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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 받는 비운의 보고서 ‘비전 2030’] 정치적으로는 사망, 정책적으로는 부활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보수 정부 9년간 일부 차용, 19대 대선 때도 어젠다로 부상 ... 새 정부 ‘비전 2030’ 인맥 두각 … ‘비전 2050’ 수립 계획

“나라 장래에 관해 30년 뒤 청사진을 만든다는 것은 완전히 ‘뻥’이다. 아라비안나이트도 아니고, 헛된 꿈으로 국민을 현혹시키지 말아라”. 2006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정부가 발표한 한 장기계획 보고서를 두고 이같이 말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뻥’과 ‘헛된 꿈’은 어떻게 됐을까. ‘비현실적’이라던 비전과 정책은 어느새 ‘현실’이 되고 있다. 당시의 논의는 19대 대선의 주요 정책목표가 됐다. 일부 정책은 이미 지난 보수 정권에서 이름을 달리해 시행됐다. 새로 들어서는 문재인 정부의 요직에 당시 이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중용될 가능성도 크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비운의 보고서 ‘비전 2030’이 지금 한국에서 재조명 받는 이유다.


‘허황된 탁상공론’ ‘공허한 청사진’ ‘현 정부는 생색내고 다음 정부엔 고통을 주는 비전’.

2006년 노무현 정부가 국가 장기 계획 보고서 ‘함께 가는 희망한국 비전 2030’을 발표했을 당시 여야 정치권과 언론이 내린 평가다. 11년이 지났다. 혹평만 받고 사장된 140여 페이지의 이 보고서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비현실적’이라던 비전과 정책이 어느새 ‘현실’이 되고 있어서다. 당시의 논의는 19대 대선의 주요 어젠다가 됐다. 일부 정책은 이미 지난 보수 정권에서 이름을 달리해 시행됐다. 새 정부에 노무현 정부 시절 인사들이 들어서면서 비전 2030의 전략이 빠른 속도로 빛을 볼 가능성도 있다.

19대 대선공약과 싱크로율 높아


비전 2030 보고서에 명시된 추진 배경은 ‘저출산·고령화와 양극화로 인한 경제 저성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10여 년이 지난 현 시점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해법의 방향도 지금의 논의와 비슷하다. 기존의 ‘선성장 후복지’ ‘낙수효과’식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성장-복지 ‘동반성장’ 구조로 바꿔야 한다는 게 보고서의 큰 줄기다. 인적 투자가 성장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 성장을 통해 복지를 확대한다는 논리다. 2006년 당시에는 ‘좌파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한 애드벌룬’이라고 비판 받았지만, 이후 박근혜 정부가 유사한 개념인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웠다.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결이 같다.

세부 과제도 부활하는 모습이다. 비전 2030이 제안한 정책 과제는 19대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싱크로율’이 높다. 비전 2030은 사회복지 선진화의 주요 과제로 ‘만4세 무상보육’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방과후 활동 확대’ 등을 제시했다. 보육 서비스 강화는 19대 대선 과정에서 주요 후보들이 공히 약속한 내용이다.

성장전략으로 창업과 중소기업을 앞세운 점도 닮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도 보고서와 대선 공약의 공통 분모다. 보고서의 보육·간병·방과후 활동 등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과 행정 중심복합도시·혁신도시 건설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공부문 81만 개 일자리와 혁신도시 2.0으로 재탄생했다.

비전 2030은 안철수 대선 후보의 공약으로 대선 과정에서 이슈가 된 학제개편 방안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지식기반경제 인재를 육성하고 청년 인력의 노동시장 진입을 앞당겨 생애 근로기간을 확대해야 한다”며 취학연령 하향과 초·중·고교 ‘5-3-4제’ ‘6-4-2제’ 등 학제 개편을 주장했다. 재정 방안은 유승민 후보의 ‘중조세 중복지’와 일맥상통한다. 비전 2030은 2010년까지는 세출 조정, 비과세 축소, 과세 투명성 강화 등을 통해 소요 재원을 마련하고, 이후에는 적정 수준의 증세를 통해 확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현 세대의 부담을 미래 세대로 전가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서도 벤치마킹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8월 30일 오전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비전 2030 보고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비전 2030의 내용 가운데 이념 성향이 다른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추진 과제로 삼거나 이름을 달리해 실제 도입한 정책도 많다. 해외 자원개발, 한류 콘텐트 지원, 노인수발보험(장기노인요양보험),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 국민연금·직역연금 개혁, 공공임대주택 확충 및 주택바우처, 지역 혁신클러스터(창조경제혁신센터) 등이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무상보육과 반값 등록금 공약을 벤치마킹했고, 민주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학교 무상급식 공약을 이어받았다.

