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경준의 디지털 인문학] 로빈슨 크루소, 근대적 자유인의 출발점 

 

김경준 딜로이트 경영연구원장

인간은 생존을 위해 모여 살 수밖에 없었고, 모여 살면 자연히 서열이 생겨나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지배자와 피지배자, 귀족과 평민, 사농공상 등의 신분이 생겨났다. 1만년 전 시작된 농경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해진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분명한 사회질서가 필요했다. 일단 무리가 형성되고 공동체, 국가 형태로 발전하면서 사회적 제도가 확립되고 종교까지 생겨나면 개인은 자체보다는 집단 내의 개인으로 정의된다. 자연인 홍길동은 소속된 신분·가족·혈연·종교·지역, 기타 직능단체에 소속된 일원으로 규정된다.

근대 이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신분제는 사회·경제적 제도와 밀접히 연결돼 있으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지배적 종교로 뒷받침했기에 이런 구조를 떠난 개인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인도의 힌두교와 결합된 카스트, 이슬람 국가, 티베트 불교의 정치·종교·사회 일체구조가 대표적 사례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종교 선택은 개인적 믿음의 차원이지만, 정교일체 사회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모든 사회·경제적 공동체와 가족관계에서의 축출을 의미하며 때로는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예컨대 카스트 제도는 신분제이면서 직업 공동체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빨래를 하는 카스트’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그 신분을 물려받는다. 성년이 되면 ‘빨래 직업 공동체’의 일원으로 일자리를 얻는다. 카스트를 탈퇴하면 더 이상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관련된 모든 사회·경제적 지원과 공식적 관계를 중단한다. 전통의 카스트 제도는 외양상 신분제이지만, 실제는 직업 공동체로 경제적으로 연계되면서 사회 내부의 분업관계를 규정하고 종교로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수천 년 동안 유지됐다. 단순히 인간을 구분한 신분제였다면 하층에서 분출하는 정치·사회적 압력을 수천 년 동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근대 경제가 발달하고 근대 교육이 확대되면서 전통적 카스트 제도에서 이탈해도 직업을 구하고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되면서 카스트 제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카스트제도와 무관한 해외로 나가서 능력을 발휘하는 인도인이 많아졌다.

일본에서도 16세기 혼란의 전국시대가 끝나고 17세기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가 실시됐다. 영주-사무라이-평민-천민 간의 계층이동이 금지되고 신분은 물론 직업까지 세습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일본의 장인정신으로 높이 평가받는 가업 계승의 출발이 실제로는 평민들이 부친의 직업을 물려받도록 하는 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소속된 지역이나 번을 떠나지 못했고, 이른바 탈번이라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에는 관할 영주의 특별 승인이 필요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인은 번에 종속된 일원이었고, 번을 떠나면 모든 사회·경제적 관계가 단절되는 입장이었다.

이렇듯 근대 이전에 집단에 종속된 개인은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물질적 여건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면서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 분리되게 된다. 서양에서는 이탈리아에서 14세기부터 300여년 간 진행된 르네상스 시대가 시발점이었다. 신에게서 인간을 분리하고 종교에서 세속이 분리되는 시대는 역설적으로 유럽에서 기독교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이 계기였다. 250년(1096~1249) 간 8차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 동방과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베네치아·제노바·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에 부가 축적되고 상인계층이 성장했다. 종교가 지배하는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에서 단절됐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물이 동방에서 유입돼 형성된 인간 중시의 관점이 르네상스의 기반이 됐다.

개인이 소속된 집단을 떠나 물질적·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개인의 출현은 1719년 영국 작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잘 나타난다. 축약된 내용의 어린이 동화책으로 널리 읽히는 로빈슨 크루소는 일종의 모험기이지만, 인간의 생활방식과 사고범위에서 독립적인 근대적 개인의 출현을 알리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환갑의 나이에 발표해 디포를 대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로빈슨 크루소]는 스코틀랜드의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의 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1704년 셀커크는 항해 중 선장과 다투면서 징벌로 칠레 해안의 후안 페르난데스 섬에 버려져 4년 동안 살다가 영국으로 귀환해 유명해졌다. 소설 속의 로빈슨 크루소는 항해에 나섰다가 배가 난파돼 홀로 살아남아 외딴 섬에 도착한다. 배에서 식량·의류·무기 등 일상용품을 가능한 섬으로 운반해 오두막집을 짓고 불을 지피며 염소를 길러 고기와 젖을 얻고 곡식을 재배하는 한편 배를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24년을 홀로 지내던 어느 날 섬의 식인종들에게 붙들린 흑인을 구출해 하인으로 삼아 2인 생활이 시작된다. 27년째 되는 해에 영국 배를 만나서 영국으로 돌아온다는 줄거리이다.

고전의 중의적 특성상 로빈스 크루소는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지만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관점이 있다. 소속된 집단에서 분리되었지만 나름대로 문명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개인적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점이다. 외딴섬에 홀로 남아 기존의 모든 사회·경제적 관계와 단절된 상황에서 27년을 살아간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은 집단과 독립된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산업혁명과 근대를 거치면서 집단에서 독립한 개인을 상징했다면, 20세기 정보화 혁명 이후 개인의 힘이 급속히 커지면서 21세기는 개인이 집단을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오늘날에도 개인은 집단에 소속돼 정체성을 형성하고 분업에 따라 생활한다. 그러나 과거처럼 개인이 특정 집단에 종속돼 있지 않으며, 집단을 떠난 삶도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과거에는 출신·혈연·지역·국가·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이를 떠난 개인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많은 항목이 개인의 선택범위에 들어와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 정보기술의 발달은 개인의 역량을 더욱 강화시켰다. 문명의 발달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정의할 수 있지만 개인이 집단에서 정신적·물질적으로 분리돼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필자는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1세기 글로벌 기업과 산업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융합형 경영전문가로 평가받는다.

1404호 (201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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