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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일수록 뜨는 ‘렌털 경제학’] 마누라 빼고 다 빌려준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드론·침대·가방·미술품·애완견 등 렌털 상품 확대 … 관련 시장 5년 새 6조원 불어나

▎롯데백화점이 지난해 7월 문을 연 패션 렌털 매장 ‘살롱 드 샬롯’. 이곳에선 명품 정장을 30만~40만원(2박 3일 기준)에 빌려 입을 수 있다.
400만원이 넘는 그림, 300만원대 청소기, 100만원대 드론…. 특정 분야 마니아나 소비 여력이 충분한 이들이 아니면 이런 것을 사서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용할 수는 있다. ‘소유’ 욕심을 버리고 ‘렌털’하면 된다.

렌털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불황이 깊어지고 소비 패턴이 변화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빌려 쓸 수 있는 시대다. 가전제품·자동차·명품 같은 고가 상품에 이어 침대·가방·미술품은 물론 애완견까지 필요할 때 빌릴 수 있다.

불경기에 소비 욕구 변화, 1인 가구 증가도 원인


한국에서 렌털의 역사는 꽤 길다. 대표적인 게 전세로 대변되는 주택 임대시장이다. 집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적은 돈으로 일정기간 내 집처럼 사용할 수 있다. 역사 깊은 렌털 시장이다. 주택 외에 국내에 본격적인 렌털 상품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매월 적은 돈으로 내 것처럼 이용할 수 있는 정수기가 등장했다. 이후 렌털 상품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수기와 비데 등 소형 가전제품에서 시작된 렌털 상품은 안마의자와 침대 매트리스, 노트북, 자동차 등으로 확대했다. 최근 등장한 렌털 상품 중에서 눈길을 끄는 상품은 홈케어 시스템 컬비가 내놓은 300만원대 청소기다. 호텔 등에서 인지도 높은 제품인데, 300만원이 넘는 가정용 청소기를 월 7만9000원 정도에 렌털해 사용할 수 있다.

미술품 스타트업 오픈갤러리가 서비스 중인 미술품 렌털 서비스도 인기다. 큐레이터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골라 3개월 단위로 대여하는 서비스다. 부담 없는 가격에 ‘작은 사치품’으로 집안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이들이 늘면서 비슷한 업체도 생겨나고 있다. 스마트 모빌리티(개인형 이동수단)와 같은 취미·오락·레저 상품도 요즘 늘고 있다. 다분히 개인 취향이 반영되는 의류에도 렌털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전체 매출에서 의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백화점에도 옷을 빌려주는 매장이 등장했을 정도다. 롯데백화점은 서울 소공동 본점에 업계 최초로 패션 렌털 매장인 ‘살롱 드 샬롯’을 열었다. 이곳에선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 특별한 날에 입을 고급 의류를 직접 착용해보고 빌릴 수 있다. 선글라스와 주얼리, 여행가방 등도 대여가 가능하다.

이처럼 렌털 상품의 종류가 늘고 이용자가 증가하면서 렌털 시장은 최근 급성장 추세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19조5000억원이었던 국내 렌털 시장 규모는 지난해 25조9000억원으로 확대됐다. 2020년에는 40조1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렌털 시장이 커지는 가장 큰 요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불경기가 꼽힌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좋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불황이 일상이 돼 버리면서 렌털이 돌파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기 침체를 겪은 다른 나라에서도 렌털 산업은 호황이다. 한국보다 앞서 경기 침체를 겪은 일본에서는 빌리지 못하는 게 없다. 요즘에는 애완동물 렌털 서비스가 성업 중인데, 개나 고양이 등을 하루 2만~3만원의 비용을 내고 원하는 기간만큼 빌릴 수 있다. 2000년 17개에 불과했던 애완동물 렌털 업체는 현재 150여 개로 늘었다.

소비욕구가 변하고 기술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과거에는 물건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여러 제품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소비욕구가 더 커지고 있다. 신제품·신기술이 하루가 멀다고 나오면서 소비 시간도 확 줄었다. 특히 명품 옷이나 가방은 가격이 비싸고 유행도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구매보다는 렌털을 선호한다는 분석이다. 1~2인 가구가 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정한식 GS샵 토탈서비스팀 차장은 “상품을 사서 혼자만 써야 하기 때문에 1인 가구는 소비 사이클이 짧아 렌털을 선택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유통업계는 이미 렌털 시장을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롯데백화점이 살롱 드 샬롯을 연 데 이어 현대홈쇼핑은 600억원을 출자해 렌털·케어 사업을 할 현대렌탈케어 법인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렌털 사업을 벌이고 있다. SK플래닛의 11번가는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안마의자 등 렌털 제품을 한데 모은 ‘생활플러스 렌탈숍’을 오픈했다. 지난해 9월에는 매일 입는 의류와 가방 제품을 음원처럼 한 달간 대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 앤’을 선보였다. 편의점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은 올해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정관을 변경하고 렌털임대업을 추가했다. GS리테일 측은 “아직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렌털 사업은 없지만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업목적에 추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렌털 서비스는 가격 측면이나 효율성에서 성장 가능성이 크다”며 “소비자는 필요성이 떨어지면 반납하면 되고, 반납된 제품은 필요로 하는 다른 소비자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업체나 이용자 모두에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계약 전 분쟁 소지 꼼꼼히 따져야

실제로 렌털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측면이 있지만 따져봐야 할 것도 많다. 특히 2~3년씩 장기 렌털할 때는 계약서와 약관을 꼼꼼히 읽어봐야 한다. 계약서·약관이 소비자 분쟁의 모든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계약서를 꼼꼼히 작성하고 기간 내 보관해 두어야 나중에 생기는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 ‘계약서입니다. 여기, 여기에 사인해주세요’라는 말만 듣고 사인만 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위약금이 있다면 얼마가 발생하는지, 과도한 위약금이 발생하지 않는지 확인하고 계약서에 상호 날인해서 꼭 보관해 두는 게 좋다. 간혹 계약서에는 과도한 위약금이 발생한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위약금이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고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상품도 있다. 이런 경우에 서면이나 계약서상 특약으로 이러한 내용을 확인받아 둬야 분쟁을 막을 수 있다. 렌털 제품이 고장 나면 소비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도 계약하기 전에 충분히 설명을 들어야 한다. 한국소비자원은 “소비자 분쟁해결 기준에서는 위약금을 10%로 정하고 있지만 일부 렌털 업체는 많게는 50%로 정하고 있는 곳도 있다”며 “계약 체결 전에 과도한 위약금이 부과되지 않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1382호 (20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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