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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서도 확산되는 고성능 컴퓨팅(HPC)] 중소기업도 1초당 경(京) 단위 데이터 처리 가능 

 

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판교 HPC이노베이션허브 내년부터 공식 서비스 … 미국 중소기업의 활용법 벤치마킹할 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9월 19일 HPC이노베이션허브를 경기도 성남의 판교기업지원허브 2층에 열었다. 연말까지 안정성 테스트와 시범 서비스를 한 후 내년부터 정식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 사진:HPC이노베이션허브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9월 19일 ‘HPC이노베이션허브’를 경기도 성남의 판교기업지원허브 2층에 선보였다. HPC(High Performance Computing)는 ‘고성능 컴퓨팅’으로 불린다. 수퍼컴퓨터로 대용량 정보를 고속으로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HPC이노베이션허브는 연말까지 안정성 테스트와 시범 서비스를 한 후 내년부터 정식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HPC이노베이션허브가 본격 운영되면 중소기업도 고성능 컴퓨팅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우선 200테라플롭스(1초당 200조번 연산) 규모로 구축된다. 200개가 넘는 기업에 HPC 시스템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제조업뿐만 아니라 영상과 의료 분야의 중소기업도 HPC를 활용할 수 있다. 양환정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4차 산업혁명으로 고성능 컴퓨팅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시의적절하게 HPC이노베이션허브를 구축했다”며 “중소기업들이 HPC를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으로 고성능 컴퓨팅 수요 증가


이미 기업 경쟁력은 HPC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거의 모든 상품 개발이 HPC를 통한 모의 실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후 공정과 설계를 최적화하고, 제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한다. 품질 향상뿐만 아니라 제품의 고장 가능성까지 예측한다.

정보통신혁신재단(ITIF)과 국제데이터센터(IDC)에 따르면 HPC는 복잡한 계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퍼컴퓨터의 대용량 처리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전자공학, 알고리즘, 응용 소프트웨어를 포괄한 여러 기술을 통칭한다. 수퍼컴퓨터와 고성능 컴퓨터는 대체로 같은 용어로 사용되지만 IDC는 50만 달러 이상의 고성능 컴퓨터를 수퍼컴퓨터로 정의하고 있다. 일반 데스크톱 컴퓨터는 단일 처리 칩(중앙처리장치, CPU) 하나로 구성되지만, HPC는 여러 CPU 간의 연동 네트워크로 이뤄진다. 여러 CPU가 동시에 실행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스레드(thread)’로 불리는 수많은 독립 계산 단위에 따라 운영된다. 미국에서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인 타이탄(Titan)은 30만개 CPU가 6백만개 이상의 스레드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수퍼컴퓨터는 1초당 경(京) 단위가 넘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때로는 수백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사용한다. 그래서 컴퓨터의 교향곡 오케스트라로 불리기도 한다.

보통 HPC는 플롭스(FLOPS)로 불리는 1초당 연산 계산 능력으로 컴퓨터의 속도가 측정된다. 작동 속도는 지난 2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 말 처음 테라플롭스(1초당 1조번)의 장벽을 깨뜨렸다. 그런데 2005년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는 1초당 1000조번으로 페타플롭스의 시대를 열었다. 최근 수년 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는 중국의 텐허2호(Tianhe-2, 天河二號)로 54.9 페타플롭스(1초당 5경4900조번)를 자랑했다. 이어 지난해 중국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의 국가초급계산중심에 설치된 선웨이타이후라이트(Sunway Taihu Light, 神威太湖之光)가 93페타프롭스(1초당 9경3000조번 연산)를 기록하며 최고의 처리 속도를 뽐냈다.

HPC는 통신·자동차·에너지·운송·의약·소비재·금융을 넘어 공공인프라와 국가안보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물리학·지구과학·생물학·기후학·우주항공학 등 계산이 집중적으로 필요한 각종 연구 분야에도 쓰인다. HPC는 연구개발(R&D), 신제품 설계, 기존 제품 개선, 제품 출시 과정에서 시간을 줄여 주기 때문에 경제성이 뛰어나다. 얼 조셉 IDC 연구원은 “2015년 기준으로 HPC를 통해 미국 기업은 비용의 10% 정도 절감하고 있다”며 “케나메탈과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스의 경우 20%까지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동차·소비재·에너지 분야서 비중 커져


