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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2) 제환공의 성공과 실패] 충신 등용해 흥하고 간신 중용해 망하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보위 초기 최고의 전문가 발탁 … 안목 흐려진 집권 말기, 간신 물리치라는 간언 듣지 않아

풍몽룡이 정리한 [열국지(列國志)]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그만큼 방대한 시기에 걸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특히 ‘동양의 그리스 신화’라 불릴 만큼 이야기의 보고이며 철학과 사유의 원형이 담겨있다. 작품의 배경은 불확실성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다. 문명이 전환하고,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가들은 부국과 혁신의 길을 모색했고, 사상가들은 인간과 공동체의 좀 더 나은 삶에 대해 고심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지금 다시 [열국지]를 펼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침실 안에 갇혀 유폐됐다. 음식은커녕 마실 물조차 주지 않았다. 몰래 들어온 후궁 한 사람이 옆을 지켰을 뿐, 늙고 병든 임금은 그렇게 쓸쓸히 죽어갔다. 춘추전국시대의 첫 패자(霸者)로 중원을 호령했던 제 환공(齊 桓公)의 마지막 모습이다. 환공은 제나라의 16대(15대로 보기도 한다) 임금으로 이름은 소백이다. 양공(환공의 형)을 시해하고 군주가 된 공손무지가 다시 피살되자, 그 자리를 놓고 형인 규와 경쟁해 승리했다. 당시 규의 참모였던 관중(管仲)은 환공을 제거하기 위해 활을 쏘았다. 환공은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는데, 이는 규 측을 안심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관중의 화살이 빗나가 혁대를 맞혔지만 입술을 깨물고 죽은 척 한 것이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규와 관중은 방심했고, 환공은 그 틈을 타서 보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인재 대거 등용해 국가 역량 극대화

군주의 자리에 오른 환공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정을 쇄신해 제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본래 제나라는 질 좋은 소금과 철의 생산지로서, 유통과 어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환공이라는 뛰어난 군주를 만나 날개를 단 것이다. 또한 환공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국가의 역량을 극대화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원수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습붕·영월·성보·빈수무·동곽아 등 ‘다섯 인걸(人傑)’에게 중책을 맡겼다. 예의와 언변, 판단력이 뛰어난 습붕이 대사행(외교)이 되었고, 농지 개간과 경작 업무에 탁월한 영월이 대사전(농업)에 올랐다. 훌륭한 장군인 성보가 대사마(군사), 올곧고 균형감을 갖춘 빈무수가 대사리(법무)에 임명되었으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언해온 동곽아는 대간(감찰, 간쟁)에 제수되었다. 해당 업무의 최고 전문가들을 발탁해 임무를 맡긴 것이다. 제환공은 “부국강병의 식견을 아뢰는 자가 있으면 모두 등용하여 실행하였으니” 천하의 인재들이 너도나도 제나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믿고 일을 맡기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가 없다. 환공은 신하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고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 주었다. 모함이 들어와도 단호하게 물리쳤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아야 하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疑人勿用用無疑)’는 격언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탁월한 용인술을 바탕으로 환공은 패업에 도전한다. 그는 우선, 제후국들의 종갓집이자 ‘천자(天子)’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주(周) 왕실을 극진히 예우했다. 이에 주나라 왕은 환공에게 방백(方伯, 제후들의 대표)과 태공(太公)의 지위를 내리고 불의를 정벌하는 대임을 맡긴다. 다른 제후국의 일에 개입하고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한 것이다. 다음으로 환공은 제후국들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연(燕)나라가 산융(山戎)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대신 격퇴해준 것이 대표적이다. 이 때 귀국하는 환공을 전송하기 위해 연나라 군주가 제나라 땅까지 따라오자, 환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고로 제후가 서로 전송할 때는 자기 나라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과인이 연나라 제후께 무례한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 연나라 국경부터 이곳까지 50리의 땅을 귀국에 드리겠습니다. 과인의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나라를 구원해준 마당에 50리 땅까지 선물로 주었으니, 설령 의도된 것일망정 감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환공은 무너질 위험에 처했던 노나라와 형나라, 위나라를 존속시켜주었다. 중원을 위협한 초나라를 억제하고 고죽국을 멸망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아홉 차례에 걸쳐 회맹(會盟, 제후들이 회합하여 맹약하는 의식)을 주관,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환공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점점 커진 오만한 마음이 그를 삼켜갔다. 환공은 자신이 세운 공업(功業)이 비할 데 없이 높다고 떠벌리며 궁궐을 더욱 크게 지었고,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일에 힘을 쏟았다. 관중의 만류로 그만두기는 했지만 천자만이 할 수 있는 봉선(封禪, 천자가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지내겠다고 고집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주나라의 한 원로대신은 “지금 제나라 군주는 스스로 공이 높다고 으스대며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대저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가득 차면 넘치는 법입니다. 제나라에도 머지않아 기울고 넘치는 때가 닥칠 것입니다”라고 예언한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을 보는 환공의 안목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환공은 말년에 역아·수초·개방을 특히 총애했다. 역아는 사람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환공의 말에 자신의 아들을 삶아 바친 인물이다. 수초는 환공을 잘 모시겠다며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되었고, 개방은 환공의 곁을 비울 수 없다며 부모가 죽었는데도 가지 않았다. 환공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기에 그랬겠느냐며 세 사람을 높이 평가했지만, 관중은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간언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륜을 저버린 자들이니, 장차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는 것이다. 관중이 죽고 재상이 된 포숙아(鮑叔牙) 역시 당장 세 사람을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환공은 이들을 잠시 궐에서 내보냈을 뿐, 이내 복귀시켰다. 이들이 없으니 불편하고 즐겁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포숙아가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환공은 요지부동이었다.

관중 이어 포숙아의 간언도 듣지 않아 비참한 말로

관중에 이어 포숙아마저 죽자 역아·수초·개방은 본색을 드러냈다. 노쇠한 환공의 눈을 가린 채 국정을 농단했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신하는 모두 쫓아냈다. 심지어 환공이 병석에 눕자 담장을 쌓아 침전(寢殿)을 폐쇄해버린다. 환공을 무력화한 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후계자를 옹립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환공이 세자로 지명한 아들 소(昭)를 공격하고, 역아와 수초는 환공의 장자인 무휴를, 개방은 환공의 또 다른 아들인 반을 내세웠다. 세 사람 사이의 의견도 달랐던 것으로, 나라의 장래보다는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제나라는 내전상태에 돌입한다. 그 와중에 환공이 죽었지만 유해조차 수습하지 않은 채 무려 67일이 흘렀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환공의 장례부터 치를 것을 요구하자, 그제야 닫혔던 침전의 문이 열렸다. 침실에 들어선 사람들은 환공의 시신을 목도하자마자 통곡했다. 이미 참혹하게 썩어 뼈가 다 드러나 있었고, 벌레가 들끓다 못해 방안 곳곳을 기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왕의 비참한 말로였다.

만약 환공이 진즉에 세 간신을 물리쳤더라면 어땠을까?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원수마저 기꺼이 등용하고, 인재들을 발탁하기 위해 애썼던 초심을 잊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환공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것도, 환공에게 실패를 가져다 준 것도 요컨대 사람이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겸손함으로 채워지느냐, 아니면 오만함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극단적으로 나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25호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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