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잘 때 외에는 언제나 경을 생각한다”두 사람이 각별했다는 것은 이 밖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박문수가 죽자 영조는 이렇게 회고한다.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나와 영성(靈城, 박문수의 군호)만 하겠는가?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성이고,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나였다.”(영조 32년 4월 24일). 서로에게 지기(知己)였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문수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 예의를 갖추지 않는 태도로 인해 자주 탄핵을 받았다. 그 때마다 영조는 경솔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용서해주었고(영조 3년 2월 20일 등 다수) “경은 지혜는 있으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한다.”(영조 4년 11월 1일), “경의 고집은 내가 실로 병통으로 생각한다.”(영조 6년 9월 14일)라고 질책하면서도 항상 너그럽게 그를 대했다. 그가 출사하지 않으면 따로 불러 “매우 간곡하게 위로하고 타이르며 달랬고”(영조 18년 7월 26일), 그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벌을 내렸다(영조 9년 4월 22일, 31년 5월 27일). 정조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잠잘 때 외에는 언제나 경을 생각한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홍재전서 21권).도대체 영조는 왜 박문수를 총애했던 것일까? 1724년(경종 4년) 4월, 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왕세제였던 영조와 인연을 맺은 이래, 박문수는 충심으로 영조를 보좌했다. 소속 당파인 소론이 영조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자 “삼종(三宗, 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은 오로지 경종과 전하뿐이니 신민으로서 마땅히 한마음으로 우러러 추대했어야 한다”라고 비판한다(영조 원년 3월 15일).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에는 토벌군의 종사관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공로로 그는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영조 4년 29일).또한, 박문수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던 군역제도의 폐단을 조목조목 거론하며 균역법(均役法) 개혁의 불을 댕겼으며(영조 6년 12월 8일), 오랜 기간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바로잡고 개혁한 일이 많았다”(영조 32년 4월 24일). 특히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만든 탁지정례(度支定例, 국가 재정 운영체계)는 정조가 “물샐틈없이 완벽하다”고 극찬할 정도다(홍재전서 172권).이와 함께 박문수는 백성 구제 업무에 두각을 나타냈다. 1727년(영조 3년), 경상도에 처음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된 이래, 박문수는 각 지역의 어사를 두루 역임하며 민심 수습과 구휼을 책임졌다. 그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고 중앙조정과 충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앙에서 근무할 때나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도 항상 민간의 농사 작황과 백성들의 생활 실태를 확인해 임금에게 보고했다(영조 7년 7월 8일). 이러한 박문수의 헌신에 대해 영조는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일을 맡으면 반드시 효과를 거두니,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있음을 알게 하는 사람은 경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라고 치하한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문수는 동료 신하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문제점만 운운하며 대책을 실행해 보지도 않는다”고 힐난했고(영조 9년 1월 27일), “코를 골며 양처럼 잠만 잘 뿐 끝내 백성을 구하려 하지 않고” “권세가들에게 아첨하며 섬기기를 노예와 같이 한다”라고 비난했다(영조 8년 12월 18일). 당쟁에 대해서도 “이것은 노론과 소론의 나라이지, 전하의 나라가 아닙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린다(영조 9년 12월 19일). 신하들이 벌떼와 같이 박문수를 공격했지만, 영조는 ‘당직(戇直, 어리석어 보일만큼 성격이 곧다)한 발언’이라며 그를 옹호했다. 신하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로서는 박문수의 말에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이뿐만이 아니다. 박문수는 영조에게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직언을 들으려 하지 않으시니, 신하들은 전하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1, 2년이 지나게 되면 장차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라고 하는 등(영조 6년 12월 8일), 독선적인 태도를 고치라고 간언했다. 그는 “일전에 전하께서 몹시 진노하셨을 때 신은 두려워 떨며 한마디도 진언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죄는 실로 만 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임금이 화를 내고 있다 하여 직언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은 “본래 어리석고 광포하여 걸핏하면 제멋대로 행동하였는데, 다행히도 전하께서 포용해주신 덕분에 목숨을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진달하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것이다(영조 9년 11월 28일). 이런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영조는 박문수가 아무리 극간을 하더라도 별다른 화를 내지 않았다. 대부분, 절실한 말이니 유념하겠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하들을 위압적으로 대한 영조로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업무 능력에 충성심 겸비무릇 임금과 같은 지고무상의 리더일수록 고독한 법이다. 격의 없이 속을 터놓을 사람이 없다. 모두가 자신에게 복종하고 예를 갖추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런 상황에서 위선이나 겉치레가 없이 자신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박문수가 영조는 반가웠을 것이다. 임금의 기분이나 조정의 평가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할 말을 하고 할 일을 하는 박문수가 소중했을 것이다. 게다가 뛰어난 업무 능력에 절대적인 충성심까지 갖췄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보스와 참모가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조화라는 점에서 참고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