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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인의 삶을 바꾼 히트상품 | 쿡방] 대한민국 요리한 ‘백주부’ ‘요섹남’ 

흔한 재료, 쉬운 레시피로 파고들어 ... 식품·주방용품 판매 큰 폭 증가 


▎쿡방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셰프 백종원. 소탈한 입담과 시청자와의 적극적인 소통, 실용적인 레시피를 선보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참~ 쉽쥬?” 유명한 셰프가 TV에 나와 뚝딱뚝딱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게다가 우리집 냉장고 안에도 있는 간단한 식재료만으로 그럴싸한 요리가 탄생하다니 의지가 불타오른다. 남들이 맛있게 먹는 장면(먹방)을 지켜보는 데 싫증난 사람들이 이젠 직접 앞치마를 둘렀다. 요리를 배우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TV만 틀면 요리사가 나와 레시피를 친절히 알려준다. 그들의 조언대로 지지고 볶다보면 얼추 비슷한 맛이 나온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동시에 포만감이 찾아온다. 요리하는(cook) 방송인 ‘쿡방’으로 느끼는 일상의 작은 행복이다.

한 해 동안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케이블에서 방영한 쿡방을 합하면 20여개에 달한다. 쿡방은 크게 요리와 무관한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서툰 솜씨로 요리를 만드는 ‘아마추어형’과 유명 셰프가 일반인에게 자신의 요리 노하우를 전수하는 ‘전문가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바쁜 현대인의 일상에서 챙겨먹는 한끼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후자는 전문가의 레시피를 공개해 누구나 쉽게 요리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10월 첫방송을 시작한 tvN [삼시세끼]는 쿡방의 포문을 열었다. 평소 화려하게만 보이던 연예인이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매끼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먹고 사는 모습은 어딜가나 비슷하다’는 묘한 동질감을 준다. 전원에 사는 모습을 전반적으로 보여준 전편에 비해 올해 새로 선보인 어촌편은 이름 그대로 ‘삼시 세끼’를 만들어 먹는 데 더욱 집중한다. 텃밭에서 기른 배추를 뽑아 겉절이를 만들고,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으로 저녁을 해결하며 하루를 보낸다. 대형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는 게 당연시되는 삶을 사는 도시인들은 방송을 통해 ‘살아있는 밥상’을 받으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 방송에서 주목받은 배우 차승원은 웬만한 주부 못지 않은 요리솜씨를 뽐내며 ‘차줌마’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아버지도 앞치마 두르게 한 ‘쿡방’의 위력

[삼시세끼]가 신선한 식재료를 무기로 내세운다면, JTBC [냉장고를 부탁해]는 전문가의 실력이 관전 포인트다. 고급 레스토랑 셰프부터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유명인이 출연해 냉장고의 빈약한 식재료만으로 정찬을 만들어낸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짧은 시간 안에 요리 대결을 펼쳐 게스트의 평가를 받는 식이다. 기존 쿡방이 정보 전달 위주였던 것에 반해, 이 프로그램은 요리하는 모습 자체를 하나의 쇼로 만들어 재미를 더한다. 셰프들의 리드미컬한 칼질과 화려한 플레이팅 과정은 다른 프로그램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쿡방이 인기를 끌며 덩달아 셰프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방송을 보고 셰프가 일하는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도 늘어 해당 레스토랑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극중 주인공의 직업을 셰프로 한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가 하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셰프들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광고까지 접수했다. 이들이 출연하는 광고는 식음료·조리도구 등 관련 분야에 그치지 않고, 화장품·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범위도 다양하다. 광고 업계에서 셰프가 사랑받는 이유는 높은 인지도와 전문성을 지닌 이들을 통해 제품 신뢰도를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쌓은 유쾌한 이미지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제품 호감도를 높일 수도 있다는 것이 업계의 판단이다.

쿡방의 주체가 셰프든, 연예인이든 인기를 끄는 요인은 누구나 따라하기 쉬운 요리를 만드는 데 있다. MBC [마이리틀텔레비전]에 출연한 백종원이 대표적인 예다. 수십여 개 프랜차이즈를 거느린 사업가이자 요리연구가인 그는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간단한 레시피를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네티즌(시청자)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프로그램 특성을 십분 활용해 주변에 있는 흔한 재료와 손쉬운 조리법으로 집밥을 만들어내 ‘백주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는 또다른 쿡방인 tvN [집밥 백선생]에서도 요리에 서툰 남자 출연자들의 요리 선생을 자처해, 그동안 요리와 거리가 멀었던 남자들에게까지 밥하는 즐거움을 전파했다. 방송에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백종원은 “자전거를 보급화하는 것처럼 요리도 보급화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바람대로 지난해 출간한 요리책은 요리 서적으로는 드물게 ‘올해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백주부’ ‘차줌마’ 같은 신종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부엌 문턱에서 망설이던 남성 혹은 아버지를 주방으로 끌어들였다. 그동안 아내가 차려준 상을 받아먹기만 하던 가장들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게 한 것이 대표적인 ‘쿡방 효과’다. 요리하는 남자들이 방송가 대세로 떠오르자 이른바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새로운 남성상도 생겼다. 이전까지 꽃미남, 짐승남 등 주로 외모를 기준으로 이성적인 매력을 느꼈다면, 이제는 요리하는 가정적인 남자가 더욱 각광받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SNS·블로그 도배한 ‘오늘의 밥상’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늘면서 식품·주방용품 판매도 크게 증가했다. 소셜커머스 쿠팡에 따르면 올 상반기 매출 기준, 식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68%, 주방용품은 25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성들의 구매 비율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 가운데는 중국식 소스나 고형카레 등 방송에서 식재료로 많이 사용된 상품일수록 판매량도 급증했다. 주방용품의 경우 믹서기나 전자레인지 등 소형 주방가전 제품의 매출이 늘었다. 쿡방 인기를 타고 주방가전 제조 업체는 주방용품으로, 주방용품 업체는 주방가전으로 신사업 확장에 나서며 업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대중이 요리에 열광하면서 각종 SNS와 블로그에 요리·음식과 관련된 포스팅 역시 부쩍 늘었다. 그간 주를 이뤘던 패션·뷰티 관련 내용이 대폭 줄어든 것과 상반된 현상이다. 직접 만든 요리 사진을 올리며 집안 밥상 풍경을 공유하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이제 예쁘게 입고 꾸미는 것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쿡방이 올 한해 대한민국을 더 맛있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허정연 기자 hur.jungyeon@joins.com

1314호 (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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