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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차(茶) 무역적자가 부른 탐욕의 전쟁 

아편 밀수로 손실 만회하려던 영국 ... 중국은 아편전쟁 패배로 반식민지 국가로 

서영수

▎아편을 흘려보낸 자리에 부러진 아편 흡연도구 상징물이 서있다.
하늘은 맑았다. 2015년 9월 3일 오전10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 인민 항일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대회’가 열렸다. 건국 이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최초의 열병식에 30명의 외국 지도자가 참석했다. 56개 중국 민족을 상징하는 56문의 예포가 개막을 알리며 70발의 축포를 쐈다. 인민영웅기념비에서 ‘121’보를 걸어온 196명의 국기호위대가 오성홍기를 국기게양대에 게양했다. 121년 전 한반도에서 맞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잠자는 용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치욕의 역사를 딛고 대국굴기(大國屈起)를 전 세계에 선포했다. 그런데 2009년 10월 1일 건국 60주년 기념일 열병식 당시 국기호위대는 ‘121’보다 많은 ‘169’보를 걸었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보다 54년 앞선 중·영전쟁에서 서구 열강에 패한 사실을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아편전쟁으로 불리는 중·영전쟁은 차(茶) 수입으로 발생한 무역적자를 아편 밀수출로 만회하려는 영국의 그릇된 야욕에서 비롯된 전쟁이다.

영국 귀족사회에서 중국 차 대인기


▎1. 아편전쟁 당시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들이 넘쳐났다. 2. 린쩌쉬는 영국 상인에게 압수한 2만여개의 아편 상자를 석회로 용해시켜 바다로 흘려보냈다.
1958년 만들어진 인민영웅기념비 하단에는 근대사를 대표하는 8개의 사건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첫 번째 부조의 내용은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된 후먼샤오엔(虎門銷煙)이다. 후먼샤오엔은 1839년 6월 3일부터 6월 25일까지 광둥성 후먼에서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가 임명한 흠차대신 린쩌쉬(1785~1850)가 영국 상인에게 압수한 2만여개의 아편 상자를 석회로 용해시켜 바다로 흘려보내며 세계 최초로 아편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아편흡입과 매매를 불법으로 금지시킨 사건이다.

영국도 아편의 폐해를 알고 있었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중국에서의 무역역조를 뒤집어야만 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차의 양은 해마다 늘었지만 중국에 수출할 마땅한 품목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 상인들에게 몰래 팔고 이를 감시하는 관리들에게는 뇌물을 상납했다. 차를 영국으로 가져가며 은으로 결제하는 대신 아편으로 대체하고 아편 밀무역이 성행하게 되면서 오히려 중국의 은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손실을 넘어 아편에 중독되어 죽거나 폐인이 되는 중국인이 거리에 넘쳤다. 린쩌쉬의 동생도 아편중독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중국이 지금도 가장 싫어하는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말이 이 무렵 생겨났다. 린쩌쉬가 1426t의 아편을 압수해 소각해버린 단호한 행동에 당황한 영국 무역 감독관인 찰스 엘리엇은 다른 관리와 달리 뇌물과 회유가 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고했다. 린쩌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 중국에서 아편은 불법이고 마약중독의 폐해를 소상히 밝히며 아편을 제외한 모든 무역에 최혜국대우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했다. 영국의회는 찬반이 분분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에서도 차가 생산되었지만 당시에는 중국차가 ‘갑’이었다. 1662년 찰스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차를 가져오면서 영국에 알려진 중국차는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귀족사회의 고품격 문화생활로 급속히 퍼졌다. 유럽제국의 동인도회사들은 ‘왕실 티파티’를 위해서 질 좋은 중국차를 먼저 진상하려는 경쟁을 벌였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왕실과 귀족사회는 물론 신흥 부르주아가 상류사회를 이끌면서 차 문화를 확산시켰다. 중국차를 부와 명예의 ‘아이콘’으로만 부러워하던 노동자도 차를 마실 기회가 왔다. 공장주들은 노동효율을 높이기 위해 ‘티 브레이크’를 만들어 휴식시간에 노동자들에게 차와 간식을 제공했다. 술 대신 차를 공급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시대는 전 국민이 고급 문화가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차를 매일 마셨다. ‘티 홀릭’에 빠진 영국은 부도덕한 전쟁에 돌입했다. 19세기는 영국 지식인의 로망 ‘유니언 잭’이 세계를 넘어 우주까지라도 뒤덮기를 갈망하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였다. 1840년 4월 영국 의회는 9표차로 중국에 대한 원정군 파견을 승인했다. 제국주의가 저물 무렵 영국인 스스로가 ‘아편전쟁은 영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었다고 반성했다.

린쩌쉬는 외국 상인들이 숨겨둔 아편을 압수하며 1상자에 5근의 차로 보상해줬다. 앞으로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외국 상인들에게 받았다. 미국과 포르투갈 등의 상인들은 순순히 협조했지만 영국 상인들은 서약서 제출을 거부하고 광저우를 떠나 마카오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 와중에 1839년 7월7일 술에 취한 영국군이 중국 농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린쩌쉬는 범인 인도를 요구했지만 찰스 엘리엇은 거부했다. 마카오를 봉쇄한 린쩌쉬의 함대와 영국 함대가 9월 4일 격돌하며 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세계 최강의 해군 전력을 자랑하는 영국군과의 해상 정면대결보다 지리에 익숙한 이점을 살려 육지로 끌어들인 후 유격전으로 승기를 잡겠다는 린쩌쉬의 전략을 도광제는 묵살했다. 낙담할 틈도 없이 린쩌쉬는 서양의 대포를 사들이고 상선을 전함으로 개조했다. 믿을 수 없는 관군 대신 상인과 민간인으로 해안경비대를 만들었다.

1840년 6월 4000명의 병사를 태운 47척의 영국 함대가 광저우에 나타났다. 린쩌쉬의 강력한 방어로 광저우는 함락되지 않았다. 광저우를 포기한 영국의 함대는 북상해 베이징의 관문인 텐진을 공격했다. 린쩌쉬의 예상대로 영국군이 움직였던 것이다. 영국군의 텐진 상륙에 놀란 도광제는 전쟁의 원인 제공과 책임을 물어 린쩌쉬를 파면했다. 유화파인 치샨을 직례총독으로 급히 임명해 영국과 강화교섭을 벌이게 했다. 인도 용병이 중심이 된 1만명의 응원군이 린쩌쉬가 없는 광저우를 격파하고 난징으로 진격했다.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

1842년 8월에 맺은 난징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해온 중국은 반식민지 국가로 몰락했다. 청·일전쟁 이전에 중국의 치욕은 이미 시작됐다.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됐지만 121년 전 이 땅 위에서 전쟁을 벌인 중국은 굴기를 선포했고 일본은 평화헌법을 버렸다.

망국의 한을 품고 죽었지만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영웅으로 부활한 린쩌쉬 기념관이 있는 아편전쟁 박물관을 찾아갔다. 광저우와 이어져있는 동관시 후먼대교 옆에 있는 아편전쟁 박물관에는 1839년 아편을 태웠던 자리에 린쩌쉬가 동상으로 남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늘은 흐렸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07호 (20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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