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건국 이래 첫 건군절 열병식하지만 쑨원 사후 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장제스가 1926년 시작한 북벌이 성공해 여러 지역을 할거하던 군벌을 제거하면서 우경화됐다.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를 포함한 공산당원을 대거 숙청했다. 4.12사건 또는 상하이 쿠데타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300~4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공산당은 난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국민당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난창봉기 당시 구성된 중국 공산당 공농홍군은 팔로군 등을 거쳐 오늘날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공산당은 8월 1일 벌어진 난창봉기를 기념해 휘장과 깃발에 팔일(八一)이라는 숫자를 새기고 있다. 난창봉기를 시작으로 그해 장시성성·후난(湖南)성의 추수봉기와 광둥성 광저우 봉기 등 공산당 무장투쟁이 연이어 벌어졌다. 무장봉기는 훗날 중국 공산당이 전국을 석권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기틀이 됐다.이날 주르허 사막기지에서 열린 행사는 1949년 건국 이래 건군절에 맞춰 벌어진 열병식으로는 처음이다. 이례적인 행사인 것이다. 열병식이 열린 장소도 독특하긴 마찬가지다. 1949년 신중국 건설 이후 중국의 열병식은 주로 베이징 중심부인 천안문 광장과 그 주변에서 열렸다. 이번처럼 베이징 밖에서 열린 대규모 열병식은 36년 만이다. 이번 행사 이전 베이징 바깥에서 열렸던 마지막 열병식은 지난 1981년 6월 29일 당시 개혁·개방을 지휘하던 덩샤오핑(鄧小平)이 허베이(華北) 군사훈련에 맞춰 개최했던 열병식이었다. 덩은 그해 6월 29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했으며 그 자격으로 열병식에서 군대를 사열했다.당시 덩은 군사위 주석이었지만 시 주석은 군사위 주석은 물론 당 총서기에 국가주석까지 맞고 있다. 이에 따라 1981년의 열병식은 ‘군대급 열병식’이었으며 2017년 행사는 ‘국가급’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행사 참석자들도 차이가 있다. 1981년 행사 때는 거의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이 모두 참석했지만 이번 행사에는 시 주석과 군 고위층만 등장했다. 시 주석이 주인공으로 ‘단독 출연’한 행사라는 이야기다. 올 가을로 예정된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19대)를 앞두고 군 내부의 충성 맹세를 받는 행사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 최고지도자 시 주석 개인이 당의 무력인 인민해방군과 사막의 훈련장에서 ‘독상’을 받은 셈이다.
군을 앞세운 공산당 지배와 개인 통치 강화이번 열병식에 참석한 각급 부대의 군인들과 사열을 하는 시 주석이 공식적으로 주고받는 공식 인사말도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전까지 천안문 광장 등에서 열렸던 열병식에서는 최고지도자는 자동차를 타고 각 부대 앞을 지날 때마다 ‘퉁즈먼하오(同志們好, 동지들 안녕하신가)’라고 인사하면 해당 부대원들이 일제히 ‘서우장하오(首長好, 지도자님, 안녕하십니까)’라고 대답한다. 그 다음에는 최고지도자가 다시 ‘퉁즈먼 신쿠러(同志們辛苦了, 동지들 수고했다)’라고 인사하면 해당 부대원들이 입을 모아 ‘웨이런민푸우(爲人民服務, 인민을 위해 복무합니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부분 인사말이 ‘서우장하오’ 대신 ‘주시하오(主席好, 주석님, 안녕하십니까)’로 바뀌었다. 자신이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 즉 인민해방군의 군 통수권자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호가 바뀐 셈이다. ‘주시하오’를 사용한 것은 지난 6월 말 홍콩 주권 회귀 20주년에 맞춰 현지에서 벌어졌던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 열병식에 이어 두 번째다. 이제 이 용어는 중국 열병식의 공식 용어로 굳어지게 됐다.이례적인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이날 시 주석은 얼룩무늬 위장전투복 차림으로 위장도색이 된 해방군 야전지프에 타고 도열한 장병을 사열했다. 이전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졌던 열병식에서 시 주석을 포함한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통상 중산복 차림에 일반 의전차량을 이용하던 것과 확연히 구별됐다. 게다가 열병식에 참가한 장병은 완보가 아닌 속보로 이동했다. 열병식이 의전용이 아니라 실전용임을 강조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실제로 이날 행사에 참가한 군인들은 보병·전차·포병·로켓 등 전투병과 일색이었다. 군악대도 없이 모든 음악은 녹음된 것을 사용했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등장했는데도 그 흔한 의장대도 등장하지 않았다. 권력의 기반이 군임을 확실히 하면서 군의 충성을 다짐 받고 이를 바탕으로 인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포석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중국 경제는 날로 글로벌화, 고도산업화, 네트워크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시 주석은 군을 앞세운 공산당 지배와 개인 통치 강화로 향후 통치의 방향을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 주석이 이렇게 군사굴기로 매진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의 경제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로 명목금액 기준 11조2182억 달러로 미국(18조 5691억 달러)에 이른다. 3위인 일본(4조9386억 달러)의 2배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1인당 GDP는 아직 8113달러 수준으로 러시아(8929달러)·브라질(8727달러)·멕시코(8555달러)와 같은 8000달러대다. 하지만 중국이 1인당 GDP 1만 달러 시대에 접어드는 일은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다. 참고로 2016년 기준 세계 평균 GDP는 1만38달러이니 중국 인민의 평균적인 삶도 이제 전 세계의 가난한 절반에서 살 만한 절반으로 접어드는 셈이다. 경제가 이렇게 받쳐주니 시 주석은 군사력으로 아시아 지역은 물론 글로벌 세계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싶을 것이다. 이런 중국의 군사몽(軍事夢)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네어멍구 열병식일 것이다.
측근 등용해 권력 집중 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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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당대회에서 시 주석 운명 갈릴 듯중국 공산당은 매년 7월 말부터 8월 상순까지 허베이성 친황다오(秦皇島) 시에 있는 보하이(渤海)만 연안의 해변 리조트인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당의 현역 지도자와 은퇴한 원로들, 그리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회의를 연다. 베이다이허에서는 간부 인사와 주요 정책을 주요 의제로 삼아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에 중국 정치에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비공식 회의라는 점 때문에 협의 내용과 일정은 물론 참가자들도 전혀 공표하지 않는다. 수영을 좋아했던 마오쩌둥이 여름철 피서지로 이곳에서 머물면서 당과 정부, 군의 간부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 회의의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후진타오 주석 시절에는 일시 폐지되기도 했지만 이후 부활됐다. 이미 물러난 원로들이 발언권을 행사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2015년 여름에는 당과 정부 미디어들이 베이다이허 회의의 존재 의미에 의문을 던지는 내용의 평론을 게재하기도 했다. 원로들과 전문가들은 현역 당 간부들보다 한 발 앞서 7월 중순에 베이다이허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베이다이허는 경비가 엄격하며 검은색 차량 행렬이 종종 목격된다고 신문은 전했다. 올해는 8월 1일 인민해방군 창군 90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뒤 베이다이허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시 주석의 장기 집권을 위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베이다이허 회의 결과를 반영할 올 가을 당대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따라 시 주석의 운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미래와 중국 경제의 전망도 이에 따라 출렁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내부 정치가 경제를 흔드는 왝더독(Wagthedog,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의미) 현상이 과연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정치와 무관하게 경제는 계속 전진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간에 중국 정치와 경제의 오묘한 함수관계를 올 가을 전 세계가 목격하게 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중국의 상황은 한국 경제, 아시아 경제, 나아가 글로벌 경제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