실업 문제를 해소하는데 기여한다. 경제의 중추인 대기업에게 신선한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기회를 주기도 한다.벤처와 대기업간의 유기적이고 선순환적인 협력 구도가 정착돼야 비로소 건강하고 활력있는 산업 생태계가 완성된다. 대형 물류 트럭이 고속도로를 쌩쌩 달려주고, 택배 오토바이가 좁은 골목길을 곡예를 하는 듯 누벼줘야 비로소 물류가 완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벤처는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데 문제가 있다. 벤처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무수히 많은 벤처가 새롭게 생겨나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수의 업체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간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독보적인 위상을 굳히는 업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기업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벤처를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동물인 ‘유니콘(Unicorn)’이라고 하는 이유다. 유니콘 기업의 10배인 100억 달러 가치의 벤처는 뿔이 10개 달린 유니콘인 ‘데카콘(Decacorn)’이라고 불린다.
벤처는 침체된 경제를 살리는 활력소미국에 벤처 인큐베이팅을 전문으로 하는 아이디어랩(Idealab)이라는 회사가 있다. 1996년에 이 회사를 설립한 빌 그로스(Bill Gross)는 그동안 100개 이상의 벤처를 만들어 키워낸 바 있으며, 지금도 환경, 정보통신, 자동화, 인터넷 서비스 분야의 벤처를 육성 중이다. 그는 벤처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수백개 벤처의 사례를 모아 다섯 가지 성공 요인을 뽑아냈다.첫 번째는 아이디어. 빌 그로스는 자신의 회사 이름을 ‘아이디어랩’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벤처는 아이디어가 생명이라고 생각해왔다. 두 번째는 팀의 능력. 복싱 경기 중에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었던 마이크 타이슨이 훗날 이런 명언을 남겼다. “누구나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얼굴을 한 대 맞기 전까지는요.” 벤처도 마찬가지다. 고객에게 한방 맞았을 때 그 팀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세 번째는 비즈니스 모델. 고객들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창출해 낼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네 번째는 펀딩.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으면 기술 개발도 마케팅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은 타이밍. 세상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아이디어가 너무 앞질러가면 안 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타이밍이 너무 늦으면 뒷북만 치게 된다.이상의 다섯 가지 모두 벤처의 성공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 중 뭐가 가장 중요한 걸까? 빌 그로스는 아이디어랩에서 설립한 100개 업체 중에서 수십억 달러의 성공을 거둔 5개 업체(Citysearch, CarsDirect, GoTo, NetZero, Tickets.com)와 실패한 5개 업체(Z.com, Insider Pages, MyLife, Desktop Factory, Peoplelink)를 뽑았다. 그리고 외부 벤처 중에서도 성공한 5개 업체(Airbnb, Instagram, Uber, Youtube, LinkedIn)와 실패한 5개 업체 (Webvan, Kozmo, Pets.com, Flooz, Friendster)를 뽑았다.그 다음에 이들 20개 업체의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는 데 있어 다섯 가지 요인간 중요성에 대해 점수를 매겨 보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벤처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타이밍이었다. 그 다음이 팀의 능력, 아이디어 순이었으며, 비즈니스 모델이나 펀딩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Airbnb)의 경우를 보자. 처음에는 많은 투자자가 이 회사에 대한 투자를 거부했다. 낯선 사람에게 자기 집이나 방을 선뜻 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불황이 닥치자 돈이 궁해진 사람들은 기꺼이 낯선 여행객들에게 집을 빌려줄 마음을 먹게 된다. 에어비앤비는 2015년 6월, 15억 달러가량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 가치가 255억 달러(약 28조원)로 치솟았다.이와 달리 아이디어랩에서 설립했던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Z.com은 펀딩도 잘 받았고, 비즈니스 모델도 훌륭했으며 심지어 할리우드 스타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문제였다. 서비스를 시작한 1999~2000년에는 미국의 인터넷 보급률이 별로 높지 않았고, 비디오를 보려면 사용자들이 브라우저에 추가 코덱을 설치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 결과 이 회사는 2003년에 파산하고 만다. 그런데 그로부터 딱 2년 뒤, 미국 광대역 인터넷 보급률이 50%를 넘어서게 되었고, 어도비 플래시(Adobe Flash)가 나오면서 코덱 설치 문제도 해결됐다. 이때 딱 맞춰 등장한 유튜브는 뚜렷한 비즈니스 모델조차 없었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결론적으로 타이밍이 안 맞으면 다른 모든 성공 조건들도 무용지물이 된다. 과연 소비자들이 지금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벤처 창업자들의 자기확신과 기술에 대한 집착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되었을 때 줄을 서서 열광할 소비자들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친 열정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 지금 이 순간에도 타이밍을 놓쳐 망연자실하는 벤처 창업자들이 전 세계에 수두룩하다.창조경제를 표방하는 현 정부는 벤처 육성에 팔을 걷어 부쳤다. 전국 각지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17개나 만들었고 대기업이 돈을 대고, 정부가 행정력을 지원해 벤처를 키운다는 계획이다.좋은 일이다. 피 같은 세금으로 벤처 육성에 나서는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해서 기라성 같은 벤처들이 쑥쑥 자라나고 우리 경제에 새로운 등불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혹시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토마토처럼 키만 크다가, 열매 하나 제대로 못 맺고 시들어 버리는 건 아닐까?
등 떠밀어 만든 창조경제혁신센터미국의 실리콘밸리, 영국의 테크시티, 중국의 중관춘, 이스라엘의 실리콘 와디 등에서 각국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주연보다 더 힘든 조연의 역할, 앞장서 구호를 외치는 대신 조용히 덤불과 돌멩이들을 치워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의 말을 빌리자면 ‘계속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Stay hungry, Stay foolish)’하지 않고 ‘곱게 큰’ 벤처는 무늬만 벤처다. 휴렛팩커드·애플·구글 등 내로라하는 세계 최고 벤처들이 태어난 곳은 허름한 창고였다. 영국 테크시티의 모태가 된 곳은 버려진 슬럼가, 샤오미와 알리바바가 창업한 곳은 중관춘의 허름한 호텔방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최근 우리나라 벤처 업계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를 받았던 기업은 국민 내비 ‘김기사’를 만든 록앤올이다. 자본금 1억5000만원으로 회사를 세운 지 5년 만에 600억원대 몸값을 받고 벤처 업계 큰형님 격인 다음카카오에 회사를 넘겼다. 설립 타이밍과 출구전략 타이밍 모두 끝내줬다. 이 회사 CEO는 성공의 비결을 ‘할 수 있다’는 마인드와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는 마음가짐이었다고 밝혔다. 대기업이 끌어줘서, 정부가 도와줘서 성공한 게 아니다. 이런 게 진짜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