복지정책의 방법론도 비슷하다. 비전 2030은 교육·의료·주거 등 분야별 수요 맞춤형 복지를 주장했다. 기존과 달리 같은 저소득층도 육아 부담, 건강 상태, 장애 여부 등 각자의 서로 다른 사정과 필요에 맞춰 다른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주창한 ‘능동적 복지’ ‘한국형 복지국가’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보고서가 주장한 학제 개편과 가을학기제 도입은 지난 두 번의 보수정권이 꺼낸 카드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저출산 대책으로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을 내놨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2014년 ‘가을학기제’ 도입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밖에 과거 정부에서 강조한 출산·육아비 부담 경감을 통한 출산율 제고, 여성·노인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도 비전 2030에서 앞서 언급된 정책이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권 말 정책 추진 동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증세나 노동 유연화 등 ‘쓴 약’을 솔직하게 언급해 좌우 진영 모두로부터 외면당했지만 ‘정치적’으로 폐기된 이후에도 ‘정책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비전 2030의 총괄책임을 맡았던 우천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은 “충분치 않지만 많은 부분이 수렴된 것을 보면 당시 필요한 과제와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본다”며 “지금 현실에 맞게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큰 틀에서 지금도 비전 2030의 많은 정책이 유효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재인 버전’ 비전 2030 준비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비서실장 직속으로 신설한 재정기획관에서 비전 2030을 벤치마킹한 ‘국가비전 2050(가칭)’을 수립할 계획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비전 2030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도 커졌다. 새 정부는 청와대 직제 개편을 통해 대통령 비서실장 직속으로 신설한 재정기획관에서 ‘국가비전 2050(가칭)’을 수립할 계획이다. 국가비전 2030을 벤치마킹해 30년간의 복지정책과 재원 조달 방안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뒷받침하듯 문재인 정부 개각 인선에서도 노무현 정부 당시 비전 2030과 관계된 인사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06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비전 2030 기획과 제작을 주도한 변양균 전 장관의 인맥이 대표적이다.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은 변 전 장관이 정책실장으로 있던 시절 정책보좌관으로 일했다. 이정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변 전 장관이 기획예산처 차관일 때부터 정책실장으로 재임할 때까지 비서관 역할을 했다. 2006년 당시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으로 비전 2030 작업에 참여한 김용익 전 민주연구원장과 기획예산처 고위공무원으로 비전 2030을 주도했던 김동연 아주대 총장 등도 청와대 정책 실장 등 요직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비전 2030은 노무현정부가 2006년 발표한 장기 국가발전 계획이다. 청와대 정책실이 주도하고 정부 산하 국책연구소와 대학 및 민간 전문가 60여 명이 제작을 맡았다. 기획예산처가 여기에 맞춰 장기 재정운용 계획과 전망을 마련했다. 당시 정부는 ‘한국이 2010년대에 선진국에 진입하고 2020년대에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해 2030년에는 ‘삶의 질’ 세계 10위에 오른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복지 지출 증가 및 제도 혁신을 통해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4만9000달러,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지출 규모를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21%(2005년 당시 8.6%) 달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비전을 실현한 방안으로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 등 50개 정책과제를 채택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위해 25년간 1100조원의 추가재정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2006년부터 2030년까지 매년 GDP의 2% 수준에 해당하는 재정을 추가로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정권 말에 발표한 장기전략, 정치권·언론으로부터 맹비난 받아


그러나 보고서는 발표 후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2006년 8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유승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이번 계획대로 정책을 추진한다면 막대한 세금 부담으로 인해 현재의 20대와 30대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집권 1년 반도 안 남은 시점에서 왜 갑자기 구체성도 없고, 실현가능성도 없으며, 재원조달 내용도 없는 구호를 제시했는지 모르겠다”고 질타했다. 전재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정부가 용역 비용 10억 원을 들여 ‘천국’을 그렸지만 그곳에 가는 방법과 길은 제시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비전 2030 작업에 참여한 황성현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정운용 확대의 방향성은 제시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증세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빠져 당시 정치권으로부터 세금 폭탄이라는 비판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천식 연구원은 “정권 말기였기 때문에 증세 방안을 인위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향후 사회적 선택’이라고 여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비전 2030은 당시 여당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듬해 치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증세 프레임이 부담이 된 탓이다. 정덕구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국민은 미래에 암이 걸리지 않는 것보다 당장 목에 걸린 가시를 빼주는 게 급하다”고 말했다. 이광철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도 “지금 국민은 당장 내일을 얘기하는데 정부에서는 2030년을 얘기하는 게 문제”라며 “국민에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미 정서가 강했던 당시 진보 진영에서 ‘FTA 체결 확대’ 과제를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문제 삼기도 했다.

결국 비전 2030은 빛을 보지 못하고 정권교체와 함께 사실상 폐기됐다. 비전 2030 작성을 주도한 변양균 전 장관은 2012년 출간한 그의 책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에서 비전 2030을 언급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잡고 세운 구체적인 재정계획이었다”며 “세금 부담 증가에 대한 국민의 비판이 두려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회고했다.

1385호 (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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