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P 물 건너가고 NAFTA도 재협상 조짐...
한·미 FTA 근간 흔들릴 가능성
“국제 통상 분야의 ‘게임의 룰’이 급격히 바뀔 것이다.”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미국 대선 이후 이렇게 전망했다. 이 말대로 미국 대통령 선거의 ‘대이변’이 국제 통상질서에 격랑을 몰고 왔다. 초강대국 미국에 등장한 첫 ‘아웃사이더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보호무역주의의 파고를 높일 태세다. 가뜩이나 수출이 부진한 한국 경제도 커다란 소용돌이에 직면하게 됐다. 당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앞날도 불투명해졌다.
파고 높아지는 보호무역주의변화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트럼프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1월 12일 ‘미국 민주·공화당 지도부가 대선 결과에 따라 TPP 비준 절차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고 백악관에 통보했다’며 ‘오바마 행정부 관리들도 현재로선 더 진척시킬 방법이 없음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TPP는 오바마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했던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무역협정이다. 하지만 이 협의가 휴지조각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이 TPP를 살리려 애를 쓰고 있지만 물줄기를 되돌릴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뿐만 아니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이 캐나다·멕시코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당선인 정권인수위는 트럼프 당선인의 새로운 요구가 반영되지 않을 경우 취임 200일 이내에 NAFTA를 폐기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캐나다와 멕시코 역시“재협상의 준비가 돼있다”고 밝혔다.트럼프의 칼날은 중국으로도 향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환율조작국 지정 및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45% 부과 등을 대선 기간 내내 주장해왔다. 실제 이런 조치가 현실화되면 미·중 간 ‘무역전쟁’이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클로드 바필드 미국 기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11월 15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주최한 ‘미국 신행정부 정책 전망 세미나’에 참석해 “트럼프 정부가 수개월 안에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것”이라며 “이런 조치가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중국은 TPP 폐기를 호기로 받아들인다. 중국은 TPP 대항마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주도하고 있다. 연내 타결이 물 건너가며 추진 동력이 약화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TPP의 앞날이 불투명해지면서 통상 질서 주도권을 중국이 쥘 기회를 잡았다.국제 통상질서에 몰아닥치는 이런 격변에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당장 한·미 FTA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한·미 FTA를 ‘재앙’이라고 비판하며 전면 개정을 주장했다. 주요 근거는 한·미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이다. 지난해 한국은 338억5000만 달러의 대(對)미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한·미 FTA가 발효된 2012년(199억4000만 달러) 이후 증가세다. 트럼프 당선인은 한·미 FTA 재협상 요구와 미국 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 규제 장벽을 더욱 높일 수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미 FTA 수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큰 데다 관세를 높이고 한국의 환율 정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등 전방위 통상 압박을 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뜩이나 부진한 한국 수출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대미 수출 규모는 698억3000만 달러다. 중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규모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미 FTA 전면 재협상이 현실화될 경우 2017~2021년 5년 간 총 269억 달러(약 31조원)의 수출 손실이 빚어진다고 추산했다. 이미 대미 수출은 쪼그라들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10월 대미 수출액은 53억9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0.3% 감소했다. 대미 수출은 6월부터 5개월째 내리막이다. 올 1~10월 누적 대미 수출액은 전년 대비 5.9% 줄었다. 지난해(-0.6%)보다 감소폭이 훨씬 크다.세계적인 보호무역 흐름 강화도 한국에 악재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보다 더 강력한 트럼프의 보호무역 바람은 부진한 글로벌 교역을 더 얼어붙게 해 한국 수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가뜩이나 세계 교역량은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 9월 올해 세계 교역량 증가율을 1.7%로 전망했다. 4월 전망치(2.8%)보다 1.1%포인트 낮다. WTO는 교역량 하향 조정 이유에 대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브렉시트로 세계 경제가 충격을 받으면서 교역량 증가율이 크게 둔화했다”라고 설명했다. WTO는 트럼프 당선이 결정된 이후 11월 10일 보고서를 내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각국 정부의 무역 규제 정책들이 계속되고 있다”며 “회원국들은 세계 경제의 퇴보를 가져오는 수입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WTO의 이런 주장이 실제 미국 등 주요국의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내 경제정책 이끌 리더십 회복 급해한국 정부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월 9일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며 “트럼프의 당선은 경제 전반에 부정적 파급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TPP의 미 의회 비준 여부와 한·미 FTA 등 통상 현안에 대한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통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 한·미FTA가 상호 이익임을 적극 강조하고 있다.전문가들은 급변하는 통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주력 산업의 위축에다 통상·환율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제조업 수출을 늘리기는 어려워졌다”며 “대미 무역에서 우리가 적자를 보는 서비스 분야 등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통상대응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통상 역량은 오히려 약화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미, 한·유럽연합(EU) FTA를 타결시켰던 통상교섭본부는 2013년 정부 조직 개편으로 외교부에서 현재의 산업통상자원부로 옮겨왔다. 이 과정에서 장관급이던 본부장의 지위는 1급 차관보로 격하됐고 조직도 축소됐다. 우선 내부의 불확실성부터 걷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 대선이 예고됐음에도 정부 대응이 미흡해 보였다”며 “이는 정책의 구심점이 사라진 영향이 커 보인다”고 지적했다. 심상렬 교수는 “하루빨리 경제사령탑을 세우고 정책 리더십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