▎중국의 선웨이타이후라이트는 1초당 9경3000조번 연산(93페타프롭스)을 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처리 능력의 수퍼컴퓨터다. / 사진:국가초급계산중심
자동차 분야에서 HPC는 차량 설계, 충돌 모의 실험, 안전성 실험에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신차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평균 60개월에서 24개월로 단축하고, 충돌에 견디는 내충격성(耐衝擊性)과 환경 친화성, 승객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1998년부터 HPC를 활용하고 있지만 최근 10년 간 모의실험 분야에서 HPC 이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다. HPC를 통해 새로운 차량 설계를 위해 만들어야 하는 모델의 수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모든 각도에서 모의 충돌 실험을 할 수 있고, 보행자 안전을 위한 충돌 시나리오까지 짤 수 있게 됐다. HPC를 통한 모의 실험이 굉장히 효과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충돌 실험을 여러 번하는 것보다 낫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마틴 아이잭 GM 전략 담당은 “HPC를 통해 개발 시간 단축뿐만 아니라, 훨씬 나은 모의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됐다”며 “덕분에 생산성도 높이면서 새로운 차량 출시 시기를 크게 앞당겼다”고 설명했다. 트럭 분야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HPC를 통한 공기 역학 디자인으로 7~12%의 연료 절감 효과를 얻게 됐다. 이에 따라 미국 트럭 운송 분야에서 매년 50억 달러의 연료를 줄일 수 있게 됐다.

타이어 분야도 큰 혜택을 입었다. 굿이어(Goodyear)는 더 이상 새 타이어의 실제 원형을 제작하지 않고, 도로에서 테스트도 하지 않는다. HPC를 통해 다양한 조건에서 새 타이어를 가상으로 만들어 시험한다. 2000년대 초반 내놓은 전천후 타이어 ‘어슈어런스’가 HPC의 첫 산물이다. 타이어를 실제로 만들어 마모 시험에서 유용한 결과를 얻으려면 4~6개월이 걸렸지만 HPC를 활용해 기간을 3분의 1로 줄였다. 굿이어는 당시 자체적으로 HPC를 활용할 수 없어 미 뉴멕시코주 샌디아 국립연구소의 도움을 받았다. 굿이어는 이후 제품 설계 시간을 평균 3년에서 1년 아래로 단축했고, 회사의 R&D 예산의 비중을 40%에서 15%로 줄일 수 있었다.

소비재 분야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 미 경쟁력위원회(The Council on Competitiveness)가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은 곳은 P&G다. P&G는 생산할 유리병이 떨어질 때 얼마나 파손되는지, 손잡이가 사람의 작은 손과 큰 손 중 어떤 손에 적합한지 등을 HPC를 통해 알아냈다. 기저귀에서 오줌이 새는지, 탄력성이 너무 빡빡하기 때문에 아기의 다리에 자국을 남기는지 여부도 파악했다. 세탁 세제가 얼마나 얼룩을 제거하는지, 새로운 천을 보호하는지, 청바지를 몇 번 세탁해야 색깔이 바래지는지 등도 알 수 있었다.

美 에너지 관련 중소기업, HPC 적극 활용

에너지 분야에서도 HPC가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에너지가 어떻게 소비되고 생산되는지를 분석해 에너지 효율을 높여 에너지와 자원 소비를 줄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건물 설계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다. 건물은 미국에서 사용되는 에너지의 약 40%를 소비하고 있는데 HPC를 통해 빌딩의 에너지 사용량을 50% 줄이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대표적인 곳이 ‘더 그레이터 필라델피아 혁신 클러스터(The Greater Philadelphia Innovation Cluster)’다. HPC를 활용해 건물의 열 흐름을 파악해 기술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석유·가스산업도 마찬가지로 HPC 분석을 통한 3차원 탄성파를 HPC로 분석해 매장량을 예측하고 있다. 프랑스의 토탈(Total)은 기존 석유·가스 매장량 모델의 해상도를 10배로 높이기 위해 수퍼컴퓨터의 용량을 세 배로 늘렸다. 덕분에 지진 예측 모델도 더욱 완벽하게 시각화했다.

대기업은 혁신을 위해 HPC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에는 아직 ‘그림의 떡’인 상황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HPC가 보편화 단계에 오른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 제조공학센터(NCMS)에 따르면 직원수가 100명 미만인 미국 제조 업체의 8%만이 HPC를 활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이들 업체 중 절반 이상이 HPC의 지원을 받는다면 부품·완제품의 설계와 시험을 대기업 수준에 가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적인 문제점도 발견됐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엔지니어가 HPC 관련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HPC 활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HPC 시스템을 작동하도록 교육하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 큰 부담이 된다. 더구나 HPC 프로그램 자체가 소규모 제조 업체가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높은 사양으로 설계됐다는 점도 문제다. 스티븐 제이 ITIF 연구원은 “중소기업이 HPC를 활용할 수 있도록 미국 전역에 12개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며 “HPC 전문가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대학교와 국립연구소 근방에서 운영해 중소기업의 접근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일부 에너지 관련 중소기업이 HPC를 활용하는 것도 판교 HPC이노베이션허브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다. 시애틀에 자리한 신생사 램젠(Ramgen)은 연간 22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던 중소기업이다. ITIF의 HPC를 활용해 비용을 500만 달러 가까이 줄이면서 고효율 가스 압축 설비를 설계할 수 있었다. 이 설비는 이산화탄소를 절반 가까이 압축할 수 있어 운영 비용을 25% 절감할 수 있는 각종 터보(Turbo) 엔진 부품에 사용될 수 있다.

1405호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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