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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차 때문에 딸 참수한 명 태조 주원장 

 

서영수
대명률로 사차무역 통제... 법 어긴 부마 두둔한 안경공주에 죄 물어

▎명 태조(太祖) 주원장은 사차무역(私茶貿易)을 자신이 제정한 대명률(大明律)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차(茶)는 국가 전매품목으로 지정된 송나라 때부터 국가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었다.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한족(漢族) 국가를 중원에 부활시킨 명 태조(太祖) 주원장은 사차무역(私茶貿易)을 자신이 제정한 대명률(大明律)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사차무역이 적발되면 세금 포탈로 얻은 불법 이득 몰수는 물론 전략물자 유출이라는 이적행위에 대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했다. 차로 국가 재정수입을 늘리는데 비중을 두었던 송나라에 비해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차를 군마(軍馬)로 교환하는 전략물자로 활용해 이민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차를 전략물자로 활용해 이민족 통제


▎안경공주(오른쪽)는 명 태조의 유일한 황후인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수영(馬秀英)이 낳은 막내딸이다.
그러던 1397년 7월, 상소문을 읽던 명 태조는 치솟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차를 공공연하게 밀매하던 부마도위(駙馬都尉) 구양륜(歐陽倫)이 지방의 민정(民政)과 재정(財政)을 담당하는 포정사사(布政使司)를 협박해 차를 운반할 수레 50대를 차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 태조의 사위라는 신분을 내세워 세금 포탈과 횡포를 일삼아오던 구양륜을 못마땅하게 여긴 담당 관리가 “국가 소유의 수레를 사사로운 일에 내어줄 수 없다”며 부당한 요구를 거부했다. 구양륜의 하인이 주인의 힘을 믿고 관리를 심하게 구타해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는 불구로 만들었다. 모욕감을 참지 못한 관리는 포정사사의 회유와 만류에도 황제에게 구양륜의 악행을 밝히는 상소문을 올렸다. 변경지역의 말단관리가 올린 상소내용은 명나라를 개국해 30년 동안 통치하며 개국공신을 포함해 2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탐관오리라는 죄명으로 10만 명에 달하는 관리에게 죽음을 내린 명 태조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남편을 살리기 위해 안경(安慶)공주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다. 안경공주는 명 태조의 유일한 황후,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수영(馬秀英)이 낳은 막내딸이다.

차를 밀매한 것도 모자라 정당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리를 구타한 국기문란 사건에 대한 처벌은 대명률에 명시돼 있지만 황제의 사위가 저지른 사건 처리를 주시하는 조정 안팎의 시선은 칠순에 이른 명 태조를 또 하나의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 마황후가 살아있었다면 천륜(天倫)과 법 사이에서 현명한 지혜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황후는 이미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중국 역사상 가장 인자한 왕비로 사랑받는 마황후는 전족(纏足)하지 않은 그 당시 신세대 여성이었다. 첫날밤 아내의 커다란 발을 보고 놀란 남편에게 마수영은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혼인했으니 당신도 내 발에 대해 흉잡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명태조는 21명의 왕자와 14명의 공주를 여러 명의 후비로부터 얻었지만 황후는 단 한 사람 마수영뿐이었다.

차 문화를 획기적으로 간소화시켜 민폐를 줄인 명 태조는 저급한 차로 취급받던 엽차(葉茶)를 자신부터 앞장서서 마셨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며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던 당·송시대의 번잡한 차 문화의 적폐를 혁파하고 현대 차 문화의 방향을 제시한 명 태조는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에서 소작농으로 연명하는 주오사(朱五四)의 6번째 막내아들로 1328년 10월 21일 태어났다. 본명은 주중팔(朱重八)이었다. 주걱턱이 이마보다 더 튀어나온 시커먼 얼굴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다. 1345년 대기근과 메뚜기 떼의 습격에 이어 전염병이 창궐해 부모와 형을 잃은 주중팔은 먹고 살기 위해 머리를 밀고 황각사(皇覺寺)로 갔지만 홍건적이 절을 습격해 폐허로 만들었다. 오갈 데 없는 그는 자신이 친 점괘를 믿고 절을 떠나 홍건적 무리에 가담했다. 홍건적 우두머리 중 하나인 곽자흥(郭子興)의 눈에 든 주중팔은 곽자흥의 하녀로 들어와 양녀가 된 마수영을 만나 아내로 맞이했다.

천륜보다 공정한 법 집행 택해

차정(茶政)과 마정(馬政)을 연계한 명 태조는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를 만들어 티베트가 말을 의무적으로 바치도록 일종의 조세제도화 하는 한편 당근 정책으로 조공호시(朝貢互市)를 위해 조공 온 사신에게 회사품(回賜品)으로 차를 후하게 줬다. 조공호시는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닌 티베트를 지배하려는 명나라의 외교전략이었다. 명 태조는 생존을 위해 차가 필요했던 티베트를 차의 수급 조절로 통제했다. 차마사(茶馬司)를 차의 집산지와 변경지대에 설치해 차 매매와 수출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

차를 전략물자로 관리하기 위해 명 태조는 민간무역을 법으로 금지했다. 나라의 허가 없이 차를 밀수출하면 사형시키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차의 밀거래를 막았지만 큰 돈이 생기는 밀무역은 국경지대에서 암암리에 이뤄졌다. 명 태조의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공포정치에도 변경지역은 법의 무풍지대였다. 명 태조의 통치기간 31년 동안 차로 인한 밀무역은 수그러들지 않고 수시로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며 오히려 말년의 명태조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차를 수출한 대가로 티베트 고원지대의 말을 수입해 군마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한 차마사는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탐관오리의 좋은 놀이터였다. “배고픔이 없었다면 황제도 될 수 없었다”며 민중소통의 정치로 나라를 세운 명 태조는 탐관오리에 대한 증오심이 어려서부터 뼈에 사무쳐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국경지대에서 성행하는 차 밀무역을 근절해 국가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순간에 공주와 부마가 연루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차로 이민족을 통제했던 명 태조는 천륜보다 공정한 법 집행을 택했다. 명 태조는 국법을 어기고 차를 밀매한 남편을 두둔한 안경공주를 먼저 참수하고 구양륜의 재산을 몰수했다. 구양륜과 관련된 자들에게 모두 죽음을 명했다. 사랑하는 자식보다 차를 선택한 명 태조는 안경공주가 죽은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그가 남긴 말은 “살면서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구나”라는 장탄식(長歎息)이었다. 왕도(王道)는 천륜과 다른 길을 걷기도 한다.

※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99호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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